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장사 좀 하러 왔지. (1)
루타니아 왕국의 수도 카르데니아는 강대국의 위용을 보여 주듯 거대했다.
성벽 주변을 둘러싼 해자에는 물이 가득 차 있어 마치 넓은 강처럼 보였다.
누가 쳐들어와도 막아 낼 수 있을 것 같은 위엄이 느껴진다.
지셀을 따라온 용병들은 처음 보는 압도적인 광경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와…… 엄청나. 여기가 말로만 듣던 카르데니아…….”
“다른 영지의 성은 완전히 장난감 수준이었네. 우리 영지에 있는 건 성이 아니었어. 그냥 토굴이었어.”
“크기도 크지만, 생긴 것도 뭔가 좀 다른 거 같은데? 더 멋있는 거 같지 않아? 짓는 데 돈 많이 들었겠다.”
카르데니아는 수백 년 동안 왕국의 수도로서 발전해 왔다.
고전적인 양식의 건물들과 새로 지어진 건물이 섞인 독특한 분위기가 특징이었다.
페르디움보다는 사정이 나았다고 해도 그들이 지내던 영지 또한 결국 변방의 가난한 영지에 불과했다.
이렇게 거대한 도시가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말 많던 벨린다도 눈만 껌뻑이며 입을 열지 못했고, 타국에서 용병 생활을 오래 한 길리언조차도 감탄을 내뱉었다.
“어우……. 보기만 해도 주눅 드네.”
용병들은 성벽을 올려다보며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보기만 해도 전의가 사라지는 위용이었다.
이 성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성벽을 넘을 수는 있을지 의문이었다.
아니, 넘기는커녕 벽에 흠집도 못 낼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영주가 제발 여기에서는 사고를 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우, 우와……. 뭐야?”
구경하던 사람들의 입에서 갑자기 감탄이 터져 나왔다.
노을로 사방이 붉게 물들었다.
그 붉은 빛은 도시 안에 수도 없이 높게 솟아오른 첨탑의 창에 반사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치 도시 전체가 스스로 붉은 빛을 뿜어내는 것만 같았다.
다들 넋이 나간 채 경이로운 광경을 구경하고 있을 때, 지셀만은 차가운 눈빛으로 성을 노려보고 있었다.
‘카르데니아…….’
난공불락, 불패의 요새, 여신의 가호를 받는 도시.
수없이 다양한 말로 칭송되던 이곳은…… 바로 그의 손에 무참히 박살 났었다.
용병왕의 군대는 선전 포고를 하자마자 순식간에 카르데니아를 덮쳤다.
지셀은 개전 후 단 일주일 만에 길목에 있는 영주들을 모두 뚫어 버리고 카르데니아를 점령했다.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속도와 파괴력이었다.
당시 지셀은 참모들과 함께 왕성으로 들어가는 가장 빠른 경로를 잡아서 파고들었다. 카르데니아가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뚫린 이유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의 복수 대상이 오직 새로운 왕에 오른 델파인 공작 하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카르데니아를 점령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결국 실패했지.’
그의 목표는 카르데니아를 점령하는 게 아니라, 델파인 공작을 죽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셀이 왕성에 들어갔을 때 델파인 공작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왜 왕위에 오른 델파인 공작이 왕성에 없었는지, 지셀은 지금도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저 실패했다는 것만 알 뿐.
분노한 지셀은 델파인 공작을 찾기 위해 왕국 전역을 헤집었다.
‘내 실수였다. 물러나서 다시 전선을 유지했어야 했는데.’
북부를 불태우고 남부를 짓밟았다. 서부를 학살하고 동부를 약탈했다.
그때부터 그는 용병왕이라는 칭호보다는 복수에 미친 악귀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루타니아 왕국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숨어 있던 강자들이 나타나 그의 앞을 막았다.
으드득.
상념에 잠겨 있던 지셀이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카르데니아 성에 드리운 노을의 붉은빛은 그 시절 지셀의 수하들이 흘렸던 피의 빛깔과 닮아 있었다.
아직도 지셀은 목이 잘리던 감각, 그 순간 느꼈던 감정까지 다시 생생히 떠올릴 수 있었다.
‘이번 생에는 반드시 네놈들을…….’
― 히이이이잉!
“도련님!”
“영주님!”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지셀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말들이 그가 뿜어낸 살기를 느끼고 공포에 질려 발버둥 치고 있었다.
“워, 워.”
지셀은 바로 살기를 갈무리하고 말들을 진정시켰다.
벨린다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갑자기 왜 그러세요?”
다른 사람들도 살짝 긴장한 눈치였다.
관광 명소를 구경하다가 갑자기 이 난리가 났으니 당황스러워할 만도 했다.
감정을 추스른 지셀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었다.
“그게…….”
“그게?”
“어……. 저 성이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랬지.”
“아니, 마음에 안 들 이유가 뭐가 있어요?”
“우리 성보다 크고 멋있잖아. 그게 마음에 안 들어. 꼭 잘난 척 으스대는 거 같아서.”
지셀은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스럽게 둘러댔다.
일행은 모두 황당해 얼이 빠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저 성이 질투가 나서 살기까지 뿜었다는 거지?”
“진짜 성격 특이하다니까. 이해할 수가 없어.”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말도 안 되는 핑계였지만, 지금까지 지셀이 워낙 괴짜 같은 이미지를 쌓아 온 탓인지 다들 그럴 수 있다고 납득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벨린다와 길리언만은 그의 변명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지셀은 얼핏 보면 자기 멋대로 구는 것 같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나름의 행동 원리와 계획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뜬금없는 이유로 살기를 내비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두 사람이 걱정스러운 듯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지셀은 손을 저어 제지했다.
“됐어, 됐어. 그냥 딴생각을 하다가 너무 몰입했을 뿐이야. 빨리 들어가자.”
영주가 그렇게 말하는데 물고 늘어질 수도 없었다.
일행은 더 이상 아무 말도 못 하고, 앞서가는 지셀을 황급히 따라갔다.
해가 졌는데도 성문 앞에는 사람이 많았다. 검문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왕도이니만큼, 경계도 삼엄하고 검문도 철저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신분 패를 보여 주십시오.”
철갑을 두른 기사 하나가 지셀과 일행들의 앞을 막아섰다.
표정에 미동조차 없는 게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거 같은 인상이었다.
주변에 있는 기사들도 다를 바 없었다.
예전 브리반트로 갈 때 보았던 검문소의 병사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기사는 지셀의 신분 패를 받아 이리저리 뜯어보다가 품에서 지도 하나를 꺼내 쫙 펼쳤다.
“페르디움 변경백의 봉신, 지셀 펜리스 남작. 확인했습니다. 왕도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기사가 턱을 치켜들고 위압적으로 내뱉었다.
그 꼴을 보고 벨린다와 길리언이 뒤에서 인상을 썼다.
평소 같았으면 무례하다고 호통이라도 쳤을 텐데, 여기서는 그래도 되는지 망설여졌다.
거대한 성이 내뿜는 기세에 주눅이 든 탓이었다.
하지만 지셀은 두 사람과 달리 고개를 건들거리며 편하게 말했다.
“장사 좀 하러 왔지.”
“상단의 총책임자는 누구입니까?”
기사는 지셀이 그저 소유 상단과 동행한 걸로 알고 형식적으로 되물었다.
“이 몸이 총책임자다.”
“……남작님이 직접 장사를 하신다고요?”
“왜? 그러면 안 돼?”
“아니, 아닙니다. 그럼 일행의 인적 사항과 상품 목록을 알려 주십시오.”
지셀이 턱짓으로 클로드를 가리키며 답했다.
“인적 사항은 쟤가 알고……. 상품은 뭐 목록이랄 것도 없는데. 화장품이야. 내가 직접 만든 거.”
“예?”
상상도 못 한 대답에 기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마저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미미한 변화였다.
하지만 기사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던 지셀 일행은 그 찰나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묘한 승리감을 느꼈다.
‘그래, 너희도 황당하지?’
기사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수레들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병사들까지 동원해 철저하게 뒤지는 모습을 보고 지셀이 내심 감탄했다.
‘군기가 바짝 들었네. 우리 영지 병사들도 저래야 하는데.’
몇 대의 수레를 확인한 기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화장품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이 몸이 만든 거지.”
“독성이 있는 물건은 아니겠죠?”
“그냥 화장품이라니까. 못 믿겠으면 하나 열어서 확인해 봐.”
기사는 통 하나를 들어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향을 맡아 보고, 손가락으로 조금 떠서 문질러 보면서도 기사는 의심스러운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음, 향기는 괜찮군요. 피부에 닿아도 괜찮은 것 같고…….”
“하나 줄까? 수도에 온 기념으로.”
기사는 고개를 저었다. 향기는 좋지만, 이런 수상한 물건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지셀은 얄밉게 웃으며 다시 물었다.
“그거 비싼 건데,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받아. 기사들 박봉으로는 구경도 못 할 고급품이라고.”
도발적인 말에 기사는 인상을 찡그렸다.
“필요 없습니다.”
“그래, 뭐 싫으면 말고. 나중에 다른 말 하지 마라? 나 원망하기 없기?”
“그럴 일 없습니다.”
자꾸 약 올리는 지셀에게 말려든 기사가 흰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카오르가 그걸 보고 킥킥거렸다.
“이야, 이제 좀 사람처럼 보이네. 표정이 하도 안 변해서 목각 인형인 줄 알았지.”
그러자 기사는 눈빛에 살기를 담아 카오르 쪽을 돌아보았다.
카오르와 크게 다를 게 없는 다른 용병들도 입꼬리를 실룩거리고 있었다.
기사는 신경질적으로 출입자 명단에 몇 글자를 적어 넣고 거칠게 내뱉었다.
“통과!”
지셀은 피식 웃으며 일행에게 손짓했다.
“자, 들어가자. 무사통과다.”
벨린다는 지셀 뒤를 졸졸 따라가며 기사를 안쓰럽게 쳐다보다 기어코 한마디를 던졌다.
“기사님, 지금 안 받은 거 후회할 거예요.”
“뭐?”
벨린다는 더 말을 잇지 않고 쏙 지나쳤다.
그 뒤에 들어가던 클로드는 기사에게 살짝 윙크를 했다.
“대체 뭐야, 저 이상한 놈들은.”
기사가 황당해하든 말든, 일행은 성에 들어오자마자 감탄하기 바빴다.
“우와아!”
세 겹이나 되는 성벽을 지나 들어온 성안은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지금까지 가 봤던 영지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번화한 곳이었다.
별의별 물건을 파는 상점이 거리에 가득했고 골목마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난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은 처음 봐.”
한 용병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보기만 해도 어지러워질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도시 자체가 살아 있는 하나의 생명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브리반트와는 다르게 지셀 일행이 시끄럽게 떠들어도 다들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들과 비슷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셀은 일행이 주변을 실컷 구경하게 내버려 두고, 완전히 어둠이 내려앉기 전에 큰 여관을 두 곳이나 잡았다.
한곳에 머물기엔 인원이 너무 많고, 수레를 보관할 곳도 마땅치 않았던 탓이다.
그러고는 여관에 짐을 풀자마자 클로드를 불러 해야 할 일을 확인했다.
“일단 지낼 곳부터 마련해야겠어.”
사람과 짐이 한둘이 아니라 여관에서 계속 묵자니 비용도 많이 들고, 움직이기도 불편했다.
다른 상단들처럼 수도에 적당한 근거지를 마련해야 했다.
클로드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어차피 물건을 판매할 상점도 필요하니까요. 괜찮은 건물이 있는지 찾아봐야겠네요. 그 뒤에는……. 홍보를 슬슬 시작해야겠죠? 연회에 참석해서 귀족들과 친분을 다지는 건 어떻겠습니까?”
심드렁한 대답이 돌아왔다.
“굳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