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언제든지 도전해도 좋다. (1)
용병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마수의 숲이라면 룬스톤을 캐러 가는 것부터 떠오르지만, 그렇다기에는 수레가 너무나 많다.
곡괭이가 아니라 삽을 챙기는 것도 이상했다.
“준비 다 됐으면 출발해!”
하지만 언제 지셀이 구구절절 설명해 준 적이 있었던가.
용병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항상 그랬듯 앞서 달려 나가는 지셀을 따라가는 것뿐이었다.
바람처럼 달린 그들은 이틀 만에 페르디움에 도착했다.
마수의 숲을 지키던 스코반은 멀리서 달려오는 지셀 일행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가끔 룬스톤을 캐러 온 적은 있지만 수레를 저렇게 많이 끌고 온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싹 다 쓸어 가려고 그러시나?”
하지만 그의 예상은 바로 빗나갔다.
지셀과 용병들은 룬스톤이 있는 지역이 아니라 엉뚱한 방향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스코반은 화들짝 놀라며 소리 질렀다.
“대공자님! 아니, 남작님! 지금 어디 가십니까! 거기는 길이 아닙니다!”
지셀이 기존에 낸 길은 새로 도로를 깔고 양옆에 목책을 세워 두었다.
하지만 개척되지 않은 지역에는 여전히 몬스터가 우글거린다.
스코반이 놀라 쫓아갔지만 이미 지셀과 용병들은 숲속으로 사라진 후였다.
“와, 미치겠네. 갑자기 왜 저래?”
그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한탄했다. 곁에 있던 리카르도가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요. 왜 저기로 들어가죠? 뭐 다른 거 발견한 거 아닙니까?”
“모르겠다. 저분 생각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냐. 그냥 모른 척하는 게 제일 편하다.”
스코반이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저를 욕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지셀은 질풍처럼 말을 달려 마수의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깊이 들어갈수록 우거진 나무들이 진로를 방해했다.
지셀은 속도를 줄일 생각도 하지 않고 뒤따라오는 용병들에게 외쳤다.
“수레를 끊어라!”
지셀의 명령에 말을 타고 달리던 이들은 수레를 바로 끊었다.
움직임이 조금 자유로워진 군마들이 지셀의 뒤를 따라붙었다.
조금 더 진입하자 숲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나무, 디루스 엔트들이 보였다.
이미 모두가 경험해 본 몬스터다.
지셀은 얌체처럼 나무인 척하고 있는 그것들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뚫어라!”
“와씨! 갑자기 이게 뭐야!”
용병들은 욕을 내뱉으면서도 창을 들어 올렸다.
마수의 숲과 전쟁을 겪었고, 그간 훈련을 쉬지 않았던 덕분에 지셀의 지휘에 즉각 반응할 수 있었다.
지셀 일행은 숲 사이사이에 있는 장애물들을 절묘하게 피하며 그대로 돌격을 감행했다.
콰아아아아앙!
쿠오오오오오!
디루스 엔트들은 고통과 경악이 섞인 비명을 내질렀다.
디루스 엔트는 천천히 다가오는 사냥감을 기습하는 방식으로 공격하는 몬스터였다.
그런데 지셀 일행이 빠르게 달려와 창을 꽂아 넣으니 대응할 방도가 없었다.
가속력이 더해진 창은 강력한 외피를 뚫고 깊숙하게 박혔다.
처음 마수의 숲에 들어왔을 때 무기도 제대로 겨누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용병들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히이이잉!
하지만 피해를 입은 건 디루스 엔트들만이 아니었다.
용병들은 창을 꽂을 때의 충격을 완전히 흘려 내지는 못했다.
말들이 울부짖는 소리와 함께, 몇몇 용병들이 말에서 떨어졌다.
간신히 말 위에서 버틴 자 중에도 무기를 놓친 사람이 꽤 있었다.
앞을 가로막던 디루스 엔트의 몸을 산산조각 낸 지셀이 크게 외쳤다.
“말이 죽으면 연병장 500바퀴다! 셋이서 하나를 상대해라!”
“아니, 대장! 미리 말이라도 좀 해 주지!”
한 용병이 억울해하며 투덜거리자 지셀이 크게 웃었다.
“적이 미리 말해 주고 찾아오냐? 언제나 긴장해야지!”
콰아아앙!
지셀은 말하는 와중에도 디루스 엔트를 하나씩 박살 냈다.
예전에도 지셀은 디루스 엔트들 대부분을 혼자 쓸어버렸다.
마나의 양만 해도 그때보다 두 배 이상 늘어났는데, 디루스 엔트 따위가 지셀의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새로운 힘을 얻고 몸이 근질근질하던 차였다.
지셀은 아예 창까지 집어 던지고 말에서 뛰어내렸다.
바로 2단계까지 코어를 활성화하자 지셀의 눈이 붉게 빛났다.
콰앙! 콰아앙!
쿠오오오오!
주먹질 단 두 번 만에 디루스 엔트의 몸이 세 조각으로 쪼개졌다.
지셀은 사방을 휘젓고 다니며 용병들이 방어진을 짜서 잡아 두고 있던 몬스터들을 학살했다.
쿠오오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지막 남은 디루스 엔트까지 모두 쓰러졌다.
사실 용병들이 해치운 건 몇 되지 않고, 대부분은 지셀과 길리언이 처리했지만…….
마나 연공법이야 나중에 제대로 가르치면 될 일.
실전을 통한 훈련이라는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다.
지셀이 주변을 한번 슥 훑어본 뒤 말했다.
“죽은 사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죽은 자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면 말이 죽은 자들은 옆으로 열외.”
스무 명 정도의 용병이 울상을 지으며 대열에서 빠져나왔다.
솔직히 이런 난전에서 말을 지키면서 싸우라니, 말도 안 되는 명령이었다.
그렇지만 실제로 말이 멀쩡한 사람도 많으니 항의하기도 힘들었다.
“영지로 돌아가면 연병장을 500바퀴 돌고 특별 훈련에 참여해라. 지금은 일단 페르디움에서 말을 빌려 와. 오는 길에 아까 놓고 온 수레들도 모두 끌고 오도록. 나머지는 그동안 휴식을 취한다.”
잠시 후, 말을 잃은 용병들이 말과 수레를 끌고 돌아왔다.
지셀은 용병들에게 각자 수레를 하나씩 맡기고 자신도 삽 하나를 챙겨 들었다.
“이제부터 이 주변의 흙을 수레에 퍼 담는다. 수레가 가득 찰 때까지.”
용병들은 대놓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기껏 마수의 숲에 와서 전투까지 했는데 전리품이 겨우 흙이라고?
항상 그랬듯 이번에도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었지만, 익숙해진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용병들이 수레에 흙을 퍼 담는 모습을 보던 길리언이 지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영주님, 흙은 왜 담아 가는 겁니까?”
지셀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마수의 숲은 아주 오랫동안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았잖아. 그러니 지력이 살아 있을 거야.”
“그렇습니까?”
지셀은 바닥에서 흙을 한 움큼 쥐어 들었다. 흙은 검은색에 가까울 정도로 짙은 색을 띠고 있었다.
“이것 봐. 우리 영지 흙하고는 색부터 다르잖아?”
“그냥 위치가 달라서 그런 것 아닙니까?”
“아니지. 일단 숲이 오래된 만큼 낙엽 같은 것도 계속 쌓였을 거고……. 몬스터의 사체도 썩고 나면 영양분이 될 테니, 계속 농사를 지어 온 땅보다 비옥할 게 분명해.”
“허어…….”
길리언은 조그맣게 감탄했다.
지셀이 하는 말 자체는 그다지 새롭지 않다.
하지만 그 말이 지셀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싸움만 잘하는 줄 알았는데, 이런 건 도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이 숲은 생명력이 엄청나. 풀과 나무들, 몬스터 크기만 봐도 감이 오지. 여기 흙을 파서 개간지 흙과 섞으면 부족한 지력을 채울 수 있을 거야. 나중에 시간 나면 이곳에 경작지를 만들어도 되고.”
두 사람이 대화하는 사이 용병들이 수레에 흙을 가득 채웠다며 다가왔다. 다들 힘이 좋아서 작업이 금방 끝이 났다.
지셀과 용병들은 다시 말에 수레를 묶고 마수의 숲을 떠났다.
두두두두두!
흙을 잔뜩 싣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며 스코반과 리카르도는 눈만 껌뻑거렸다.
“비싼 것도 아니고 그냥 흙을 왜 저렇게 많이 퍼 가는 걸까?”
“생각하지 말자면서요.”
“……그러자.”
* * *
지셀은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인부들을 소집했다.
“자, 이걸 새로 만든 개간지에 골고루 섞어라! 기존 흙과 새 흙의 비율은 일 대 이로 한다.”
인부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어디서 가져온 흙이기에 개간지에 섞으라는 걸까?
한 노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흙이 무슨 흙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아주 오래된 흙이야. 그러니까…… 퇴비 같은 거지.”
퇴비라는 말에 노인은 걱정스러운 듯 미간을 좁혔다.
“으음, 영주님. 비료도 이미 여러 번 뿌려 보았습니다.”
이곳의 흙은 거칠고 너무 메말라서 아예 작물이 자랄 수가 없었다.
그걸 해결하기 위해 몇 번이나 분뇨를 뿌려 봤지만, 그것도 큰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너무 많이 뿌리면 땅에 흡수되지 않고 그냥 썩어 버리기 때문에 양을 늘릴 수도 없었다.
“거기다…… 흙의 두 배나 되는 퇴비를 섞는다니요. 너무 많습니다.”
“아니야, 그 정도가 딱 좋아.”
“땅을 따뜻하고 촉촉하게 하는 마법도 걸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이 정도로 퇴비를 많이 섞으면 작물까지 죄다 썩어 버릴 겁니다.”
“괜찮아. 그 정도로 강력해야 잡초가 못 자라고 벌레들도 안 올 거 아니야?”
“아니, 그게…….”
지셀을 설득하던 노인은 말문이 막혀 한숨을 내쉬었다.
잡초가 못 자랄 정도인데 작물이 어떻게 자란다는 말인가?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내세우며 괜찮다고만 하니 인부들은 황당할 따름이었다.
지셀이 영지에 온 뒤 벌인 일들은 대부분 다 그럴듯하고 필요한 일들이었다.
그런데 유독 농사 쪽에서만 이상한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그래도 영주가 시키는 일이다. 돈도 많이 주니 안 할 수가 없었다.
“그, 그럼 바로 작업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래, 충분히 섞고 파종 작업도 확실히 하도록.”
“알겠습니다.”
지셀이 떠난 뒤 다들 불안한 표정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총관님은 아직 항복 안 한 거야? 곧 내기가 끝나는 날짜라던데.”
“저주 효과가 조금 부족했던 게 아닐까?”
영지민들은 회의적인 표정으로 일단 파종 작업을 시작했다.
식량이 늘면 좋다. 영주가 힘 써주는 것도 고맙기는 하지만…….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농사가 말처럼 쉬웠으면 굶다 못해 산으로 도망가는 사람이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간 베풀기만 한 영주에게 고마운 마음이 있으니 오히려 더 안타까웠다.
자존심 때문에 쓸데없이 돈과 시간을 쏟는다니.
곳곳에서 영지민들의 한숨이 깊어질 때, 벨린다도 손톱을 깨물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이제 시간이 일주일밖에 안 남았잖아.’
돈과 노동력은 있는 대로 날리고 기껏 영입해 온 사람도 도망가게 생겼다.
그런 손해야 그렇다 치더라도, 지셀이 크게 망신을 당할 것이 더 문제였다.
만약 가신과 내기했다가 져서 돈을 뜯겼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귀족 사회에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닐 것이다.
망나니 이미지를 전쟁에서 활약해서 겨우겨우 없앴는데.
호구라는 이미지를 회복하려면 또 얼마나 큰 업적을 세워야 할지.
‘그냥 총관 놈을 납치할까? 아으, 미치겠네!’
각자의 우려와 걱정, 분노와 한숨 속에서 다시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마침내 약속한 날이 하루 뒤로 다가왔을 때.
클로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미소 지었다.
‘그러면 그렇지. 괜히 쫄았네.’
워낙 지셀이 자신만만하게 구니 클로드도 조금 긴장하기는 했다.
하지만 예상대로 별다른 일은 없었다.
이제 하루만 지나면 내기는 끝난다.
자신은 돈을 받고 떠나면 그만이었다.
그날, 대전에서 진행된 회의에서 클로드는 마지막 보고를 올렸다.
“……여기까지입니다. 그동안 힘들었지만 즐거웠습니다. 영주님이 안나와 저에게 베푸신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클로드의 인사에 지셀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답했다.
“인사가 너무 빠른 거 아니야? 아직 하루 남았잖아.”
“고작 하루 만에 무슨 일이 생기겠습니까? 뭐, 그래도 짐은 챙겨야 하니 내일 확인하고 떠나도록 하지요.”
가신들은 눈치를 보며 아무런 말도 못 했다.
불편한 표정으로 입을 다문 사람들 사이에서 카오르만이 실실 웃고 있었다.
클로드는 연신 미소 지으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전 이 영지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제 행복을 찾아 떠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
대전이 침묵으로 물들었다.
클로드는 신이 나는지 팔을 벌리며 크게 외쳤다.
“클로드는 자유예요!”
그때, 개간지를 점검하던 하급 관리 하나가 사색이 되어 급하게 들어왔다.
그가 더듬거리며 내뱉었다.
“개, 개간지에…… 싸, 싹이 났습니다. 이, 이게 왜 벌써 자라죠? 싹이 아닌 걸까요?”
“뭐?”
클로드가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관리를 돌아보았다.
지셀은 얄미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같이 가 볼까?”
내기 결과를 확인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