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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100화 (100/269)

100화 보내 준다고 할 때 갔어야지. (4)

클로드는 뿌옇게 흐려진 시야에 눈을 끔벅였다.

눈물 때문이었는지, 몇 번 눈을 비비자 금세 세상이 밝아졌다.

다행히 정신을 놓은 사이에 목이 잘리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슬그머니 고개만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 안에는 클로드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아, 진짜 일하기 싫다.’

클로드는 침대에 걸터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적응 기간이라도 줘야 하는 거 아냐? 갑자기 일을 그렇게 많이 주면 어떻게 하냐고. 여기 살던 사람도 아닌데.”

한동안 판판이 놀다가 갑자기 일하게 되니 영 의욕이 나지 않았다.

어떻게 그 많은 일을 해야 할지 걱정도 되었고.

“돈도 척척 주기에 마음씨 고운 영주님인 줄 알았는데. 악마네, 악마야.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그걸 다 한꺼번에 하라니 제정신이 아니야! 적당히 좀 시키지!”

소심하게 투덜거리던 클로드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점점 커져 갔다.

“사람 귀한 줄 모르고 말이야……. 두고 보자. 나 없으면 일이 안 돌아가게 해 놓고 바로 따져 줄 테다. 아니다, 어차피 일할 사람도 나밖에 없는데 그냥 지금 확 도망가 버릴까?”

그때, 방문이 달칵 열렸다.

클로드는 기겁하며 침대 위로 뛰어올랐다.

“누, 누구신지?”

차분하게 생긴 하녀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안녕하세요, 총관님. 집사장님의 명령으로 총관님을 모시게 된 웬디라고 합니다. 호위까지 제가 맡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집사장? 아, 벨린다.”

이번에 새로 집사장에 임명받은 벨린다가 전속 하녀를 보내 준 모양이었다.

그런데 호위라니. 클로드는 입가에 비웃음을 띠고 물었다.

“시중이야 그렇다 쳐도, 호위라고? 일개 하녀가 영지의 총관을 호위한다니, 사람이 없긴 없는 모양이네.”

웬디는 비꼬는 말에 대꾸하는 대신, 살짝 손을 흔들었다.

파앙!

무언가가 귀 옆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가 싶더니, 등 뒤의 벽에서 퍽 하는 소리가 났다.

클로드는 식은땀을 흘리며 천천히 고개를 돌려 보았다.

벽을 지나던 바퀴벌레 하나가 단검에 꽂혀 바들거리고 있었다.

웬디는 여전히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성이 낡아서 벌레가 많습니다. 총관님께서 이 문제도 해결해 주시기 바랍니다.”

“……네.”

하녀라며…….

‘이 영지는 어떻게 평범한 게 없어.’

클로드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깨어나면 바로 일을 시작하라는 영주님의 명령입니다. 이제 움직이시지요.”

“……네.”

아, 호위가 아니라 감시였구나. 도망도 못 가겠구나. 하녀도 나한테 일을 시키는구나!

클로드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느릿느릿 일어났다.

나가려나 했는데, 웬디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집사장님께서 전달하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뭔데?”

“일하기 전에 먼저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영주님에게 벼룩 하나라도 옮기면 죽여 버리겠다고요.”

“……그래.”

오스턴에서 여기까지 오는 며칠 동안 제대로 씻지 못했다.

찝찝했던 참이니 씻는 건 좋지만…….

말이라도 좀 예쁘게 하면 어디 덧나나?

이게 총관인지 노예인지 모르겠다.

‘어휴, 죄다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구나. 누가 안 한대? 하면 될 거 아니야. 확 다 부숴 버릴까 보다.’

……라고 속으로만 투덜거렸다. 단검에 꿰이고 싶지는 않다.

씻고 준비된 집무실로 이동하는 와중에도 웬디는 별말이 없었다.

눈치를 보던 클로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여기 사용인들이 다 너처럼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칼 잘 던지고 그래?”

“아닙니다. 집사장님께서 어렸을 때부터 데려다 가르치신 사람이 몇 명 있습니다. 저는 원래 엘레나 아가씨를 모시다가 이번에 교대해 온 겁니다.”

“엘레나 아가씨? 아, 영주님 동생. 어쨌든 전부 다 그런 건 아니라니 다행이네.”

하녀들이 죄다 이 모양이면 밥 먹을 때도 눈칫밥 먹다가 체할 게 뻔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집무실에 도착한 클로드는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책상 위에 서류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하급 관리들이 그동안 밀린 일들을 올려놓은 것이다.

심지어 이걸로 끝이 아니다. 지셀이 시킨 일들도 추가해야 한다.

‘에휴, 어쩌겠어. 죽어라 해 보는 수밖에.’

* * *

클로드는 반 억지, 반 자의로 시작한 일에 치여 며칠 만에 살이 쏙 빠져 버렸다.

그는 퀭한 눈으로 서류를 뒤적이다가 고민에 빠졌다.

“으음, 이거 정말 살릴 수 있는 거 맞나? 완전히 망한 영지인데. 윗대가리 하나는 제대로 된 사람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지셀이 시킨 일들은 전부 영지가 부강해지는 데 필요한 것들이었다.

귀족이 어떻게 이런 걸 알고 시켰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제 영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영주들이 태반이다.

관심 있어 봤자 돈이나 군사력 정도?

하지만 지셀은 정말 꼼꼼하게도 많은 일을 시켰다.

이건 영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두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다.

지셀이 시킨 일들은 대부분 돈을 갈아 넣으면 되는 것들이었다.

건설 쪽도 시간이 조금 걸릴 뿐, 마법사들이 도와준다면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펜리스 영지는 밑 빠진 독이나 다름없었다.

돈을 쓴 만큼 어디선가 다시 벌어 와야 할 텐데, 지금 펜리스 영지에는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없었다.

“돈이 될 만한 건 영주님이 가진 룬스톤뿐이지.”

그러나 룬스톤도 무한히 나오는 것은 아니다.

지금 당장은 문제가 없지만, 지속적인 자금줄이 없다면 몇 년 뒤에는 현상 유지조차 힘들어질 것이다.

하지만 몇 번이나 다시 검토하고 영지를 둘러봐도 도무지 방법이 없었다.

“돈……. 돈을 벌 방법이라.”

클로드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영지가 망할 게 뻔히 보이는데, 총관으로서 무시할 수가 없었다.

절대 끝이 안 보이는 일거리의 늪에서 도피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순간, 클로드가 눈을 빛내며 미소를 지었다.

“이 방법이 좋겠군. 흐흐흐.”

돈을 벌 거면 화끈하고 편하게 벌어야 한다.

그리고 그는 확실한 방법을 하나 알고 있었다.

“어차피 보고할 것도 있으니까……. 이왕 가는 김에 한꺼번에 밀어붙이자. 좋아할지도 몰라.”

클로드는 구상한 것들을 정리해서 품에 안고 회의장으로 향했다.

‘후, 주인공은 언제나 늦게 나타나는 법이지.’

그는 일부러 느릿느릿 걸었다. 그러자 뒤에서 조용히 따라가던 웬디가 말했다.

“총관님, 걸음이 너무 늦습니다. 영주님께서 이미 도착해 계실 겁니다.”

“……알았어, 재촉하지 마. 걷는 것도 마음대로 못 해? 나 힘들어 죽겠거든? 이럴 때라도 좀 쉬자!”

말하다 보니 울컥해서 목이 멘다.

웬디는 울먹이는 클로드를 조금 애잔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영 인상이 좋지 않은 사람이지만, 요 며칠 일이 많아서 잠도 제대로 못 자는 걸 봤다.

조금 불쌍하기는 했다.

“……아, 예. 편하게 걸으세요.”

클로드는 작은 승리에 의기양양해하며 천천히 걸었다.

느릿느릿 걸어 도착한 대전에는 이미 지셀을 비롯해 가신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가신들은 클로드가 나타나자 모두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

클로드는 턱을 치켜들며 그 시선을 즐겼다.

‘캬, 이래서 다들 권력을 쥐려나 보다. 일 많은 건 짜증 나지만 이건 괜찮네.’

이러니저러니 해도 영지의 총관이다.

지셀이 클로드에게 얹어 준 다른 직위까지 더하면, 적어도 펜리스 영지 안에서만큼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것이었다.

거기다 인사권까지 넘겨받았으니, 다들 혹시라도 꼬투리가 잡힐까 봐 몸을 사렸다. 자칫하면 일을 떠맡게 될 테니까.

그래도 모두가 인사를 한 건 아니었다.

카오르는 클로드와 눈이 마주치자 보란 듯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기회만 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속내가 그대로 드러나는 표정이었다.

클로드는 솔직히 좀 심정이 미묘했다.

‘으음, 저놈은 건드리면 진짜 위험해. 인내심이 개미 다리털보다도 작은 거 같던데.’

영주가 대놓고 그의 뒷배를 봐주고 있는데도, 영주가 있는 자리에서 서슴지 않고 칼부림을 하던 놈이다.

‘친하게 지내는 게 좋겠지.’

클로드는 온 마음을 담아 한쪽 눈을 깜박였다.

“저 새끼가?”

불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었다.

카오르가 번개처럼 검을 뽑으며 달려들자, 웬디가 재빨리 단검을 꺼내며 클로드의 앞을 막아섰다.

벨린다도 웬디의 옆으로 이동하고, 길리언이 도끼를 쥐고 카오르를 노렸다.

대전을 지키던 병사들은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일단 영주 옆으로 달려갔다.

가신들만 혼비백산이었다.

‘이 미친놈들이 또 영주 앞에서 무기를 꺼내 들다니!’

‘도대체 영주님은 어디서 이런 꼴통들만 모아 왔단 말인가!’

그 순간, 지셀이 가볍게 발을 굴렀다.

살기 어린 묵직한 마나가 방 전체에 퍼져 나갔다.

모두 얼어붙은 듯 움직임을 멈췄다.

지셀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적당히들 좀 해라. 회의장에서 무슨 짓이야.”

그 말에 다들 무기를 집어넣고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카오르는 마지막까지 씩씩대며 클로드를 노려보았다.

그가 고개를 돌리고 나서야 클로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와, 친하게 지내자고 해도 지랄이네. 저 새끼 친구 없다는 데 내 머리카락 건다.’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가라앉자, 지셀이 클로드를 바라보며 물었다.

“일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지?”

“네, 그게……. 일단 식량과 자재들은 차근차근 사 모으고 있습니다. 인부들도 모집 공고를 냈고, 화전민들도 찾고는 있습니다. 다만…….”

“다만?”

“영주님이 시키신 일들은 전면 철회하고 새로 계획을 잡으셔야겠습니다.”

가신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미 돈을 잔뜩 써 가며 이것저것 일을 벌여 놓았는데 전부 철회하자니?

심지어 그건 모두 지셀이 직접 시킨 일이었다.

지금 클로드는 대놓고 영주가 틀렸다고 지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말을 들은 지셀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되물을 뿐이었다.

“왜? 무슨 문제가 있나?”

“당연히 있죠! 그냥 있는 수준을 넘어서 아주 많습니다.”

지셀이 눈을 가늘게 뜬 채 계속해 보라며 고갯짓했다.

클로드는 침을 한 번 삼키고 입을 열었다.

“일단, 이 영지는 땅이 너무 척박합니다. 농법을 개선하든 뭘 하든 생산량을 늘릴 수가 없어요. 먹을 게 없으면 사람도 안 늘고, 그러면 당연히 세금도 안 늘겠죠.”

지셀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래서라뇨, 지금 영주님 명령으로 온갖 시설을 짓고 있잖습니까. 세금이 안 들어오는데 유지비는 어디서 마련하시려고요?”

“흐음.”

“그냥 농사가 어려운 수준이라면 모를까, 자원이 아예 없습니다. 사람이 없으니 수공예품 같은 걸 특산품으로 낼 수도 없고, 교통의 중심지도 아니니 상업을 일으킬 수도 없고요. 정말로, 개털만큼도 돈을 벌 수단이 없습니다.”

“듣기만 해도 처참하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너무 처참해서 뭐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펜리스 영지에서 살아온 가신들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 영주들이라고 영지를 살리려는 노력을 안 한 건 아니었다.

선대부터 별의별 방법을 써 봤지만 다 실패했다.

이번 전쟁도 전 영주가 어떻게든 돌파구를 마련하려고 시도한 거였다.

결국은 패배하고 목숨까지 잃고 말았지만.

사람들이 동조하자 자신감을 얻은 클로드가 더 힘차게 말했다.

“몇 가지 시설은 꼭 필요하죠. 저도 인정합니다. 그런데 나머지는 당장 쓸모가 없습니다. 하물며 그걸 이렇게 대규모로 지어야 할 이유가 없어요. 애초에 개털인 영지에 이런 시설을 잔뜩 지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왜 우리 도련님 기를 죽이고 그래요!”

벨린다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아니, 욕하는 게 아니라 현실이 그렇다고요.”

“우리 룬스톤 많잖아요. 그거 쓰면 되지!”

“아까도 말했잖아요, 유지비가 문제라고. 룬스톤이 뭐 새끼라도 친답니까? 지금 돈 많다고 덩치를 무작정 키웠다가 나중에 룬스톤 떨어지면 개털도 안 남는 거예요.”

“그거 해결하라고 당신 데리고 온 거잖아요!”

클로드가 황당해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아니, 제가 신이에요? 황무지에 손만 갖다 대면 옥토가 됩니까? 땅만 파면 광산이 막 나오고 그러냐고요. 이건 진짜 신이 와서 갈아엎지 않으면 답이 없어요!”

“왜 신이 아닌 건데!”

“……그러게요, 왜 나는 신이 아니지? 이런 영지는 그냥 싹 다 날려 버리면 좋겠는데…….”

저도 모르게 진심을 내뱉던 클로드가 흠칫 놀라 지셀의 눈치를 보았다.

“아니, 영주님. 꼭 그렇다는 게 아니라…….”

지셀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너한테 불가능한 걸 이뤄 달라고 한 건 아냐. 그래도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뭔가 다른 방법을 떠올린 거겠지?”

“그렇습니다. 결국 문제는 고정 수입이 없다는 거죠. 쓸데없는 곳에 돈 쓰지 말고 안정적인 벌잇거리를 마련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쉽고 빠르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영주님도 들으면 무릎을 탁 치실걸요?”

“뭔데?”

클로드가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도박장을 차리는 겁니다!”

그 순간, 허공으로 뛰어오른 벨린다의 발이 클로드의 안면에 직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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