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장사 좀 하러 왔지. (4)
“그, 그게…… 얼마 전 선물로 들어왔던 화장품이 있었는데…….”
“화장품?”
“네, 네. 피부 미용 크림이라고 해서……. 어떤 남작님이…….”
평소와 다른 메리엘의 모습에 하녀는 당황해서 말을 자꾸 더듬었다.
답답해진 메리엘은 하녀장을 돌아보며 어찌 된 상황인지 물었다.
“얼마 전 펜리스 남작이라는 분이 각 귀족가에 선물을 돌렸습니다. 백작님께도 따로 선물과 서신을 보낸 걸로 압니다.”
“펜리스 남작? 처음 듣는 이름이네.”
“이번에 수도에 처음 올라오신 분 같습니다.”
“그래서 선물을 돌린 건가. 그런데 남편한테는 보내고 나한테는 안 보냈다고?”
에일즈버 백작이 권세가 높다고는 하지만, 메리엘보다는 못했다.
그녀는 왕국에 몇 없는 후작가의 장녀이기도 하고, 수도의 사교계를 완전히 휘어잡고 있으니까.
“남편이 아니라 나한테 잘 보여야 할 텐데, 한심하긴. 아무리 수도 사정을 잘 모른대도 그렇지…….”
시골에서 막 올라와 누가 실세인지 미처 파악하지 못한 탓이겠지만, 자존심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손부채질로 열이 오른 얼굴을 식히며 그녀가 다시 물었다.
“그이한테는 더 좋은 화장품을 선물해 준 거야?”
“아닙니다. 백작님에게는 만드라고라 한 뿌리를 보냈다고 합니다.”
메리엘이 헛웃음을 흘렸다.
“겨우 만드라고라 하나? 엄청 가난한 귀족인가 봐. 그런데 이런 화장품은 어디서 구한 거지? 하녀들에게 전부 선물할 정도로 많다는 거잖아.”
“펜리스 남작의 상단에서 직접 개발했다고 들었습니다.”
“직접…… 개발했다고?”
메리엘이 감탄과 비웃음이 섞인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수도 사정도 모르는 시골 영주의 상단이 화장품을 개발했다니.
평소였다면 비웃고 무시했을 말이다.
하지만 화장품이 실제로 효과가 있다는 걸 확인한 지금은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메리엘은 잠시 고민하다 빠르게 결정을 내리고 하녀장을 돌아보았다.
“오늘 모임은 취소해. 몸이 안 좋아서 못 간다고 전해라. 그리고 너, 날 따라오도록.”
그녀는 피부가 가장 좋아 보이는 하녀를 데려다 화장품을 어떤 식으로 사용했는지 자세하게 물어보았다.
메리엘은 적당한 돈을 주고 받아 온 화장품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으음, 이걸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효과가 없으면 차라리 다행이다. 만에 하나라도 부작용이 생긴다면 앞일이 피곤해진다.
수많은 귀부인과 영애들의 비웃음을 사는 건 물론이고, 지금껏 쌓아 왔던 명성까지 모두 곤두박질칠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직감은 끊임없이 외치고 있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고.
누구보다 먼저 차지해야 한다고.
“그래, 부작용이 생긴 사람은 하나도 없었어. 몇 명은 티가 날 정도로 상태가 좋아졌고. 한번 써 보자.”
메리엘은 깨끗하게 세수를 하고 천천히 크림을 얼굴에 바르기 시작했다.
‘아, 이건……. 아침 이슬을 바르면 이런 느낌일까?’
처음에는 잠깐 끈적거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금방 피부에 흡수되었다. 곧 피부 속에서부터 수분이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이거다.
확신이 든 메리엘은 화장품을 얼굴에 골고루 펴 바른 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하루 이틀 만에 극적인 효과가 날 수는 없다. 하지만 자고 일어난 메리엘은 미세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분명해. 효과가 있어. 겉으로는 티가 안 나지만 달라졌다. 부작용도 지금까지 없는 거 보니 효과는 확실해.’
조금 더 지켜보겠다고 시간을 끄는 건 미련한 짓이다. 메리엘은 좋은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바로 하녀장을 불러 물었다.
“펜리스 남작과 상단이 어디에 머물고 있지?”
“수도 외곽의 폐가에 머물고 있습니다.”
“외곽의 폐가……. 설마 그 유령의 집? 까마귀 저택?”
“네, 그렇습니다.”
“정말 돈이 없는 모양이네. 오히려 잘됐어. 후후후.”
메리엘은 이 화장품을 독점할 생각이었다.
시골에서 막 올라온 귀족이 만든 제품이 팔려 봐야 얼마나 팔리고 있겠는가. 아직 인지도도 없고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을 것이다.
지금 독점 계약으로 묶어 버리면 유통되는 물량을 이쪽에서 통제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재력과 권력을 쌓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당장 펜리스 남작을 만나러 가자.”
메리엘은 짧은 고민 끝에 외출할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 * *
화려한 사두마차가 수도 한복판을 가로질렀다. 호위 기사 몇몇이 앞서가며 앞길을 텄다.
밀려난 사람들이 투덜거리다 마차에 찍힌 귀족가의 문장을 확인하고 입을 닫았다.
저택 현관 옆에 세워 둔 간이 상담소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던 클로드는 그 광경을 보고 입을 쩍 벌렸다.
“뭐, 뭐야……. 왕비님이라도 행차하는 건가? 그런 거라면 사전에 연락이 왔을 텐데?”
아니라는 걸 알아도, 화려한 마차와 호위들의 분위기에 주눅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마차가 저택 앞에 멈춰 서고, 안에서 하녀장이 내렸다.
하녀장은 나름대로 정리를 한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후줄근한 현관을 못마땅한 눈으로 훑어보다 입을 열었다.
“에일즈버 백작 부인이십니다. 펜리스 남작님이 이 저택에 기거하신다 들었는데, 맞습니까?”
“예? 아, 예. 맞습니다.”
클로드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턱을 치켜든 하녀장은 어지간한 귀족들만큼이나 고급스러운 차림새였다. 호위 기사들의 수나 무장도 범상치 않았다.
세이론에서도 귀부인들을 많이 봤지만, 이 정도로 위세가 대단한 사람은 없었다.
‘백작 부인이 이 정도라고? 역시 강대국은 다르긴 다르구나.’
사실 루타니아에서도 메리엘만큼 영향력이 큰 귀부인은 손에 꼽혔지만, 아직 수도 사정을 제대로 모르는 클로드는 알 리 없는 일이었다.
호위 기사 중 하나가 마차 문을 열고 메리엘이 쉽게 내릴 수 있도록 도왔다.
저택 주변을 지키던 용병들이 메리엘을 보고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허매…….’
화려한 장미가 연상되는 미모였다.
꽤 나이가 들어 보였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우아하고 기품 있는 분위기가 풍겼다.
북부의 시골에서 촌스럽게 살아온 용병들 따위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처럼 보였다.
그들도 북부에서 귀부인이나 귀족 영애들을 본 적이 있긴 하지만, 메리엘에 비하면 그들도 평민이나 다름없었다.
메리엘은 그들의 시선을 익숙하게 받아넘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녀장이 다시 나서서 방문 목적을 말하려 했지만, 그녀는 손을 들어 제지하고 직접 입을 열었다.
“에일즈버 백작가의 메리엘이에요. 펜리스 남작님을 만나러 왔어요.”
“…….”
클로드와 용병들은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었다. 침이라도 흘릴 기세였다.
벨린다의 발길질이 날아왔다.
“아악!”
클로드는 정강이를 얻어맞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뭐 해요? 손님 왔잖아요!”
벨린다는 짜증 섞인 한마디를 던지고 혀를 차며 저택 안으로 돌아갔다.
클로드는 아픈 정강이를 비비며 잽싸게 머리를 굴렸다.
유령이 나온다고 소문난 저택에 귀족가의 부인이 찾아올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화장품이 효과를 봤구나!’
클로드는 한껏 양손을 비비며 허리를 숙였다.
“혹시 화장품을 사러 오셨습니까? 제가 안내를…….”
“펜리스 남작님을 만나러 왔어요.”
“일단 제가 먼저 설명을…….”
“펜리스 남작님을 만나러 왔어요.”
메리엘은 우아하게 웃으며 같은 말만 반복했다.
영주를 직접 만나기 전까지는 물러서지 않을 기세였다.
클로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들어가시지요. 지금 정원에 계실 겁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꼴통 영주가 괜히 사고 칠까 불안해서 가능한 자신의 선에서 처리하고 싶었지만, 이렇게 되면 다른 방도가 없었다.
“고마워요.”
메리엘은 살짝 웃어 보이고는 몇 명의 하녀들과 기사들만을 대동한 채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정원에 들어서자마자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회색빛으로 죽어 있는 정원과 저택 주변을 날아다니는 까마귀들이 상당히 거슬렸다.
자신은 아무리 돈이 없어도 이런 곳에서는 하루도 살 수 없었다.
‘그만큼 돈이 없다는 거겠지. 거래하기는 쉽겠네.’
그녀는 조금 마음을 편하게 먹고, 저택 사용인의 안내에 따라 정원에 들어섰다.
지셀은 정원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까마귀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영주님, 에일즈버 백작 부인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음, 그래?”
지셀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까마귀 하나가 그의 어깨 위에 여유롭게 내려앉았다.
“반갑습니다. 지셀 펜리스입니다.”
까악!
메리엘은 까마귀 울음소리에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이자가 펜리스 남작이라고? 너무 젊잖아.’
지셀을 위아래로 훑어본 메리엘은 살짝 당황했다. 훤칠한 외모에 나이도 젊어 보인다.
이 나이에 남작의 위와 봉토를 받는 경우는 드물다.
제법 힘이 있는 가문 출신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만…….
펜리스라는 이름이 영 귀에 익숙하지 않은 걸 보면, 중앙까지 힘을 뻗치지 못하는 그저 그런 귀족일 확률이 높았다.
‘그냥 운 좋게 작은 영토 하나 얻었나 보군. 아버지가 영지를 쪼개 줬겠지.’
그래도 시골 귀족 주제에 자신을 보고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태도 하나는 높이 살 만했다.
메리엘은 복잡한 심사를 숨긴 채 살짝 고개를 숙였다.
“에일즈버 백작가의 메리엘이에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남작님의 상단에서 만든 화장품에 관해서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 왔어요.”
“호오, 그렇습니까?”
지셀이 눈을 빛냈다.
귀부인들이란 우아한 척하며 말을 빙빙 돌리는 게 특기인 사람들이라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성격이 화끈하다.
“들어가서 말씀 나누시죠.”
여유롭게 저택으로 앞서 들어가던 지셀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거물이 걸려들었네.’
에일즈버 백작가라는 이름을 들으니 기억이 났다. 눈앞에 있는 귀부인은 수도 사교계를 손안에 쥐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어떤 화장품을 쓴다는 소문만 퍼져도 순식간에 팔려 나가 수도 전체에서 품절이 될 정도로.
콧대 높은 귀부인이 직접 찾아온 걸 보면, 본래 목적을 생각보다 빠르게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 * *
메리엘은 응접실에 들어와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본론을 꺼냈다.
“이제 막 화장품을 개발해서 수도로 들어오신 거죠? 그 제품에 대해 독점 계약을 맺고 싶어서 왔어요.”
역시 꽤나 화끈한 사람 같다.
“독점 계약이라 하시면?”
“말 그대로예요. 제작되는 물량을 제가 전부 사겠어요. 개발만 하시면 유통은 제가 맡는다는 말이지요.”
그녀는 살짝 협박도 곁들였다.
“수도에서 자리를 잡고 싶다면 뒷배가 필요할 거예요. 다른 귀족들과 상단들이 견제할 테니까요. 제 힘으로 그걸 막아 드릴 수 있어요. 반대로 거절하신다면 수도에서 장사하기가 쉽지는 않을 거예요.”
쓸데없이 밀고 당기기 따위는 하지 않았다.
지셀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저야 화장품을 많이 팔 수만 있으면 상관없긴 합니다만……. 가격이 조금 비싼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메리엘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지금 누구 앞에서 돈 얘기를 꺼내는 거야?’
이래서 뭘 모르는 사람들과는 길게 말을 섞을 수 없는 것이다.
“에일즈버 백작가는 수도에서도 손꼽히는 부호랍니다. 제가 못 하면 다른 사람도 못 할 거예요. 얼마죠?”
“개당 100골드요.”
“뭐……라고요? 몇 개에 100골드요?”
메리엘이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지셀이 확실하게 다시 한번 강조했다.
“‘개당’ 100골드입니다.”
메리엘의 우아한 미소에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