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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119화 (119/269)

119화 내가 다 먹는 게 낫다. (3)

공짜가 아니라는 말은 룬스톤을 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전리품을 챙겨 왔다는 뜻이다.

식은땀을 흘리던 클로드가 조심스레 물었다.

“페르디움 백작님이나 그 가신들은 전혀 모릅니까?”

“모르지. 디갈드가 워낙 가난한 걸로 유명하잖아. 전쟁 비용으로 재산을 거의 다 쓴 줄 알걸? 내가 그렇게 보고하기도 했고.”

지셀은 전쟁이 끝나자마자 디갈드로 달려왔다.

디갈드 백작을 죽여서 후환을 없애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귀족들의 재산을 죄다 챙기려는 속셈이 컸다.

아무리 가난한 영지라 해도, 귀족은 귀족이다.

거기다 디갈드 영지는 영지민을 수탈하기로 유명했다. 그만큼 영주와 가신들이 숨겨 둔 재산이 많았다.

클로드가 궤짝에 담긴 금화를 살피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정말 많군요. 영지 상태가 그 꼴이었던 것도 이해가 갑니다.”

“아, 이게 다 디갈드에서 나온 건 아니야. 돌아가는 길에 남작령들도 다 털었거든.”

“……네?”

“전쟁 참여한 놈들은 다 털었지. 어차피 가는 길이니까 겸사겸사.”

“와……. 그걸 혼자 다 먹었다고요?”

“그럼 누구랑 나눠 먹냐? 난 내 걸 남한테 뺏기는 게 제일 싫어.”

부끄러움 한 점 느껴지지 않는 발언에 클로드는 눈을 감았다.

‘아버지가 남이냐? 그리고 원래 아버지 거잖아……. 진짜 이건 귀족이 아니라 산적 새끼인가.’

세이론 왕국에서도 욕심 많은 귀족은 숱하게 봐 왔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돈을 밝히는 놈은 단연코 처음이었다.

“저기, 혹시 출생의 비밀 같은 거 있으신 건 아니죠?”

“뭔데. 무슨 뜻이야?”

지셀이 노려보자, 클로드는 손사래를 치며 변명했다.

“아니, 페르디움 백작님한테도 말을 안 하셨다니까 그렇죠. 꼭 이렇게 혼자 다 먹어야 해요? 아버지 섭섭하시게.”

“장담하는데, 다 내가 쓰는 게 훨씬 낫다.”

페르디움이 챙겨 봤자 또 어영부영 새는 바가지나 때우다가 전부 날릴 게 뻔했다.

그들은 미래를 대비하기는커녕 현재를 견디기도 벅찬 상황이었으니까.

그럴 바에는 자신이 필요한 곳에 확실히 쓰는 게 나았다.

덕분에 페르디움도 그 혜택을 보고 있지 않은가.

얘기를 듣고 있던 클로드가 눈을 반짝였다.

놀라긴 했지만, 이 기회를 멍청하게 넘길 수 없었다.

“후후, 당장 일을 줄여 주시지 않으면 이 사실을 페르디움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셀이 팔을 걷어 올리며 사악한 웃음을 지었다.

“옳지, 그 말 하기를 기다렸다. 말로만 하는 경고는 영 시원찮아서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네? 으아아악!”

잠시 후, 클로드는 창고 구석에서 훌쩍거리며 일어났다.

“죽을 때까지 조용히 있겠습니다.”

“좋아, 그 마음 잊지 말도록. 사실 말해도 상관없긴 하지만, 모양새가 좀 안 좋잖아? 굳이 얼굴 붉힐 필요는 없지.”

지셀이 웃으며 손뼉을 쳤다. 기다렸다는 듯 창고 문이 열리며 웬디와 용병 몇 명이 들어왔다.

“어?”

클로드는 깜짝 놀랐다.

지셀과 자신이 들어올 때만 해도 분명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용병들이 대체 언제부터 대기하고 있었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가 놀라거나 말거나 웬디와 용병들은 인사를 한번 하고 재화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클로드는 황당해하다 곧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 읽혔네, 정말.’

돈이 떨어질 것도, 그래서 자신이 찾아올 것도 이미 예상한 모양이었다. 짐꾼 노릇을 할 용병들도 미리 불러 두고.

지셀은 클로드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웃었다.

“또 돈 떨어지면 말해라.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해. 돈은 내가 구해 줄 테니.”

“……쳇.”

클로드는 고개를 돌린 채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어쩐지 자존심이 상했다.

제멋대로에 엉망인데도, 뭔가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든 해결책을 제시한다.

방식은 영 상식 밖이지만, 그 비상식이 또 잘 통한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크흠, 요 절반 정도면 당분간은 문제없겠네요.”

“그래, 얼른 떠날 준비 해.”

클로드는 지셀에게 받은 돈으로 급히 필요한 자재 따위를 사들였다.

꾸준히 관리해야 하는 업무는 로웰에게 철저히 숙달시켰다.

클로드가 수도로 떠날 준비를 하는 동안 지셀은 페르디움으로 향했다.

자리를 비운 사이 영지의 병력을 관리하고 기초 훈련을 시킬 사람이 필요했다.

‘란돌프 단장님이라면 적당히 관리할 수 있겠지.’

가장 좋은 건 자리를 비운 사이 용병들이 마나를 쌓을 수 있도록 마나 연공법을 알려 주는 것이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자가 태반이었기에 연공법을 가르치려면 바네사에게 그랬던 것처럼 하나하나 잡아 주어야 한다.

한두 명이면 모를까, 몇백 명이나 되는 용병들이 스스로 연공할 수 있을 때까지 봐주려면 당장 지셀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연공법을 가르치기 전에 계약도 새로 맺어야 하니까. 지금은 다른 부족한 부분을 먼저 가르치는 게 낫겠지.’

란돌프라면 기초 군사학처럼 정규군에게 필요한 기본 소양 정도는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용병들뿐만 아니라 새로 충원한 병사들도 가르쳐야 하니 겸사겸사 부탁할 생각이었다.

* * *

란돌프는 이야기를 듣고 별 반대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즈발터는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수도로 가겠다니? 너는 영주다. 영주가 고작 장사 때문에 자리를 비우겠다고?”

“네, 중요한 일이라 제가 직접 가야 합니다.”

“허어, 어찌 영주가 한낱 장사치처럼 직접 물건을 들고 움직인단 말이냐. 사람들이 비웃을 것이다.”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건 제 체면이 아닙니다.”

즈발터는 아들의 태도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 봉토를 받아서 그런지 자신이 영주라는 자각이 아예 없는 듯 보였다.

“그런 이유라면 파견할 수 없다. 너도 영주가 됐으니 그 책무가 얼마나 무겁고 중요한지 알아야 한다.”

본래 즈발터도 이렇게까지 꽉 막힌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지셀이 영주라는 자리의 무게를 전혀 모르는 듯하니, 이렇게 간접적으로라도 가르칠 셈이었다.

물론 지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식량 1년 치.”

“응?”

“갔다 와서 페르디움 영지의 1년 치 식량을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생각해 보니 너도 북부를 벗어나 견문을 넓힐 때가 온 거 같구나. 잘 다녀오거라. 란돌프는 준비가 되는 대로 보내마.”

즈발터는 인자하게 웃으며 아들의 어깨를 두드렸다.

거부하기에는 너무 큰돈이었다.

* * *

즈발터를 가볍게 제압하긴 했지만, 영지에 돌아오고 나서도 격한 반대에 부딪혔다.

상행을 떠난다고 하니 체면 차리기에 바쁜 가신들은 물론, 지셀을 잘 아는 벨린다와 길리언마저도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그냥 다른 사람 보내요! 그걸 왜 도련님이 해요?”

“영주님, 영주님께서 직접 나서시면 다들 비웃을 겁니다. 상단주는 총관인데 어찌 영주님께서 직접 움직이신단 말입니까?”

“안 돼, 내가 직접 해야 제일 빨라. 장사만 하러 가는 게 아니라, 수도에서 할 일도 있고.”

두 사람이 몇 번 더 설득해 봤지만 지셀은 언제나처럼 요지부동이었다.

벨린다와 길리언은 포기하고 한숨만 내쉬었다.

이렇게 된 이상 늘 그랬듯 같이 가서, 이상한 짓을 하려고 하면 몸을 던져서 막는 수밖에 없었다.

며칠 뒤, 지셀은 짐이 가득 실린 수레 여러 대를 훑어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1차 물량은 이 정도면 적당하겠어.”

“정말 다 팔 수 있을까요?”

“홍보만 잘되면 문제없어. 일단 써 보면 귀족들이 환장할 거다. 걱정하지 마.”

자신만만한 지셀의 말에 클로드가 턱을 긁적였다.

화장품의 효능은 확실하니, 언젠가는 소문이 나긴 할 것이다.

하지만 초도 물량이 너무 많았다.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물건도 아닌데, 도대체 이걸 어떻게 다 판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화장품을 실은 수레들에도 보통 돈이 들어간 게 아니었다.

물건이 상하지 않게 한다고 수레마다 냉동 마법진을 새겼다. 마법진을 유지하기 위해 룬스톤도 하나씩 박아야 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귀족들이 안 사면 엄청난 손해라고요. 냉장 보관이 만능은 아니에요.”

“아, 걱정하지 말라니까. 하나도 안 남기고 다 팔 수 있어. 쉽게 썩는 것도 아니고.”

“에휴, 그러시겠죠. 영주님은 다 계획이 있으시겠죠.”

클로드는 자포자기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 상대해야 할 사람들은 영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귀족들이다.

이 성질 더러운 영주가 그들을 어떻게 설득해서 홍보를 할지 예측조차 할 수가 없었다.

“도련님! 이쪽도 준비 다 됐어요!”

벨린다가 다가와 생글생글 웃으며 보고했다.

그 뒤에는 스무 명쯤 되는 사용인들이 짐을 잔뜩 진 채 서 있었다.

“하아……. 이렇게 많이 안 가도 된다니까?”

“명색이 귀족인데 이 정도는 따라가야죠. 기선 제압 모르세요? 수도에서는 조금이라도 얕보일 틈을 보이면 안 돼요.”

지셀이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 벨린다가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자칫하면 촌놈이라고 무시당한다고요. 가뜩이나 귀족이 장사치 노릇 한다고 비웃을 게 뻔한데!”

틀린 말은 아니라 지셀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을 다물었다.

때마침 길리언과 카오르도 완전 무장을 한 용병 오십여 명을 이끌고 와 지셀 앞에 도열했다.

“저희도 준비 끝났습니다. 영주님.”

“뭐야, 용병도 이만큼 데려가자고? 이렇게 많이 안 가도 된다니까.”

“수도까지는 길이 멉니다. 비싼 물건을 옮기는데 이 정도 인원은 있어야 합니다. 또 영주님도 편히 모셔야 합니다.”

길리언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듯 표정을 단단히 굳혔다. 지셀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뭐 이왕 준비한 거 다 같이 수도 구경이나 한번 하자. 이제 더 갈 사람은 없는 거지?”

벨린다와 길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도련님, 이거 뭐라고 불러요? 이름은 지었어요?”

“이름?”

“네. 소개하고 홍보도 하려면 이름이 있어야죠.”

“그건 그렇지. 음…… 러블리 블링블링, 이런 거 어때? 예쁘지 않아?”

지셀의 말에 클로드가 배를 잡고 웃었다.

“우와! 작명 센스 뭐야! 소녀 감성 뭐야!”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조금 전까지 가슴속에 맺혀 있던 걱정과 근심이 싹 사라져 버렸다.

지셀이 무표정한 얼굴로 노려보자 클로드는 얼른 시선을 피하며 모른 척했다.

벨린다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건 좀……. 귀족들은 이름에도 품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요.”

“블링블링이 어때서? 난 예쁜데. 그렇게 별로야?”

지셀이 길리언을 홱 돌아보았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길리언은 이를 악물고 답했다.

“괜찮……습니다.”

지셀은 클로드 옆에 서 있던 웬디와도 눈을 맞추었다.

그녀는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입꼬리가 실룩이는 건 막지 못했다. 물어볼 필요도 없는 표정이었다.

“도련님, 진짜 그건 아니라니까요.”

벨린다가 눈을 찌푸리자 지셀은 입맛을 다시며 화장품의 원래 이름을 말해 주었다.

“데네브.”

데네브는 전생에 델파인 공작이 화장품에 붙인 이름이었다.

고대에 전해지던 별의 이름을 따온 거라고 들었다.

멋지긴 했지만, 델파인 공작이 붙인 이름이라 영 정이 안 갔다.

그래서 이 이름 말고 자신이 붙인 ‘러블리 블링블링’을 써 보려고 한 건데 씨알도 안 먹힌다.

“으음, 뭐 나쁘진 않네요. 귀족들이 좋아할 만한 느낌이에요.”

벨린다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서 듣고 있던 카오르는 삐딱하게 고개를 꺾으며 생각했다.

‘러블리 블링블링? 나는 이게 더 괜찮은 거 같은데.’

역시 사람의 취향은 다들 달랐다.

어쨌든 이름도 정해졌겠다, 이제 수도로 가서 제대로 파는 일만 남았다.

지셀은 말에 올라타 모두를 둘러보았다. 믿음직한 사람들을 보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한껏 웃음 지은 지셀이 말고삐를 채치며 크게 외쳤다.

“자, 이제 수도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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