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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90화 (90/269)

90화 절반은 받아야겠습니다. (5)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룬스톤을 못 팔겠다니! 애초 약속하고 다르지 않은가! 우리가 왜 부담까지 지면서 마법사들을 파견했는데! 시세의 세 배까지 쳐주지 않았는가? 갑자기 이러면 곤란해!”

그러자 지셀은 자신도 매우 곤란한 처지라고 강조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시다시피 이번에 정말 큰일이 날 뻔하지 않았습니까? 아마 앞으로도 룬스톤을 노리는 영주들이 많아질 겁니다.”

휴베르트는 지셀을 죽어라 노려보았지만, 맞는 말이라 부정할 수가 없었다.

“소문이 난다면 노리는 영주들이 늘어날 수 있겠지.”

지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병력도 부족하고 물자도 부족합니다. 룬스톤을 팔면 돈이야 많이 벌 수 있겠지만 결국 그것도 한정된 자원이지요.”

“그러니까 그걸 우리한테 팔라니까? 정 그렇다면 내 시세의 다섯 배로 쳐주지!”

휴베르트가 다급하게 외쳤다.

하지만 지셀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돈을 확보해도 병력을 키우고 물자를 마련하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그사이에 누군가가 또 쳐들어오면요?”

“……또 전쟁이겠지.”

설마 그러겠냐고 생각하기엔, 이미 전쟁이 한번 예상보다 빠르게 터졌다.

휴베르트는 그 어떤 미래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지셀은 휴베르트의 반응을 확인하고 속으로 웃었다. 이래서 책상물림들이란.

“전쟁이 일어나면 룬스톤을 또 터뜨려야겠죠. 대군을 막으려면 방법은 그것밖에 없으니.”

휴베르트의 눈이 뒤집혔다.

“미쳤나? 룬스톤을 또 터뜨린다고? 그렇게 써 대다가는 금세 바닥나고 말 걸세!”

“어쩔 수 없습니다. 저라고 안 아깝겠습니까? 그 돈이면 병사도 키우고 시설도 더 좋게 만들고 영지를 엄청나게 발전시킬 수 있을 텐데. 그렇지만 전쟁에서 지면 다 헛일이죠. 도리가 없습니다.”

“아,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 말게!”

“제가 룬스톤을 팔아서 영지가 멸망하는 건 말이 되고요?”

“이이익…….”

휴베르트는 대꾸할 말이 없어 이만 악물었다.

지셀의 말에는 틀린 점이 없었다.

영지의 존망이 걸려 있는데 돈이나 벌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도 어떻게든 설득해야 했다.

룬스톤이 없다면 적염의 마탑도 망하고 말 테니까.

“그럼 룬스톤을 판 돈으로 병력을 마련해서…….”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대답했지만, 지셀이 콧방귀를 뀌었다.

“하, 탑주님. 어느 세월에 수천의 병력을 모은단 말입니까? 병사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닙니다. 우리 영지는 인구도 적다고요.”

“용병을 고용하면 되지 않겠나.”

“제가 저번에 룬스톤 판 돈으로 북부를 죄다 돌며 용병을 고용했는데, 그게 고작 삼백 명이 조금 넘습니다. 그전에도 이미 이백 명 가까이 고용해서 지금 용병은 씨가 말랐어요.”

“아니, 그 정도면 충분한 거 아닌가?”

“적은 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많은 것도 아니죠. 이번에도 수천 명이 쳐들어왔었는데요.”

“…….”

지셀은 짐짓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저도 돈 좋아하고, 이거 다 팔고 싶습니다.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좋은 거래 이어 가고 싶다고요. 그런데 영지가 멸망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휴베르트는 눈앞이 다 아득해졌다.

그렇다고 영지를 팔고 다른 곳으로 가라는 말도 할 수 없었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팔면, 어딜 가든 불명예스러운 자들이라 손가락질당할 터였다.

아니, 그 이전에 페르디움을 떠나면 룬스톤도 사라진다.

“우, 우리가 보증을 서고 최대한 도와주겠네! 룬스톤을 왕실에 상납하고 보호받는 건 어떤가?”

휴베르트가 생각나는 대로 이것저것 해결책을 늘어 놓았다.

“아니면 다른 영주들과 동맹을 맺고 연계하는 건? 신전과 붙는 것도 괜찮고. 델파인 공작의 봉신이 되어도 안전할 거야!”

지셀은 마지막 말에 반사적으로 코웃음을 치려다 참았다.

그들이 적이라고 밝힐 수는 없었다. 그러면 마탑도 바로 태도를 바꿀 테니까.

“그것도 어느 정도 효과가 있겠지요. 하지만 그건 다른 영주들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전쟁에서 이긴 뒤 룬스톤을 바치겠다고 하면 어느 누가 말리려 들겠습니까.”

지셀이 부러 씁쓸한 표정을 연기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도 정말 많이 고민해 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습니다. 어차피 계속 벌어질 전쟁, 쳐들어올 때마다 룬스톤을 터트리는 수밖에요.”

결국 휴베르트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마법사! 마법사들을 더 보내 주겠네! 왕실도, 다른 영주도, 신전도 다 싫으면 우리가 도와줄게!”

그 순간, 지셀은 저절로 치솟는 입꼬리를 손으로 황급히 가렸다. 연기를 하려면 끝까지 해야지.

“아……. 생각해 보니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적염의 마탑에서 강력한 마법사들을 보내 준다면 안심이지요. 그런데 괜찮으시겠어요?”

“어차피 이미 마법사들을 파견했으니, 한배를 탄 상황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언젠가 소문이 나면 결국 영주들도 알게 될 거고.”

“그래도 아직 안 걸리지 않았습니까?”

휴베르트가 지셀을 쏘아봤다.

“소문나지 않을 거라고……. 아니, 소문내지 않을 거라고 맹세할 수 있나?”

“아니,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제가 그럴 사람입니까?”

지셀이 억울한 척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휴베르트의 매서운 눈초리는 떨어지지 않았다.

룬스톤을 폭발시키려면 마법사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페르디움 같은 마법사라곤 찾아볼 수 없는 데서 그런 폭발이 일어났으니, 여기에 마법사가 있다고 광고하는 꼴이었다.

분명 파고드는 사람이 나올 거고, 그렇게 되면 언제 마법사들의 정체가 걸릴지 모른다.

핑계를 대면 어찌어찌 빠져나갈 수 있겠지만…….

휴베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룬스톤을 사고 싶었을 뿐인데 뭔가 이놈하고 엮일수록 일이 이상하게 꼬이는 느낌이었다.

그러자 지셀이 그를 안심시키듯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절 뭐로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저도 적염의 마탑과 오래오래 같이 가고 싶습니다.”

“말은 잘하는군.”

지셀이 못 들은 척 말을 돌렸다.

“위험을 무릅쓰고 마법사들을 더 보내 주신다니, 마탑주의 결단에 감동했습니다.”

“크흠, 그러면 룬스톤은 예정대로 파는 건가?”

그러자 지셀은 은근히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이왕 위험을 부담하시는 거, 조금 더 쓰시죠?”

“뭐? 뭘 더 써?”

휴베르트가 반문하자 지셀은 진지하게 표정을 굳혔다.

“우리 영지에 마탑의 지부를 세우시는 거죠.”

“뭐? 지부?”

휴베르트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지부 같은 걸 세우지 않네. 아니, 대륙의 모든 마탑이 그렇지. 마탑뿐만 아니라 초월의 경지를 엿보는 모든 단체가 그렇네. 그 정도는 귀족인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비전을 공유한 자들이 한곳에 모여 서로 도우며 수련해야 경지를 더 빨리 높일 수 있다.

세력을 키우겠다고 여기저기 흩어져 버리면 오히려 더 약해질지도 모른다.

자신들만의 비전을 외부로 유출하지 않으려는 이유도 컸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마법사들을 추가로 더 파견해 주신다면 아예 지부를 세우는 것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정식으로 지부를 세우는 건 마탑의 설립 의도에 어긋나는…….”

“마법사들을 파견한 게 소문날까 봐 불안하시잖습니까. 지부를 세우면 그런 논란을 피할 수 있습니다.”

“뭐?”

“마탑이 있는 영지라 교류하는 거고, 보호한다는데 다른 자들이 뭘 어쩌겠습니까?”

휴베르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지금까지 그런 사례가 없었기에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그러네. 룬스톤도 가까이서 받을 수 있고 ……. 적당히 몇 명 보내서 지부인 척 꾸미면 될 거 같은데?’

지부를 세우면 되는 것을, 왜 그동안 생각하지 못하고 살았을까?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관습을 어겨서는 안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정치 세력과 결탁하지 않고 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 누구의 편도 들지 않지만 누구와도 적이 되지 않는다. 스스로의 경지를 올리는 것에만 정진한다.

처음 마탑을 세웠던 자의 뜻이 오래도록 이어져 내려오면서 불문율이 되었다.

모두가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들과 손을 잡으려는 이들도 없었다.

‘하지만 옳은 일이라고 모든 상황에서 옳은 건 아니지 않은가?’

전통과 관습이라는 말은 종종 사람을 얽매는 고정 관념이 되곤 한다.

그런데 지셀 페르디움에게서는 그런 게 전혀 보이지 않았다.

복잡한 것도 단순하게 풀어 버리고, 제 편한 대로 밀어붙인다.

좋게 말하면 깨어 있는 사람이고 나쁘게 말하면 관습을 무시하는 짐승 새끼다.

하지만 위기에 몰린 적염의 마탑을 되살리려면 지셀처럼 자유로운 사고방식이 필요했다.

전통과 관습을 지키려다 고사당하느니, 뻔뻔하다고 욕 좀 들을지언정 살아남는 편이 훨씬 낫다.

휴베르트는 상념을 이어 가다 상대방의 말소리에 금세 정신을 차렸다.

“싫으시면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세력을 키우고 안전해졌을 때 룬스톤이 남아 있으면 다시 찾아오죠.”

지셀이 돌아가려는 듯 몸을 일으켰다.

휴베르트는 이제 놀라지도 않고 냉큼 일어나 문을 가리고 섰다.

“에이, 지금까지 그랬다는 거지. 탑주인 내가 그렇게 하겠다면 하는 거야. 어차피 몇 명 더 보내는 거, 전에 보낸 놈들까지 해서 지부를 세우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알포이 녀석 후계자 수업도 시킬 겸.”

마법사들은 마탑에 충성하기보다는 개인의 성취를 우선하는 족속들이다.

룬스톤 공급을 계속 못 받으면 마탑이 망할 텐데, 그렇게 되면 선대의 뜻이고 지랄이고 무슨 소용인가.

이 부분을 설득하면, 장로들이나 일반 마법사들도 군말 없이 동의할 게 당연했다.

“너그러운 결정에 감사드립니다.”

지셀은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목적은 이뤘군.’

마법사들을 영입하면 영지를 보호하고 개발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도 용병인 것처럼 속여 고용했던 때와는 달리, 당당하게 지원을 받을 수 있다.

마법사는 기사보다 더 육성하기 힘든 인재다.

지셀이 아무리 미래를 알고 있다 한들, 직접 마법사를 키우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마탑을 찾아온 것이다.

‘룬스톤을 터트리긴, 아깝게 내가 그걸 왜 또 터뜨리냐?’

앞으로 그가 세운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면 룬스톤이 굉장히 많이 필요하다.

적도 바보가 아닌 이상 같은 함정에 두 번은 당하지 않을 거고.

“크흠, 일단 지부를 세우는 건 처음이라 좀 알아보고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네.”

“그거야 당연하지요. 알겠습니다.”

“페르디움에 적당한 땅은 있는가? 아무리 지부라 해도 마탑이 생기면 사람이 몰릴 걸세. 넓고 교통이 좋고 산수도 좋고 땅도 좋아야 해.”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마탑의 주변 환경은 마탑의 자존심이나 마찬가지였다.

지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시는 자리로 드리죠. 그런데 페르디움이 아닙니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자기 영지로 오라더니 페르디움이 아니라고?

이놈이랑 대화하면 도무지 어느 쪽으로 튈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럼 어디로 오라는 말인가?”

지셀이 씨익 웃으며 답했다.

“펜리스 남작령. 제가 영주로 있는 곳입니다.”

“영주? 자네가 영주우?”

이놈이 영주라니, 왕국이 망할 징조인가?

휴베르트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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