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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111화 (111/269)

111화 뭘 또 만들어요? (2)

상식을 벗어난 행동은 때로 누구도 생각지 못한 새로운 돌파구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항상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영주는 농사로 한번 성공했다고 자신감에 차 있지만, 아마 성공할 확률은 그리 높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은 한다.

이성은 내기를 해서 판을 뒤집어야 한다고 소리치는데, 똑같은 상황에서 크게 당한 적 있어서 그런지 괜히 찝찝했다.

클로드는 몸을 사리며 알포이를 끌어들였다.

“알포이도 걸고 하면 안 될까요?”

“미친 새끼야! 나를 왜 걸어!”

“아니, 10년씩 나눠 걸자는 거지. 성공하면 자유, 패배해도 20년이 아니라 10년만 추가되는 거잖아. 난 준비가 되어 있는데 알포이 님의 생각은?”

“닥쳐! 이제 도박 안 할 거야!”

“이런, 생각보다 정신을 빨리 차렸네요. 역시 마법사라 그런가? 은근히 냉정해.”

클로드는 고개를 저으며 손을 들었다.

“이번에는 안 따라가렵니다. 판돈이 조금 부족해서 말이죠.”

솔직히 생각이 없는 건 아니지만, 20년은 좀 손이 떨린다.

그러자 지셀이 살짝 조건을 낮춰 줬다.

“그러면 10년은 어때? 인심 썼다.”

“아니요. 이번은 그냥 죽을래요.”

허세 부리기는.

클로드가 입 모양만으로 꿍얼거렸다. 하지만 끝까지 하겠다고 나서지는 않았다.

허세라고 생각하다 내기에서 진 게 바로 얼마 전이다.

지셀은 아쉬운지 혀를 차고는 새로운 서류를 건넸다.

“이것들도 같이 준비해.”

“하, 진짜 일 좀 그만 주세요.”

클로드는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서류를 보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름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뒷장에는 괴상한 시설의 설계도들까지.

“이건…… 뭡니까?”

“뭐긴 뭐야. 약초들이지. 북부 지역 상단들에 쫙 연락해서 다 쓸어 와. 그 뒤에 설계도는 대장장이한테 넘겨서 만들게 하고.”

“약초를 이렇게 많이 모아서 어디에 쓰시려고요?”

“아까부터 얘기했잖아. 특산품 만들 거라니까. 잔말 말고 준비나 잘해 놔라.”

지셀은 전생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상품을 만들 생각이었다.

제작법을 완벽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중요한 부분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완성했을 때 벌어들일 돈을 생각하면 개발에 드는 비용은 별것 아니었다.

물론 돈을 벌려면 클로드의 말대로 식량과 룬스톤을 파는 게 제일 쉬운 길이다.

하지만 룬스톤이라면 몰라도, 식량은 미래를 위해 비축해 둬야 했다.

귀족들은 흔한 물건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들에게 뭔가 팔아먹으려면 식량보다는 조금 더 특별한 물건이 필요했다.

“에휴, 이상한 약 만들어서 팔면 돌팔이라고 욕만 먹을 텐데.”

하지만 지셀의 계획을 알 리 없는 클로드는 한숨만 내쉬며 서류를 넘겨 보았다.

대부분 저번 계획에서 빠졌던 영지 개선 방안이거나, 기존 계획을 보강한 구상 따위였다.

‘……도망가고 싶다.’

하지만 나는 자유롭지 못한 노예지.

클로드는 고개를 푹 떨구었다. 앞으로 혹사당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지셀은 알포이와 마법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희는 인원을 적당히 나눠서, 수로를 파고 상수도와 저수조 시설을 만드는 지역에 들어가라. 오래된 우물이 마르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수질이 나쁜 곳에는 정화 마법도 걸어 놔. 전부 새로 정비할 거니까. 작업 책임자는…… 알포이다.”

“거기는…… 왜요?”

“왜긴. 인부들이 일하려면 길을 막은 바위 같은 건 마법으로 부숴 놔야지. 겸사겸사 땅도 같이 파고.”

토목 공사는 인력도 많이 들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작업이다.

마법사들이 힘을 쓴다면 공사 시간을 엄청나게 단축할 수가 있었다.

당연히 알포이는 반발했다.

“우리 마법사입니다! 노동자도 아닌 우리가 그런 걸 왜 합니까! 그런 건 그냥 인부들 시키세요!”

그들은 이전에도 몇 번 대규모 공사에 끌려가 힘을 쓴 적이 있었다.

그때도 강압적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겉으로는 협조를 구하는 시늉이라도 했는데……. 이제는 대놓고 부려 먹겠단다.

알포이의 항의에 지셀은 심드렁한 얼굴로 답했다.

“그러면 뭐 우아하게 구경이나 하려고 그랬어? 10년 동안 열심히 일하기로 했잖아. 이제부터 적극적으로 영지 건설에 동참해.”

“안 해! 난 위대한 마법사라고! 감히 마탑의 후계자인 나를 시골 영주 따위가!”

“그냥 노예 시장에 팔아 버릴까? 계약서도 있으니 법으로도 문제없고……. 마법사 노예는 희귀해서 노예 상인들이 좋아할 거 같은데. 소문나면 웃기겠네. 마탑의 후계자를 노예로 부릴 수 있다고? 아, 이건 못 참지.”

“죄송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알포이는 지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허리를 직각으로 숙였다. 놀라울 정도로 빠른 태세 전환이었다.

‘으으으, 두고 보자. 내가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줄 알아?’

자괴감이 치솟아 뒷골까지 짜릿했다. 알포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이를 갈았다.

‘곧 장로님이 오신다. 내가 당한 일을 아시면 네놈을 가만두지 않으실 거다!’

마탑의 지부는 거의 다 완성되었다.

곧 지부장을 맡을 장로와 함께 마법사들이 추가로 도착할 것이다. 알포이는 장로에게 부탁해 노예 계약을 무를 생각이었다.

‘그 전까지만 참는다. 아오!’

일을 잔뜩 받은 클로드와 마법사들은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기도 전에 알포이는 클로드에게 삿대질을 해 댔다.

“너 때문이야! 그딴 내기를 해서 지니까 이렇게 된 거 아냐! 똑바로 알지도 못하면서 왜 내기를 해? 아카데미 수석이라는 말도 거짓말이지? 이 엉터리 도박쟁이야!”

클로드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비아냥거렸다.

“그게 왜 나 때문이야? 내가 당신네더러 내기하라고 협박하길 했나, 애원하길 했나.”

“네놈이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구니까 당연히 믿고 간 거라고!”

“누가 믿으랬어? 아니 애초에, 저건 정상적인 농사법도 아니잖아. 마법을 같이 썼는데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당신들이야말로 마법사 맞아?”

“뭐? 지금 이게 다 우리 탓이라는 소리냐?”

“그럼 아니야? 마법사면 그런 것도 금방 알아냈어야지. 당신들이 중간에 눈치만 챘어도 어떻게든 무승부로 만들었을 텐데. 어휴, 엉터리 마법사.”

“엉터리? 이 새끼가 지금 마탑의 마법사한테 건방지게!”

“네, 다음 노예. 난 그래도 아직 이 영지의 총관이거든?”

“총관은 마법 맞아도 안 죽는대냐?”

“어쭈, 식충이들 주제에 지금 협박하는 거야? 해보시든가.”

“뭐? 식충이? 이 새끼가!”

알포이가 부들부들 떨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뒤에 있던 마법사들도 클로드를 노려보며 같이 마력을 끌어올렸다.

“어이쿠, 진짜로 마법 쓰게? 웬디, 뭐 해! 쟤들이 나 괴롭히잖아!”

웬디가 혀를 차며 단검을 꺼냈다. 클로드는 후다닥 그녀 뒤로 물러섰다.

“드루와! 드루와, 이 새끼들아!”

양측이 서로 노려보며 빈틈을 찾는 일촉즉발의 상황.

영지를 둘러보려고 느긋하게 나오던 지셀이 그 꼴을 보고 혀를 찼다.

“쯧쯧,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쌈박질이나 하고, 잘하는 짓이다. 폭력 쓰지 말고 대화로 해결해라, 대화로. 내가 주먹 들 일 없게 해. 비폭력 평화주의를 지향할 수 있게 도와줘라, 좀.”

지셀의 말에 양측 다 표정을 구기며 뒤로 물러섰다.

들어도 영주 놈에게 저런 말을 듣다니 억울해서 눈물이 나올 거 같았다.

“뭐 해? 한가해? 시간이 남아돌아? 일거리가 부족했나 보지?”

“지금 갑니다, 가요!”

클로드와 마법사들은 지셀이 또 무슨 일거리를 던져 줄까 봐 깜짝 놀라 후다닥 자리를 피했다.

지셀은 그들의 의기소침한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고는 영지 순행에 나섰다.

* * *

지셀은 밀 재배에 성공하고도, 다른 영지에서 식량을 사 오는 걸 멈추지 않았다.

어찌나 식량을 박박 긁어모으는지 가신들도 기겁을 할 지경이었다. 마치 굶어 죽은 유령이라도 하나 달라붙은 것만 같았다.

이런 상황이니 밀 수확까지 끝나면 펜리스 영지에는 식량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쌓일 것이다.

“이제 먹고살 걱정은 아예 안 해도 돼. 영주님이 이렇게까지 해 주시는데 조금만 더 힘내 보자고.”

“겨울인데도 이렇게 자라다니, 신기해 죽겠어. 우리 영주님은 모르는 게 없나 봐.”

“3개월이면 수확할 수 있다는데? 이 엄청난 양을 1년에 네 번이나 수확할 수 있다니.”

영지민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지셀을 칭송하며 맡은 일에 전념했다.

영주가 계속 돈을 푸니 일거리를 노리는 사람도 끊임없이 모여들었다.

영지 전체에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활력이 돌았다. 펜리스 영지는 빠르게 발전해 갔다.

인부들이 게으름 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해서 마탑의 지부도 금세 완성되었다.

곧 적염의 마탑 다섯 장로 중 한 사람이 스무 명의 마법사들을 이끌고 펜리스 영지에 찾아왔다.

장로는 지셀을 보자 반갑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허허, 잘 지내셨습니까? 아주 신수가 훤해 보이십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반말을 찍찍 갈기던 장로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존대해 주었다.

펜리스 영지에서 지내게 된 이상 영지의 주인에게 기본적인 예의를 지켜야 했다.

지셀도 마탑의 장로를 반갑게 맞이했다.

마법사들은 영지를 방어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만, 역시 대규모 공사에 가장 큰 힘이 되었다.

“장로님이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허허, 지부를 맡아서 이끌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룬스톤 거래도 관리해야 하고요.”

장로의 안색은 조금 어두웠다.

사실 이 문제로 마탑에서도 말이 많았다. 가겠다는 장로들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한 지부를 책임지는 중책이라고 하더라도, 미쳤다고 이런 쓰레기 같은 곳에 박혀 있기를 바라겠는가.

결국 누가 갈지 제비뽑기로 정했는데, 당첨되어 온 장로는 우울증 초기 증세까지 보이고 있었다.

그의 불편한 심정을 눈치챈 지셀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

“굳이 그러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곳은…….”

그때 그의 말을 끊고 누군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왔다.

“으아아! 장로님! 장로님! 저 알포이입니다!”

“음? 알포이?”

장로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오만하고 시건방진 마탑주의 후계자가 이렇게 자신을 반갑게 맞아 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허겁지겁 달려온 알포이가 의아해하는 장로에게 재빨리 외쳤다.

“장로님! 저 좀 살려 주십시오! 이 영주 놈이 저에게 노예……!”

지셀 옆에 있던 벨린다가 순식간에 다가가 알포이의 머리를 잡고 목을 돌려 버렸다.

빠각!

목이 돌아간 충격으로 알포이는 말을 하다 말고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아, 아니! 이게 지금 무슨 일……!”

그때, 지셀이 장로의 등을 살짝 감싸며 자연스럽게 알포이를 가리고 섰다.

“하하하, 요새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 좀 피곤한 모양입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목이 돌아갔…….”

“괜찮습니다. 요새 이런저런 연구를 하고 있는데 뭔가 잘못됐는지 이상한 행동을 자주 합니다. 그때마다 기절시켜 달라고 알포이가 먼저 부탁한 겁니다. 어이, 뭐 해? 어서 데리고 가.”

벨린다가 알포이를 들고 후다닥 사라졌다.

무슨 상황인지 몰라 눈만 끔뻑이는 장로에게 지셀이 은근하게 속삭였다.

“장로님 같은 분이 이런 시골에서 지내시는 건 조금 그렇지 않습니까? 아직은 부족한 게 많은 영지라서요.”

“그건 그렇지만…….”

“차라리 지부장은 알포이로 하고 장로님은 가끔 와서 확인만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마법사가 스무 명이나 늘어났는데 별일 있겠습니까?”

5서클 마법사가 있으면 확실히 영지를 지키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딱 그뿐이다.

어차피 지식수준도 바네사가 훨씬 높은데, 의욕도 없는 자를 장로라고 우대하느니 알포이를 책임자로 두고 마음껏 부려 먹는 게 낫다.

“아무래도 영지가 요새 시끄러워서요. 이런 상태로는 장로님을 모시기에 부족함이 많아요. 제 마음이 안 좋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돌아가시지요.”

“으음, 그래도 마탑에서 결정한 일인데…….”

“그거야 제가 나중에 직접 찾아뵙고 탑주님께 잘 말씀드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나머지는 저에게 맡기시고 그냥 돌아가시지요. 지금 당장.”

장로는 뭔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말 자체는 공손하지만, 분위기는 뭔가 협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친절한 듯하지만 묘하게 번들거리는 지셀의 눈빛이 ‘돌아가지 않으면 상당히 피곤해질 거’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그, 그럴까요? 그럼 그냥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것 참…….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네.”

“네, 이번에 캐 온 룬스톤 일부를 팔 테니 그거 들고 돌아가시죠. 약속대로 시세만 받겠습니다. 그런데 요새 조금 오른 거 아시죠?”

진홍의 마탑이 사재기를 해서 그런지 룬스톤 가격은 자꾸 올라가고 있었다.

그나마 적염의 마탑은 지셀 덕분에 겨우 숨을 돌리고 있었다.

룬스톤을 다른 데에서 구해 오기 전까지는 지셀이 하라는 대로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안 그래도 어떻게 룬스톤 얘기를 꺼내나 생각하던 장로가 화색을 띠었다.

“좋습니다. 그러면 탑주님께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권한으로 알포이에게 지부장의 자리를 넘기도록 하죠.”

어차피 거부권이 없다.

장로는 조건을 수락하고 허겁지겁 돌아갔다.

그간의 경험을 통해 말이 안 통하는 지셀과 오래 얘기를 나눠 봐야 손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안 그래도 오기 싫었는데 이렇게 가라고 등을 떠밀어 주니 장로 입장에서는 잘된 일이었다.

“후, 이제 얼추 숫자는 맞췄군.”

장로를 보낸 지셀은 미소 지었다.

총 스물여섯 명의 마법사가 지부를 핑계로 영지에 계속 머물게 되었다. 어지간한 대영주들도 보유하기 힘든 숫자다.

각자 경지는 높지 않지만, 오히려 그 편이 여기저기 써먹기 좋다.

새로 온 마법사들은 장로가 갑자기 떠나니 조금 당황했지만, 별걱정은 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북부 제일의 마탑에서 온 마법사라는 자신감 덕분이었다.

오만한 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마법사들을 보니 지셀은 내심 헛웃음이 났다.

하지만 속내를 감추고 상냥하게 웃으며 두 팔 벌려 환영했다.

“먼 길 잘 오셨습니다. 환영합니다. 앞으로 영지를 위해 잘 부탁드립니다.”

영주까지 나와서 환대할 만큼 대접받는다는 생각에 마법사들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한적한 시골에서 휴양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왔겠지만, 지셀의 생각은 달랐다.

‘공사가 더 빨리 끝나겠네.’

이들은 영지의 좋은 노동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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