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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115화 (115/269)

115화 인생 한 번 더 걸어 볼까? (3)

“뭘?”

지셀은 뻔히 알면서도 괜히 모른 척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꾸했다.

벨린다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말했다.

“나도 그거! 화장품 주세요! 좀 많이 주세요. 관리 열심히 해야 할 나이거든요.”

“전에는 필요 없다며?”

“무슨 말씀이세요? 저도 지원했었잖아요. 저 놈팡이들이 막아서 못 받은 거지. 호호호, 우리 도련님은 정말 못 하는 게 없다니까?”

벨린다가 뻔뻔하게 받아쳤다.

지셀이 피식 웃으며 옆에 쌓여 있던 화장품 중 몇 개를 집어 던져 주었다.

어차피 여러 사람에게 테스트해 볼 생각으로 넉넉하게 준비해 놨으니까.

“꺅! 고마워요!”

그녀는 싱글벙글 웃으며 화장품을 품에 꼭 안고 냉큼 자리를 떠났다.

그 뒤를 이어 카오르와 용병들이 당당하게 앞으로 나섰다.

“저희도 좀 주십시오.”

“사나이는 이런 거 안 바른다며. 그리고 너희들은 원래 꾸미는 거 관심 없었잖아?”

용병들이야 특이한 몇 놈 말고는 평소에 외모 관리에 큰 관심이 없었다.

험악한 놈이 관리해 봤자 매끈하고 험악한 놈이 될 뿐이니까.

한데 묶여서 같은 취급 당하는 게 억울했는지, 카오르가 옆에 있는 용병을 팔꿈치로 쿡 찔렀다.

“……꼬시고 싶어서요.”

“뭐?”

“여자한테 선물로 줘서 꼬시려고요!”

“……그래. 솔직해서 좋네.”

절절히 흘러나오는 욕망에 지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쓸 만큼 챙기고, 다른 용병들에게도 나눠 줘. 대신 선물 받은 사람도 부작용이 있으면 보고하라고 해.”

“이예!”

지셀은 시제품 상자 몇 개를 상자째로 건네주었다.

용병들은 화장품을 받아 들자마자 환호성을 지르며 우르르 나갔다.

“웬디는 성의 다른 사용인들에게도 나눠 주도록. 경과 확실히 보고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지셀은 웬디에게도 몇 상자를 챙겨 주었다.

구경하고 있던 다른 가신들도 한두 통씩 얻고 희희낙락하며 돌아갔다.

오직 클로드와 마법사들만이 손톱을 깨물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지셀은 그들을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너희는 안 돼. 지금은 내기 중이니까.”

“으으…… 치사해.”

아직 내기의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길리언이 큰 효과를 보았다고 소문이 퍼져 가니 클로드와 마법사들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화장품을 얻어서 확인해 보려고 달려왔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일단 돌아가자. 벌써 겁먹을 필요는 없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고.”

클로드가 마법사들을 달래며 물러났다.

고작 한 사람이 효과를 본 것뿐이다. 길리언은 마나를 다루는 사람이니 다른 요인으로 좋아진 걸 수도 있다.

마법사들은 클로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안정시켰다.

사람들이 한차례 집무실을 휩쓸고 지나간 뒤, 길리언이 지셀을 찾아왔다.

지셀은 반색하며 그를 맞았다.

“오, 길리언. 어서 와.”

모두가 거부할 때 스스로 나서서 효과를 보여 준 남자다.

덕분에 지원하는 사람이 늘어 테스트도 한결 수월해졌다.

“확실히 피부가 좋아졌네. 어때, 쓸 만하지?”

“그렇습니다. 한층 젊어진 느낌입니다.”

길리언은 자신감 넘치는 웃음을 흘렸다.

예전에 비해 매끈해진 피부 결에서 반짝반짝 윤이 나는 것 같았다.

“그래, 무슨 일이야? 화장품은 이미 받아 간 게 아직 남았을 텐데. 훈련 보고인가?”

“……저도 하나만 더 주십시오.”

“응?”

“딸한테 좀 보내 주고 싶습니다.”

“아, 그렇군. 이게 부모의 마음인가.”

레이첼은 엘레나와 함께 페르디움에 있으니 얼굴을 못 본 지도 꽤 되었다.

직접 보살피지 못하는 딸에게 좋은 선물이라도 보내 주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이리라.

지셀은 마음껏 쓰라고 여러 개를 건네주며 웃었다.

“덕분에 사람을 많이 구했어. 길리언의 공이 커. 영지 사정이 나아지면 엘레나와 레이첼도 데리고 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써 보면 모두 만족할 겁니다.”

길리언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지셀이 그를 마주 보며 웃었다.

사람이 많이 참여했으니 이제 효과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흠, 그러고 보니…… 바네사도 좀 가져다줘야 하나. 요새 계속 수련만 하고 있다던데.”

지셀은 연무장에 처박혀 수련과 연구만 하고 있는 바네사를 친히 찾아갔다.

그녀는 현재 6서클의 경지를 돌파하기 위해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예고도 없이 찾아가자 그녀는 깜짝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

“앗, 여, 영주님……. 갑자기 무슨 일로…….”

“와, 너…….”

지셀은 바네사를 보고 흠칫 놀랐다.

얼마나 수련과 연구에만 집중했는지 그녀의 꼴은 가관이었다.

머리는 완전히 떡이 되어 산발이었고, 옷은 대체 언제 마지막으로 갈아입었는지 꼬질꼬질했다.

지셀은 헛기침을 하며 바네사에게 화장품을 건넸다.

“소문 들었나? 이게 그 화장품인데, 시간 날 때 좀 발라 봐.”

“네, 넵!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연구도 좋지만 잠도 좀 자고, 밥도 먹고, 좀 씻기도 하고.”

바네사가 고개를 숙이고 슬쩍 미소를 지었다.

어디다 쓰는 물건인지는 둘째 치고, 무언가를 선물 받은 건 처음이었다.

지셀은 집무실로 돌아가려다 연무장 문을 닫기 전에 문틈으로 살짝 안을 확인했다.

그녀는 화장품을 한쪽 구석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책더미 사이로 스르르 들어갔다.

그리고 수백 권의 책 사이에 주저앉아 다시 연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와, 저걸 어떻게 다 읽어? 저게 다 머리에 들어가?”

마법사들은 클린 마법을 쓰면 최소한의 청결은 유지할 수 있다.

그렇기에 대부분은 남한테 지저분한 꼴을 보이는 걸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하지만 바네사는 청결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못할 정도로 연구에 몰입하고 있었다.

“하긴, 이렇게 본격적으로 공부할 기회가 없었겠지. 그래도 정말 대단하군.”

마탑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그녀다.

온전히 수련과 연구에만 시간을 쏟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으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조만간 마력도 최대한 올려 줘야겠어. 아주 믿음직스럽단 말이지.”

지셀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못 받은 사람 중에 필요한 사람 있으면 전부 찾아오라고 해.”

지셀의 명령이 성 곳곳에 빠르게 퍼졌다.

뒤늦게 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이 넘쳐 났고, 시제품은 빠르게 동이 났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영주님이 주신 거 써 봤어? 대박이야! 지금 전부 난리야.”

“어머, 야. 나 이틀 만에 피부 탱탱해진 것 봐라. 열 살은 어려진 거 같지 않아?”

“아니, 그건 좀……. 그래도 열 시간 정도는 젊어진 거 같아.”

“귀족들이나 쓰는 물건인데 이 기회가 아니면 언제 발라 보겠어.”

“이거 재료가 엄청 비싼 거래. 아껴 써야 해. 이럴 줄 알았으면 하나 더 받아 올걸.”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지셀이 만든 화장품 얘기로 꽃을 피웠다.

피부 관리를 안 하던 사람들이라 효과가 눈에 띌 정도로 좋았다.

지셀은 며칠 동안 화장품을 사용한 사람들에게 경과 보고서를 꾸준히 받았다.

“좋아, 대부분 긍정적인 반응이군.”

결과는 대호평.

나쁜 말을 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오히려 몇 개만 더 달라는 요청이 줄을 이었다.

귀족들이나 쓸 법한 물건을 경험해 본다는 인식도 화장품의 인기에 한몫했다.

자고로 비싼 걸 싫어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니까.

성의 분위기가 들뜰수록 클로드와 마법사들은 점점 더 불안해했다.

“젠장! 요새 사람들 얼굴 봤어? 점점 매끈해지고 있잖아! 이거 정말 효과 없는 거 맞아? 어떻게 할 거야!”

알포이가 초조하게 외쳤다. 클로드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걱정하지 마. 아직 결과가 나온 것도 아니잖아. 왜 이렇게 급해? 도박에서 조급함은 금물이라고. 마지막 패를 까기 전까진 결과가 어떨지 아무도 모르는 법이야.”

“사람들이 다들 칭찬만 하고 있잖아! 얼굴도 진짜 좋아지는 거 같다고!”

“그거야 분위기에 휩쓸려서 그래. 잠을 잘 잔 것뿐인데도 왠지 더 좋아 보이는 거지. 게다가 넌 모르겠지만 저기에는 엄청나게 비싸고 좋은 약초들만 들어갔어. 그러니 일시적으로 좋아 보일 수도 있지.”

“뭐? 그러면 진짜 효과 있는 거잖아!”

클로드는 같잖다는 표정을 지으며 코웃음을 쳤다.

“그냥 좋은 거 다 때려 박는다고 성공할 거면 마탑에서도 벌써 오래전에 성공했겠지. 약초 아무거나 섞어 바르면 피부 더 안 좋아지는 거 몰라? 좋은 것도 마구 섞으면 독이 된다고. 그래서 귀족들도 조심하는 거고.”

“그건 그렇지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푹 쉬고 있어.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봐. 너나 나도 아니고, 영주님이 성공한다니 말이 안 되잖아. 안 그래?”

“그, 그렇지.”

알포이는 불안한 기색을 보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드는 박력 있게 책상을 내리치며 말을 이었다.

“우리는 지식인이라고, 지식인! 언제나 냉철한 이성과 지성으로 판단하는 사람들! 저런 무지하고 비상식적인 인간한테 휘둘리면 안 된단 말이야.”

그 말에 알포이는 다시 자신감을 찾은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를 떴다.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클로드의 말은 확실히 틀리지 않았다.

영주는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도 아니고, 다방면으로 지식을 쌓은 사람도 아니다.

저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을 두 번이나 연달아 성공시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알포이를 따라 마법사들까지 떠나가자 클로드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정말 피곤하군. 다들 저렇게 심약한 주제에 내기를 왜 하는지……. 무서우면 애초에 하지를 말았어야지. 쯧쯧쯧.”

뒤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던 웬디는 경악에 찬 눈으로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네가 꼬셨잖아!’

다른 건 몰라도 저 뻔뻔함과 주둥이는 정말 인정할 수밖에 없다.

웬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클로드를 재촉했다.

경멸스럽기는 하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가 펜리스 영지의 총관이니까.

“총관님, 일이 많이 밀렸습니다. 다음 일정은 군수 창고 건설 상황을 확인…….”

그런데 갑자기 클로드가 몸을 배배 꼬며 손톱을 깨물기 시작했다.

웬디는 입을 다물었다. 꼴을 보아하니 옆에서 하는 말은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젠장, 어떡하지? 진짜 효과가 있는 거 같은데. 와, 미치겠네. 설마 저것도 성공하는 건 아니겠지?’

웬디는 매일같이 클로드 옆에 붙어 있었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웬디의 피부 상태를 바로 옆에서 보고 있으니, 완전히 망했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거 훼방을 놓을 수도 없고!’

솔직히 방해할까 생각도 했다.

마법사들과 같은 편이니, 방법은 무궁무진했다.

아예 씻지 못하게 물을 없애 버리거나, 부패 마법을 이용해 공기를 더럽히면 간단하다.

‘걸리면 최소 30년 이상 감옥에 갇히겠지.’

하지만 지셀의 성격상, 뭔가 이상한 기미가 보이면 증거가 없어도 일단 감옥에 처넣는 것부터 할 게 뻔했다.

이젠 화장품을 받아 간 사람이 많아서 훼방을 놓는 것 자체도 불가능해졌다.

성에서 일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용병들과 가신들까지 다 받아 갔으니, 그 사람들을 모두 막으려면 영지 전체에 손을 써야 했다.

대마법사가 아닌 이상 도무지 방법이 없었다.

‘하, 씨. 어떡하지?’

발을 동동 구르던 클로드는 웬디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괜히 투덜거렸다.

“뭐, 왜! 이 배신자야. 너 화장품 바르더라? 어휴, 얼굴 매끈해진 것 봐.”

웬디는 경멸 반, 안쓰러움 반 섞인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얼마 동안 같이 지내면서 느낀 바로는, 저 주둥이는 상대할수록 손해였다.

초조해하던 클로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몇 사람 정도는 분명 부작용이 있을 거야. 화장품이라는 게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지. 그런 제품을 영주님이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어. 마지막 날에 확인하면 돼.’

몇 사람만 부작용이 나와도 우기면서 무승부로 밀어붙일 수 있다.

조금이라도 위험한 제품은 귀족들이 거부할 테니 그것만으로도 상품의 가치가 없어진다.

‘아직 결과도 안 나왔는데 벌써 겁먹을 필요는 없지. 이런 긴장감이 도박의 묘미인데, 나도 많이 약해졌군. 후후후.’

도박쟁이가 흔히 하는 현실 부정이었지만 클로드는 깨닫지 못했다.

“가자, 가. 일은 해야지.”

내기 때문에 일을 소홀히 했다가는 분명 무시무시한 보복을 당할 것이다.

영주는 대범한 거 같으면서도 의외로 집요한 구석이 있었으니까.

어떻게든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서 발버둥 치는 클로드와 달리, 지셀은 쌓여 가는 서류들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부작용 0건.”

그 많은 사람들이 보름이 넘게 사용했음에도 부작용이 단 한 건도 없었다.

아무래도 세세한 제조법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오래 걸릴 거라고 예상했었는데, 각오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성공한 셈이었다.

화장품을 만드는 데 성공한 것도 기쁜 일이지만, 사람들이 화장품을 쓰면서 즐거워하는 게 보기 좋았다. 그 정도로 사람들이 마음의 여유를 찾았다는 뜻이니까.

지셀은 잠시 고민하다가 가신들에게 새로운 명령을 전달했다.

“그동안 다들 일만 하느라 너무 바쁘게 달렸다. 조만간 연회를 열 생각이다. 시간이 촉박하더라도 적절하게 휴식을 취해야 계속 싸울 수 있는 법이지.”

가신들은 모두가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그 흔한 만찬조차 단 한 번도 연 적 없는 영주가 갑자기 연회를 열겠다니.

‘저 일에 미친 영주가 웬일이래?’

놀라는 가신들을 보며 지셀은 말을 이었다.

“연회 날은 내기 마지막 날로 하겠다. 성의 사용인들과 영지민들이 모두 즐길 수 있게 술과 고기를 준비해라. 근무해야 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 연회는 이틀간 진행한다.”

내기 결과를 보는 김에 겸사겸사 휴식도 취하겠다는 뜻이었다.

사실 이번 내기도 영주의 승리라는 게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다.

농사 때야 싹이 날 때까지 결과를 알 수 없었지만, 화장품은 다르다.

쓰는 사람 얼굴을 매일 지켜볼 수 있으니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바로 눈에 보였다.

사용인들까지 연회에 참가할 수 있다는 소식에 한껏 들뜬 사람들 사이에서 클로드와 마법사들만이 우울함에 잠긴 채 돌아다녔다.

그들은 안타까운 심정으로 매일매일 여신께 기도를 올렸다.

“제발 세상이 멸망하게 해 주세요. 마왕이라도 하나 보내 주세요.”

내기에서 또 지느니 그냥 다 같이 죽는 게 낫다는 심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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