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절반은 받아야겠습니다. (2)
“땅을 달라고?”
즈발터가 당황해 되물었다.
아니, 땅이야 못 줄 것도 없다.
본래도 영주가 신하들을 치하할 때는 돈이나 영토를 주곤 하니까.
페르디움에는 돈이 없으니 땅이라도 달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요구였다.
그래도 그렇지, 백작령의 절반을 달라니!
아무리 디갈드가 작은 영지라고는 하지만 그건 다른 백작령에 비해서다.
백작령인 이상 반절이라도 우습게 볼 만한 크기가 아니었다.
다른 가신들도 말도 안 되는 요구에 당황해 눈만 끔뻑거렸다.
“들어와라.”
지셀이 가볍게 신호했다. 그러자 용병 두 명이 대전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호메른이 남몰래 인상을 구겼다. 이놈들은 대전이 무슨 동네 여관인 양 마음대로 들락거린다.
‘대공자만 아니었어도…….’
그가 속으로 투덜대거나 말거나, 용병들은 한순간도 머뭇거리지 않고 지도를 펼쳐 들었다.
누가 봐도 아예 작정하고 준비를 한 모양이었다.
“에헴, 설명을 시작하겠습니다.”
지셀은 어디선가 얇은 지휘봉까지 슬그머니 꺼내서는 지도 곳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디갈드 백작령은 직할령을 제외하고 총 다섯 개의 남작령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중 펜리스 남작령을 중심으로 그 북쪽과 남쪽에 있는 남작령까지 총 세 개 영지를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설명이라더니, 어디를 가져가겠다고 시원하게 통보하고 있다.
즈발터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날카로운 눈으로 지도를 노려보았다.
지셀이 말한 세 개의 영지는 디갈드 백작령의 남쪽과 동쪽에서 다른 영지와 인접한 위치였다.
즉 최전방 지역을 가져가겠다는 뜻이었다.
“그곳을 원하는 이유가 있느냐?”
즈발터가 묻자 지셀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이곳은 다른 영지들과 인접한 경계 지역이죠. 제가 이곳을 방어하겠습니다. 레이폴드가 페르디움을 공격하면 제가 따로 옆구리를 칠 수 있습니다.”
지셀이 지휘봉으로 지도에 그려진 페르디움의 남쪽 영지를 툭툭 쳤다.
페르디움의 남쪽, 디갈드의 동쪽에 붙어 있는 영지에는 레이폴드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레이폴드? 갑자기 거기는 왜?”
“그쪽도 데스몬드와 별다른 거 없습니다. 룬스톤이 소문나면 눈독을 들일 게 분명합니다.”
지셀은 레이폴드를 이미 적으로 상정한 상태다.
아멜리아가 결국 레이폴드를 차지할 게 뻔했으니까.
솔직히 그쪽에도 개입하고 싶지만, 더 중요한 일들이 쌓여 있어 좀처럼 여유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레이폴드가 적이 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세워야 했다.
다른 이들은 그런 사정을 몰랐지만, 지셀의 이야기가 허황된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셀이 아멜리아에게서 돈을 뜯어 온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짐바르는 레이폴드를 거쳐 가야 하니 바로 견제하지는 못하겠지만, 그쪽이 쳐들어오면 이곳에서 언제든지 페르디움 쪽으로 지원을 나갈 수 있습니다.”
“정식으로 군사를 키우겠다는 말이냐?”
“네, 용병들만 데리고 움직이기엔 한계가 있으니까요.”
즈발터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내비쳤다.
“너는 어차피 이곳을 물려받을 후계자다. 디갈드까지 병합한다면 이제 페르디움은 작은 영지라 할 수 없고. 더 큰 영지에서 경험을 쌓을 생각은 없느냐?”
“그러기에는 북부의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제가 좀 더 자유롭게 움직이는 편이 낫습니다.”
영토를 받는다면 지셀은 페르디움의 대공자인 동시에 영주인 펜리스 남작이 되는 것이다.
아무리 큰 영지의 대공자라도 영주와는 비교할 수 없다.
“영지를 다스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곳은 전쟁의 후유증으로 페르디움보다 더 상황이 안 좋을 것이다. 게다가 너에게 충성을 바치는 기사도 없지 않으냐? 관료들이야 몇 명은 남아 있겠지만, 기사는 돈으로도 쉽게 구할 수 없다.”
“괜찮습니다. 그 부분은 제가 생각해 둔 바가 있습니다.”
“으음, 하긴 네가 순순히 내 말을 들은 적이 없지.”
즈발터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영지를 다스리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싸움만 잘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돈이 많다고 쉬운 것도 아니다.
책임감과 신념, 능력까지 겸비해야 영주 자리에서 버텨 나갈 수 있다.
영지민을 착취하는 악덕 영주가 된다면야 힘들 일도 없겠지만, 지셀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럴 기미만 보여도 즈발터가 용납하지 않을 테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디갈드 영지는 페르디움처럼 야만인과 마수의 숲을 경계해야 하는, 밑 빠진 독 같은 위치는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 그거면 되겠느냐?”
“네, 행정 인력이 부족하니 당장은 그 정도가 적당합니다. 남작령 세 개를 펜리스 영지 쪽으로 통합시켜 다스릴 생각입니다.”
“허허, ‘당장은’이라니…… 얼마나 욕심이 큰 게냐.”
젊은 나이에 그런 큰 공을 세워 남작령을 세 개나 가져가면서,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한다.
저 끝없는 배포에는 정말 따라갈 수가 없었다.
‘스스로 최전방에 서겠다는 마음은 대견스럽긴 하다만.’
남작령 세 개는 작지 않은 크기였지만, 어차피 전쟁에서 이기지 않았으면 얻지도 못했을 영토였다.
지셀은 차후에 페르디움 전부를 물려받을 후계자이니 미리 영지를 다스리는 경험을 쌓아도 좋을 터였다.
거기 사는 영지민들이 조금 걱정되지만……. 즈발터는 그래도 아들을 믿었다.
설마 이제 와서 망나니처럼 굴지는 않겠지.
만약 영지 상태가 영 시원찮다면 차후에 개입하면 될 일이었다.
“그대들 생각은 어떤가?”
“…….”
가신들은 한숨만 내쉴 뿐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요즘 계속 이런 식이다. 언제부터인지, 대공자가 하는 짓을 이해하고 따라가기가 버거웠다.
‘상의도 없이 항상 통보만 하니 의견 교류가 안 되잖아!’
‘룬스톤을 쥐고 있으니 반대하고 싶어도 못 하고, 설득하고 싶어도 안 되고.’
‘영주님도 사실 똑같은 심정이겠지만…….’
가신들은 즈발터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는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듯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마 아들은 말릴 수 없으니 포기하고, 가신들에게 동의라도 받고 마음이라도 편해지자는 심정일 테다.
고민하던 호메른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나섰다.
“그냥 대공자님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시지요.”
영주로서의 재능은 모르겠지만, 전쟁에서는 충분히 능력을 보여 줬다.
여기서 반대해 봤자 반대한 사람 꼴만 우스워진다.
애초에 호메른도 놀랐을 뿐, 크게 반대하려는 생각은 없었다.
지셀에 대한 인식이 점점 바뀌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직 걱정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계속 지셀을 예전처럼 망나니 취급할 수는 없었다.
이번 전쟁을 통해 지셀에 대한 반감이 상당히 사라지기도 했고.
다른 가신들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공을 세웠으면 보상이 있어야 마땅하지요. 봉토를 수여하는 것도 합당하다고 봅니다.”
“누군가는 어차피 맡아야 하는 곳입니다.”
“남은 장원들의 분배만 신경 쓰면 될 거 같습니다.”
“영지를 위기에서 구했으니, 그 정도 보상은 과하지 않습니다.”
“대공자님도 이제 예전과 같은 사고뭉치가 아니니 한번 믿어 보셔도 될 거 같습니다.”
제멋대로에, 사고 먼저 치고 나중에 통보하는 건 여전하다.
하지만 대공자의 변화에 조금이나마 믿음이 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알버트도 나름대로 이유를 들어 동의를 표했다.
“어차피 대공자가 아니었으면 얻지도 못할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희 역량으로는 디갈드 영지를 모두 장악할 수도 없습니다.”
페르디움은 행정력이 부족한 탓에 갑자기 늘어난 땅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없었다.
그대로 방치하게 될 바에야 돈 많은 대공자가 알아서 하게 절반을 맡기는 게 나았다.
지셀을 가만히 보던 란돌프가 마지막으로 찬성표를 던졌다.
“대공자의 실력은 어느 정도 검증이 됐습니다. 너무 위험하게 움직여서 문제긴 하지만요……. 아무튼 그 정도 실력이라면 대공자에게 남쪽을 맡겨 봐도 괜찮을 거 같습니다. 데스몬드가 우리를 노리고 있어도 북방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가신들 스스로도 사실 이미 결정된 거나 다름없는데 이런 말을 해서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지만, 그래도 모양새라는 게 있었다.
영주인 즈발터나 가신들이 그나마 체면을 살릴 수 있는 길이었다.
지셀이 이렇게 통보하는 것도 나름대로 즈발터와 가신들에 대한 예우일 것이다.
이거라도 어디냐는 생각에 가신들은 잠자코 지셀의 배려를 받아먹었다.
즈발터는 어색한지 연신 헛기침을 해 댔다.
“흠, 흠, 좋다. 자격도 갖추었고, 모든 가신들이 찬성했으니 지셀에게 펜리스 남작의 위를 수여하겠다.”
“감사합니다.”
“충성 서약은 그럼 조만간 길일을 잡아…….”
“그냥 지금 대충 하시지요. 왕성도 아니고 우리끼리 굳이 그렇게까지 격식 차릴 필요 있습니까. 시간 아깝습니다.”
“크흠, 거참 좋은 생각이다.”
사사로이 부자지간이긴 하지만 공적으로는 주군과 봉신의 관계가 됐으니 뭐라도 하긴 해야 한다.
하지만 지셀은 격식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명예를 중시하는 즈발터도 받는 사람이 그렇다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가신들과 기사 몇 명, 용병 몇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급조된 작위 수여식이 간략하게 진행되었다.
즈발터는 예식용 검을 들고 근엄한 목소리로 선언하였다.
“……그리하여 지대한 공로를 인정하니, 위대하신 국왕 폐하에게 전권을 받은 나 즈발터 페르디움이 그대에게 새로이 펜리스의 봉토와 남작의 위를 수여하노라. 그대는 불멸의 충성을 바치고 백성들과 약자들을 보호하며, 법과 정의를 수호하는 것에 평생토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니…….”
지루한 선언문이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하겠느냐는 질문에 지셀이 대충 대답하는 것으로 작위 수여식이 얼렁뚱땅 끝났다.
어색하고 떨떠름한 분위기 속에서 가신들은 영혼 없는 축하를 건넸다.
열린 대전의 문 너머에 어느샌가 용병들과 병사들, 사용인들까지 모두 모여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구경하고 있었다.
지셀에게 작위를 수여한다는 소문이 그새 성안에 퍼진 모양이었다.
지셀은 원하는 걸 얻자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즈발터에게 고개를 한번 숙인 뒤 그대로 몸을 휙 돌렸다.
볼일 다 본 곳에서 미적거릴 여유 따위는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방금 작위를 받은 놈이.’
즈발터는 헛웃음을 지었고 가신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비죽거렸다.
반면 용병들은 환호하며 지셀에게 달라붙었다.
특히 벨린다는 너무 좋아하며 방방 뛰었다.
“도련니임! 어쩜 좋아! 우리 도련님이 영주님이 되다니! 역시 제 조기 교육 덕분일까요?”
“조기 교육……? 그래서 대장이 저렇게 망나니로 큰 거였구만?”
벨린다가 카오르를 째려보며 팔꿈치로 옆구리를 콱 찔렀다.
카오르가 옆구리를 잡고 짜증을 냈다.
“뭐야! 왜 찔러? 대장 인성이 누구한테서 나왔는지 알겠네!”
“좋은 날 피 보기 싫으니까 득츠즈……?”
벨린다의 눈빛에서 진심 어린 살기를 읽었는지, 카오르가 비웃음을 지으며 똑같이 살기를 뿜어냈다.
“누구 피를 보게 될지 한번 해보든가.”
지셀은 투덕대는 두 사람을 보고 내심 혀를 찼다. 다행히 길리언이 말려 큰 소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중에 혼 좀 내라고 해야겠네, 저거.’
그사이 대전 앞은 작위 수여식 이야기를 듣고 몰려온 사람들로 인해 어느새 시장바닥처럼 번잡스러워졌다.
전쟁에서 지셀과 함께한 기사들과 병사들이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하녀들마저도 드디어 철이 들었냐는 듯 감탄의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예전처럼 쓸데없이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고, 제 할 일을 한 것뿐인데 평가가 올라갔다.
지셀은 자신을 칭송하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회한이 서린 쓴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쉬웠던 걸…….’
왜 그때는 몰랐는지.
“영주님?”
그가 가만히 서 있자 길리언이 의아한 듯 불렀다.
지셀은 얼른 표정을 고쳐 얼굴에 거만한 웃음을 띠었다.
“작위를 받은 기념으로 오늘은 내가 쏜다! 우리의 승전 연회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술과 고기를 준비하고 모두 참석해라!”
과장되게 팔을 벌리며 호응을 유도하는 그에게 사람들은 환호를 보냈다.
“오오오! 대공자님이 쏜다!”
“그렇지! 급한 거 끝났으면 거하게 놀아야지! 역시 뭘 좀 아시는 분이야!”
“우리 남작 대장님이 최고다!”
“와아아! 축제다 축제! 남작님이 쏜다!”
모두가 신이 나서 주변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렀다.
대전 안에 있던 가신들은 혀를 차며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넘어갔다.
지셀은 사람들을 이끌며 크게 외쳤다.
“자, 가자!”
사람들이 신나게 그의 이름을 연호하며 따랐다.
두려움 따위가 아니라 즐거움과 친근함을 듬뿍 담은 외침이었다.
“펜리스 남작 만세!”
지셀 펜리스 남작. 곧 왕국에서 명성을 날리게 될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