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인생 한 번 더 걸어 볼까? (2)
박력 있게 쳐들어온 마법사들을 보고 지셀이 같잖다는 표정을 지었다.
“단체로 무슨 일이야?”
“내기하러 왔습니다! 우리 전부 영주님의 화장품이 쓸모없다는 쪽에 걸겠습니다.”
“흐음, 사람이 너무 많은데……. 조건은?”
대표로 나선 클로드가 씨익 웃으며 답했다.
“저희가 이기면 노예 계약은 해지하고 2천 골드씩 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너희가 지면?”
“그러면 각자 10년씩 추가하겠습니다.”
지셀은 괜히 빼는 척 다시 물었다.
“내가 내기를 안 받아들이면 어떻게 할 건데?”
그 모습에 클로드와 마법사들이 눈을 빛냈다.
저 막 나가는 영주가 처음으로 자신 없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승리할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였다.
“영주님이 먼저 내기를 하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와서 거절하시는 건 명예롭지 못한 행동입니다. 그만두실 거면 5년씩 빼 주시죠.”
“아, 그건 곤란하고…….”
지셀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10년씩 더 추가하기 미안해서 그런 건데…… 다들 이렇게 의지가 확고하니 어쩔 수 없네. 내기를 받아들인다.”
“이예!”
클로드와 마법사들은 주먹을 쥐고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좋습니다! 그럼 기한을 정해 주시죠.”
“음, 한 달 정도면 되려나?”
지셀은 자신 있게 툭 내뱉었다.
보름이면 효과가 나타나기 충분하지만, 피부 상태는 사람마다 다르기에 넉넉하게 한 달로 잡았다.
클로드는 희희낙락하며 내기의 증인으로 삼을 가신들을 잔뜩 불러왔다.
영지를 시찰하러 나가 있는 길리언과 연무장에서 수련 중인 바네사를 제외하고 모두 대전에 모였다.
당연히 벨린다는 악을 쓰며 반대했다.
“내기는 또 무슨 내기예요! 저놈한테 물들었나 봐! 화장품을 도대체 어떻게 증명할 건데요?”
농사야 눈에 보이는 싹이 움트고 열매가 달리지만, 화장품은 효과를 평가할 만한 객관적인 기준이 없었다.
잘 먹고 잠만 푹 자도 좋아지는 게 사람 얼굴이다.
달리 말하면 억지로 피부를 엉망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뜻이다.
“설마 저놈들한테 줄 건 아니죠? 무슨 짓을 할 줄 알고요!”
지셀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당연히 클로드와 마법사들은 테스트에서 빠져야지. 저놈들은 내기에서 이길 수 있다면 똥도 얼굴에 바를 놈들이거든.”
마법사들은 자존심이 상했지만 반박하지 못했다.
여차하면 진짜 똥칠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으니까.
지셀의 말에도 벨린다는 화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러면 누가 실험할 건데요? 뾰루지 하나만 나도 저놈들은 이겼다고 난리를 피울 거라고요!”
“흐음, 그건 그렇지.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한데…….”
지셀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자리에 와 있던 사람들은 모두 혹시나 눈이 마주칠까 봐 얼른 고개를 숙였다.
검증되지도 않은 제품을 자기 얼굴에 실험해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가 좋으려나…….”
모두에게 강제로 바르라고 안겨 주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이 겁먹고 안 바르기라도 하면 내기 결과가 애매해진다.
클로드와 마법사들이 효과가 없다고 우길 여지를 주게 되니까.
신제품이 아무리 효과가 좋다고 해도, 며칠 정도는 꾸준히 발라야 효과가 난다.
지셀은 강제로 다 바르게 하는 것보다는 제대로 테스트할 사람을 우선 구해 보기로 했다.
“카오르, 네가 한번 발라 볼래? 며칠 훈련 빼 줄게.”
마나도 익히고 있어 외부 조건에 영향을 덜 받을 테니, 적당한 후보였다.
하지만 카오르는 코웃음을 치며 건방진 표정으로 거절했다.
“사나이는 그딴 거 안 바릅니다.”
“너 밤마다 얼굴에 과일 껍질 붙이는 거 누가 모를 줄 알아?”
“그건! 과일을 먹다가 우연히 붙은 겁니다!”
카오르는 지셀에게 져서 합류하기 전에도 종종 얼굴에 과일 껍질을 붙이고 잤다.
페르디움에 오고 나서도 가끔 그랬으니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어쨌든! 그건 안 바릅니다. 전 이제 그런 거 안 합니다.”
본래도 피부 관리에 신경 쓰던 사람이, 정체도 모르는 걸 얌전히 바를 리가 없었다.
강경한 거부에 지셀은 어깨만 으쓱였다.
싫다는 사람에게 강요할 마음은 없었다.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아 보면 그만이니까.
“실험해 줄 사람은 따로 찾아 봐야겠네. 아무튼 내기는 진행할 거니까 다들 그렇게 알고 있어.”
“뭘 찾아요! 영주 체면이 있지, 내기한답시고 사람 찾아다니는 게 말이 돼요?”
벨린다가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성질을 냈다.
지셀이 황당해하며 고개를 기우뚱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안 한다잖아. 그러면 벨린다가 해 줄래?”
“아니, 그건 좀…….”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자 그녀는 당황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으으, 어쩔 수 없지. 일단 바르는 척하고 방법을 찾아야겠다.’
벨린다는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알겠어요. 제가 할 테니 한 통 줘 봐요.”
받아도 바를 생각은 없었다.
그냥 최대한 잠을 많이 자고 마나 연공을 열심히 하다가, 내기가 끝나는 날 마나를 이용해 피부를 바짝 당겨 볼 속셈이었다.
그러면 잠깐이라도 확실히 피부가 좋아 보이는 효과가 나올 것이다.
“잠깐! 집사장은 안 됩니다.”
클로드가 나서며 벨린다의 행동을 제지했다.
“왜요?”
“지금도 집사장은 피부가 꽤 좋잖아요? 눈가에 나이 주름은 조금 있긴 하지만…….”
“조용히 안 해요?”
“어쨌든 집사장은 안 됩니다. 무슨 수를 쓸지 모르는 사람이에요. 다른 사람으로 해 주십시오. 피부가 안 좋아서 확실히 티가 날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도박장에서 몇 년을 구른 클로드답게, 갑자기 태도를 바꾸는 벨린다를 보고 바로 수상함을 감지한 것이다.
‘아오, 저놈 진짜…….’
벨린다는 씩씩거리며 클로드를 노려봤다.
잔망스러운 놈이 눈치는 빨라서 아주 결정적일 때 훼방을 놓는다.
지셀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른 사람을 찾아 보도록 하지. 이제 다들 나가서 일 봐.”
벨린다가 한숨을 내쉬며 나가고, 다른 사람들도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도망치듯이 떠났다.
다들 거부했지만 지셀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를 믿고 흔쾌히 사용해 줄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용병들하고 사용인들은 좋아하지 않을까? 이런 건 귀족들이나 쓰니까 말이야. 뭐, 적어도 몇 사람 정도는 믿어 주겠지.”
지셀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이거 한번 써 볼래?”
“죄, 죄송합니다.”
“이거 한번 발라 볼래? 진짜 끝내주는 제품인데. 귀족들이나 바르는 거라고.”
“용서해 주십시오!”
사람들은 모두 지셀이 만든 화장품을 꺼림칙하게 여겼다.
뭔지도 모르는 걸 바르라 하니 당연한 현상이었다.
“다들 지금 상태에 만족하면서 사는 건가? 상태가 좀 안 좋은 사람들만 모아서 줘 볼까?”
피부 상태가 안 좋은 사용인들과 용병들을 따로 모아서 줘 봤지만, 다들 마지못해 받거나 정말 싫어하는 기색이라 도로 뺏었다.
이래서는 제대로 된 테스트가 되지 않는다.
“하, 미치겠네. 나중에 귀족들한테 파는 것도 문제겠는걸? 내가 지금 델파인 공작만큼 이름값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델파인 공작가는 그 이름만으로도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었다.
회귀 전엔 공작가에서 새로 개발한 제품이라고 발표하자, 너도나도 화장품을 사려고 달려들었었다.
하지만 펜리스 영지는 변방 중의 변방, 그 영주인 지셀의 인지도 또한 바닥이었다.
그런 곳에서 만든 걸 누가 믿고 쓰겠는가.
지셀을 잘 아는 수하들도 이 모양인데, 귀족들은 아예 존재 자체를 무시할 게 뻔했다.
“테스트가 끝나면 수도로 올라가서 홍보할 방법을 찾아봐야겠어.”
지셀은 혀를 찼다.
만들기만 하면 끝날 줄 알았는데, 살 사람을 찾아다녀야 하게 생겼다.
“일단 그건 나중에 생각해 보자. 지금은 테스트가 우선이다.”
지셀은 열심히 성 안팎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자신이 만든 화장품을 권했다.
초반에 잡혔던 사람들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슬슬 지셀을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영주님이 들고 다니는 그거……. 받았어?”
“으음, 일단 받긴 했는데 표정 보더니 다시 뺏어 가더라.”
“갑자기 왜 그런 걸 만들어서 판다고 하실까?”
“우리 영주님 가끔가다 이상해지잖아. 저번에도 독 마시고 죽을 뻔했고.”
영주가 농사를 성공시킨 것은 영지 전체에 잘 알려져 있다.
그때는 지셀의 새로운 시도가 유효했음을 다들 인정했다.
하지만 그게 지셀의 본래 실력인지, 요행이었는지는 아직도 반신반의하는 사람이 많았다.
워낙 기행이 잦은 사람이다 보니 온전히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믿음과 불신을 오간다고 해야 할까?
새로운 시도가 성공할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하지만, 그걸 자기 몸으로 실험해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영주가 다시 이상해졌다는 소문은 금세 영지 전체로 퍼져 나갔다.
부정적인 여론이 시작되니 더더욱 지원자를 찾기 어려워졌다.
“이 새끼들이……. 그냥 죄다 강제로 발라야겠다.”
지셀이 저도 모르게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며칠이 지났음에도 테스트에 단 한 명도 지원하지 않았다.
처음에 가졌던 여유와 자신감은 박살 난 지 오래였다.
웬만하면 평화로운 방법을 쓰려고 했는데, 다들 이렇게 비협조적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
단체로 바르게 한 뒤 전체적인 표본을 구하는 게 더 빠를 터였다.
지셀이 강제로 테스트를 진행하려고 마음먹은 그때, 구세주가 불쑥 나타났다.
“영주님, 그거 제가 한번 써 보겠습니다.”
“오, 길리언!”
영지를 시찰하러 나가 있었던 탓에 길리언에게는 바로 권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충직한 남자는 소문을 듣자마자 먼저 찾아와 실험을 자처한 것이다.
지셀은 길리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주름도 꽤 있고, 피부도 거칠고…….’
가만 보니 테스트에 아주 적합한 인물이다.
길리언도 마나를 다루지만, 세월의 흔적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거기다 매번 밖에서 훈련하고 험하게 살아온 탓에 피부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훌륭한 시험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지셀은 확인차 물었다.
“괜찮겠어? 다른 사람들은 다 피해 다니던데. 이거 내가 만든 거라고.”
“외모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상관없습니다.”
길리언도 믿는다는 말은 안 한다.
못마땅했지만, 그래도 자원한 게 어디냐 싶어 지셀은 슬쩍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주섬주섬 통 하나를 꺼내 길리언에게 건넸다.
“어떻게 사용하면 됩니까?”
“그냥 자기 전에 세수하고 얼굴에 바르고 자면 돼. 꼭 얼굴만이 아니라 다른 데 발라도 좋을 거야.”
“알겠습니다.”
그날부터 길리언은 지셀이 준 화장품을 꾸준히 바르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이것도 영주가 내린 명령이었으니까.
사흘이 지나자 주변에서 조금씩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영감, 요새 여자 생겼어? 얼굴 좋아 보이네. 어디서 만났어?”
“헛소리하지 마라. 모가지 날려 버리기 전에.”
건들거리며 묻는 카오르에게 길리언은 건조하게 대답했다.
항상 똑같이 훈련하고 영지 개발 상황을 감독하느라 바쁜데 언제 여자를 만나겠는가.
그냥 하루하루 영주님께 도움이 되기 위해 살아갈 뿐이었다.
이틀 정도가 더 지나자 주변의 반응이 확실히 달라졌다.
용병들은 길리언을 볼 때마다 수군거렸다.
“뭐야? 뭔가 좀 젊어진 거 같지 않아?”
“피부 탱탱해진 것 봐. 혼자 좋은 거 먹나?”
“아니, 갑자기 얼굴이 저렇게 좋아져? 설마 저거…… 대장이 만든 그 화장품을 쓴 건가?”
길리언의 얼굴에 이전과 달리 윤기가 흘렀다.
주름은 그대로였지만, 피부의 결이 달라지니 확실히 전보다 젊어 보였다.
햇볕에 타 칙칙해 보이던 피부색도 오히려 활력 넘치는 구릿빛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평생 관리를 한 적이 없으니 효과가 더 극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길리언도 왜 이렇게 됐는지 금세 깨달았다.
“영주님이 만든 게 정말 효과가 있었군. 역시 영주님은 대단하구나.”
실제로 효과가 있다는 걸 알게 된 뒤 그는 더 열심히 화장품을 사용했다.
그 전까지는 한 손가락으로 떠서 바르던 걸 두 손가락으로 늘렸다.
피부에 신경 안 쓴다곤 했지만 주변에서 하도 말을 하니, 자기 전이나 아침에 방에서 나가기 전에 거울을 괜히 한 번 더 보게 되었다.
“나이를 먹어도 신경 쓰이는 건 똑같구나.”
하루하루 달라지는 자기 얼굴을 보며 길리언은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사람들이 물어볼 때마다 영주님이 만든 화장품의 효과라고 설명해 주었다.
소문은 이번에도 빠르게 퍼져 나갔다.
길리언처럼 피부가 안 좋은 사람도 사흘 만에 효과를 볼 정도로 대단한 화장품이다! 그야말로 화장품계의 대혁명이다!
그리고, 길리언에게 시제품을 넘긴 지 일주일째 되던 날.
쾅!
지셀의 집무실 문이 부서질 듯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업무를 보고 있던 지셀은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들었다.
벨린다를 비롯해 클로드와 웬디 등 영지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다.
“무슨 일이야?”
지셀이 재미있어하며 묻자 벨린다가 가쁜 숨을 고르며 외쳤다.
“나도 그거 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