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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107화 (107/269)

107화 무승부로 해 드리겠습니다. (2)

벨린다는 맡고 있던 일도 미루고 지셀 곁을 지켰다.

혼자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으니까.

“괜찮아. 금방 나을 거……. 쿨럭! 크윽!”

아니나 다를까, 지셀은 각혈까지 하며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벨린다는 푹푹 한숨을 내쉬며 피를 닦아 주었다.

“낫긴 뭘 나아요! 그런 강력한 독이 쉽게 사라질 거 같아요? 지금도 죽어 가면서!”

끊임없는 잔소리에도 지셀은 그저 웃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병자 같아도, 그에게는 몸 안에 흘러넘치는 기운이 선명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예상한 대로, 고작 이틀 만에 망가진 몸이 완전히 회복되었다.

새벽부터 지셀의 방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벨린다는, 멀쩡하게 걸어 나오는 그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 진짜 괜찮아졌어요? 이게 무슨 일이래.”

지셀은 어깨만 으쓱했다.

몸은 여전히 해골처럼 말라 있었지만, 눈빛이 살아나고 움직임이 가벼워지니 그녀도 괜찮다는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독을 마시기 전보다 마나 양이 늘어나고 회복력이 놀라울 정도로 향상되었다.

효과를 본 이상 독을 마시는 걸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 후로도 창고에 보관해 놓은 독은 계속 줄어들었다.

지셀이 그걸 가져다 마신다는 게 뻔히 보일 정도였다.

연무장에서 혼자 독을 마시고 쓰러진 채로 발견된 것이 몇 번.

급기야 클로드가 제대로 항복하지 않으니 영주님이 화가 나서 저런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총관님은 왜 고집을 부리는 거야! 우리 영주님을 왜 내기 따위로 압박하는 거냐고!”

“영지를 발전시킨다고 좋아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죽으려고 하겠어. 이게 다 총관님 때문이야!”

“우리 영주님 못 잃어! 절대 못 잃어!”

영지민들은 어디서 구해 왔는지 클로드와 알포이의 초상화를 가져다가 송곳으로 마구 찔러 댔다.

영지민들의 저주 때문인지, 지셀이 떠넘긴 일 때문인지 클로드는 눈 밑이 더욱 시커메졌다.

그는 매일 지셀을 찾아와서 말렸다.

“아, 영주님 그냥 그만하자고요! 무승부로 해 드리겠다니까요? 지금 영주님 몰골이 어떤 줄은 아세요? 해골이 와서 형님 하겠어요!”

“야, 쫄았냐? 질 거 같아서 그래? 콜록!”

“와, 미치겠네! 쫀 건 영주님이잖아요! 지금 겁먹고 이러는 거 아니에요?”

“겁먹긴 누가 겁먹어? 아, 됐고. 쿨럭! 마침 잘 왔어. 이것도 좀 확인하고 진행해 봐. 끄응…….”

지셀은 혀를 차며 서류를 건넸다. 클로드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에이 씨…… 괜히 왔어. 내가 진짜, 곧 떠나니까 너그럽게 봐 드리는 겁니다.”

괜히 왔다가 일만 더 받는 상황이 몇 번 더 반복되자, 클로드는 더 이상 지셀을 찾아오지 않았다.

지셀은 귀찮은 잔소리가 줄었다고 기뻐하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클로드처럼 일거리를 안겨 주었다.

수하들이 일에 치여 신경 쓰지 못하는 사이, 지셀이 쓰러지는 횟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걸 이런 식으로 다 쓸 줄이야.”

지셀은 마지막 남은 독 병을 들어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블러드 퓌톤의 독은 며칠 만에 바닥났다.

애초에 물에 희석해서 군사용으로 쓰려고 챙겨 둔 것인데, 모조리 지셀의 배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어차피 사용하기도 어려운 거 이렇게 쓰는 게 낫지. 이게 다 투자다, 투자.”

지셀은 독을 병째로 입에 털어 넣었다.

처음에 조심스럽게 몇 방울만 슬쩍 털어 넣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지금은 한 병을 모조리 다 마셔도 혀가 약간 찌릿할 뿐 아무런 이상이 없다.

웬만한 독은 앞으로 그에게 어떠한 영향도 끼칠 수가 없을 것이다.

그건 지금처럼 독으로 마나를 늘리는 편법을 더 이상 쓸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짓도 오늘로 끝이네.”

지셀은 자리에 앉아 천천히 마나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몸에 들어온 독은 빠르게 마나와 섞여 하나가 된 뒤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무아지경에 빠져 마나를 연공하던 지셀이 몇 시간 만에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에 순간 검붉은 빛이 스쳐 지나갔다.

“이제 독이라면 지긋지긋하긴 하지만……. 조금 아쉬운걸.”

독을 모두 흡수하니 마나의 총량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늘어났다.

마나의 양만 따진다면 이전의 두 배 이상은 되는 거 같았다.

“정말 운이 좋았어.”

지셀이 아무리 마나를 다루는 데 능하다지만, 많은 마나를 쌓으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독의 기운이 강력하면서도 지셀의 마나와 궁합이 잘 맞은 덕분에 시간을 많이 단축했다.

‘이 정도 효과를 내는 영약은 거의 없는데 말이지.’

지셀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단검으로 손바닥을 얕게 베었다.

길게 베인 손바닥은 순식간에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하게 아물었다.

새어 나온 피 몇 방울만이 그곳에 상처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었다.

“마음에 드는군.”

지셀은 손을 몇 번 쥐어 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 * *

독을 마시는 수련이 끝나자 지셀의 몸에는 빠르게 살이 붙기 시작했다.

피부도 좋아지고 눈에서는 정기가 뿜어져 나왔다.

몸 쓰는 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봐도 차이가 단번에 느껴질 정도였다.

“도련님, 왜 이렇게 건강해 보여요? 설마 죽기 전에 잠깐 반짝하는 거예요?”

“왜 자꾸 멀쩡한 사람을 죽이려고 해. 그냥 좋은 거 먹어서 그런 거지.”

“좋기는 무슨, 독 먹어 놓고 그런 소리가 나와요?”

하지만 실제로 몸이 좋아진 게 눈에 보이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진짜 좋아요? 나도 먹어 볼까?”

벨린다가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이며 지셀을 위아래로 뜯어보았다.

지셀은 그 시선을 피하며 슬쩍 내뱉었다.

“이제 독 안 마실 테니 걱정하지 마.”

옆에 있던 클로드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안 마시는 게 아니라 못 마시는 거겠죠. 창고에 남은 게 없던데요.”

독을 한 방울도 안 남기고 모조리 털어 가 놓고 이제 와서 안 마신다고 해 봐야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그래도 그런 기행은 이제 안 한다 하니 클로드는 내심 한시름 놓았다.

온 영지 사람들에게 눈총을 받는 건 아무리 뻔뻔한 그라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창고에 가 봤어? 그럼 밀알 상태도 봤겠네.”

“보기야 했죠. 심으면 몬스터라도 나올 것처럼 생겼던데요.”

전에 지셀이 마나를 불어넣었던 밀알들을 보고 클로드는 깜짝 놀랐다.

장정의 엄지손톱 정도로 크기가 커졌고, 낱알 하나하나가 은은하게 푸른 빛을 내뿜고 있었다.

겨우 밀알 주제에!

확실히 예사롭지 않은, 상당히 수상한 생김새였다.

“잘 자란 모양이네. 그럼 이제 다음 준비를 해야겠군.”

“정말 그 이상한 걸 심을 겁니까? 이제 보름밖에 안 남았는데 그거 심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고집은 그만 부리시죠.”

클로드가 미심쩍은 듯 지셀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니, 혹시 이길 자신 없으니까 뭐 괴물 같은 거 키워서 복수하려는 건 아니죠?”

지셀은 콧방귀를 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2차 개간 작업을 시작한다. 인부들을 모집하도록.”

‘어휴, 진짜 단단히 망신당해야 저 성격이 고쳐지지. 지는 게 쪽팔려서 독까지 마셨으면서 무슨 배짱이래. 마음대로 하쇼, 망해도 영주님 책임이지!’

클로드는 살짝 약해졌던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그가 인부를 모집하는 동안 지셀은 마법사들을 호출했다.

“으, 이번에는 뭡니까?”

얼굴에 짜증을 한가득 담고 나타난 알포이가 오자마자 퉁명스레 내뱉었다.

지셀이 독을 마시는 쇼를 한 뒤부터 사람들은 알포이에게도 내기를 포기하라고 압박해 왔다.

요새 들어서는 심장도 쿡쿡 쑤신다. 누군가 저주를 하는 게 틀림없다.

그런 와중에 일은 또 얼마나 많은지.

영주는 툭하면 마법사들을 불러내서 인부들이 하기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들을 대신 시켜 댔다.

이제는 노동자인지 마법사인지 스스로도 헷갈릴 지경이었다.

“룬스톤에 마법을 좀 새겨야 하거든. 어려운 마법은 아닌데, 조금 많이 필요해.”

“무슨 마법이요?”

“주변을 따뜻하게 유지하는 마법, 마나 흐름을 바꾸는 마법. 그리고 습도를 일정하게 유지시키는 마법……. 대충 이 정도?”

모두 어려운 마법은 아니다.

마나 집속진이야 마나를 대량으로 끌어와 한 곳에 고정해야 하니 룬스톤이 오래 버티지 못하지만, 단순히 마나 흐름을 바꾸는 정도라면 반영구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 비싼 룬스톤에 그딴 싸구려 마법을……. 아니, 좋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서 어디에 쓰시게요?”

“개간지에 박을 거야. 이제 슬슬 밀알을 심어야 하니까.”

지셀은 여상스럽게 대답했다. 알포이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확 찌푸렸다.

“아직도 포기를 안 하셨어요?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룬스톤을 박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땅의 성질을 바꿔 버릴 거야.”

“하…….”

알포이는 어처구니없는 웃음을 짓다가 벅벅 마른세수를 해 댔다.

마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마법을 쓴다고 나대는 꼴을 봐 주기가 힘들었다.

‘이놈한테는 뭐 하냐고 안 물어보는 게 차라리 속이 편하겠다.’

그 순간, 알포이는 옛 현인이 남겼다는 말씀을 떠올렸다.

‘마음의 평화를 얻고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바보들과 다투지 않아야 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네, 당신 말이 옳습니다.’

알포이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자리에 앉았다.

마나가 살랑거리며 그의 주변을 천천히 감싸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던 마법사들은 깜짝 놀라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지셀도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갑자기 왜 깨달음을 얻고 지랄이야?”

아무리 깨달음이 불쑥 찾아오는 거라 해도, 온도 유지 얘기를 하다가 깨달음을 얻는다고?

머릿속으로 뭔가 괴상한 생각을 한 게 분명했다.

잠시 후, 알포이가 눈을 떴다. 그의 눈에 살짝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아주 작은 깨달음이라 경지도 겨우 개미 눈곱만큼 올랐지만, 그의 마음은 어느 때보다도 편안했다.

‘그래, 바보와 다퉈서 무엇하겠는가? 옛 현인 말씀에 틀린 점 하나 없다. 그냥 네가 옳다고 하고 무시하면 그만인 것을. 자유가 얼마 안 남았는데 굳이 얼굴 붉힐 필요 없지.’

어차피 지셀이 하는 말은 모두 헛소리일 뿐이다.

본인이 틀렸다는 생각조차 못 하는 자를 뭐 하러 고쳐 주겠다고 열을 내겠는가.

내버려 두면 실패하고 알아서 얌전해질 터.

룬스톤이 조금 아깝긴 하지만, 어차피 내 돈도 아닌데.

알포이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작업하지요. 개간지 크기에 맞춰서 필요한 수량만큼 준비하겠습니다.”

지셀은 갑자기 순순하게 변한 알포이의 태도가 꺼림칙해 미간을 좁혔다.

영지의 일꾼, 그것도 무급 노예인 놈의 경지가 오른 건 아주 좋은 일이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무작정 좋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왜 말을 잘 듣냐고 따지기도 어렵다. 지셀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래, 최대한 빨리 해 줘.”

“그러지요.”

마법사들에게 룬스톤 작업을 맡긴 뒤 지셀은 길리언을 필두로 용병 백 명을 소집했다.

명령에 따라 완전 무장을 하고 말에 올라탄 용병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오랜만에 싸울 일이 생겼다 생각하니 벌써 몸이 근질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인부들이 다가오더니 용병들의 말에 큰 수레를 한 대씩 묶었다.

수레에는 철로 만든 삽이 하나씩 묶여 있었다.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든 용병 하나가 물었다.

“저기 수레와 삽은 왜 챙깁니까?”

지셀은 뭐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표정으로 답했다.

“당연히 삽질하러 가는 거겠지?”

“어디로…… 가나요?”

가장 선두에 있는 말에 올라탄 지셀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마수의 숲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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