124화 장사 좀 하러 왔지. (5)
“말도 안 돼요!”
메리엘은 어마어마한 가격에 당황해 말까지 더듬거렸다.
“100골드라니! 너무 비싸요. 그렇게 비싸면 누가 사겠어요?”
“비싸다뇨. 그 유명한 명품 ‘샤르넬’도 100골드 이상 받지 않습니까.”
“그건 보석이잖아요! 화장품처럼 쓰는 대로 닳지 않아요.”
“하지만 이건 그 이상의 명품이 될 겁니다.”
지셀이 자신만만하게 대꾸했다. 메리엘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정말 그 가격에 팔릴 거라고 생각하세요?”
“그럼요. 백작 부인께서 이곳에 찾아온 것만으로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
메리엘은 반박하지 못했다. 100골드는 물론 조금 부담스럽긴 하지만, 돈 많은 귀부인이라면 못 낼 것도 없는 가격이다.
“그, 그러면 수도에서의 유통만이라도 저랑 계약하는 건 어때요? 제가 도우면 수도에서 자리 잡기도 훨씬 수월할 거예요.”
지셀은 그 제안에도 어깨만 으쓱였다.
“이건 시궁창에 진열해도 팔릴 물건입니다.”
메리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지셀의 말대로였다.
이건 한번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면 무조건 팔릴 제품이었다.
독점하려면 아예 기술을 빼앗고 입을 막아야 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 정도로 악독한 사람은 아니었다.
“후우…….”
메리엘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물건이 너무 좋아도 문제였다. 화장품만큼 매력적인 대가를 내놓아야 할 텐데, 그럴 만한 게 없었다.
클로드는 그녀에게서 풍기는 처연한 분위기에 홀려, 그냥 달라는 대로 주자고 지셀의 등을 쿡쿡 찔렀다.
하지만 지셀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호구 노릇을 할 순 없지.’
그래도 메리엘과는 관계를 이어 나가는 편이 좋다.
지셀은 짧은 고민 끝에 유통권 대신 다른 걸 주기로 했다.
“백작 부인께서 역시 감이 좋으신 거 같습니다. 가장 먼저 찾아오셨거든요. 독점 계약은 힘들겠지만, 대신 사교계의 명성을 가져가실 수 있게 해 드리죠.”
“명성이라면?”
지셀이 응접실 한쪽 구석에 따로 준비해 두었던 큰 상자 하나를 메리엘 앞으로 밀어 놓았다.
메리엘은 의아해하며 상자를 열어 보았다. 상자 안에는 화장품 50여 개가 들어 있었다.
“이건……?”
“소문이 더 퍼지기 전에 먼저 유행을 이끄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부인의 명성이 꽤 오래 갈 겁니다. 선물이 비쌀수록 그 가치도 커질 거고요.”
메리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저를 이용해서 화장품을 홍보하겠다는 말씀이군요?”
“어차피 소문날 바에는 서로 좋은 게 좋지 않겠습니까? 저는 시간을 아끼고, 부인께서는 명성을 쌓고 말이지요. 이건 저희 제품을 제일 먼저 알아봐 주신 데 대한 감사의 표시입니다.”
그녀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니다. 사교계에서는 누가 먼저 유행을 선도하느냐도 평판에 대단히 큰 영향을 미친다.
이 화장품을 가장 먼저 발견하고 주변에 권유하는 것만으로도 과연 안목도 좋다는 평판을 얻게 될 것이다.
이러면 가격이 비싼 것도 장점이 된다. 아무나 쉽게 쓰지 못하는 화장품이어야 쓰는 사람의 위상이 높아질 테니까.
“좋아요. 그 제안 받아들이지요.”
그녀는 흔쾌히 수락하며 상자를 챙겼다. 독점 계약이 안 된다면 명성이라도 챙기겠다는 심산이었다.
“저는 이만 가 볼게요. 홍보는 걱정하지 마세요.”
메리엘은 미적거리지 않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더 소문이 나기 전에 빨리 연회에 참석해서 선수를 쳐야 한다.
돌아가자마자 초대장을 모조리 뒤져 가장 날짜가 빠른 모임부터 참석할 생각이었다.
지셀은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살펴 가시길.”
그의 어깨 위에 앉은 까마귀도 지셀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까악!
* * *
메리엘이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장품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졌다.
화장품의 효과는 확인하지도 않고, 그녀가 보증한다는 이유만으로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엄청나게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은 망설이지 않고 화장품을 사들였다.
비싸서 계속 쓰는 건 힘들어도, 메리엘이 쓰는 제품이라고 하니 한 번쯤은 사서 써 볼 만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밀려 들어오는 주문에 클로드와 벨린다는 환호성을 질렀다.
“대박이다! 대박이야!”
저택에는 금화가 산처럼 쌓였다. 이 돈만으로도 영지를 일 년은 먹여 살릴 수 있을 정도였다.
“으하하하! 영주님, 아예 다 때려치우고 그냥 여기서 장사나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게 제일 편하네!”
돈 세는 재미에 빠진 클로드가 헛소리까지 지껄였다.
“이렇게 비싼데도 엄청나게 잘 팔린다고요! 더 만들어 와야 하는 거 아닙니까?”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 한다.
왕국 전체로 소문이 퍼지기 전에 미리 수도에 지점을 제대로 내고, 영지에서 주문받은 물량을 각지로 보낼 준비도 하려면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클로드는 물론 주변 사람들 모두가 재촉하며 난리를 피웠지만 지셀은 까딱도 하지 않았다.
“기다려. 아직 할 게 더 남았어.”
“남긴 뭐가 남아요! 빨리 영지로 돌아가서 물량 뽑아야 한다니까요?”
클로드가 박박 우겨도 지셀은 요지부동이었다.
“흐음……. 슬슬 소식이 들어올 때가 됐는데. 아직 소문을 못 들은 건가?”
메리엘 덕분에 예상했던 것보다 소문도 빠르게 퍼지고 물건도 금방 팔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진짜로 노리는 상대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며칠이 더 지나고 1차로 가져온 물량이 동날 때쯤, 말끔하게 빼입은 초로의 신사가 저택에 찾아왔다.
“미흡하나마 브랜포드 후작가에서 집사 자리를 맡고 있습니다. 펜리스 남작님 되십니까?”
지셀의 눈이 반짝였다.
기다리던 물고기가 드디어 낚싯줄에 걸려들었다.
* * *
지셀은 브랜포드 후작가에 일부러 선물을 보내지 않았다. 그래야 그쪽에서 직접 찾아올 테니까.
브랜포드 후작은 왕실의 궁내부 장관으로, 델파인 공작가와 대립하는 친왕파의 수장이자 왕국 최고의 권세가다.
왕실의 대소사는 모두 그의 손을 거친다는 평가도 나올 정도였다.
동부의 대영주로서 기반도 단단하고, 입궁 전에 군 지휘관을 역임한 덕분에 군부에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런 가문의 집사가 겨우 화장품 몇 개 사자고 지셀에게 찾아오다니. 다른 귀족들이 알면 기겁할 일이었다.
형식적인 인사가 끝나자마자 집사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이 화장품을 쓰면 피부가 깨끗해지는 게 맞습니까?”
“애매한 질문이네. 피부 상태가 좋아지는 효과는 있지. 이미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지 않나? 뭐가 알고 싶은 건데?”
“혹시 이걸 써서 피부가 일시적으로 좋아졌다가 다시 나빠질 수도 있습니까?”
“글쎄. 피부는 관리하기 나름이라 꾸준히 쓰는 만큼 효과가 있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집사는 집요할 정도로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성분은 뭔지, 부작용 사례가 없는지 등등.
지셀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저으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브랜포드 후작가에서 왔다고 했지. 후작 영애께서 써 보시려는 건가?”
“그건…….”
집사가 곤란해하며 말끝을 흐렸다. 지셀이 하찮은 것 보듯 그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뭘 숨겨? 후작 영애께서 가면을 쓰고 집에만 계신다는 얘기는 이미 들었네. 다들 쉬쉬하고 있긴 하지만 그게 어디 숨겨질 일인가? 내가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됐다고 그 정도도 모를 거 같아?”
“……그렇습니다. 아가씨께서 쓰실 예정입니다.”
“그래, 솔직히 말하니까 얼마나 좋아.”
지셀이 낄낄대며 화장품을 꺼내 놓았다.
“일단 두어 개 가져가서 써 봐. 내 지식을 전부 쏟아부어서 만든 제품이야. 내가 약초학하고 의학에 좀 일가견이 있거든.”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다. 어쨌든 지금은 지셀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첨단 지식을 잔뜩 알고 있다.
원리는 모르고 결과만 아는 게 문제지만.
지셀은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이걸 써도 효과가 없다면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는 뜻이니까 그때 다시 얘기해 보자고.”
“……알겠습니다.”
돌아가는 집사의 뒤에 대고 지셀이 덧붙였다.
“참고로 나는 ‘영원의 형벌’을 고치는 방법도 알고 있어.”
집사는 그 말을 못 들은 척 아예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영원의 형벌’이 불치병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기에, 지셀이 허풍을 떤다 생각한 것이다.
익숙한 반응에 지셀은 입꼬리를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사람 참, 못 믿기는. 그때 그 사제라도 데려와야 하나.”
* * *
브랜포드 후작은 집사가 가져온 화장품을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이게 요새 유명한 피부 미용 제품인가?”
“네, 에일즈버 백작 부인께서 말씀하신 제품입니다.”
브랜포드 후작은 시큰둥하게 중얼거렸다.
“별로 효과가 있을 거 같지는 않군.”
왕국을 좌지우지하는 권력가인 그였지만, 최근 신경에 거슬리는 문제가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델파인 공작가.
왕실에 충성하던 델파인 공작이 최근 들어 세력을 이루며 공격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친왕파는 공작파 귀족들에게 연일 당하며 순식간에 세력이 줄어들어 갔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딸이 앓고 있는 고질적인 피부병이다.
“이것도 효과가 없으면 이제 남은 방법은 없는 건가?”
델파인 공작의 일이 최근의 골칫거리라면 딸의 일은 예전부터 있었던 문제다.
어느 날부터인가 딸의 얼굴과 몸에 반점 같은 게 마구 돋아났다.
그것뿐이라면 모르겠지만, 햇빛에 닿으면 증상이 더 심해져 가려움으로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 밖에 나가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그렇다고 심각한 병에 걸린 것도 아니었다. 뭐가 문제인지 아무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사제에게 신성 치료를 받으면 잠깐 호전되지만 그때뿐이고, 금세 다시 재발했다.
효과가 좋다는 약도 죄다 구해서 먹어 봤지만 증상은 여전했다.
“내가 직접 가져다 주겠다.”
브랜포드 후작은 천천히 딸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딸은 외부와 관계를 모두 끊고 어두운 방에서 홀로 지내고 있었다.
집안일을 돌보던 사람이 두문불출하고 있으니 집안의 분위기도 우중충해졌다.
다른 사람들에게 흉한 얼굴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아버지인 자신조차도 갈수록 심해지는 상태를 확인할 때마다 눈이 찌푸려질 정도니까.
하지만 더 이상은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결혼을 더 늦출 수는 없다.”
브랜포드 후작은 공작파의 독주를 막아서기 위해 중립 귀족 가문과 정략결혼을 추진했다.
하지만 딸은 계속 시간을 달라며 결혼을 미루고 있었다.
“쯧, 배려해 주는 것도 한계가 있지.”
브랜포드 후작도 딸의 마음을 생각해 지금껏 결혼 날짜를 늦춰 왔지만, 언제까지고 미룰 수는 없었다.
델파인 공작가의 세력이 더 커지기 전에 친왕파 세력을 굳건히 할 필요가 있었다.
덜컥.
방문을 열자 촛불 몇 개만이 후작을 반겼다.
창문은 굳게 닫혀 커튼으로 가려져 있고, 비싼 마법 등은 어디로 치웠는지 보이지 않았다.
후작의 딸, 로잘린은 희미한 촛불 빛에 의지해 책을 보고 있었다.
‘이래서야 탑에 갇힌 죄수와 다를 게 없군.’
슬쩍 방을 둘러본 브랜포드 후작은 내심 혀를 차면서도 겉으로는 티 내지 않고 무심하게 화장품을 건넸다.
“로잘린, 이걸 써 보거라. 요새 인기가 많다는 미용 크림이다. 피부에 좋다고 하더구나.”
로잘린은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게 소용이 있을까요?”
담담했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감정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브랜포드 후작은 붉게 충혈된 딸의 눈을 잠시 바라보고는 다시 말했다.
“에일즈버 백작 부인께서 추천한 거다.”
“…….”
그 말에 로잘린은 입을 닫았다.
메리엘이라면 로잘린도 잘 알았다. 어렸을 때부터 동경해 온 사람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확실한 제품만 사용하며 사교계의 유행을 선도해 왔다. 쓸모없는 걸 추천해 줬을 리는 없었다.
“두고 가세요.”
“알겠다. 그리고 결혼은 곧 진행할 생각이다. 그렇게 알고 있어라.”
그 말에 로잘린이 감정을 꾹꾹 억누르며 답했다.
“이런 상태로 결혼을 하라고요? 이런 꼴로는 평생 사랑받지 못하고 괴물 취급이나 당할 거예요. 제가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사고 무시당하면서 살기를 바라세요?”
브랜포드 후작은 차갑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가문을 위한 일이다.”
“제 인생은 중요하지 않은가요?”
“가문이 더 중요하다.”
그러자 로잘린은 다른 말을 꺼냈다.
“상대측 공자님이 과연 제 얼굴을 보고 만족할까요? 후에 영주에 오르면 강제로 결혼을 밀어붙인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을까요? 그때도 두 가문의 동맹이 공고할 거라 생각하시나요?”
브랜포드 후작은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제까짓 게 감히 원망해 봤자 어쩌겠느냐. 어차피 가문끼리의 결합은 다 그런 법이다. 영주에 오를 나이가 되면 그 정도 이득은 충분히 계산할 수 있을 터.”
로잘린이 개인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반면, 브랜포드 후작은 철저하게 정치적인 관점에서 판단하고 있었다.
어느 한쪽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람마다 추구하는 관계의 성격이 다른 거니까.
브랜포드 후작은 말을 마치고 그대로 몸을 돌려 방에서 나갔다.
“하아…….”
로잘린은 한숨을 내쉬고 천천히 일어나 얼굴에 화장품을 바르기 시작했다.
화장품을 바르는지 눈물을 바르는지 구분도 못 할 지경이었다.
* * *
화장품을 바르기 시작하고 며칠 뒤.
로잘린은 전부 포기하고 화장품을 한쪽으로 치워 버렸다.
‘역시, 소용없구나.’
화장품을 바르면 피부가 좋아지기는 했지만 반점이 없어지지는 않았다.
울긋불긋한 건 여전한데 피부에 윤기만 흐르니 오히려 더 이상해 보였다.
쨍그랑!
거울을 보던 로잘린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탁자 위에 놓인 잔을 집어 던졌다.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방 밖까지 퍼져 나갔지만, 아무도 로잘린의 방에 접근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어두운 방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그저 언젠가는 이 고통이 끝나기만을 바라면서.
그 시각, 브랜포드 저택의 정문에 누군가가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어이, 후작님 지금 계시지? 다 알아보고 왔으니까 없다고 하지 말고.”
경비병은 딱딱한 어투로 방문자에게 물었다.
“누구십니까?”
“펜리스 남작이 찾아왔다고 전해라. 지금 좀 뵙자고.”
브랜포드 후작가를 찾아온 사람은 바로 지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