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절반은 받아야겠습니다. (3)
“우리가…… 패배했다고?”
보고를 받고 해럴드는 얼굴을 시뻘겋게 붉혔다. 한쪽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어지러울 정도로 분노가 치밀었다. 그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입만 뻐금거렸다.
“후우우우…….”
해럴드는 가빠 오는 숨을 가라앉히려고 억지로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의 앞에는 기사들과 병사들이 앉아 있었다.
다들 화상을 입어 언제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는 모양새였다.
패잔병들이 오자마자 참모들이 정리한 보고서를 받았지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생존자들을 직접 불렀다.
패배라니! 북부에서 누구보다 강하다고 자부하던 데스몬드의 군대가 패배했다고?
그것도 페르디움의 병력 따위 가뿐히 뛰어넘을 압도적인 숫자였는데 말이다.
“도대체 어쩌다 패배한 거냐! 불의 마법? 함정? 수천의 병사를 태울 정도의 마법을 부릴 수 있는 자가 이 왕국에 누가 있다는 말이냐!”
해럴드가 목소리를 높였다.
기사들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직접 당한 사람들도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이해할 수가 없는데, 영지에 있던 자들이 이해할 리가 없었다.
다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꼴을 보고 해럴드는 강한 분노를 토해 내었다.
“이 멍청한 새끼들! 그 많은 병력이 전멸했는데 뭐에 당했는지도 모르고 돌아왔다는 말이냐? 빅토르! 빅토르는 어떻게 됐느냐!”
일찌감치 전장에서 도망간 자들이 빅토르가 어떻게 됐는지 알 리가 없었다.
콰아앙!
여전히 이어지는 침묵에 해럴드는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쳐 박살을 냈다.
아끼고 아껴 키웠던 빅토르마저 행방불명이 됐다.
전쟁에서 행방불명되었다는 건, 포로로 잡혔거나…… 죽었다는 뜻이다.
빅토르 정도 되는 인물을 위험하게 살려 두었을 리가 없으니, 아마 죽었을 가능성이 컸다.
일반병에 비해 육성하는 데 오래 걸리는 공병대를 잃은 것도 아깝지만, 병사들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기사들까지 수십이나 잃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뼈아픈 건 빅토르라는 걸출한 인재를 잃은 것이었다.
“도대체 누가……!”
해럴드는 페르디움을 확실히 밟아 버리기 위해서 전쟁 전 그들의 전력을 낱낱이 분석했다.
압도적인 병력에 마법사까지 붙여서 보냈다.
생존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분명 페르디움의 전력은 전쟁 전에 파악한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심지어 물자의 양도 예측한 것과 맞아떨어졌다.
그렇다면 예측을 뛰어넘을 만큼 치명적인 변수가 있었다는 뜻이다.
해럴드는 보고서를 다시 펼쳐 보았다.
“역시 이놈들인가.”
보고서에는 ‘검은 부대’의 활약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해럴드는 보고서에 적힌 전장의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검은 부대’는 지휘관이 해럴드 자신이었더라도 당했겠다 싶을 만큼 허를 찌르는 방식으로 움직였다.
예측할 수 없는 과감한 움직임은 숫제 야수를 보는 것만 같았다.
‘우연이다. 우연이야, 우연……. 페르디움에 그런 인물이 있을 리가 없다.’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지만, 해럴드는 ‘검은 부대’의 활약이 우연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우연이라 치부하기엔 마지막에 준비한 함정이 너무나도 효과적이었다.
‘그런데 그런 마법을 대체 어떻게…….’
왕국에 단 두 명뿐인 7서클 마법사도 그런 어마어마한 마법은 시전하지 못한다.
해럴드는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짜증과 분노로 깊게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가면 갈수록 그의 얼굴은 무표정하게 굳어 갔다. 그걸 본 데스몬드의 가신들과 참모들은 백작의 곁에서 슬금슬금 멀어졌다.
해럴드는 철저하고 냉정한 사람이었다. 평소 흥분하는 일이 거의 없었고, 실수한 부하를 가차 없이 죽이곤 했다.
처음 보는 모습으로 화를 내는 것도 두려웠는데, 점점 싸늘해지는 걸 보니 어쩌면 전쟁에서 진 책임을 물어 자신들을 모조리 죽이려 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우……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해럴드가 보고서에서 눈을 떼고 가신들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실패를 만회할 생각은 안 하고 도망부터 치는 꼴들이라니.
차라리 저번에 죽였던 놈이 더 나았다.
‘시간 여유만 있었다면 정말로 다 죽여 버렸을 텐데.’
해럴드는 짜증을 삼키며 가신들과 참모들에게 명령했다.
“레이폴드의 움직임에 대비해야 한다.”
당장은 아니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폴드도 대략적인 상황을 알게 될 것이다.
호시탐탐 북부를 평정하려고 때만 노리는 레이폴드 백작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북부에서 수위를 다투는 데스몬드지만, 병력을 잃은 지금 당장은 레이폴드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아멜리아의 반란을 앞당길 것이다. 당분간 다른 일은 모두 뒤로 미룬다. 오직 그 일에 최우선으로 전념해라.”
“아, 알겠습니다.”
새빨갛게 충혈된 해럴드의 눈을 보고 참모들은 고개만 숙였다.
만약 여기서 한 마디라도 반박했다가는 바로 목이 날아갈 테니까.
하지만 해럴드의 구겨진 미간은 펴질 줄 몰랐다.
‘엉망이군.’
반란을 앞당길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급하게 진행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전쟁에서 패배한 여파로 모든 상황이 다급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계획이 하나하나 다 어긋나고 있다는 생각에 해럴드는 찜찜함을 털어 버릴 수가 없었다.
“공작가에서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텐데.”
암살 건은 애초에 영지전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크지 않았고, 실패하더라도 다른 대안이 많았기에 괜찮았다.
하지만 영지전에서 페르디움에 지고, 병력까지 크게 잃은 것은 해럴드의 능력을 의심받을 만한 큰 실수였다.
자신만 한 인재도 드무니 실수 한 번에 바로 목숨을 잃지는 않겠지만, 이전보다 위험한 처지에 놓인 건 확실했다.
델파인 공작은 무도할 정도로 잔인하니까.
그리고 매번 홀연히 나타나 공작을 도와주는 자들도.
‘공작도 문제지만, 특히 그놈들이…….’
왕국을 전복시키는 계획은 다 그놈들이 나타난 뒤부터 시작됐다.
이번 일에 실패하면 그들도 손해를 입을 터.
그렇다면 손해를 본 놈들은 자신을…….
‘아니, 아니지.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무슨 짓을 해서 대영주 자리까지 올랐는데, 이대로 쓰러질 수는 없었다.
설득해야 한다. 아직 레이폴드가 남았다고, 그 일은 반드시 성공시키겠다고 하면 된다.
‘전쟁에서 이겼다면 세력을 더 키울 수 있었을 텐데. 빅토르만 있었어도…….’
해럴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비틀거리며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 * *
냐앙.
아멜리아는 마차에 앉아 강아지풀을 흔들며 바스테트와 놀아 주고 있었다.
바스테트는 강아지풀을 잡겠다고 깡충깡충 뛰어올랐다.
상냥한 미소를 지은 채 고양이를 바라보던 그녀는 곧 작게 하품을 내뱉었다.
“좀 지루하네.”
페르디움에서도 전령을 보내기를 포기했는지 더 이상 나타나는 자는 없었다.
그래도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기에, 아멜리아는 여전히 페르디움으로 드나드는 길목을 틀어막고 있었다.
자리를 비운 시간이 조금 길어지기는 했지만, 딱히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이런저런 사교 모임에 자주 참석하는 편이라, 본래도 성에 머무는 시간보다 밖에 나가 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자유로운 행동을 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쌓아 온 이미지가 이럴 때는 도움이 된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지?”
강아지풀을 무료하게 흔들다 말고 아멜리아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 정도 전력이면 이미 결과가 나와야 하는데 일주일이 넘도록 소식이 없다는 건 좀 이상했다.
“정말 무슨 일이 생겼나 보네.”
그녀는 디갈드 보급 부대를 기습한 게 지셀이라고 확신하자마자 전장에 사람을 보냈다.
그 미친놈이 무슨 짓을 벌이는지 알기 위해서.
그때, 베르나프가 마차 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세작들이 돌아왔습니다.”
베르나프의 뒤로 몇 사람이 머뭇머뭇 아멜리아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초췌하고 꾀죄죄한 몰골로 그만큼 지저분한 보고서를 내밀었다.
오면서 급하게 작성한 보고서라 글씨는 알아보기 힘들 만큼 삐뚤거렸다.
아멜리아는 정리된 문서로 보고받는 걸 좋아하기에 부랴부랴 작성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보고서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아멜리아는 너저분한 종잇장을 보고 인상을 잠깐 찌푸렸지만, 별말 없이 보고서를 넘겨받아 읽기 시작했다.
종이를 넘기는 손이 몇 번이나 멈췄다.
이내 아멜리아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자세히 얘기해 봐.”
세작들은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손짓, 발짓 다 하며 전쟁 과정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베르나프는 그 모습을 보며 살짝 뒤로 물러났다.
‘화내는 것도 예쁘지만……. 나한테 화내는 건 싫으니까 피해야지.’
아멜리아는 지셀에게 돈을 뜯긴 이후로 그에 관한 일에는 과할 정도로 화를 내고 신경질적으로 굴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으리라.
바스테트도 베르나프의 움직임과 아멜리아의 분위기를 보고 눈치껏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흐음……. 그래?”
그런데 베르나프의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을 뿐 별말 하지 않았다.
아멜리아는 잠시 고민하다 베르나프에게 물었다.
“어떻게 이런 함정을 만들었을까? 병사 수천 명을 단번에 집어삼킬 정도의 마법 말이야. 그 정도의 마법사가 있었어? 애초에 페르디움이 그럴 만한 여력이 있던가?”
“7서클 마법사라도 힘듭니다. 그들이 이 정도 마법을 쓸 수 있었다면, 7서클 마법사를 확보하자마자 델파인 공작이 왕국을 뒤집었을 겁니다. 그 정도 위력을 내려면 최소 8서클 이상은 되어야 가능하지 않을까요.”
“그렇지. 왕궁 마법사도 이런 일은 못 할 거야. 그럼 누가 이런 엄청난 마법을 쓴 거지?”
“단신으로 그런 게 가능한 자는…… 역시 ‘세계수의 수호자’나 ‘망자들의 주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자 아멜리아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확실히 그들이라면 단신으로 그런 이적을 일으킬 수 있겠지만, 그들이 페르디움을 도와줬을 리가 없었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해 살아가는 그들이 뭐 하러 이런 촌구석 영지에 나타나겠는가.
그때, 아멜리아의 입가에 돌연 만족스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알겠다.”
“뭘요?”
“페르디움 따위가 그런 대단한 마법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었는지 말이야. 방법은 하나뿐이지.”
“그게 뭔데요? 어? 설마…….”
“룬스톤이야. 룬스톤을 잔뜩 쓴다면 가능할 거야. 땅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니, 미리 룬스톤을 묻어 놨겠지.”
베르나프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 폭발이라면 룬스톤을 어마어마하게 썼다는 건데……. 그게 말이 됩니까? 그만한 양이면 페르디움의 수십 년 치 예산과 맞먹습니다. 그걸 함정에 다 쏟아붓다니요.”
황당하고 무식하기 짝이 없는 방법이다.
하지만 지셀은 상식을 벗어난 짓을 거리낌 없이 하는 놈 아닌가.
“아니, 그 미친놈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어. 그렇지, 그래야지. 이제 그 정도의 손해는 감당할 만하다는 거지?”
아멜리아는 자신보다 지셀을 잘 파악한 사람은 없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지셀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보통 사람의 상식에 맞춰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다시 보고서를 훑어보며 머릿속으로 상황을 그리던 그녀는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로 빠르게 부대를 훈련시키고 움직였다고? 그 망나니한테도 이런 능력이 다 있었네. 아니면 다른 조언자나 인물이 있는 건가? 어쩌면 내가 좋은 남자를 놓친 걸지도 모르겠어.”
베르나프가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아멜리아는 가볍게 무시하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확신하기에는 아직 정보가 부족했다. 조금 더 정보를 수집하고 지켜봐야 했다.
“돌아가자. 여기 더 있을 필요는 없어. 그리고 애들 당장 다 모아서 대기시켜.”
뜬금없는 명령에 베르나프는 멍청하게 되물었다.
“병력을 모으라고요? 어째서입니까?”
“데스몬드가 개작살이 났는데 우리 아빠가 가만히 있을 거 같아? 그 멍청하고 욕심만 많은 늙은이가 그럴 리 없잖아.”
“…….”
“분명 정보가 들어오는 대로 꼬투리를 잡아서 데스몬드를 치려고 할걸? 우리의 동맹인 페르디움을 건들다니! 내가 조금 늦게 알았지만, 지금이라도 용서하지 않겠다! 뭐 그런 핑계를 대면서 말이야.”
긍정도 부정도 못 하고 있던 베르나프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거랑 우리 애들 모으는 거랑 무슨 상관이…….”
“베르나프, 내가 항상 생각을 하라고 했지? 해럴드의 병력이 날아갔잖아. 그것도 상당수가. 지금 아빠가 군사를 일으키면 어떻게 되겠어?”
베르나프가 멀뚱히 있자, 아멜리아가 한숨을 쉬며 덧붙였다.
“그걸 해럴드가 모를까? 해럴드는 음흉하지만 멍청한 인간은 아니야. 그렇다면 해럴드가 어떻게 하겠냐고.”
“공작가에 지원을 요청하지 않을까요?”
“아니지. 지금 공작이 왕실을 압박하는 중이잖아. 공작가에서 군사를 일으키면 왕실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아. 일이 너무 커지게 돼.”
“어, 그러면?”
“그래, 내 반란을 더 빨리 진행하겠지. 걔네는 이제 남은 방법이 없거든. 덕분에 나는 반쪽짜리 레이폴드를 얻겠군.”
반란이 급히 진행되면 영지의 피해도 커질 것이다. 그러면 온전한 영지를 차지하지 못하게 된다.
아멜리아는 불만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폴드가 망가지는 것도 아쉽지만, 지금 더 속이 끓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지셀, 이번에는 정말 죽을 줄 알았는데 결국 또 살아남았구나. 이 정도면 이제 운이라고만 할 수는 없겠네. 징그러운 새끼.”
자존심 때문에 부정해 왔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셀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속에서 분노가 끓어올랐지만, 그럴수록 그녀는 침착하게 굴려고 애썼다.
상대가 강할수록 그녀도 더욱더 냉정해진다.
이게 바로 지셀이 경계하던 아멜리아의 진짜 모습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놈은 시간을 꽤 번 셈이네. 데스몬드는 기세가 꺾였고, 공작은 더 중요한 일로 바쁘니까 당장 지셀을 건들지 못할 거야.”
“역시 전쟁 전에 치는 게 나았을까요?”
“글쎄…….”
베르나프의 물음에 아멜리아는 잠시 고민했다.
그때는 확신했지만 지금은 확신할 수 없었다.
“일단 레이폴드부터 차지하고 생각해 봐야겠어.”
“그냥 이제 신경 끄고 내버려 두는 건 어떻습니까? 어차피 페르디움은 공작가가 나중에 처리할 거 같은데요.”
아멜리아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지셀을 반드시 죽이고 싶긴 하지만, 다른 해야 할 일이 많다.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그래, 일단은 내버려 둬. 해럴드와 델파인 공작에게 찍혔으니 어차피 죽겠지. 우리는 우리 일에 집중한다.”
레이폴드 백작 자리가 끝이 아니다. 그건 시작일 뿐이다. 그녀에게는 더 큰 야망과 목표가 있었다.
“물론 기회가 오면 반드시 내가 작살내 버릴 거야.”
마지막 말을 내뱉는 아멜리아의 낯빛은 그 어느 때보다 서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