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언제든지 도전해도 좋다. (2)
앞장서 가는 지셀의 뒤를 따르던 클로드가 손톱을 깨물었다.
‘말도 안 돼. 진짜 싹이 났다고?’
지셀이 내세운 논리 자체는 꽤 그럴듯해서 솔직히 조금 찝찝하기는 했다.
농사를 지어 본 적도, 농업 기술을 연구한 적도, 마법을 배운 적도 없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 안심하고 질렀는데!
‘아, 안 돼. 진짜라면 나는 이제 찍소리도 못하는 노예가 된다! 관리가 잘못 본 거여야 해!’
그는 불안한 마음을 숨기고 허세를 부리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성에서 가장 가까운 개간지에는 이미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었다.
소문이 금세 퍼졌는지 다른 지역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마법사들까지 와 있었다.
한데 모여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던 사람들은 영주가 나타나자 주춤주춤 물러났다.
지셀은 그들이 터 준 길을 지나 밭 가까이 다가갔다.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 멋진데?”
경작지를 덮은 푸른 새싹들을 본 지셀이 탄성을 내뱉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오와 열을 맞춰 솟아 있는 밀의 싹이 꼭 군대처럼 보였다.
흐뭇하게 웃는 지셀과 달리,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경악에 찬 눈빛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던 땅에서 이렇게 금방 싹이 트다니!
알포이도 그 곁에서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주먹을 꾹 쥐었다.
깨달음을 얻어 편해졌던 게 언제였냐는 듯, 그의 마음에는 풍랑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알포이는 엄한 새싹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화를 냈다.
“니가 왜 거기서 나와!”
안 된다. 이건 꿈이다. 꿈이어야만 한다.
노예라니! 마탑의 후계자인 자신이 10년간 무급 노예라니!
그의 몸을 감돌던 마력이 안정되지 못하고 폭주하기 시작했다.
며칠 전 얻은 깨달음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을 버티지 못한 것이다.
높은 자존심에 무급 노예로 지내게 된 충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부들부들 떨던 알포이는 급기야 피를 토하며 엎어졌다.
“쿨럭!”
지셀이 황당해하며 혀를 찼다.
“아니, 이놈은 또 왜 이 지랄이야? 이게 마나 역류까지 일어날 일인가. 깨달음 얻은 지 며칠이나 됐다고……. 하여간 신기한 놈이야. 거기 너희들, 빨리 이놈 데리고 가서 안정을 취하게 해라. 소중한 노예인데 아프면 안 되지.”
쓰러진 알포이는 주변 사람들에 의해 급하게 병상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알포이가 받은 충격은 클로드의 절망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었다.
‘아니, 씨…… 이게 되네?’
그가 지금껏 믿어 왔던 모든 상식이 파괴되는 순간이었다.
‘생산량이 복사가 된다고? 이거를? 영주님이?’
대륙 어디에서도 이런 방법으로 농사를 한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이게 다 지셀이 스스로 생각해 낸 방법이라는 뜻이다.
생각이야 누구든 할 수 있지만, 그게 진짜로 효과가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클로드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지셀이 이렇게 단번에 성공했다는 사실 자체를 믿을 수 없었다.
“내가 졌다고? 세이론 왕립 아카데미 수석 출신인 내가? 에이, 그럴 리가 있나!”
클로드는 급기야 현실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요즘 일을 너무 열심히 해서 기가 허해졌나 봐. 헛것이 다 보이네. 안나 보고 싶다…….”
“이런, 클로드!”
지셀은 넋이 나간 클로드의 양어깨를 붙잡고 다급하게 흔들었다.
“괜찮아? 정신 차려! 너는 이런 데서 끝날 놈이 아니야!”
“……예?”
“앞으로 10년 동안 일해야 하는데, 벌써 정신을 놓으면 어떡해!”
“…….”
……살짝 감동할 뻔한 게 더 빡친다.
지셀이 히죽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확인 사살이나 다름없는 발언에 클로드는 충격을 더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거품을 문 채 기절해 버렸다.
다행히 옆에 있던 웬디가 가볍게 그의 몸을 잡았다.
“오늘은 푹 쉬게 해. 내일부터 훨씬 바빠질 테니까. 시킬 일이 정말 많거든.”
“알겠습니다.”
웬디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클로드를 질질 끌고 갔다.
“그럼 다른 곳도 한번 둘러볼까?”
지셀은 휘파람을 불며 느긋하게 영지를 돌아보았다.
파종한 시각이 달라 밭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모든 개간지에서 싹이 났거나 날 기미가 보였다.
웃으며 성으로 돌아갈 만큼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전생…… 미래의 지식을 훔쳐 온 거지만 어쨌든 가장 중요한 식량 생산에 성공했다.
이제 이 영지는 엄청난 속도로 발전할 것이다. 식량이야말로 영지 발전의 근간이니까.
“도련님!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어떻게 알았어요?”
“으음, 뭐 종자가 마나를 흡수해서 튼튼해지면 강한 지력도 버틸 수 있게 되는 거지.”
벨린다가 꼬치꼬치 캐물었지만 지셀은 대충 얼버무리며 넘어갔다.
사실 지셀도 원리를 정확히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이건 자신이 아니라 미래의 마법사와 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만들어 낸 방법이었으니까.
그는 단지 그 결과만 알 뿐이다.
설명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다들 그러려니 하고들 넘어갔다.
가문의 비전이거나 설명해도 이해할 수 없을 거라 여긴 것이다.
애초에 원리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정말로 식량 생산량이 늘어나게 되었다는 결과였다.
* * *
지셀은 밀이 잘 크는 것을 확인한 뒤부터 다른 일에 집중했다.
그에게는 이번 일도 장기 계획의 일부, 거쳐 가야 하는 과정일 뿐이었다.
클로드와의 내기는 소소한 덤이고.
하지만 영지민들에게는 달랐다. 이번 일은 그들의 삶을 바꿀 중요한 사건이었다.
“정말 우리 영지에서 이렇게 작물이 잘 자란다고?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네.”
“우리 영주님은 하늘이 내리신 분이야! 농사의 신에게 축복을 받으신 거라고! 무조건 믿고 따르자!”
영지민들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펜리스 영지 전역에서 영주에 대한 칭송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사실 그동안은 영주가 한껏 베푸는 것을 보면서도 마음 한쪽에 불안감이 남아 있었다.
영지 시설을 뜯어고치는 건 좋지만, 그것도 결국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언젠가는 영주님의 돈이 떨어지지 않을까? 다시 예전처럼 가난해지지 않을까? 그러면 다른 영주들처럼 우릴 수탈하지 않을까?
영지에 돈 나올 구석이 없으니 모든 게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나이를 먹은 노인들은 개간지를 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제 굶지 않아도 되겠구나. 내 자식, 손자들은 이제 안 굶어도 돼. 흐으윽.”
“영주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영주님을 잘 모셔야 한다. 영주님만이 우리의 희망이다.”
굶주리며 살아온 지난 시절이 거짓이었던 것 같다. 새로 온 영주는 몇 달 만에 영지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영지민들의 충성심이 날이 갈수록 하늘을 찔렀다.
지셀은 대전에 가신들을 모아 놓고 거만하게 앉아 잘난 척했다.
“내가 말했지? 된다고 했잖아. 또 나랑 내기하고 싶은 사람은 언제든지 도전해도 좋다.”
가신들은 모두 입만 꾹 닫고 아무런 말을 못 했다.
분명 상식을 벗어난 일인데, 실제로 결과가 나오니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당분간은 얌전히 영주의 말을 들을 수밖에.
지셀은 우거지상을 한 가신들의 표정에 콧방귀를 뀌고는 길리언을 돌아보았다.
“아직 싹이 자라는 중이니 관리를 잘해야겠지? 야생 동물이나 미친놈들이 짓밟지 못하게 개간지에 병력을 배치해.”
그러자 길리언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미 영지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교대로 지키고 있습니다.”
“오, 그래?”
“그들도 필사적인 모양입니다.”
“그거 좋네. 무언가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은 강한 법이지.”
영지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개간지를 지키는 건 정말 좋은 현상이다.
그 땅이 영지의 희망이라는 걸 이제 모두가 알고 있다는 뜻이니까.
지셀은 속 시원한 웃음을 지었다.
자신만 확신하고 있던 희망이, 드디어 영지 곳곳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 * *
“그래, 땅에 묻어 놓았던 룬스톤을 한꺼번에 터뜨렸다 이거지? 그걸 주도한 놈이 지셀 페르디움……. 이제 펜리스 남작이군.”
데스몬드의 백작, 해럴드가 보고서를 들춰 보며 중얼거렸다.
피곤한 듯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얼굴도 예전과 다르게 무척이나 핼쑥했다.
머리카락은 희게 세었고, 눈 밑은 퀭한 것이 잠도 제대로 못 자는 모양이었다.
“그렇습니다.”
“……미친 새끼.”
처음에는 해럴드도 보고를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페르디움에서 흘러나온 소문도 그렇고, 공작가에서까지 그게 사실이라고 검증하니 이제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믿는 것과는 별개로, 여전히 지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깟 페르디움을 지키겠다고 영지 전체를 팔아도 못 살 만큼의 룬스톤을 터트리다니.
“상대가 산수도 못 하는 미친놈인 줄은 몰랐군. 하긴, 그러니 내가 예측을 못 했겠지.”
어쩐지 이름을 듣는 순간부터 찝찝하더라니.
해럴드는 혀를 차며 부관을 돌아보았다.
“그놈이 지금 뭘 하고 있다고?”
“토지 생산량을 늘리겠다면서 영지를 헤집고 있습니다. 기반 시설을 새로 짓거나 고치기도 하고요. 영지를 개발하기 위해 엄청난 돈을 쓰고 있습니다.”
“……토지 생산량을 늘린다고?”
해럴드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디갈드가 전쟁에 패배하면서 그 영지는 모두 페르디움에 귀속되었다.
그중 절반을 지셀이란 놈이 가져갔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지셀이 펜리스 영지를 뒤엎고 있다는 소식은 훨씬 더 당황스러웠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지? 그 지역 땅을 경작지로 쓸 수 없다는 건 놈도 알고 있을 텐데.”
“생산량이 너무 적으니 그러는 거 아니겠습니까? 관리만 잘한다면 지금보다는 나아지긴 할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과한데. 룬스톤으로 벌어들인 돈을 죄다 밀어 넣은 수준이군.”
그러자 부관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젊은 나이에 처음 받은 영지니까요. 남들이 뭐라 하든 이것저것 시도해 보고 싶을 겁니다. 꼭 직접 해 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망나니였던 과거를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닙니다.”
해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헛된 꿈에 젖어 영지를 발전시키겠다고 돈을 잔뜩 쓰는 사람은 지셀 외에도 많았다.
보통 제대로 후계자 교육을 못 받은 초보 영주들이 그런 실수를 하곤 했다.
“고작 함정 하나로 전쟁에서 이겼다고 자만하는 모양이군.”
해럴드는 지셀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니, 인정할 수 없었다.
사람이 갑자기 달라졌다고 해도, 망나니로 살던 과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나.
해럴드의 드높은 자존심과 지셀에 대한 편견이 그의 눈을 가렸다.
지셀의 과거를 낱낱이 조사했던 것이 오히려 그에겐 악수가 된 셈이었다.
해럴드에게 지셀은 그저 운이 좋아 살아남은 애송이일 뿐.
다음번에 반드시 목을 베면 그만이었다.
“잘됐다. 어차피 당분간 저기 신경 쓸 여력도 없는데, 알아서 자멸해 주면 이쪽은 환영이지. 그냥 내버려 둬라.”
“알겠습니다.”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페르디움 공방전에서 패배한 이후 그는 공작에게 엄청난 질책을 들었다.
그간 세운 공이 아니었으면 목이 날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번 일은 절대 실패해서는 안 된다.
페르디움 영지를 차지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었다.
“북부의 일을 마무리할 때가 왔다.”
현재 왕국은 북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델파인 공작이 의도한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반란을 완벽하게 성공시키려면 북부도 평정해야만 했다.
해럴드는 날카로운 눈으로 곁에 모인 참모들을 둘러보았다.
“회유되지 않은 영지는 몇 남지 않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밀어붙여라. 그리고 특히 아멜리아의 반란 준비를 더 서둘러라. 레이폴드의 기사단장을 상대하는 방법은 따로 고민해 보겠다.”
레이폴드의 기사단장은 북부의 최강자, 북부제일검이라 불리는 남자다.
그자를 상대하기 위해 빅토르를 키웠건만……. 지난 전쟁 때 죽었으니 다른 방안을 찾아야 했다.
‘지셀……. 그놈만 아니었어도. 레이폴드를 정리하고 난 뒤에는 네 차례다. 목을 씻고 기다려라.’
지셀만 떠올리면 이가 갈렸지만 당장은 그쪽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공작가와 해럴드는 지셀을 처리하는 것보다 레이폴드를 손에 넣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계획을 변경했다.
지셀이 아무리 발버둥 쳐 봐야 공작가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쓸어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들은 펜리스가 어떻게 발전할지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