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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82화 (82/269)

82화 제가 협상하고 오겠습니다. (1)

“크륵…….”

빅토르가 마지막 비명을 내질렀다.

원통한 듯 뜬 두 눈에서는 생명의 빛이 꺼져 버렸고, 간헐적으로 꿈틀거리던 몸도 그 떨림을 멈추고 말았다.

털썩.

마지막까지 검을 깊이 박아 넣고 버티던 지셀은 빅토르가 죽었다는 확신이 들자마자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푸후―!”

그는 한참이나 숨을 크게 몰아쉬다 천천히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불길은 전투의 여파로 밀려나 있지만, 여전히 주변에는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끄응, 힘들군.”

몸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마나를 끌어올려 봤지만 흐름이 듬성듬성 끊기고 있었다.

“이런, 귀찮게.”

디루스 엔트의 내피도 모두 말라비틀어지고 뜯겨 나가 열기를 제대로 막지 못하고 있었다.

지셀은 갑옷을 모두 벗어 던지고 남은 마나를 억지로 움직여 최대한 열기를 막아 냈다.

어차피 이런 상태면 갑옷도 입고 있어 봤자 무겁고 뜨거울 뿐이다.

그는 다시 일어나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두리번거려 봐도 사방은 불로 가득 차 있었다.

“저 불길을 모두 뚫고 가야 하는데 말이지.”

불꽃이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며 그를 잡아먹으려고 덤벼들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온몸을 칼로 난자당하는 듯한 고통이 느껴진다.

피를 너무 흘렸는지 머리가 어지러웠다.

털썩.

다리가 후들거려 일단 다시 주저앉았다.

“하, 미치겠네.”

몸이 완전히 만신창이가 되었다.

어떻게든 이 불만 헤치고 나가면 끝날 텐데,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이쯤 되면 누가 구하러 왔었는데.”

혼자 움직이면 이럴 때가 제일 곤란하다.

전생에는 이런 뒤처리를 알아서 해 주는 수하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사람이 없었다.

지금도 용병들을 데리고 있긴 하지만…… 그놈들은 뒤처리를 맡기는커녕 자신을 따라오는 것만으로도 벅차 한다.

그나마 벨린다라면 지셀이 늦는다며 달려올 법하지만, 지금은 그가 맡긴 마법사들을 돌보느라 바쁠 거다.

“별수 없나. 불맛 좀 봐야겠네.”

얼마 남지 않은 마나로는 열기를 막는 것도 벅찼다.

마나를 쓰면 몸을 움직일 수는 있지만, 열기를 막지 못해 피부가 일그러지겠지.

“에잉, 이번 생에서는 얼굴 좀 곱게 쓰려고 했는데.”

지셀이 혀를 차며 투덜거렸다.

용병왕 시절에는 얼굴에 남은 흉터가 너무 많았다.

과거로 돌아와 얼굴이 깨끗해진 게 꽤 마음에 들었지만……. 그렇다고 목숨과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가 보자.”

지셀은 자리에서 일어나 근육을 지탱하는 쪽으로 마나를 돌렸다.

그러자마자 뜨거운 마력을 품은 열기가 순식간에 몸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타 죽기 전에 밖으로 나가야 했다.

지셀이 조급해지는 마음을 누르고 걸음을 내디디려던 때였다.

“공자님!”

파악!

길리언이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불길을 가르며 나타났다.

“괜찮으십니까!”

‘아, 그래. 예전 수하들 못지않은 사람이 하나 있었지.’

지셀은 반갑게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아직은 괜찮아. 좋은 타이밍에 찾아왔네.”

“저자와 싸우신 겁니까?”

길리언이 빅토르의 시체를 흘끔 보며 물었다.

“적장이야. 저놈 잡으려고 좀 무리했어.”

“일단 바로 빠져나가겠습니다.”

“그래, 부탁해.”

파앙!

길리언은 지셀을 옆구리에 끼고 빠르게 불길을 뚫고 나갔다.

후끈거리는 열기가 몸을 덮쳤지만 지셀은 마나를 이용해 막았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불지옥에서 빠져나왔다. 시원한 공기가 훅 밀려와 열기를 식혀 준다.

“푸하!”

신선한 공기를 만나자 지셀은 비로소 거친 숨을 터트렸다. 까맣게 익어 가던 가슴이 씻겨 나가는 느낌이었다.

길리언이 조심스럽게 그를 내려놓으며 부축해 주었다.

지셀은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사방이 적들의 시체로 가득했다.

“다 처리한 모양이군.”

대기하고 있던 용병들이 다가오더니 지셀을 보고 놀랐다.

“대장? 왜 혼자 죽을상이여?”

“우리는 잘 놀다 나왔는데. 으하하!”

낄낄거리는 용병들에게 한번 웃어 준 지셀은 길리언에게 물었다.

“디갈드 백작은?”

“일찌감치 도망갔습니다. 눈치가 제법 빠르더군요.”

“그렇군. 죽을힘을 다해 도망가는 중이겠어.”

“병사들도 따라서 도망갔지만 대부분 잡아 죽였습니다.”

“그래, 소문을 내려면 몇 놈 정도는 도망가게 두는 것도 괜찮겠지. 슬슬 마무리를 지어야겠어.”

그때 일단의 병력이 저 멀리서 말을 타고 달려오는 게 보였다.

“도련님!”

“지셀!”

“대공자!”

벨린다와 즈발터, 란돌프가 병사들을 이끌고 급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지셀이 불길 속으로 뛰어든 걸 알고 발을 동동 구르다가, 동문 쪽으로 빠져나와 성을 우회해서 달려왔다.

“이제야들 나타나셨네.”

지셀이 다가오는 이들을 반갑게 맞았다.

늦었다고 타박하듯 말했지만, 진심은 아니었다.

애초에 보호구 없이는 버틸 수 없는 불이었으니 일반 병사들을 데리고서는 멀리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일찍 왔다면 일이 더 귀찮아졌을지도 모른다.

후방에 대기하고 있던 적군이 성에서 나온 병사들을 봤다면 그 즉시 도망쳤을 게 뻔했다.

벨린다는 말 위에서 단번에 뛰어내려 지셀 곁에 달라붙어 그를 살폈다.

“도련님! 괜찮아요? 얼굴 익은 것 봐! 그러니까 거길 왜 들어가요! 내가 미쳐, 정말!”

빠르게 쏟아지는 잔소리에 지셀이 다급하게 손을 들었다.

“아냐, 괜찮아. 정말 괜찮다고. 그냥 열기만 좀 쐰 정도야.”

벨린다는 울상을 지으며 지셀을 부축했다.

“지셀, 괜찮으냐?”

“대공자!”

즈발터와 란돌프도 허겁지겁 달려왔다.

“괜찮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지셀이 웃으며 말하자 즈발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생각으로 불 속에 뛰어들었나 했는데…….

주변에 선 용병들의 갑옷을 보니 뭔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저게 불을 어느 정도 막아 준 모양이었다.

‘이미 다 준비해 놓은 상태였구나.’

어떻게 그런 어마어마한 위력의 함정을 마련했는지도 궁금했지만, 그건 전쟁의 뒷수습을 하며 물어봐도 될 것이다.

지금은 그저 승리를 기뻐할 때였다.

즈발터는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이겼구나.”

지원 요청도 모두 거절당하고 물자도 없이 대군을 맞이한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결국은 페르디움이 이겼다.

즈발터는 아들을 바라보았다.

“네가 이겼어.”

새삼 지셀이 달리 보였다.

적의 보급을 끊고, 공성탑을 부수고, 암습을 막고 마지막에는 함정을 써서 적을 일망타진했다.

사람 목숨을 파리처럼 취급하며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잔혹한 광기에 몸을 맡기며 살아가는 자들.

지셀에게서는 그들과 비슷한 향기가 났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 상식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행보.

지금까지 알고 있던 아들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괴리감에 불편하고 거북하기도 했다.

하지만 페르디움을 지켜 낸 것은 바로 그 지셀이었다.

‘망나니였는데…….’

아니, 사실 지금도 말 안 듣고 제멋대로 구는 망나니인 건 여전했다.

귀족의 품격이라고는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망나니이되, 과감했고 능력도 있었다.

누가 이제 감히 지셀더러 쓰레기라 손가락질할 수 있겠는가.

아들은 이곳의 구원자이자 영웅이었다.

떨리는 손을 감추듯 즈발터는 천천히 지셀을 껴안았다.

“수고했다. 정말 수고했다. 네 덕분이다.”

“아버지…….”

언제나 무뚝뚝한 아버지가 내보이는 격한 감정에 지셀은 미소 지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감동을 참지 못하고 란돌프가 검을 높이 들며 우렁찬 목소리를 토해 냈다.

“우리가 이겼다! 페르디움의 승리다!”

“우와아아아아아!”

“승리다! 우리가 이겼다!”

따라온 병사들도 감격 어린 표정으로 무기를 높이 들고 함성을 내질렀다.

용병들도 이에 뒤질세라 목청 높여 소리를 질렀다.

“우리가 해냈다! 죄다 죽였다고!”

지셀은 입을 앙다물고 모두를 둘러보았다.

모두 살아남았음에 기뻐하고, 승리했음에 환호하고 있었다.

그래, 자신은 이들을 지키기 위해 싸웠던 것이다.

고생스럽고 힘들었다. 남는 시간에는 수련에 전념하느라 편히 쉴 시간조차 없었다.

그냥 쉬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참고 견딘 덕분에 지금 이들이 웃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면, 그깟 고생 따위 몇 번이든 할 수 있었다.

화르르르.

불길이 서서히 약해지기 시작했다. 불꽃이 죽어 가는 게 눈에 띄게 보일 정도였다.

가라앉는 불길을 보며 즈발터는 기쁜 웃음을 지었다.

“어서 성으로 돌아가자. 정리가 끝나는 대로 승전 연회를 열 것이다.”

아직도 모든 이들이 환호를 내지르며 승리를 기뻐하고 있었다.

즈발터 또한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단 하나, 지셀만이 고개를 저으며 차갑게 내뱉었다.

“지금 당장 디갈드 백작에게 정식으로 항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 내일이라도 란돌프가…….”

“그러면 늦습니다. 지금 당장 제가 용병들과 함께 가겠습니다.”

“그렇게 급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겠느냐? 이미 전쟁이 끝났는데.”

“아닙니다. 시간을 줄수록 저쪽도 머리를 굴릴 겁니다. 바로 들이닥쳐 유리한 조건으로 배상을 받아 내야 합니다. 혹시나 다른 영주에게 몸을 의탁한다면 후속 처리가 더 골치 아파집니다.”

“네가 그런 것까지 생각하다니!”

즈발터가 살짝 놀라 외쳤다.

아들의 말에는 틀린 점이 하나도 없었다.

디갈드 백작이 전쟁의 여파를 자력으로 정비하거나 어디선가 지원받아 안정된다면 배상에 소극적으로 나올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협상이 지지부진해질 테니 사전에 차단해야 한다.

만약 몸을 피해 버리면 영지를 점령해도 헛수고가 된다.

어쨌든 명분은 디갈드 백작에게 있으니, 다른 영지로 피신이라도 하면 골치만 아파진다.

‘산전수전 다 겪어 본 장수 같은 판단이로구나.’

즈발터 자신도 기적 같은 승리가 너무 기뻐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지셀은 벌써 다음 일을 계획하고 있었다.

냉철하고 빠른 아들의 판단에 감탄하며 즈발터는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러면 나와 란돌프가 지금 당장…….”

“안 됩니다. 두 분은 영지민들을 달래고 빠르게 정비부터 하셔야죠. 이기긴 했지만, 병사와 물자를 너무 많이 징발했습니다. 영지의 경제가 엉망이 됐을 겁니다.”

“그, 그렇지. 다들 힘들겠지.”

“그들에게 보상을 확실히 약속하고 위로해 주십시오. 돈이 부족하지 않게 룬스톤을 제공하겠습니다.”

“오, 정말이냐? 룬스톤을 내어놓겠다고?”

지셀은 미리 준비한 듯 청산유수로 말을 내뱉었다.

그중 한 단어에 홀린 즈발터가 눈을 빛냈다.

짠돌이처럼 굴던 아들이 먼저 룬스톤을 건네준다고 하다니!

다른 말은 죄다 귀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는 페르디움의 수십 년 치 예산액에 맞먹는 양의 룬스톤이 폭발해 사라졌다는 걸 아직 몰랐다.

지셀은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그럼 제가 항복과 배상 조건을 바로 받아 오겠습니다. 아버지가 그 뒤에 조율하시지요.”

“그, 그래. 그렇게 하겠다.”

아들에게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박력을 느끼고 즈발터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이 끝나면 영지민들을 달래고 영지를 정비하는 게 최우선 과제였다.

애초에 영지전을 벌인 명분 자체가 후계자의 복수를 한다는 핑계였으니 배상 문제를 조율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릴 게 뻔했다.

당장 해야 할 일이 많으니, 배상과 관련해서는 일단 지셀에게 1차 처리를 맡겨도 될 것이다.

항복 선언과 기본 배상 조건만 받아 오면 되는 일이니까.

즈발터는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물었다.

“몸이 안 좋아 보이는데, 정말 괜찮겠느냐?”

“움직이는 데 무리는 없습니다.”

거짓말이다. 지금이라도 쓰러져 당장 자고 싶었다.

하지만 지셀은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도련님! 그냥 기사단장님한테 맡겨요!”

“그렇습니다, 제가 가서 붙잡아 놓겠습니다.”

벨린다와 길리언도 말렸지만, 지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가지.”

예의 그 미묘한 회복력이 발동된 모양인지, 잠깐 쉬었다고 그래도 좀 움직일 만해졌다.

“모두 말에 올라타라!”

지셀과 용병들은 페르디움군이 타고 온 말을 건네받아 올라탔다.

“마수의 숲 경비대도 따라와라.”

“네?”

스코반과 리카르도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지셀이 즈발터에게 말했다.

“디갈드 백작이 협상 중에 다른 짓을 못 하게 감시 병력으로 두고 오겠습니다.”

“으음, 그렇게 해라. 영지가 정비되는 대로 후속 부대를 보내겠다.”

머뭇거리던 경비대도 영주가 허락하니 모두 말에 올랐다.

지셀이 출발하기 전 즈발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비록 오해로 인해 전쟁을 치렀지만, 디갈드 백작 또한 왕실에 충성을 맹세한 귀족이고 우리의 오랜 동맹이었다. 이미 전장에서 벗어났으니 예의를 갖춰 대해라.”

즈발터는 법과 관습, 명예를 존중하는 사람이었다.

망나니 같은 아들을 보내면서도 혹시나 아들이 무례를 범할까, 걱정을 감추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지요.”

지셀은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한번 숙인 뒤 손을 들었다.

“자, 디갈드 백작령까지 바로 달린다!”

두두두두두!

지셀은 용병들과 경비대를 이끌고 힘차게 말을 달렸다.

이제 이 전쟁을 ‘제대로’ 마무리 지을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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