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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86화 (86/269)

86화 절반은 받아야겠습니다. (1)

룬스톤 얘기가 나오자 다들 기대하는 표정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눈빛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반짝했다.

1등 공신에게 포상금을 주기는커녕 손을 내밀다니 창피한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룬스톤을 받아야 영지의 재정에 숨통이 트인다.

창피하다고 마다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대놓고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룬스톤은 오롯이 지셀이 얻어 낸 것이니까.

결국 가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래로부터 내려온 방법을 쓰는 것뿐이었다. 아부나 아첨이라고도 불리는 칭찬 릴레이 말이다.

눈치를 보던 호메른이 가장 먼저 나서며 크게 외쳤다.

“대공자님의 활약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입니다! 페르디움 공방전의 승리는 전적으로 대공자님의 공입니다! 대륙의 모든 음유시인이 그 업적을 칭송하며 널리 알릴 것입니다! 선대 페르디움 영주셨던 단테 페르디움 백작께서는…….”

호메른의 말이 길어질 듯 보이자 알버트가 바로 말을 끊었다.

“대공자님 나이에 이만큼 활약한 전쟁 영웅은 극히 드뭅니다. 다른 영지의 누구도 대공자님에게는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크흠, 대공자가 확실히 큰일을 해내긴 했습니다. 싸움 잘하더라고.”

왠지 떨떠름한 란돌프의 칭찬까지 이어지자 나머지 가신들도 앞다투어 떠들었다.

“엄청난 전과입니다.”

“영지민들도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습니다.”

“온 영지에 대공자에 관한 소문이 가득합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사실 소문이 너무 과장되어서 지셀의 활약을 보지 못한 가신들은 온전히 믿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전장에 나갔던 사람들은 다들 입을 모아 ‘대공자가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라고 칭송해 댔다.

그러니 뭐, 잘했다는 칭찬 정도야 못 해 줄 것도 없었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니니까.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칭찬이 끝없이 이어졌다.

미소를 지으며 실컷 칭찬을 들은 지셀이 이쯤이면 배가 부르다 만족하고 입을 열었다.

“룬스톤 지금 없는데요.”

찬물을 끼얹는 발언이었다. 알랑거리던 가신들이 말을 멈췄다.

호메른이 잘못 들었다는 듯 되물었다.

“뭐라고요? 뭐가 없다고요?”

“룬스톤 없어요.”

가신들은 대공자가 또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다.

어떤 이들은 미심쩍어하는 눈으로 지셀을 노려보았다. 막상 주기 아까워서 말을 바꾸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답답해진 호메른이 재촉하듯이 말했다.

“아니, 준다면서요. 없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전쟁 전에 몰래 빼돌린 거 많지 않습니까?”

“아, 그거요? 없어요.”

“……왜요?”

“모르셨구나. 그거 다 터졌어요. 쾅!”

지셀이 팔을 벌리며 과장된 몸짓을 보였다.

“터져요?”

그 많은 룬스톤이 터지다니. 대체 어디다 썼기에?

머리가 좀 빨리 돌아가는 알버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그 함정으로 썼던 불이…… 설마 그 룬스톤들로?”

지셀이 썼다는 마법의 불은 말만 들어도 엄청났다.

그 정도 위력의 마법을 어떻게 쓴 건지 궁금해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드디어 그 실체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네, 룬스톤들을 땅 밑에 잔뜩 깔아 놨다가 터뜨렸습니다.”

나무 장작 몇 개 태운 것처럼 대수롭지 않은 어조였다.

가신들이 모두 당황해 다들 입만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지셀이 간단하게 함정의 원리를 설명하자 가신들이 비틀거렸다.

룬스톤을 겨우 함정 하나 만들겠다고 날려 버린 사례가 있을까? 대륙 역사를 통틀어도 없을 것이다.

그것만 해도 기겁할 일인데, 심지어 그 엄청난 분량을 모조리 털어 썼다니.

수레 몇 대 분량의 금화를 불태워 버렸다는 말과 똑같았다.

그 정도 분량이면 대영주들도 몇 년은 넉넉히 쓸 액수다.

페르디움에서는 족히 십 년 이상, 지금처럼 아껴 쓴다면 이십 년 이상도 버틸 만한 금액이었다.

아들의 기행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즈발터도 얼굴이 창백해졌다.

호메른은 답답한 듯 가슴을 치며 외쳤다.

“아니, 그 많은 분량을 모조리 함정으로 날려요?! 차라리 절반을 레이폴드나 데스몬드에 주고 대영주들의 도움을 받는 게 낫지 않았겠습니까? 그게 더 현실적이었겠네요! 그 정도 룬스톤을 준다고 하면 분명 다른 영주들이 달려왔을 겁니다!”

“데스몬드에서 쳐들어온 겁니다.”

“뭐라고요?”

룬스톤 소식보다 더 충격적인 말이 이어지자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디갈드처럼 가난한 영지에서 저 병력을 어떻게 마련하겠습니까? 데스몬드에서 지원해 준 겁니다.”

“데스몬드 같은 대영주가 왜 우리를 노린단 말입니까?”

“룬스톤 때문이겠지요.”

사실 다른 이유가 있을 테고, 데스몬드가 아니라 델파인 공작이 뒤에 있지만.

지셀은 지금 당장은 얘기하지 않기로 했다. 혼란을 막기 위해서였다.

즈발터는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정말이냐? 정녕 데스몬드가 맞느냐?”

“맞습니다. 증거를 보여 드리지요.”

지셀이 길리언에게 고갯짓했다.

잠시 후 길리언이 쇠사슬로 둘둘 묶인 세 명의 기사를 끌고 왔다.

페르디움에 잠입했다가 잡힌 데스몬드의 기사들이었다.

당시 지셀은 이들을 이용하려고 일부러 목숨을 붙여 놓았었다.

“이들은 전쟁 중에 잠입했던 데스몬드의 기사들입니다.”

그들은 세상 잃은 표정으로 매우 피곤한 기색을 내비치고 있었다.

룬스톤으로 만든 마나 억제 수갑은 본래도 효과가 그리 좋지 않다.

강력한 자들에게는 제대로 통하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페르디움에서 가지고 있는 건 싸구려 중의 싸구려라 기사들의 마나를 절반도 억제하지 못했다.

기사들을 제압하려면 마나 억제 도구를 여러 개 달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쇠사슬까지 꽁꽁 묶어 놓았으니, 아무리 기사라도 몸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직접 물어보시지요.”

즈발터는 짐짓 노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한 기사가 바짝 갈라진 입술을 열었다.

“데스몬드의 기사가 맞습니다.”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대체 우리 영지를 왜 공격한 건지 설명해 보아라!”

진노한 즈발터의 말에 기사는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나 아마 룬스톤 때문인 것 같다, 아직 대부분 영주가 페르디움의 룬스톤에 대해 모르고 있으니 먼저 선점하려는 거 같다…….

기사는 순순히 아는 대로 말했다.

협조하면 나중에 때를 봐서 풀어 주겠다는 약속도 받았기에, 그들은 그 희망으로 버티는 중이었다.

애초에 지셀이 무서워서 거짓말을 할 용기도 생기지 않았다.

심문이 끝나자 즈발터와 가신들은 모두 무거운 표정을 지을 뿐, 말을 잇지 못했다.

전쟁에서 이겼어도, 데스몬드와 같은 대영주와 척지는 건 매우 불안하고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아니, 솔직히 손이 떨릴 정도로 무서웠다.

천천히 대전을 둘러보던 지셀이 말했다.

“앞으로 데스몬드와 최대한 거리를 두어야 할 겁니다. 싸울 수는 없으니까요. 대외적으로는 우리 쪽에 쳐들어온 건 어디까지나 디갈드이고.”

결국 눈 가리고 아웅에 지나지 않는다.

데스몬드가 자신들의 병력을 디갈드의 병사라고 조작했으니, 다소 허점이 보이더라도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다.

“다른 영주들도 바보가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면 대충 눈치를 채겠죠. 그러니 데스몬드 편을 들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우리를 도와주지도 않을 겁니다.”

데스몬드는 북부에서 강하기로 손꼽히는 대영주다. 데스몬드를 상대할 수 있는 영지는 레이폴드뿐이다.

하지만 레이폴드와 페르디움은 이미 최악의 관계가 된 상황.

가신들은 다들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지셀이 말을 이었다.

“룬스톤을 바쳐서 평화를 얻는다는 보장이 있다면 그리해야죠. 하지만 한번 도움을 청하면 상대방은 더 욕심낼 겁니다. 레이폴드건 데스몬드건 말입니다. 힘들고 어렵겠지만 우리 힘으로 스스로를 지켜야 합니다.”

담담한 목소리에 다들 슬그머니 고개를 끄덕였다.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아서 그렇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룬스톤은 새로 캐 와서 드리겠습니다. 저에게 룬스톤이 있는 걸 알고 있으니 다들 얼마간은 기다릴 겁니다. 영지민들에게도 곧 구호 물품을 내릴 거라 알리면 민심 또한 금방 수습할 수 있을 겁니다.”

즈발터는 조금 감탄 어린 눈빛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룬스톤을 당장 못 받게 된 건 아쉽지만, 아들의 새로운 모습을 보니 놀라우면서도 기뻤다.

언제까지나 어린아이인 줄로만 알았는데 어찌 이리도 믿음직스럽단 말인가.

가신들도 대공자의 듬직한 모습에 즈발터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호메른은 지셀의 성장이 기꺼우면서도 조금은 두려웠다.

‘이제 대공자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전에는 대공자에게 돈 좀 달라 아쉬운 소리를 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번 전쟁에서 벌인 활약에, 전쟁의 배후를 찾아낸 공까지 더해져 대전의 분위기가 지셀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도, 가신 중 그 누구도 지셀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물론 이번만은 틀린 말이 아니기에 호메른도 별말 없이 있었지만…….

덮어놓고 지셀의 말을 따르는 분위기가 되는 것만은 막고 싶었다.

대공자가 변한 건 좋다. 하지만 왜 변했는지를 모르니 언제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사람은 쉬이 바뀌지 않는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제지할 수도 막을 수도 없겠구나.’

이미 지셀은 영지에 막대한 정도가 아니라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꿀꺽.

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대공자가 달라진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전쟁이 대공자를 삽시간에 이렇게 키운 것인가. 아니면 원래 이런 인물이었단 말인가.

지금까지 자신을 숨긴 것인가. 아니면 어떠한 계기가 있었던 것인가.

왜 달라졌는지도 모르겠고, 사고방식도 이해할 수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숨소리 하나도 들리지 않을 만큼 적막한 분위기 속에서, 지셀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로게스 백작에게 다시 전령을 보내고 동맹을 공고히 하십시오. 데스몬드가 적인 이상 이대로 끝나진 않을 겁니다.”

강력한 대영주가 적이라는 말에 가신들의 얼굴에는 불안감이 묻어났다.

하지만 지셀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전과 다르게 이제 명확한 적이 윤곽을 드러낸 이상 영지도 변화해야만 했다.

“거기다 데스몬드 말고도 또 다른 누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페르디움 혼자 모든 걸 막을 수 없으니 같은 편이 꼭 필요합니다.”

언제까지 북방에만 매달리며 뒤를 소홀히 할 수는 없었기에 같이 연대할 세력이 필요했다.

즈발터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다시 전령을 보내고 로게스 백작과 긴히 얘기를 나눠 보마.”

그는 잠시 고민하다 말을 이었다.

“남은 자들의 포상은 잠시 뒤로 미루겠다. 지셀이 나머지 룬스톤을 가져오면 영지민들에게 먼저 베풀고 포상을 내리지.”

기사 중 몇 명은 약간 실망하는 기색을 내비치기도 했지만, 대부분 고개를 숙이며 수긍했다.

지금은 반대했다가는 돌로 처맞고 끌려갈 판이었다.

어차피 지셀이 룬스톤을 주지 않는 이상 포상을 내릴 돈도 없었다.

모두가 수긍하자 즈발터가 지셀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너에게 2000골드를 주기로 했지만, 돈을 받고 거기서 조금 떼어서 돌려주는 꼴이 되는구나. 네게 돈은 별로 필요 없을 거 같다. 혹여 다른 필요한 게 있느냐?”

지셀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이 생고생을 하고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상대가 가족이라고는 해도, 일한 만큼 보수는 받아야 하는 게 용병이다.

겨우 2000골드의 포상으로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게다가 앞으로의 일을 대비하려면 필요한 것들이 참 많았다.

“일단 그 전에 하나 여쭙겠습니다. 아버지는 디갈드 백작령을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즈발터는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갑자기 영토가 늘어났으니 상세한 계획이 있을 리 만무했다.

“음, 일단은 관리들을 보내 직할령으로 다스리다가 적당히 공을 세운 가신들에게 땅을 분배할 생각이다. 물론 충성을 맹세한 자들은 그대로 받아 줘야 할 테고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원하는 보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허허, 그래, 좋다. 무엇이든 말해 보거라.”

사람 좋게 웃으며 말하는 즈발터에게 지셀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 땅의 절반을 제가 받아야겠습니다.”

즈발터를 비롯한 모두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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