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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105화 (105/269)

105화 나랑 내기 한번 할까? (5)

고든이 분을 못 참고 소리를 질렀다.

“아니, 말이 안 되잖아요! 왜 사람도 아니고 밀알이 먼저 들어가요!”

“네가 먼저 들어가는 건 말이 되고?”

하긴 길리언에 카오르, 다른 선배 용병들이 있는데 고든이 먼저 들어갈 수 있을 리가 없다.

할 말이 없어진 고든이 괜히 목을 긁었다.

지셀은 얼빠진 용병들을 보며 웃었다.

“나중에 기회를 줄 테니 오늘은 가서 하던 일들이나 마저 해.”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큰 법. 고든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억지를 부리기 시작했다.

“아, 저 한 번만 먼저 들어가 보면 안 돼요? 진짜 이거 해 보고 싶었어요.”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재능을 가진 기사도 겨우 맛이나 볼 수 있는 게 마나 집속진이다.

그런 게 눈앞에 있는데, 씨앗에 쓸 거라 인간은 못 넣어 준단다.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나중에. 마나 집속진은 제대로 된 마나 연공법 없으면 몸이 터져 죽는다.”

“아, 제발요. 저 아는 거 있어요. 예전에 조금 배웠다고요.”

사실 그가 익힌 건 마나도 못 뿜어내고, 쌓이는 양도 미미한 최하급 연공법이라 조금 건강해지는 효과 정도밖에 없었다.

집속진에 들어가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 확실하지 않았다.

그래도 평생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면 죽으나 사나 한번 시도라도 해 보고 싶은 게 사람 욕심이다.

길리언이 인상을 쓰며 뒷덜미를 붙잡았지만, 고든은 계속 징징댔다.

안나를 데려다주고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서 해이해진 마음이 아직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은 탓이다.

다른 용병들은 저러다 혼날 거라고 혀를 차면서도, 혹시나 지셀이 허락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고든을 말리지 않았다.

턱을 쓰다듬으며 곤란한 표정을 짓던 지셀이 길리언을 돌아보았다.

“요새 좀 쉬니까 다들 힘이 남아도나 봐. 길리언.”

“네.”

“모두 연병장을 200바퀴 돌고, 자기 전까지 충격 전술을 훈련시켜.”

“알겠습니다.”

그 말에 용병들이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다른 급박한 사정이 생기지 않는 이상, 지셀은 한번 내린 명령을 절대 철회하지 않는다.

게다가 길리언은 지셀의 명령을 우직하게 실행하는 자다. 말 안 듣는 부하들은 때려 가면서.

용병들은 뒤늦게 후회하며 울상을 지었다.

최근에 지셀이 영지 일에만 신경을 써서 그들과 엮일 일이 없었는지라 잊고 있었다. 본래 이런 사람이라는 걸.

용병들은 고든을 쥐어 패며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카, 카오르는 어디 갔지?”

훈련은 어쩔 수 없이 하게 됐지만, 빨리 카오르를 찾아야 했다.

카오르가 길리언과 투닥거려야 그 틈을 타 훈련 강도를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뭐야! 어디 갔어?”

카오르는 어디로 숨었는지 이미 자리에 없었다.

자기는 그 자리에 없었다고, 훈련하라는 말 같은 거 못 들었다고 오리발을 내밀 모양이었다.

길리언은 용병들에게 한심한 눈빛을 보내며 낮게 말했다.

“지금부터 훈련을 시작한다. 여기서부터 바로 뛴다. 실시.”

용병들이 울상을 지으며 사라진 뒤, 지셀은 피식 웃으며 다시 마법진을 점검했다.

멍하니 그를 보던 알포이가 갑자기 배를 잡고 웃었다.

“으하하하! 빨리 키운다는 게 용병이 아니라 밀알이었어? 아니, 거기 사람이 안 들어가고 밀알이 들어가면 강해질 거라 생각한 겁니까? 와, 발상의 전환 뭐야.”

사람이 들어가면 마나를 쌓아서 금세 강해지니, 밀알도 마나를 흡수해 강해지면 척박한 땅에서 버틸 줄 알았나 보다.

그야말로 마법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무식한 자나 할 수 있는 발상이었다.

“사람도 마나 연공법을 익히지 않은 채로 들어가면 몸이 터지는데, 밀알이 어떻게 버티겠냐고요. 아니, 작으니까 운 좋게 버틴다 해도…… 밀알은 마나 연공법을 못 쓰는데 마나를 어떻게 활용하겠어요? 푸하하핫!”

알포이가 옆에 있던 바네사를 붙잡고 낄낄댔다.

“아이고, 배꼽 떨어지겠네. 바네사, 여기 어디 내 배꼽 떨어지지 않나 잘 좀 봐 줘. 푸하하하하!”

바네사가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지만, 알포이는 신경도 쓰지 않고 웃기 바빴다.

얼마나 내기에 이기고 싶었으면 저 아까운 룬스톤을 저렇게 날릴까?

차라리 그걸 마탑에 파는 게 영지에 더 도움이 됐을 텐데!

‘하이고, 아까워라. 멍청이가 보물을 쥐니 감당을 못 하는구나.’

겉으로는 정신없이 웃으면서도, 알포이는 내심 룬스톤이 아까워 혀를 찼다.

하필 저런 미친놈에게 룬스톤이 들어가서는!

겨우 내기 하나 때문에 피 같은 룬스톤이 눈 녹듯이 사라질 걸 생각하면 울화병이 날 지경이었다.

알포이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지셀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너도 내기할래?”

“뭐라고요?”

“내가 이기면 너도 10년 무급에 찍소리 말고 열심히 일하기. 내가 지면 5천 골드도 주고 마탑으로 돌아가게 해 줄게.”

‘기회다!’

알포이는 혹여나 지셀이 무를세라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콜!”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마법사들도 손을 들었다.

“우리도 하겠습니다!”

지셀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들은 희희낙락하며 돌아갔다.

“우리는 자유다!”

바네사가 안절부절못하며 발만 동동 구르다가 다급하게 말했다.

“여, 영주님! 안 돼요. 마법사들이 있어야 대규모 공사를 할 수 있어요.”

마탑이 지부를 차리면 지부를 관리할 마법사들이 더 오기야 하겠지만, 지금 있는 마법사들이 떠난다면 그것도 의미가 없다.

“괜찮아. 나 못 믿어?”

“아니, 그게 아니고…….”

이건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상식의 문제인데요!

바네사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지만, 차마 지셀에게 따지지는 못했다.

결국 그녀는 벨린다에게 상황을 알리러 잽싸게 자리를 떠났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지셀은 쯧쯧 혀를 찼다.

“이제야 좀 조용해졌네. 다들 참 힘이 넘쳐.”

클로드가 퀭한 눈으로 지셀을 보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떠나기 전에 최대한 일을 많이 ‘해 주고’ 가겠다고 밤낮없이 일하다 보니 미라가 따로 없는 몰골이었다.

“아니, 여기다 쓰려고 밀알을 준비시킨 겁니까?”

“그래, 종자를 개량해서 끝내주는 놈을 만들 거야.”

“하아…….”

클로드는 애잔한 눈으로 지셀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종자를 개량한다니, 그건 좋은 놈들만 골라 심어 가며 몇 세대를 키워야 하는 일이다.

마법사들이 달라붙어 몇 년을 연구해도 성공을 장담할 수가 없다.

종자를 개량하는 게 그렇게 쉬웠으면 진작에 왕실에서 지원해 새 품종을 만들었을 것이다.

‘분명 바네사도 당황하는 눈치였어.’

마법 지식만 따지면 영지 최고의 마법사인 그녀까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 보면, 정말 헛짓거리라고밖엔 할 수가 없었다.

“저기, 영주님. 뭐든 시도해 보시는 건 좋은데…… 내기 기한이 얼마 안 남았어요. 이제 한 달하고 보름 정도 남았는데 그 안에 성과를 낼 수 있겠습니까?”

걱정되어 묻는 건 아니었다. 내기는 어차피 자신이 승리할 테니까.

그래도 지셀의 행동이 뭔가 조금 찝찝하고 수상스러웠다.

“문제없어. 그 정도 기간이면 충분하지.”

“밀알을 여기서 얼마나 키워야 하는데요?”

“한 달 정도?”

클로드는 웃음을 참느라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알포이의 말처럼 밀알이 터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백 보 양보해서, 지셀의 생각대로 밀알이 터지지 않고 무사히 완성된다고 하더라도 고작 보름밖에 안 남는다.

도대체 보름 동안 뭘 할 수 있겠는가.

“크흠, 그냥 패배를 인정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이렇게 룬스톤을 날린 게 알려지면 내기에 진 것 이상으로 욕을 먹을 겁니다. 어휴, 룬스톤 아깝게 이게 뭡니까?”

그래도 지셀은 안나를 구해 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클로드도 지셀이 그렇게까지 망신당하는 건 바라지 않았다.

“뭐, 지금이라도 부탁하시면 제가 무승부로 해 드릴 수는 있는데.”

무승부를 한 글자 한 글자 강조하는 클로드의 말에 지셀이 안쓰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벌써 쫄았어? 뭘 무승부야, 무승부는. 시작했으면 끝까지 가야지! 지금 고오급 노예가 잔뜩 생길 판인데.”

“하하하, 이것 참. 영주님을 생각해서 드린 말씀인데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지요. 뭐, 온 김에 밀알이 터지는지 안 터지는지나 구경하고 가겠습니다.”

“좋은 구경시켜 주지.”

지셀은 씨익 웃으며 밀알을 조금씩 나눠 마법진에 넣었다.

가동 술식이 적힌 룬스톤에 마나를 조금씩 집어넣자, 곧 마나가 마법진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법진에 푸른 빛이 돌더니 조금씩 마나가 쌓여 갔다.

그에 따라 마법진 안에 흩어 놓았던 밀알들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알포이가 장담했던 게 무색하게도, 터지는 밀알은 하나도 없었다.

꼼꼼하게 모든 마법진을 살펴본 지셀이 미소 지었다.

“성공이군.”

이제 이 밀알들은 놀라운 생명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전생에는 이 방법도 널리 퍼져 모르는 사람이 드물었지만, 지금은 오직 지셀만의 지식이다.

대륙이 황폐해지고 사람들이 죽어 나가자, 수많은 마법사와 학자가 모여 찾아낸 해결책이다.

마나를 이용해 종자를 강화하는 방법. 미래를 아는 지셀이 했으니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은 수십, 수백 번의 실패 끝에 정립된 지식이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지셀을 보고 클로드가 조금 찝찝한 듯 말했다.

“뭐, 다행히 터지지는 않네요. 설마 예상하신 겁니까?”

“당연하지, 아무것도 모르고 만들었을까.”

살짝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클로드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냥 우연이겠지. 아니면 그런 효과가 있는 마법진이거나. 바네사가 몰래 힘을 썼을지도 몰라.’

지식인들이 모여 있는 아카데미에도 밀알에 마나를 주입해서 생산량을 늘리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마탑 출신 마법사들도 모르는 모양이고.

‘설사 그런 방법이 있다 해도, 아무도 모르는 걸 영주님만 알고 있을 리가 없다.’

시골 촌구석에서만 살아온 지셀이 학자나 마법사들보다 정보에 밝을 리 없잖은가.

‘마법도 모르는 영주님이 직접 만들어 낼 수도 없지. 이건 100% 블러핑이다.’

클로드는 확신했다.

도박에도 이런 상대들이 자주 보인다.

안 좋은 패를 쥐고서도 허세를 부려 상대가 먼저 항복하게 유도하는 것이다.

‘후후, 허세도 어지간해야 속지요. 밀알이 정말 마나를 머금더라도, 애초에 땅이 받쳐 주지 못하는데 어쩌려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지셀이 내기에서 이길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클로드는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툭 내뱉었다.

“뭐, 잘 봤습니다. 결과 기대하겠습니다.”

클로드는 부리나케 자리를 피했다.

괜히 주변에서 얼쩡거리다가는 지셀이 일을 더 시킬지도 몰랐다.

모두가 떠나고, 혼자 남은 지셀은 고민에 잠긴 채 괜히 주먹을 쥐어 보았다.

당장 해야 할 일은 모두 처리했다.

잠깐 여유가 생겼으니, 계속 마음에 걸렸던 문제를 해결해야 할 때였다.

‘내 몸 문제인데 더 미룰 수는 없지.’

시간이 날 때마다 꾸준히 신체를 단련하고 마나 연공도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마나의 성질이 변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회복력이 좋아진 이유도.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 때문인 거 같은데…….’

마수의 숲에서 블러드 퓌톤과 싸우다 죽을 뻔한 뒤에 벌어진 현상이니, 분명 블러드 퓌톤의 독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죽으려면 곱게 죽지, 새끼가.”

지셀이 짜증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확인은 해 봐야 하는데.”

불확실한 힘을 몸에 품고 있는 건 그의 성정에 맞지 않는다.

하지만 확인할 방법이 하나밖에 없어 그동안은 차마 시도하지 못했다.

‘한창 바쁠 때 쓰러지면 곤란하니까…….’

지금까지는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확인을 미뤄 왔지만, 앞으로는 더 바빠지게 된다.

개간지 작업도 끝났겠다, 종자 개량만 끝나면 또 할 일이 몰아칠 것이다.

잠깐 여유가 생긴 지금이야말로 무언가 시도해 보기에는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지셀은 결국 실험을 해 보기로 했다.

목숨이 위험해질지도 모르는 실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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