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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84화 (84/269)

84화 제가 협상하고 오겠습니다. (3)

지셀은 헛웃음을 지으며 로웰을 내려다보았다.

대범한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호기심은 들었다.

동정심에 기대어 사정하거나 관례만 들먹이던 멍청한 놈들과 달리, 이놈은 자신의 쓸모부터 피력한다.

그 부분만으로도 다른 놈들과는 달랐다.

거기다 능력에도 제법 자신이 있어 보였다.

지셀은 낄낄대고 웃으며 길리언에게 고갯짓했다.

“일단 저놈은 보류. 감옥에 가둬.”

행정뿐만 아니라 병력 관리에 참모 노릇까지 했다니, 전쟁 준비나 진행 과정도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나중에 따로 심문해 보고 정말 도움이 되는지 지켜볼 생각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로웰은 지옥에서 끌려 나온 심정으로 눈물을 질질 흘리며 고개를 조아렸다.

한시적일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목숨을 붙인 것이다.

그를 끌고 가던 고든이 감탄한 표정으로 낮게 속삭였다.

“나는 너처럼 계산이 빠른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 봤어. 그 정도로 빠르면 조금 틀리는 건 문제도 아니지! 나중에 나도 계산하는 방법 좀 알려 줘.”

“…….”

고든은 진심으로 존경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로웰은 뭐라 대꾸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맞장구를 쳤다간 정말로 눈앞에 있는 놈과 같은 수준이 될 거 같았다.

로웰이 끌려간 뒤로도 인원 분류는 한동안 이어졌다.

많은 자들이 죽어 나갔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공포에 떨었다.

스코반은 지셀을 말리지 못했다. 그저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며 혼자 발을 동동 구를 뿐이었다.

“마수의 숲 경비대는 이곳에 남아 치안을 맡아라. 곧 아버지께서 후속 병력을 보내 주실 거다. 디갈드의 남은 병사들은 일단 감옥에 가둬 두고 지켜만 보고 있어라.”

“네, 넵. 알겠습니다.”

병사들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그 정도는 문제없었다.

스코반은 황급히 대답하며 슬쩍 지셀의 눈치를 보았다.

보아하니 애초부터 작정하고 자신들을 데리고 온 모양이었다.

지셀은 인원 정리를 끝내고 디갈드 성에 남은 재산들과 물자들을 확인한 뒤 하루를 쉬었다.

용병들도 지쳐 있고 본인 몸 상태도 좋지 않으니 최소한의 휴식은 취해 줘야 했다.

페르디움 성으로 돌아가는 길은 타모스를 추격할 때만큼 급하진 않으니 비교적 천천히 이동했다.

이틀이 지나 성에 도착했을 때, 페르디움 영지의 분위기는 그들이 떠나기 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와아아아아!”

지셀과 용병들이 나타나자 영지민들이 모두 달려 나와 환호했다.

다들 행색은 여전히 허름하고 초라했지만, 얼굴에는 웃음꽃이 한가득했다.

“대공자님이 돌아왔다!”

“페르디움 만세! 대공자님 만세!”

“공자님! 여기 좀 봐 주세요!”

“용병들도 멋있어요!”

“대공자님과 용병들이 우리를 지켰다!”

예상하지 못한 반응에 용병들은 얼떨떨해했다.

페르디움에 머무는 동안 영지민들은 용병들을 보면 못 본 척하거나 뒤에서 수군대기 바빴다.

용병들도 그런 반응을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험악한 용병들은 어디를 가도 환영받지 못하니까.

하지만 영지민들이 진심으로 기뻐하며 환호하는 모습을 보니, 절로 가슴을 펴고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게 되었다.

“어, 흠. 기분이 나쁘진 않네.”

“우리는 뭐 그냥 하라는 대로 한 건데.”

“뭔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싸우고 뛰어다니긴 했지. 흐흐흐.”

얼떨떨한 용병들과 달리 지셀은 익숙한 듯 여유롭게 손을 흔들며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전생에서 이런 환호 정도야 시도 때도 없이 받아 봤으니 당황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전쟁이 끝난 지 고작 삼 일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대공자 덕에 전쟁이 끝났다는 소문이 영지를 가득 메울 정도로 퍼져 있었다.

살아남은 병사들이 여기저기 소문을 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믿지 못하던 영지민들도 비슷한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려오자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세한 사정을 세간에 알릴 수는 없다 보니, 소문은 오히려 걷잡을 수 없이 부풀려져 갔다.

― 대공자가 그동안 마법을 익히고 있었다는데? 무려 100서클이래! 100서클!

― 이 등신아! 세상에 100서클이 어디에 있냐? 그게 아니라 악마와 계약해서 영혼을 팔았다더라. 예전에 계속 미친 짓을 하고 살았던 것도 그래서였대. 망나니 악마 같은 거라나?

얼토당토않은 소문들이었지만, 사람들은 뻔히 알면서도 지셀을 띄워 주기 바빴다.

어쨌든 대공자 덕분에 전쟁에서 이겼고 가족들이 살아 돌아올 수 있었으니까.

“공자님, 기분이 어떠십니까?”

길리언이 웃으면서 묻자 지셀은 능청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쁘지 않군. 조금 더 찬양해도 괜찮아.”

“하하, 전쟁이 끝나니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셨군요.”

정말 나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고양감이 조금씩 몸을 채우고 있었다. 전생에 겪었던 환영식과는 뭔가 느낌이 달랐다.

‘으음, 오랜만의 환영식이라 그런가? 별거 없는데도 왠지 기분이 좋군.’

지셀은 뭐가 다른 건지 고민하다 어깨를 으쓱이며 영지민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길리언은 그 모습을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정말 말한 대로 이루어졌군.’

처음 이 영지에 왔을 때는 희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영지를 발전시키려고 해도 어디서부터 건드려야 할지 모를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 내가 반드시 영지의 가난을 끊어 낼 거야. 한 방울의 물이 아니라 비가 되어서 말이지.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길리언은 그저 젊은이의 패기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셀의 호언장담은 점점 사실이 되어 가고 있었다.

전쟁을 예측하고 기적 같은 승리를 얻어 냈다. 룬스톤도 아직 남아 있으니 영지를 빠르게 발전시킬 수 있다.

앞으로 이 젊은 주군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이렇게 가슴이 뛰는 것도 오랜만이군.’

처음에야 은혜를 갚을 마음으로 충성을 맹세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걸 넘어서, 그가 꿈꾸는 미래가 보고 싶어졌다.

* * *

환영하는 인파들을 지나 영주성 앞에 도착하자 더욱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대공자님께서 돌아오셨다!”

한 기사가 우렁차게 외쳤다.

기사의 양옆에는 영지의 모든 병사가 나와 도열하고 있었다.

지셀도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기 들어!”

갑옷을 차려입은 기사가 검을 뽑으며 외치자, 좌우의 병사들이 양손으로 창을 잡고 기울이듯이 앞으로 내민다.

천 명이 넘는 병사들이 좌우로 늘어서서 길을 내 주는 것은 그 자체로도 장관이었다.

병사들은 전쟁의 흔적이 채 가시지 않아 아직 지저분한 모습들이었지만 그 기세는 비할 데 없이 늠름했다.

“와아아아!”

지셀 일행을 뒤따라온 영지민들이 그 모습을 보고 다시 환호하기 시작했다.

지셀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줄지어 선 병사들 뒤에는 페르디움의 기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수는 그리 많지 않지만, 이들이야말로 페르디움의 핵심 무력이자 가장 자부심이 넘치는 계급이다.

언제나 지셀을 무시하고 없는 사람 취급하던 그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나와 있었다.

“페르디움의 계승자에게 영광을!”

가장 앞에 서 있던 기사가 검을 가슴 앞에 세우며 외쳤다.

척! 척! 척!

그러자 나머지 기사들도 같은 동작을 보이며 복창했다.

“페르디움의 계승자에게 영광을!”

기사가 존경하는 자에게 올리는 최고의 예였다.

대공자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모두가 나와 예를 갖춘 것이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곧 병사들 사이에서 커다란 환호가 울려 퍼졌다.

“와아아!”

“지셀 페르디움에게 영광을!”

페르디움 공방전은 전쟁사에 남을 만한 기록이었다.

적의 압도적인 병력을 전멸시키고, 누구도 이길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 어떤 누구도 폄하할 수 없는 전공이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활약이었다.

남은 건 이 짜릿한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것과 그 주인공을 찬양하는 일이다.

이제 대공자는 영지의 망나니이자 골칫덩어리가 아니었다.

과거의 나쁜 소문들은 이제 자취를 감추었고 의미를 잃었다. 모두가 진심을 담아 한마음 한뜻으로 예를 바쳤다.

기사들과 병사들에게서 시작된 외침은 다시 영지민들에게 이어졌다.

“와아아아아! 최고다!”

“지셀 페르디움 만세!”

“여신이시여! 대공자에게 축복을!”

“페르디움을 수호하는 검!”

“진정한 북부의 늑대!”

용병들은 처음 영지민들에게 환영받았을 때보다 얼굴이 더 상기되었다.

천한 취급을 받던 자신들이 기사들의 예를 받다니!

비록 기사들이 예를 바친 상대는 지셀이었지만, 자신들도 그에 못지않은 찬사를 받고 있었다.

“아아, 살아 있기를 잘했어.”

“이 정도로 환영해 주다니.”

“진짜 기분 째지는데?”

지셀은 흥분하고 기뻐하는 사람들을 돌아보다 눈을 감았다.

‘역시 다르구나.’

전생에도 수많은 환호와 찬사를 받았다. 이보다 더 크고 화려한 개선식을 경험하기도 했다.

용병왕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든 최고로 대접받았다.

하지만 그 끝은 언제나 지독한 고독과 공허함만이 가득했다.

다른 이들을 위험에서 구하고, 지켜 주고, 그들을 위해 싸웠지만…….

그 자리에 자신의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미 사랑하는 가족들과 친구들, 영지민들을모두 잃었으니까.

무엇도 그 공허함을 채워 주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꾀죄죄한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사람들.

전생처럼 화려한 환영식은 아니지만,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사람 수도 적고 행색도 볼품없어 보이지만.

‘…….’

예전에 받던 화려한 칭송보다 지금 이 소박한 감사가 훨씬 더 마음에 와닿았다.

“오빠!”

“공자님!”

영주성 앞까지 달려온 엘레나와 레이첼이 웃으며 손을 흔든다.

뒤따라온 사용인들도 같이 손을 흔들며 반갑게 맞이해 준다.

지셀을 보는 그들의 얼굴에 두려움은 없었다. 이제 대공자가 변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오오, 대공자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호메른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다가왔다.

항상 지셀에게 짜증을 내고 잔소리만 하던 그도 반가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룬스톤을 구한 게 확실히 운이 아니었군요. 소문은 아주 지겹도록 들었습니다.”

“싸울 때 보면 괴물 같더군. 매일 노는 줄만 알았는데 은근히 수련했나?”

차갑기만 하던 알버트도 미소 짓고 있었고, 란돌프 또한 대견스럽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리고 성안에서, 지셀이 가장 그리워하고 가장 미안해했던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어서 와라. 무사히 돌아왔구나.”

즈발터가 그 누구보다 기쁜 웃음을 지으며 아들을 맞이했다.

지셀은 갑자기 목이 메어 숨을 크게 들이켰다. 어떠한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전생에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충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언제나 그가 바라고 바랐던, 평생을 원하고 원했던 소원이 이루어졌기에.

‘내가 돌아온 이유.’

사랑하던 사람들이 반갑게 맞이해 준다. 언제나 꿈에서만 그리던 광경이었다.

이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은 돌아온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모두를 위해서.

이제는 꺼낼 수 있다. 그렇게나 하고 싶었지만 들어 줄 사람이 없어 결국 내뱉지 못했던 그 한마디를.

지셀은 전생에서 단 한 번도 짓지 못했던 환한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돌아왔습니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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