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뭘 또 만들어요? (3)
알포이는 영지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공사에 매일 참여했다.
마력은 항상 바닥인 데다 채울 새도 없고, 피로가 쌓여 눈 밑이 퀭해졌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멈출 수가 없었다.
요령을 피우다 들키면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니까.
“아니, 도대체 이게 뭡니까? 일도 적당히 시켜야지! 너무 많지 않습니까!”
“자랑스러운 적염의 마탑에서 온 마법사들에게 이런 일이나 시키다니! 이런 하찮은 일을 하려고 온 게 아니란 말입니다!”
새로 투입된 마법사들은 매일같이 알포이에게 쏘아 댔다.
하지만 아무리 그들이 항의해도 알포이는 다 죽어 가는 표정으로 고개만 저었다.
“주인님…… 아니, 영주님이 시키니까 해야지…….”
“비겁한 변명입니다!”
새로 온 마법사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탑주의 후계자로서 항상 자신감이 넘치던 알포이가 왜 이렇게 변했단 말인가.
이상한 건 알포이만이 아니었다. 다른 마법사들도 입을 꾹 닫고 일만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말씀 좀 해 보십시오! 대체 왜 이런 허드렛일을 순순히 하고 계시는 겁니까!”
“그야…… 재미있으니까…….”
“재미있는데 왜 우시는데요!”
“눈물이 날 정도로…… 재미있으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십쇼!”
새로 온 마법사들은 참다못해 들고일어났다.
마탑에서 영주의 말에 잘 따르라고 당부하기도 했고, 지부장도 솔선해서 일하니 며칠간은 꾹 참고 시키는 대로 했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이용당할 수는 없었다.
자존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먼저 와 있던 마법사들의 모습을 보면 볼수록 불길한 예감이 자꾸 들었다.
하나같이 눈 밑이 거무죽죽하고, 공사장만 전전해서인지 꾀죄죄하다.
항상 깔끔하고 우아한 마법사들이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는 꼴이었다.
“같이 갑시다!”
“어디를?”
“영주님한테 가서 이런 일 못 한다고 따져야죠! 그래도 거부하면 마탑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지부장님도 같이 가시죠? 강하게 얘기합시다!”
“몰라……. 뭐야, 그거……. 무서워…….”
“이이익!”
마법사들은 소극적으로 반응하는 알포이를 보고 이를 갈았다.
이래서야 어디 가서 마탑의 후계자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한심하군. 우리는 더 이상 당신을 탑주님의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겠소!”
“이 일은 내 반드시 탑주님에게 얘기할 것이오!”
“우리끼리라도 영주한테 찾아갑시다!”
마법사들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영주를 협박해서라도 일을 그만두거나 이곳을 떠날 셈인 듯했다.
마법사들에게 심한 모욕을 당하면서도 알포이는 그저 멍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마법사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벗어나자, 알포이와 남아 있던 마법사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크크큭, 멍청한 놈들.”
그들은 떠난 자들이 혹시나 웃음소리를 듣고 돌아올까 봐 숨죽여 웃었다.
자칫하면 연기한 보람이 없어질지도 모른다.
“나만 죽을 수는 없지.”
“어디 한번 당해 보라지.”
자신들만 노예가 될 수는 없다는 마음 하나로 갖은 모욕을 당하면서도 꾹꾹 참아 왔다.
“크크큭, 여기 영주가 얼마나 무서운 새끼인데. 저놈들 이제 큰일 났다.”
“시건방진 놈들이, 여기가 어디인 줄 알고 저렇게 목에 핏대를 세워.”
“어휴, 난 조마조마했다니까? 계약하고 오면 일은 전부 저놈들한테 떠넘기자고.”
“그래,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지 쟤들도 알아야지.”
“하여튼 꼭 매를 맞아야 정신을 차려요.”
마지막 희망이었던 장로도 떠났다.
어차피 도망도 못 갈 바에는 인원이라도 좀 늘어나는 게 나았다. 그럼 조금이라도 더 잘 수 있지 않겠는가.
잔머리 굴리는 속도만 빨라진 마법사들이었다.
그들이 예상한 대로, 지셀은 항의하는 마법사들을 뚱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이제 이런 일 못 합니다!”
“제대로 대우해 주십시오! 안 그러면 마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턱을 쓰다듬던 지셀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내가 분명 알포이에게 관리 잘하라고 했는데……. 알포이가 안 말렸나?”
“말리긴 무슨! 여기 같이 오자고 해도 거절하더군요. 그 사람 완전 바보가 되었어요. 침을 질질 흘리면서 멍하니 앉아 있기나 하고! 매일 공사만 하니까 사람이 한심하게 변한 거 아닙니까!”
그러자 지셀은 이마를 부여잡고 킥킥 웃었다.
“하, 이 새끼 누가 마법사 아니랄까 봐, 머리 굴리는 것 보게. 웃기는 놈.”
“이보세요! 영주님! 우리 말이 말 같지 않습니까?”
지셀이 웃는 이유를 모르는 마법사들은 그가 자신들을 무시한다 느낀 듯 더 화를 냈다.
“아, 너무 흥분하지 마. 그래, 계속 공사에 투입할 거면 그냥 돌아가겠다, 그 말이지?”
“그렇습니다!”
“탑주님에게 얘기 안 들었어? 우리 영지 일에 무조건 협조하라고 했을 텐데. 공사 얘기도 분명 했을 거 아냐?”
“세상에 그렇다고 정말 마법사들을 공사판에 밀어 넣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어느 귀족도 감히 그렇게는 못 합니다!”
“마탑주님과 내가 충분히 상의한 뒤에 계약한 건데도? 이러면 계약 위반이야. 내가 룬스톤을 엄청나게 공급해 주고 있잖아. 그 혜택을 당신들도 보고 있고.”
“그건 알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영주님이라도 강제로 우리를 부릴 수는 없습니다! 앞으로 영지 방어와 연구에만 신경 쓰겠습니다.”
뻣뻣하게 고개를 세운 마법사 스무 명을 앞에 두고 지셀은 잠깐 고민했다.
지금 이들은 계약의 중요성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냥 돌려보내면 어차피 이들은 마탑주한테 큰 벌을 받을 것이다. 계약을 위반한 거니까.
“하아, 이거 마탑주님이 너무 설렁설렁 설명했나 보네. 마법사들의 자존심이란 참 어렵단 말이야.”
마탑에서 다시 교육받고 오게 하면 정신은 차리겠지만, 시간 낭비가 너무나 크다.
가뜩이나 할 일도 많은데 마법사가 빠지면 계획만 더 늦어질 것이다.
“흐음, 어떻게 할까?”
알포이가 마법사들을 지셀에게 보낸 의도는 뻔히 보였지만, 강제로 노예 삼는 건 그다지 끌리지 않았다.
비폭력 평화주의자로서 할 일이 아니니까.
그렇다고 전처럼 내기를 걸 시간도 없었다.
“후우. 마음은 아프지만, 시간이 없으니 별수 없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아, 잠시만 기다려 봐.”
지셀은 손짓으로 마법사들을 진정시키며 문밖을 향해 소리쳤다.
“어이, 거기 누구 몽둥이 있으면 하나만 가져다줘라.”
곧 문이 열리고 병사 한 명이 예쁘게 깎은 몽둥이를 들고 왔다.
나뭇결 하나하나에서 장인의 숨결이 느껴졌다.
지셀이 몽둥이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구경하는 꼴을 보고 마법사들이 얼굴을 와락 구기며 외쳤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이건 너무 무례하지 않습니까!”
“무례라니, 누가 무례한지 모르겠네. 그래,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지. 우리 내기 하나 할까?”
“뭐요?”
“동시에 덤벼. 나한테 상처 하나라도 내면 원하는 대로 해 주지. 대신 지면 계약서 하나에 서명해 줘야겠어.”
“그게 무슨?”
“아, 말 길어지는 거 귀찮으니까 빨리빨리 가자. 진짜 눈곱만한 생채기라도 내면 앞으로 편하게 지내게 해 줄게. 룬스톤도 달라는 대로 다 주고, 원하는 사람은 바로 마탑으로 돌려보내 주지.”
그 말에 마법사들이 눈을 빛냈다.
각자 높아 봐야 3서클 수준의 고만고만한 놈들이지만, 무려 스무 명이다.
아무리 서클이 낮아도 이 정도 숫자면 웬만한 기사도 순식간에 다져 버릴 수 있었다.
“그 말 후회하게 될 겁니다.”
마법사들은 모두 동시에 마력을 끌어올렸다.
가뜩이나 요즘 지셀에게 쌓인 게 많았는데, 이런 기회를 마다할 리가 없었다.
스무 명이나 되는 마법사들이 마력을 끌어올리자 주변에 있는 물건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셀은 그 모습을 보고도 방긋 미소 지을 뿐이었다.
“아, 노예는 더 안 늘리려고 했는데. 진짜 착하게 살고 싶은데 세상이 안 도와주네.”
마법사들이 내뿜는 마력의 흐름을 가르며 지셀의 몽둥이가 우아하게 움직였다.
그날, 영지에 노예 스무 명이 추가되었다.
* * *
총 스물여섯 명의 마법사들이 울면서 공사에 전념한 지도 며칠이 지났다.
클로드가 찾아와 지셀에게 보고를 올렸다.
“분부하신 약재는 모두 도착했습니다. 도구들도 준비가 끝났습니다.”
“좋아, 바로 시작하지.”
“도대체 뭘 만드시려고요? 특산품이란 게 뭐…… 저기 밀처럼 마나를 머금은 약초라도 됩니까?”
클로드는 진심으로 궁금해하며 물었다.
지셀이 넘겨준 설계도를 나름대로 뜯어보았지만, 무언가를 끓이고 분해하고 섞고 녹이고……. 아무리 봐도 연금술사들이 이상한 거 만들 때나 쓸 만한 조합이었다.
“귀족들이 좋아할 만한 물건이지. 미리 알면 재미없으니까 기대하고 있으라고.”
‘아오……. 이걸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클로드는 한마디 쏘아 주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지만 꾹 참았다.
지셀에게 된통 당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지금은 몸을 사리고 패턴을 지켜봐야 할 때였다.
‘확률적으로 사람이 매번 성공할 수는 없잖아. 경과를 좀 보다가 다시 내기할 각을 좀 잡아야겠다.’
도박 중독자들이 흔히 하는 착각이었다.
저번에 성공했으니 이번에는 실패할 확률이 높다고 믿는 것이다.
아카데미 수석 출신이어도 그 오류에 빠지는 건 마찬가지였다.
클로드는 얼른 다시 내기를 걸어서 노예 계약을 풀 생각에 빠져 혼자 히죽댔다.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흘겨보던 지셀은 혀를 쯧쯧 차며 바로 자리를 옮겼다.
‘약재 개발실’이라 이름 붙인 구역은 이름만 거창할 뿐 사실 별거 없었다.
한쪽에는 약재들이 가득 쌓여 있고, 반대쪽에는 지셀이 설계한 도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거 정말 연금술사들 작업실 같은데?”
지셀이 감탄하며 개발실을 둘러보았다.
실제로 그가 만들려는 건 미래에 마법사와 연금술사가 힘을 합쳐 개발한 제품이니, 연금술사의 작업실이라는 게 틀린 말도 아니었다.
“마법사들을 불러와.”
뜬금없이 끌려온 마법사들은 지셀의 명령에 따라 도구들에 마법진을 새기기 시작했다.
낯빛이 거무죽죽해진 알포이는 입을 앙다물고 마법진을 그려 나갔다.
몇 가지 마법진이 약초의 효과를 끌어내거나 불순물을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까지는 알아차렸지만, 그 이상은 알 수 있는 게 없었다.
‘어차피 물어봐도 또 말도 안 되는 소리나 해 대겠지.’
마법진까지 새긴 기구를 어디에 쓸 건지 궁금했지만 호기심을 꾹 참았다.
‘뭔지 절대 안 물어볼 거야. 두고 봐, 진짜 안 물어볼 거니까. 물어보면 내 손해라고.’
비교적 그리기 쉬운 마법진들이라 작업은 하루 만에 끝이 났다.
호기심은 마법사의 본능.
마력을 상당히 소모해 피곤함에 절어 돌아가려던 그때.
알포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묻고 말았다.
“이거 뭡니까? 뭐 만드는 거예요?”
“끝내주게 돈이 되는 물건. 맞혀 볼래? 맞히면 자유, 틀리면 10년 추가…….”
“됐습니다! 그런 거 안 합니다!”
알포이는 씩씩거리더니 혼자 욕을 중얼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첫 도박에서 진 충격이 큰가 보네. 저렇게 단호하게 거절하다니.”
지셀은 감탄 반, 아쉬움 반으로 혀를 차며 인부들을 불러 일을 시켰다.
어떤 이는 약재를 분류하고, 어떤 이는 물을 끓이고, 어떤 이는 불을 관리했다.
인부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른 채, 아무 생각 없이 맡은 일만 반복했다.
“영주님이 또 뭘 만드는 거지?”
“무슨 약 같은 걸 만들려나 봐.”
“우리야 뭘 알겠어.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거지. 몸에 좋은 거 아니겠어?”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가장 끝에 있는 도구에서 걸쭉한 검은 물이 흘러나왔다.
지셀은 그 물을 손가락에 찍어 냄새를 맡아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색이 아니었는데. 어디가 틀린 모양이네. 냄새도 안 좋고.”
한 번에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다.
전생에 주워들은 지식만 가지고 복잡한 과정을 구현하려니, 틀린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셀은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아예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새로운 걸 창조하는 것보다는 당연히 쉬울 테니까.
큰 틀은 확실히 알고 있으니, 세부적인 부분을 수정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셀은 며칠 동안 기억을 더듬으며 조금씩 약재의 배합 비율과 반응 시간을 조율하고 마법진을 조정했다.
몇 번의 실험 끝에 드디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오오, 완벽해. 그래, 바로 이거야.”
이전과는 달리 새하얀 추출물을 보고 지셀은 흐뭇하게 웃었다.
제품이 완성된 것도 기쁘지만, 더 좋은 점은 사실 따로 있었다.
전생에 이 제품은 델파인 공작가의 가장 큰 돈줄이었다.
지금쯤 어디에선가 이 제품을 열심히 개발하고 있을 놈들을 떠올리며 지셀은 코웃음을 쳤다.
“어디 한번 잘해 봐라, 새끼들아. 이미 늦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