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보내 준다고 할 때 갔어야지. (3)
“으헉! 뭐야?”
다짜고짜 달려드는 카오르를 보고 클로드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설마하니 진짜 달려들 줄은 몰랐다.
‘이놈의 영지는 정상인이 없어.’
지셀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밑의 수하들도 다 제정신이 아니다.
검이 클로드의 팔 하나쯤은 단번에 자를 기세로 날아들었다.
카앙!
하지만 언제 꺼내 들었는지, 길리언의 도끼가 검을 가로막았다.
“뭐야! 영감, 안 비켜? 저 새끼 버릇 좀 고쳐 놔야겠다고! 영감도 한 방 맞고 싶어서 그래?”
“까불지 마라. 감히 영주님 앞에서 검을 뽑다니, 죽고 싶나?”
“염병, 도끼는 괜찮고?”
“너를 막으려고 그런 거니 괜찮다.”
두 사람이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벨린다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놀란 척 내숭을 떨어 댔지만, 눈이 웃고 있었다.
클로드는 두 사람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들은 어느새 자신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자기들끼리 옥신각신하기 시작했다.
“그만.”
지셀이 조용히 내뱉으며, 맞붙은 두 사람 쪽으로 검 하나를 날렸다.
파악!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뒤로 물러났다.
검은 그들이 있던 자리에 깊숙하게 박혔다.
“사람도 많잖아? 싸움은 나중에 밖에 나가서 해.”
두 사람을 타박하면서도 지셀은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영주로서 권위를 지켜야 하니 일단 말리기는 했지만, 사실 그는 지금의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전생에 함께 지냈던 용병단이 생각나기 때문이었다.
지셀은 힐끗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저놈도 슬슬 원래 성격이 나오나 보네. 전생에도 나한테 손가락으로 욕하다가 얻어맞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지.’
클로드는 자기 능력에 자부심이 강했다.
그만큼 내뱉는 말에도 거침이 없는 자였다.
성질 더럽고 무식한 용병들과 얼마나 많이 부딪쳤는지 모른다.
‘아, 그때 참 재미있었는데.’
클로드가 깐족거리며 용병들을 놀리고, 카오르처럼 발끈한 이들이 달려들었다.
그러다 보면 다른 단원들도 하나둘 끼어들어 주먹다짐을 하다가, 또 언제 그랬냐는 듯 같이 술을 퍼마시고 잠들었다.
지셀은 뒤에서 그 꼴을 보고 낄낄대며 술을 마셨다. 몸이 근질거리면 싸움에 끼어들기도 하고.
예의와 질서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때만큼은 아무 생각 없이 웃을 수 있었다.
‘그래도 이제는 그때와 같을 순 없겠지.’
지셀은 씁쓸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옛 추억을 떠올리고 별말 없이 넘어갔지만, 펜리스 영지에서 일하던 관료들은 그러지 못했다.
‘이, 이게 무슨 개판이란 말인가? 영주님 앞에서 칼을 뽑고 싸우다니!’
‘수하들이 죄다 용병이라고 그랬었나? 천박하기 이를 데가 없구나.’
‘저걸 그냥 웃으면서 넘어간다고? 영주님도 미쳤어!’
언제나 딱딱한 예법에 갇혀 살아온 이들은 지셀과 수하들이 보이는 자유로운 태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에 있던 영주는 영지민들을 쥐어짜기는 했지만 최소한의 품격은 지켰다.
다른 가신들도 서로 우아하게 말싸움하며 영주를 상대했지, 이렇게 막되어 먹은 자들은 없었다.
‘산적 떼 같은 놈들이 왔구나. 영주도 용병 나부랭이랑 다를 게 없다니.’
‘이, 이 영지는 이제 정말 끝이다.’
다들 아무것도 못 본 척 고개를 숙이고 식은땀만 흘렸다.
이미 몇 명이나 목을 날린 영주에게 예법을 따질 용기는 없었다.
지셀은 관료들이 심란해하는 이유를 오해하고 차분히 말을 이었다.
“아직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인물에게 많은 일을 맡기니 걱정이 큰 건 이해한다. 하지만 잘할 거니까 다들 걱정하지 마라. 그렇지, 클로드?”
“끄응…….”
클로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털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전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안 그러는 척 자신을 훔쳐보고 있었다.
어쩐지 막막해져서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분명 지셀은 멋지게 말했었다.
― 루타니아의 펜리스 영지로 와라. 네가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날개를 달아 줄 테니.
날개를 달아 주긴 했다. 그 날개가 조금 많이 무거워서 문제지.
‘젠장, 여기서 못 하겠다고 뺄 수도 없고.’
도박 중독자니, 멍청이니, 머리가 망가졌다는 소리까지 들었는데 이제 와서 못 한다고 하면 자기 꼴만 우스워진다.
평생의 빚을 진 건 사실이니 죽어라 한번 해 보는 수밖에.
클로드는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지금 당장은 어쩔 수 없지만, 상황을 봐서 하나씩 일을 덜어 내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그러자 지셀이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 일이 좀 많은 거 같지만 초반이라 그래. 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야.”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전생의 클로드는 이 정도 일쯤이야 매일같이 해냈다. 때로는 이보다 더 힘든 일도 했었다.
가뜩이나 망할 대로 망한 영지라 꼼꼼하게 모든 걸 확인하고 키워야 하는 상황이다.
지셀이 생각해 둔 큰 틀 안에서 세부적인 사항들을 채우고,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빠른 판단을 내려 자체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 정도 능력은 되잖아? 안 그래?”
당장은 좀 막막해하는 것 같지만, 금방 적응하겠지.
지셀은 속 편하게 웃으며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결국 클로드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가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대충 일하는 것도 자존심이 상한다.
“뭐, 일단 해 보고 힘들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좋아. 더 필요한 건 없나?”
“아니요. 제발 가만히 계셔 주세요. 뭐 더 얹어 주려고 하지 말고요.”
클로드가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지셀은 영지를 관리하던 기존 행정관에게 영지 상태를 물었다.
“기사는 몇 명이나 남았지?”
“전쟁 중에 거의 다 죽고,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은 영지에서 떠났습니다.”
충성을 맹세한 영주가 죽고 자유가 된 자들이 이런 척박한 영지에 남을 리가 없었다.
아쉬운 일이지만, 지셀도 이미 짐작했던 일이기에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들은?”
“죄다 전쟁에 끌려가는 바람에 서른두 명만 남았습니다.”
지셀은 잠시 고민하다 한숨을 내쉬었다.
“병력이 워낙 부족하니 군권을 맡을 자는 나중에 정하겠다. 벨린다는 집사장을 맡아 사용인들을 관리하도록. 가정 교사는…… 이제 그런 건 안 하는 게 나을 거 같아.”
“알겠어요.”
벨린다는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가정 교사 일에서 손을 떼는 건 좀 아쉽지만, 영주님을 모시는 사람들을 관리하는 일도 중요하니까.’
지셀은 길리언과 카오르에게도 당분간은 지금까지처럼 용병들을 훈련시키고 관리하는 일을 맡겼다.
이들을 위해서는 따로 생각해 둔 게 있었다.
가까운 수하들까지 챙기고 나서 지셀이 클로드를 돌아봤다.
“그러면 바로 일을 시작하지.”
“네? 벌써요? 저 아직 영지 사정도 파악하지 못했는데요?”
“그거야 일하면서 파악하면 되지.”
“아니……. 뭘 알아야 일을…….”
클로드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지셀이 명령을 내렸다.
“인구 조사부터 시작한다. 오랫동안 수탈받은 영지이니, 산으로 숨은 화전민들이 많을 거다. 하나도 빠짐없이 찾아서 마을로 내려보내도록.”
“아, 네…….”
“영지민들이 굶고 있으니 식량도 대량으로 수입해야지. 최소 6개월은 먹일 수 있게 준비해라.”
“인구 조사가 끝나야 6개월 치가 어느 정도인지 알 텐데……. 얼마나 사야 할까요?”
“그건 네가 파악해야지.”
“제가요?”
“그럼 내가 하리?”
“…….”
저렇게 말하면 클로드도 할 말이 없었다.
행정 업무는 전적으로 자신의 소관이 되었으니까.
지셀은 방향성만 제시해 주면 되는 일이었다.
다 언젠가는 해야 하는 일이 맞으니 클로드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지셀의 입에서 온갖 명령이 와르르 쏟아졌다.
“식량 수급도 개선할 계획이다. 경작지를 파악하고 추가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지 알아봐라.”
“노후한 시설물들을 파악해 먼저 정비해야 할 것들을…….”
“성벽과 성문을 보강할 테니 준비해라. 오면서 보니 엉망진창이더군. 군사들의 진입로를 우선으로…….”
“영지의 각 도시와 마을들을 잇는 도로를 정비한다. 페르디움에 있는 마수의 숲까지 연결…….”
“군수 물자의 현황을 파악하고 낡은 장비를 교체…….”
“멀쩡한 우물이 몇 개나 있는지 파악하고 수로를 건설할 거다. 저수조를 채우고…….”
“영지의 위생 상태도 개선해야지. 화장실도 다 뜯어고치고, 배수로를 확인해. 구덩이의 규격도 정해라. 지정된 자리에만 설치할 수 있게…….”
“창고를 건설하고…… 룬스톤을 비롯해 약재와 광석, 자재들을…….”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끝도 없이 늘어나는 일에 클로드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듣고 있던 다른 관리들도 마찬가지였다.
혹시나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봐 다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지셀은 지금 영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뜯어고치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그것도 클로드 단 한 사람에게.
지셀의 말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클로드는 생존 본능에 따라 번쩍 손을 들며 영주의 말을 끊었다.
일에 치여 죽느니 지금 매 맞는 게 낫지!
“저 혼자 하기엔 일이 너무 많은데요!”
지셀이 황당해하며 한쪽 눈썹을 들었다.
“인사권 줬잖아? 사람 뽑아서 시켜.”
“오.”
클로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 전만 해도 그를 쓰레기 보듯 하던 사람들이 지금은 하나같이 그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
클로드는 아무나 한 명 짚고 물었다.
“원래 뭐 하셨어요?”
“저는 그냥 군마 관리를…….”
“아, 그래요? 그럼 군수 물자 관리도 하실 수 있겠네! 저랑 같이 일을…….”
“제가 지병이 도져서, 슬슬 은퇴하려고……. 쿨럭! 쿨럭!”
클로드는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다 고개를 저었다.
지셀은 필요한 사람을 뽑아 쓰라 했지만, 뽑을 인물이 없었다.
고위 관료들은 전쟁에 참여한 죄로 지셀이 죄다 목을 날려 버린 지 오래였다.
그렇다고 하급 관리들을 윗자리로 올려서 쓸 수도 없었다. 모르는 일을 맡겨 봤자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비운 자리도 어차피 다른 누군가로 채워야 하고.
‘하긴, 쓸 만한 사람이 있었으면 날 여기까지 끌고 왔을 리도 없지!’
지셀이 직책을 잔뜩 맡길 때만 해도 일이 많을 건 예상했다.
하지만 이건 상상을 넘어서는 수준이었다.
어느 왕국의 재상이 와도 지셀이 맡긴 일은 다 못 할 것이다.
결국 클로드는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젠장! 결국 나 혼자 다 해야 하잖아! 못 해!”
그러자 지셀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에이, 해 봤어? 할 수 있다니까. 해 보고 말해.”
“동시에 진행해야 하는 일이 너무 많잖아! 하나씩 시키라고, 하나씩! 나도 사람이야!”
“안 돼, 그럴 시간 없어.”
지셀은 딱 잘라 말했다.
델파인 공작가가 왕실에 집중하는 지금 최대한 빨리 세력을 키워야 했다.
그러나 그 속사정을 모르는 클로드는 한번 해 보겠다는 마음이 싹 사라져 버린 뒤였다.
“나도 안 돼! 일에 치여 죽긴 싫다고! 죽일 거면 차라리 깔끔하게 목을 베라!”
클로드가 호기롭게 외쳤다. 지셀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보다 카오르에게 고갯짓했다.
카오르가 신이 나서는 검을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어, 어? 진짜 베려고?”
클로드는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도움을 청하려고 다급하게 주변을 둘러봤지만, 관료들은 하나같이 눈을 피하고 용병들은 오히려 도망갈 길을 막아섰다.
‘장난이 아니구나! 미친놈, 저거 사람 새끼 맞아?’
이미 몇 번이나 진짜 미친놈이라고 감탄한 거 같은데, 계속 더더욱 미친 짓을 한다.
저런 자에게 빚을 졌으니, 그의 인생은 여기서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평생 노예처럼 이 거지 같은 영지에서 일만 하다 죽게 생겼다.
퍽!
그 생각에 이르자 클로드는 머릿속에서 무언가 터지는 걸 느꼈다.
‘이 영지는 글렀어. 내 인생도 글렀고.’
충격적인 현실과 마주한 클로드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