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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93화 (93/269)

93화 그게 오늘이었어? (3)

구해 줬는데 고맙다는 인사는 대충 하고 술 좀 사 달란다.

길리언은 그 뻔뻔한 행동에 더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섰다.

“예의를 지켜라. 이분은 루타니아 왕국의 펜리스 남작님이시다.”

그러자 클로드는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나 원래 이런 꼴로 사는 놈인데. 마음에 안 들면 죽이든가.”

길리언은 인상을 찌푸리며 더 말을 잇지 않았다.

배 째라고 달려드는 태도가 묘하게 익숙했다.

지셀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도 저런 눈빛이었으리라.

두 사람을 지켜보던 지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에 지셀은 클로드와 오랜 시간을 보냈다.

클로드가 왜 저러는지는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지금은 굳이 예를 차리지 않아도 괜찮아.”

“지금은?”

클로드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지셀은 대답 없이 히죽 웃기만 했다.

하지만 지셀 본인이 괜찮다고 해도, 지셀을 따르는 자들은 불쾌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손목 잘릴 뻔한 사람을 구해 줬으니 엎드려 절을 해도 모자랄 판인데, 감사한 줄 모르고 뻗대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시간 낭비를 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대장은 저런 놈을 뭐 하러 만나러 온 거지? 그냥 도박 중독자 같은데.’

‘구해 준 사람한테 고마워할 줄도 모르고.’

지셀은 그 기색을 읽고 클로드를 옹호했다.

“이 친구가 지금 좀 힘들어서 그래. 큰일이 있었거든. 얘 많이 아파.”

그러자 클로드는 도리어 표정이 굳었다.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안다고? 대체 너 누구야?”

“뭐, 그냥 소문을 들었을 뿐이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

소문을 들었다는 말에 클로드는 더더욱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했다.

자신에 대한 소문이라 해 봐야 글 선생, 아니면 도박 중독자라는 것 정도다.

그런데 지셀은 클로드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아는 것 같았다.

“에헤이, 긴장하지 말라니까. 술 마시고 싶어? 그럼 내가 좋은 걸로 한잔 사 줄게.”

지셀이 괜히 친한 척하며 클로드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클로드는 얼굴을 구겼다.

건달 놈들한테서 겨우 풀려났는데, 이번에는 웬 이상한 귀족 놈이 달라붙었다.

빠져나가려고 시도해 봤지만, 맨손으로 검을 부러트리는 사람에게 힘으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클로드는 우거지상을 한 채 지셀에게 강제로 끌려갔다.

용병들은 입맛을 다시며 그 뒤를 따랐다.

지셀이 나서서 클로드를 옹호하니, 더 뭐라 할 수도 없었다.

단 한 사람, 벨린다만이 눈을 가늘게 뜨고 지셀의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상하단 말이야. 어디서 저렇게 특이한 사람들만 찾아내는지.’

지셀이 영입한 사람들은 전부 다 뭔가 부족하거나 모자란 사람들이었다.

일부러 하자 있는 사람들만 찾아다녀도 이 정도는 아닐 것이다.

‘하다 하다 이제는 도박 중독자야?’

벨린다는 지셀이 주변에 모아 놓은 사람들의 면모를 하나씩 떠올리다 한숨을 내뱉었다.

‘역시 도련님 주변에 정상은 나밖에 없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지셀 뒤를 종종 쫓아갔다.

자신도 절대 정상은 아니라는 사실은 깔끔히 무시한 채.

* * *

지셀은 클로드를 이끌고 화려하게 꾸며진 술집으로 들어갔다.

“다들 편하게 앉아서 한잔들 해. 나는 이 친구와 따로 얘기 좀 하지.”

용병들은 희희낙락하며 자리에 앉으려 했지만, 길리언이 그들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바로 조를 나눠 경계를 세우고, 취하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며 으름장까지 놓았다.

용병들은 불만 어린 표정을 지으면서도 길리언을 거역하지는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셀은 클로드를 잡아끌어 구석에 앉혔다.

고급술과 안주가 잔뜩 나오자 클로드의 눈빛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직접 보니 상태가 더 안 좋군.’

지셀은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대며 클로드를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손목이 잘릴 뻔했는데 그건 신경도 쓰지 않고, 겨우 술 하나에 격하게 반응한다.

정신적으로 상당히 망가졌다는 뜻이다.

“손목도 무사하고, 이런 고급술까지 얻어먹다니 오늘 내가 복이 터진 모양이야. 잘 마실게.”

클로드는 말을 끝내자마자 바로 술을 들이켰다.

지셀도 그와 속도를 맞추어 말없이 잔을 비웠다.

그들은 술이 떨어질 때마다 다시 주문해 가며 술을 목구멍에 들이부었다.

마나를 다룰 줄도 모르고 체력도 약한 클로드가 먼저 나가떨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얼굴이 불콰해진 클로드가 중얼거렸다.

“술을 잘 마시는군. 눈을 보면 술을 즐기는 성격 같지는 않은데 말이야.”

“있으면 마시고 없으면 안 마시는 정도지. 그래도 비싼 와인은 꽤 좋아해. 레드 드래곤 같은 거 말이야.”

“하, 왕도 마시기 힘든 걸 좋아한다고? 허세는……. 뭐 어쨌든 할 말이 있어서 구해 주기까지 한 거 아닌가? 왜 아무 말도 없어?”

지셀은 말없이 어깨만 으쓱였다. 클로드가 투덜거렸다.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도박이라도 알려 줘?”

“도박도 잘하는 사람한테 배워야지. 너한테 배우고 싶지는 않아.”

“제기랄, 반박할 수가 없네. 할 말 있으면 빨리 하고 꺼져. 왜 나를 찾아와서 구해 준 거지?”

지셀은 자세를 고쳐 앉고 클로드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빙빙 돌리는 대화는 좋아하지 않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너한테 영지의 행정을 맡기고 싶다.”

클로드는 제가 잘못 들었는지 의심하듯 잠시 눈만 깜박이다, 곧 배를 잡고 웃었다.

“으하하하, 도박 중독에다 술에 절어 사는 나한테 영지를 맡기겠다고?”

“그래.”

“와, 나도 미친놈 소리는 많이 들었지만 그쪽은 더 심각하네. 농담이지? 내가 누군지는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이게 내 용건이다. 제안을 받아들일지, 말지 선택은 네 몫이다.”

지셀은 더 말을 잇지 않고 술을 들이켰다.

황당해하던 클로드는 술을 몇 잔 더 들이켠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구해 준 건 고맙지만…… 솔직히 아무 의미 없는 짓이었어.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는 사람이거든.”

“…….”

“남은 게 아무것도 없어. 꿈도 없고 희망도 없지.”

클로드가 술잔을 벌컥 비우고 말을 이었다.

“옛날에는 나도 꼭 이루고 싶은 게 있었지……. 하지만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 이제는 돈도, 건강도, 지식도 모두 잃었어. 이렇게 쓸모없는 인간이 세상에 또 있을까.”

클로드의 눈빛이 점점 더 죽어 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잃고, 삶의 의욕마저 사라진 자만이 보일 수 있는 표정이었다.

“그래, 너를 따라가서 영지를 맡는 건 정말 좋은 일이야. 일자리도 얻고……. 거기다 제법 높은 자리잖아? 나 같은 놈이 감히 거절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

“…….”

“그런데 나는 여기를 못 떠나. 내 발목에는 족쇄가 채워져 있거든. 나는 여기서 이렇게 살다 죽어야 해.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야.”

“내가 그 족쇄를 끊어 주지.”

잠자코 클로드의 넋두리를 들어 주던 지셀이 툭 내뱉었다.

일말의 고민조차 없는 지셀의 태도에 클로드가 이를 악물었다.

“아직 젊어서 그런가? 세상 모든 일을 자기가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오만이야. 그게 얼마나 독이 되는지 아직 모르나 보네.”

지셀은 술잔을 탁 내려놓고 클로드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외양에 어울리지 않게 심유한 눈빛이었다.

“원하는 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룬다. 설사 그 결과가 죽음이라 해도. 그 외에는 생각할 필요 없지.”

클로드의 얼굴이 점점 분노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겁도 없이 지껄이는 모습이 마치 자신의 과거를 보는 것만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나도 그랬던 적이 있었지. 하지만 그 결과는 끔찍할 뿐이야. 좋아, 내가 널 따라가면 뭘 해 줄 수 있지?”

“원하는 걸 말해 봐.”

“돈. 아주 많이 필요해. 돈 많다는 귀족들도 부담스러워하는 금액이지.”

그러자 지셀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돈이면 돼? 그건 가장 쉬운 해결 방법인데. 더 필요한 건 없고? 누구 좀 죽여 달라든가.”

“까불지 마라.”

클로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세상 문제는 대부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 해결하지 못한다면 돈이 부족한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보통 이 말은 턱이 빠질 만큼 많은 돈을 들여야 하는 문제를 두고 하는 말이다.

클로드의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

믿기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저 애송이가 부리는 허세겠지.

이성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차가운 이성과는 달리 클로드의 눈빛은 점점 기이한 열망에 물들고 있었다.

모든 걸 잃고 나락까지 떨어진 인간의 눈앞에 한 줄기 빛이 보인다면, 그 사람은 어떻게 반응할까?

설령 그게 가짜더라도 한 번쯤은 붙잡으려고 시도해 볼 것이다.

클로드가 조금 빈정대듯 물었다.

“펜리스 남작이랬나? 그렇게 자신만만한 걸 보니 영지가 부자인가 본데……. 남작이 돈이 많아 봤자 얼마나 많겠어. 돈이 쉬운 문제라고 했지? 그렇게 돈이 많으면 나한테 좀 빌려줘. 아니, 내 몸값은 아주 비싼데 살 마음이 있어?”

옆 테이블에서 대화를 훔쳐 듣던 벨린다가 눈을 찌푸렸다.

사람도 구해 줘, 술도 사 줘, 영지 행정까지 맡긴다는데 거기다 돈부터 내놓으라니!

그것도 제 입으로 몸값이 비싸다고 뻔뻔하게 지껄인다.

보나 마나 뻔했다. 수작을 부려서 돈을 뜯어내고는 술과 도박으로 모조리 날려 버리겠지.

벨린다는 당연히 지셀이 거절할 거라 생각했다.

지셀은 호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약혼녀에게도 2만 골드를 뜯어내는 사람이 뻔히 보이는 수작에 넘어가겠는가.

하지만 지셀의 답변은 전혀 딴판이었다.

“좋아. 나는 네 생각보다도 돈이 많은 사람이거든. 얼마나 필요하지?”

아버지와 가신들이 그렇게 돈을 달라고 해도 쉽사리 주지 않았던 도련님이 저렇게 흔쾌히 대답하다니.

‘그냥 적선하는 셈 치려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지금이라도 말려야 하는 거 아냐?’

벨린다는 화를 삭이며 술을 들이켰다.

그런데 그다음으로 튀어나온 말은 더 놀라웠다.

“2천 골드가 필요해. 그만큼 줄 수 있어? 남작령이라면 만만치 않은 금액일 텐데?”

벨린다가 휙 두 사람 쪽을 돌아보았다.

지셀이 오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곤란해하는 듯도, 한심해하는 듯도 한 표정이었다.

클로드는 그 표정을 보고는 대놓고 그를 비웃었다.

“왜. 한 20골드 정도일 줄 알았어? 내가 너같이 허세 가득한 귀족을 한두 번 본 줄 알아? 표정 보니 빤하네, 지금 머리 복잡하지?”

벨린다는 더 못 참고 자리에서 일어나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봐요! 지금 장난해요? 한 몇 골드 달라고 할 줄 알았더니……. 얼마요? 2천 골드으?”

앞서 호언장담한 게 있으니 지셀 본인이 못 주겠다 하기는 어려웠다.

그의 체면을 깎아 먹는 일이니까.

벨린다는 지셀에게 거절할 핑계를 주기 위해서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 의도가 무색하게도, 지셀의 입에서는 그가 한 말이라 믿을 수 없는 대답이 튀어나왔다.

“5천이 아니라 2천 골드? 뭐야, 얼마 안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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