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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85화 (85/269)

85화 제가 협상하고 오겠습니다. (4)

즈발터의 눈빛에는 감동과 믿음이 가득했다.

‘어느새 이렇게까지 성공했구나. 이런 늠름한 모습은 상상도 못 했거늘.’

“수고했다. 정말 수고 많았다.”

그는 지셀의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해 주었다.

옆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호메른이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모여 있던 사람들을 해산시켰다.

영지민들은 돌아가라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참이나 지셀의 이름을 환호했다.

결국 병사들이 나서서 그들의 가족들을 데리고 귀가한 뒤에야 주변이 조용해졌다.

지셀도 용병들을 주둔지로 돌려보내고 성안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돌아가 쉬려던 그를 즈발터가 뒤에서 붙잡았다.

“항복 협상은 어떻게 되었느냐? 가져온 초안을 한번 보자.”

곧 논공행상을 해야 했다.

이미 공적에 따라 적당한 보상을 책정해 두었지만, 배상액을 얼마나 받느냐에 따라 여유 금액이 달라진다.

즈발터가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던진 질문에 지셀은 환하게 웃으며 시원스럽게 답했다.

“없습니다.”

“협상안이 없다고? 왜?”

“죽였습니다.”

즈발터는 한동안 눈을 끔뻑이며 말뜻을 해석했다.

지셀의 태도가 너무나 당당해서 혹여 제가 잘못 들은 건지 되물었다.

“뭐? 죽였어? 정말?”

“네.”

즈발터가 표정을 굳혔다.

“……혹시 내 말을 잊은 거냐?”

“잊지 않았습니다. 직접 가서 보니 빨리 정리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빨리 정리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항복을 받아 주면 다시 이곳을 노릴 겁니다. 귀찮은 일은 미리 예방해야 하니까요.”

즈발터가 한숨을 내쉬었다.

망나니 같은 아들놈이 사고를 칠까 봐 당부했던 건데, 아니나 다를까 사고를 쳐도 거하게 쳤다.

그는 지셀을 꾸짖으려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아들의 행색을 보고 말을 집어삼켰다.

“…….”

이미 죽였다는데 뭐 어쩌겠는가?

아예 예상하지 못했던 일도 아니고, 전쟁 후 쉬지도 못한 아들을 잡아 둘 정도로 급하지 않았다.

“일단 쉬고,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즈발터는 고개를 저으며 아들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그 어깨며 등허리가 축 처져 있었다.

* * *

다음 날, 대전에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이 모였다. 논공행상을 하는 자리였다.

“시작하라.”

즈발터의 말에 따라 호메른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침을 튀겨 가며 이번 승리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지 연설을 시작했다.

말이 이어질수록 사람들의 표정이 점차 죽어 갔다.

지루한 표정들을 보고 즈발터가 호메른의 말을 냅다 끊었다.

“그쯤 하면 됐다. 이제 포상을 내리겠다.”

지셀이 자리를 비운 동안 전공을 세운 사람들과 그 공적을 정리해 두었던 터라, 시상식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가장 낮은 계급의 병사들부터 포상이 시작되었다.

그다음은 전쟁이 지속될 수 있게 군수와 영지의 관리를 책임진 행정관들.

이어 영지의 주력이라 할 수 있는 기사들까지, 공에 따라 적당한 돈과 직위를 받았다.

“2등 공신을 발표하겠다. 기사단장 란돌프! 무관장 윌리엄…….”

지휘관들은 2등 공신으로 책봉되었다.

다른 때 같았다면 1등 공신이 되었을 사람들의 이름도 불렸지만, 아무도 의아하게 여기거나 불만스러워하지 않았다.

2등 공신에 대한 포상까지 끝난 뒤에도 사람들은 기대감 섞인 얼굴로 자리를 지켰다.

아직 가장 중요한 인물이 남아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지셀에게로 향했다.

페르디움을 승리로 이끈, 이 전쟁의 진정한 영웅.

다들 그가 얼마나 큰 포상을 받을지 궁금해했다.

“대공자 지셀은 앞으로 나오시오!”

호메른이 외치자 지셀이 앞으로 나아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영주와 대공자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대전에는 순식간에 침묵이 찾아왔다. 즈발터는 그 침묵을 즐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신들의 만장일치로 1등 공신은 오직 한 명, 지셀 페르디움이다. 이번 승리는 지셀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셀의 활약을 전장에서 지켜보았던 기사들과 병사들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신 중 일부는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대세에 거스를 수는 없었다.

“따라서 지셀에게는 2천 골드를 하사한다.”

이어진 말에 대전에는 환호가 쏟아졌다.

“와, 대단하다! 2천 골드라니 엄청나잖아!”

“평생 놀고먹을 수 있는 금액이야!”

“대공자님이라면 그 정도 받을 만하지!”

모든 이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번에 다른 사람들이 받은 포상금을 모두 합해도 2천 골드가 되지 않는다.

보통 사람은 평생을 살아도 만지지 못할 금액이었다.

그런 거금을 한 사람에게 주겠다는 말에 대전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전 한쪽에 물러나 있던 벨린다와 길리언, 카오르는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

지셀은 의기양양해하는 즈발터를 보며 애잔한 표정을 지었다.

영지가 얼마나 가난했으면, 겨우 2천 골드 가지고…….

* * *

평생을 검소하게 살아온 사람은 돈 쓰는 배포도 작을 수밖에 없다.

그걸 모르지 않는 지셀은 대전에서 굳이 포상금이 적다고 거부하거나 따지지는 않았다.

진짜 포상은 따로 받아 내면 되니까.

논공행상은 끝났지만, 전후 처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대전에 모였던 사람들을 물리고 주요 가신들만 모인 자리에서 즈발터는 복잡한 표정으로 지셀에게 물었다.

“굳이 디갈드 백작을 죽일 필요까지 있었겠느냐? 그들도 전쟁을 치르느라 무리했을 거고, 병력도 이미 전멸했는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

갑자기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지셀의 물음에 즈발터는 대답하지 못했다.

“디갈드는 애초에 그만한 병력을 준비할 수 없습니다. 다른 곳에서 손을 뻗친 거지요. 사실 아버지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왜 로게스 백작이 오지 못했는지도 말입니다.”

“……그래, 알고 있다.”

즈발터가 침중한 목소리를 흘렸다. 지셀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죽인 겁니다. 조작되었더라도 디갈드 백작가에는 저희를 공격할 명분이 있습니다. 그들이 살아 있으면, 실질적으로 저희를 침공한 자들이 그들을 이용해 금방 다시 침공할 겁니다. 디갈드 백작령이 아예 없어져야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또한 북부는 대부분 봉토가 아니라 독립된 백작령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번거로운 절차 없이 바로 영지를 넓힐 수 있는 기회입니다.”

“크흠…….”

즈발터는 불편한 속내를 감추지 않고 헛기침을 했다.

아들은 언제나 극단적인 효율을 추구한다.

그게 나쁜 건 아니지만…… 오랜 시간 내려온 관습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다른 귀족들에게서 항의 서한이 빗발치듯 올 미래를 생각하니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냥 배상을 받거나 감옥에 가두는 정도로 끝낼 수도 있었다. 애초에 우리는 그곳까지 다스릴 여력이 부족하지 않으냐.”

즈발터라고 영토를 넓히는 것이 싫을 리는 있겠는가.

단지 현실이 문제였다.

가뜩이나 가난한 페르디움인데, 거기에 가난한 디갈드가 합쳐지면 그냥 두 배로 가난해질 뿐이다.

페르디움 내부도 상태가 좋지 않아 디갈드에서 받아 낼 배상금을 기다리고만 있는 중인데, 디갈드 영지까지 관리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곳을 안정시키려면 도리어 디갈드에 남은 물자를 모두 쏟아부어야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룬스톤이 남아 있으니, 최대한 빨리 양쪽 영지가 정상화되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으음, 그만한 양이 되겠느냐?”

“충분합니다.”

“……좋다, 사실 네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디갈드를 소화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더 강해질 테니까. 이왕 일이 벌어진 건 어쩔 수가 없으니 넘어가겠지만…….”

즈발터가 근심 어린 눈빛을 보였다.

“솔직히 걱정이다. 갈수록 행동이 과격해지는구나.”

“…….”

“조금 자중하거라. 너도 귀족들과 다른 영주들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알고 있을 텐데.”

효율만 추구하다 보면 주변 사람들의 반발에 계속 부딪힐 수밖에 없다.

그건 장기적으로 볼 때 오히려 큰 손해가 된다.

기득권이란 그렇게 무서운 법이다.

모두를 적으로 돌릴 바에는 적당히 양보해 주는 것이 나았다.

즈발터는 그 점을 꼬집은 것이다.

귀족들의 습성을 알고 있는 지셀 또한 순순히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미래를 모르고 있기에 현실적으로 행동하는 것일 뿐이니까.

“노력해 보겠습니다.”

“끄응…….”

즈발터가 앓는 소리를 냈다. 말하는 꼴을 보니 앞으로도 제멋대로 굴 것 같았다.

하지만 호통을 치고 싶어도 이제 함부로 대할 수도 없었다.

지셀의 능력은 이제 그의 영향력을 벗어났다.

‘허허, 어쩌다 이렇게 됐지?’

갑자기 훌쩍 커 버려서 대응하기도 어려웠다. 전광석화와 같은 변화에 따라가기가 벅찰 정도다.

머리가 복잡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대견스럽기도 했다.

제 품에서 벗어나 크게 성장한 자식을 보고 기뻐하지 않을 부모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 과격하긴 하지만 아직 젊어서 그런 거겠지.’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 누구보다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그저 아비로서 걱정되기에 잔소리를 좀 했을 뿐이다.

“걱정되어서 말했을 뿐이니 서운해하지 말거라. 어쨌든 수고 많았다. 정말 잘했다. 이제 전후 처리를 해야 하니 당분간 쉬거라. 곧 승전 연회도 열 것이다.”

영지를 안정시킬 방안을 고민하던 즈발터는 문득 한 가지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잠깐…… 그렇게 되면 당장 배상을 못 받는 거잖아?’

갑자기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페르디움 영지는 안타까울 정도로 돈이 없다.

애초에 포상금도 디갈드에서 배상을 받으면 그 돈으로 나눠 줄 심산이었다.

그런데 디갈드의 영지가 페르디움에 귀속됐으니, 그쪽을 운영하려면 많은 돈을 빼 올 수가 없었다.

“알버트……. 우리 돈이 얼마나 남았지?”

즈발터가 묻자 재무관인 알버트는 뭔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답했다.

“우리 돈 없습니다.”

“없어?”

“네, 한 푼도 없습니다. 새삼 왜 그러십니까? 전쟁 때문에 그나마 있는 물자들도 다 긁어 썼는데요. 원래 우리는 항상 돈이 없었습니다.”

“……그럼 포상은 어떻게 하지?”

“그거 디갈드에서 받아 낸 배상금으로 충당하자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랬지.”

승리한 기쁨이 팍 식어 버렸다.

가신들이야 조금 나중에 줘도 되지만 기사들과 병사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포상금을 늦게 줄수록 사기가 떨어질 것이다.

헌신하면 보답해 준다는 믿음이야말로 충성심의 기틀이 된다. 전공 포상금은 대표적인 ‘보답’ 중 하나였다.

“허어, 공을 세운 자들을 포상해야 하지 않겠나!”

즈발터는 혀를 차며 가신들을 둘러보았다. 돈 나올 구석을 생각해 내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시선은 모두 지셀을 향해 있었다.

모두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차마 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영지 최고의 부자이자 룬스톤을 주기로 약속한 사람.

그리고, 단 한 사람뿐인 1등 공신.

“크흠, 흠흠! 아, 목이 조금 아프네.”

살짝 헛기침을 한 즈발터는 조금 민망한 듯 웃었다.

“저기…… 지셀? 룬스톤 좀 먼저 주면 안 되겠느냐?”

1등 공신에게 포상을 주기는커녕 돈부터 빌려야 할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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