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나랑 내기 한번 할까? (2)
영주에게 총관이 내기를 걸었다는 소문은 금세 퍼졌다.
자세한 사정을 들은 사람들은 다들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쯧쯧, 영주님이 무리했네.”
“총관도 참 성깔 있어. 그래도 영주님인데, 져 주는 시늉이라도 하지. 영주님 측근들이 엄청나게 벼르고 있던데.”
“영주님이 건들지 말라고 했으니 이제는 측근들도 못 건드려. 총관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영주님 명예만 더 떨어지는 거니까. 그러면 누가 영주님을 믿고 일하겠어?”
사람들의 말대로, 벨린다는 차마 클로드에게는 손을 대지 못하고 온종일 베개만 때리며 화를 삭이고 있었다.
“아오! 도련님은 왜 그런 내기를 해 가지고! 농사는 쥐뿔도 모르면서 무슨 억지야! 그 성질머리는 언제 고쳐지는 거야?”
클로드의 말마따나, 수백 년 동안 아무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였다.
그런 문제를 아무것도 모르는 지셀이 해결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법사나 사제들에게 부탁해 잠깐 지력을 끌어올릴 수는 있을 거다. 하지만 그 효과는 오래가지 않는다.
차라리 그 돈으로 식량을 사는 게 더 싸게 먹힐 터였다.
“아아악! 열 받아! 그 도박쟁이 놈도 그래, 영주가 막 나가면 좀 양보해야지! 그걸 날름 받아들여? 꼴에 감은 좋아서, 신변 보호까지 요청하고……. 잔망스러운 새끼!”
벨린다가 죄 없는 베개를 퍽 내리쳤다.
집사장인 벨린다가 총관에게 이를 가니, 성안 분위기도 어수선해졌다.
바네사는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고민에 빠졌다.
‘영주님이 이기셔야 하는데. 마법으로 지력을 잠깐 끌어올려야 하나? 그 넓은 땅을 나 혼자 관리하는 건 무리인데. 유지하려면 마력을 엄청나게 쏟아부어야 하고…… 나는 마나가 없고…… 룬스톤도 없고…….’
바네사의 마력으로는 지셀이 계획한 개간지 전체는커녕, 손바닥만 한 밭뙈기 하나도 감당할 수 없었다.
‘알포이 님과 다른 마법사님들 마력을 뺏어 오면 될까?’
마법사들이 잠을 잘 때 기습해 볼까 생각했지만, 그녀 혼자 그들을 제압하기는 불가능했다.
‘영주님 죄송해요. 저는 쓸모없는 인간이에요…….’
날이 갈수록 걱정으로 말라 가는 바네사는 주변 사람들의 걱정을 샀다.
반면 카오르는 날이 갈수록 얼굴이 반질반질해졌다.
벨린다가 두문불출하는 틈을 타서 켈베로스 용병단 단원들과 술을 퍼마신 탓이었다.
“큭, 영주가 져도 재미있고…… 총관이 지면 더 재미있겠네.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러게, 그 괴물 같은 영주가 지면 무슨 표정을 지을지 너무 궁금한데?”
단원 중 하나가 내뱉은 말에 카오르가 코웃음을 쳤다.
“이번에는 영주가 실수했지. 질 수밖에 없는 내기잖아. 그 고집이 언젠가 문제가 될 줄 알았어.”
지셀은 지금까지 다들 반대하고 불가능하다는 일에 도전해 왔다.
그리고 매번 성공시켰다.
뛰어난 감각과 강력한 힘으로 안 될 일을 억지로 되게 한 것이다.
매번 그러다 보니 주변 사람들도 웬만하면 지셀이 하자는 대로 따라왔지만, 이번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이번에는 힘이 아니라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일이니까.”
낄낄대며 웃던 카오르가 갑자기 표정을 굳혔다.
멀리서 길리언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꼰대 영감 오시네. 야, 다들 해산! 빨리빨리 움직여라, 자식들아!”
지셀이 클로드와 내기를 시작한 이후로, 길리언은 내내 언짢은 표정으로 돌아다녔다.
클로드가 일부러 도박장 얘기를 꺼내서 지셀을 도발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저렇게 기분이 안 좋으니, 괜히 이렇게 술판을 벌인 걸 들켜 트집이 잡혔다가는 길리언에게 온갖 잔소리를 들을 게 뻔했다.
카오르는 용병들과 함께 후다닥 주변을 정리하고는, 길리언의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 * *
성안 분위기가 날카로워질수록 클로드는 열성적으로 일했다.
이상하게 잠을 안 자도 힘이 솟았다.
“후후후, 난 곧 자유다.”
여전히 일은 끔찍할 정도로 많지만, 3개월만 버티면 된다 생각하니 갑자기 할 만해졌다.
아예 끝이 보이지 않는 일과 끝이 보이는 일은 이렇게나 다른 법이다.
“가기 전에 일은 깔끔하게 해 놓고 가야지. 괜히 책잡히면 안 되니까.”
뒤에서 단검을 꺼내 이리저리 돌려 보는 웬디가 무서워서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너 혹시 뭐 갑자기 뒤에서 찌르거나 그러는 거 아니지? 음식에 독 넣거나.”
갑작스러운 말에 웬디가 당황하며 단검을 품에 집어넣었다.
“그런 거 안 해요.”
“나 죽으면 영주님이 더 크게 망신당하는 거야. 알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러니까 나 잘 지켜. 요새 나 노리는 사람들이 좀 있는 거 같더라.”
클로드는 스물세 번째로 경고하고 후련한 얼굴로 일을 시작했다.
웬디가 다시 단검을 꺼내고, 클로드가 똑같은 질문을 스물네 번째로 반복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 * *
지셀은 클로드가 처리한 업무들을 살펴보고 용병들을 소집했다. 화전민들을 찾아서 끌고 오는 일은 그가 직접 해결하는 편이 빨랐다.
“길리언은 주변 영지의 협조를 얻어서 도망간 영지민을 찾아와. 카오르는 북쪽을 뒤지도록. 숨어 있는 화전민들은 싹 다 찾아서 끌고 오고. 나는 남쪽으로 가겠다.”
클로드가 여기저기 뒤지고 다닌 탓에 영지민들은 불안에 떨고 있었다.
무장한 병사들이 사방을 뒤지고 다니니 조만간 큰 사달이 일어날 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영주가 직접 병력을 이끌고 잡으러 다닌단다.
이에 영지민들은 공포에 떨었다. 민심은 바닥을 쳤고 지셀의 인기는 끝도 없이 내려갔다.
새로 온 영주가 전임 영주보다 더 지독하고 무섭다는 소문이 흉흉하게 돌았다.
관리들이 걱정스러워하며 천천히 진행하자고 건의했지만, 지셀은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상관없다. 천천히 진행할 여유는 없어. 강압적이더라도 최대한 빠르게 진행해라.”
지셀은 순식간에 산에 숨어 살던 화전민들을 찾아냈다.
물론 발견된 사람들이 순순히 그를 따라올 리는 없었다.
“영주님, 제발 여기서 살게 해 주십시오. 아니면 며칠만 정리할 시간을 주십시오.”
“세, 세금은 어떻게든 내겠습니다.”
“내려가면 땅도 없습니다. 먹고살 식량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사정사정했지만, 지셀은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시간을 주면 분명 다른 곳으로 다시 도망갈 것이다.
“식량도, 일거리도 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 시간 없으니 당장 내려간다.”
여기서 나올 세금이라 해 봐야 쥐꼬리만 했다.
일할 사람이 부족해서 찾아온 거지, 돈 몇 푼 뜯어내자고 온 게 아니었다.
지셀의 단호한 태도에 화전민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눈짓했다.
시간을 벌려는 시도도 통하지 않았다. 영주가 아예 작정하고 온 모양이었다.
그들을 찾아온 병력은 영주까지 고작 열 명. 상대할 만해 보이는 숫자였다.
중년 남성 하나가 몽둥이를 들고 외쳤다.
“시발! 어차피 내려가면 전처럼 뜯어먹을 거잖아!”
“나 그런 사람 아니다. 내가 얼마나 착한 사람인데. 내 주변 사람들은 세상에 나 같은 비폭력 평화주의자가 없다고들 한다고.”
주변 사람들이 들었다면 고개를 갸우뚱할 말이었다.
심지어 지셀과 함께 온 용병들도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표정을 구기고 있었다.
화전민들이 믿을 리가 없었다.
“안 가! 우리 좀 그냥 내버려 둬!”
독이 오른 몇몇 화전민들이 다른 사람들을 부추기기 시작했다.
“여러분, 그냥 싸웁시다! 어차피 내려가면 지옥이라고요!”
“그러자! 자유를 달라!”
“우리끼리 그냥 여기서 살 거야!”
지셀은 사람들의 격렬한 반응에도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는 구차하게 말을 길게 하는 사람이 아니다. 누군가를 설득한 적도 없었다.
그는 용병들에게 살짝 턱짓했다.
“그냥 죄다 체포해.”
용병들은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으며 화전민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럴 줄 알았다! 무슨 비폭력 주의자야!”
“모두 무기를 듭시다!”
“와아아아! 더 이상 착취당하지 않겠다!”
화전민들의 기세는 놀랍도록 사나웠다.
수탈을 피해 도망쳐 온 사람들이 강압적인 명령에 순순히 따를 리가 없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화전민들은 찾아온 자들을 모조리 죽이고 도망칠 각오를 했다.
영주에게 잡혀가서 서서히 말라 죽든, 지금 반항하다 칼에 맞아 죽든 죽는 건 마찬가지다.
찾아온 용병들보다 화전민들의 수가 두 배를 넘으니 해볼 만하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희망이 산산조각 나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으악!”
용병들이 한두 대씩 툭툭 치면서 지나가니 화전민들은 실 끊어진 인형처럼 모조리 땅바닥에 누워 버렸다.
“으으으…….”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는 화전민들을 앞에 두고 한 용병이 지셀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영주한테 덤빈 자들은 반역죄를 물어 죽이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지셀이 화전민들을 찾아온 이유를 알기에 용병들은 바로 손을 쓰지 못했다.
지셀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쓰러진 남자들의 가족인 듯, 아이들과 여자, 노인들이 주저앉아 덜덜 떨고 있었다.
“이거 완전히 내가 악덕 영주 같잖아?”
지셀은 너털웃음을 내뱉으며 사람들에게 손짓했다.
“안 죽일 거니까 겁먹지 마. 비폭력 평화주의자라니까? 바로 영지로 내려갈 테니 꼭 필요한 짐만 챙겨라.”
저항할 의지를 잃은 화전민들은 주섬주섬 일어나 짐을 챙겼다.
사람들이 대충 짐을 챙기고 모여들자 지셀이 용병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집은 모두 부숴라. 범죄자들이나 첩자들이 숨어들 수도 있으니까.”
용병들은 바로 도끼를 들고 움직였다.
화전민들이 어설프게 세운 판잣집들은 강한 힘에 버티지 못하고 빠르게 박살 나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지내던 마을이 부서지는 걸 눈앞에서 지켜본 화전민들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제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걸 새삼 깨달은 것이다.
울먹거리는 어린아이를 보고 지셀이 상냥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나처럼 착하고 상냥한 영주는 세상에 또 없다고. 봐라, 영주한테 덤볐는데도 아무도 안 죽었잖아?”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아이에게 지셀은, 아비를 때려눕히고 집을 부숴 가며 자신들을 강제로 끌고 가는 악덕 영주에 불과했다.
아이는 차마 뭐라고 하지는 못하고 새빨개진 눈으로 이를 악물었다.
그 표정을 본 지셀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불신이 가득한 이들에게 구구절절 설명해 봤자 소용이 없었다. 직접 보여 주는 수밖에.
“자, 다 됐으면 내려가자. 밤에는 춥다고.”
오늘도 마을 하나를 박살 낸 지셀이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지셀에게 덤볐던 사람들은 생선 엮이듯 묶인 채 끌려갔다.
절망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그들을 나머지 가족들이 뒤따랐다.
화전민들은 산에서 내려가는 내내 앞으로의 삶을 걱정하며 훌쩍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멀리 도망갈 것을.
험하고 깊은 산속까지 이렇게 열심히 뒤질 줄은 정말로 몰랐다.
“오늘은 꽤 많이 찾았네. 마흔 명이나 넘게 모여 있을 줄이야.”
신나 하는 지셀을 보며 화전민들은 이를 갈았지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얼마 후, 성에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지셀이 휘파람을 불었다.
“오, 제법 많아졌네.”
화전민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