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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79화 (79/269)

79화 이날을 기다렸다. (2)

“이, 이게 도대체?”

거대한 불의 장벽은 적군의 주위를 완전히 둘러싸고 있었다.

앞으로 나가기는커녕 후퇴조차 할 수 없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현상에 당황해 모두가 넋이 나가 있었다.

빅토르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옆에 있는 마법사들에게 소리쳤다.

“마법을 파훼하시오! 해제하란 말이오!”

그러나 마법사들은 눈을 크게 뜬 채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우, 우리는 이 마법을 해제할 수가 없소.”

“뭐요? 당신들 마법사잖아!”

“이건 우리의 서클을 뛰어넘는 마법이오.”

마법사 중 한 명이 떠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경도 보시오. 이게, 이게 일반적인 마법으로 보이오? 이런 걸 본 적이나 있소? 어지간한 마탑의 탑주도 이런 마법은 못 쓰오. 우리로서는 이 마법을 해제할 수 없소.”

다른 마법사가 불의 장벽을 노려보며 말을 받았다.

“이건 4서클의 마법이오. 하지만 시전한 자는 4서클이 아니겠지. 적어도…….”

“적어도?”

“……7서클 이상이오.”

“개소리하지 마시오! 왕국에 7서클 마법사는 단 두 명뿐이오! 그런데 이곳에 그런 고위 마법사가 있다고?”

빅토르가 이를 갈며 소리쳤지만, 마법사는 들리지 않는 듯 혼자 중얼거렸다.

“아니, 7서클 마법사도 이렇게는 할 수 없을 텐데. 도대체 이게 뭐지? 이건 일반적인 마법의 개념을 벗어났어. 개인의 힘이 절대 아니야. 뭐지? 마법진? 아티팩트? 어떤 장치가 있는 거야. 분명 매개체가 필요할 텐데.”

이 와중에도 마법사들은 적을 물리치는 것보다 자신들의 호기심을 채우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들은 불의 장벽을 뜯어보며 마력의 패턴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빅토르는 마법의 원리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백작님은 마법사가 있을 걸 대비해 당신들을 보낸 거다. 그런데 해결을 못 한다고? 지금 한가하게 구경이나 하고 있을 때야!”

“우,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소.”

“백작님도 이런 건 예상하지 못했을 거요.”

두 마법사의 변명에 빅토르는 머리끝까지 열이 뻗쳤다.

“으으, 이 쓸모없는 것들! 이런 일에 대비하라고 온 게 아닌가!”

데스몬드 백작이 마법사를 두 명이나 붙여 준 건, 페르디움이 룬스톤을 판매한 돈으로 마법사를 초빙할 가능성까지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렇게 철저한 해럴드조차 페르디움에 5서클 이상의 마법사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왕국 전체를 통틀어도 5서클 이상은 50명이 채 넘지 않는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 짧은 기간 동안 페르디움이 데려올 수 있는 건 4서클 마법사가 한계였다.

그마저도 운이 좋아야 겨우 초빙할 수 있을 거라고 봤다.

“백작님도 예상하지 못했다는 말인가?”

빅토르는 혼자 중얼거리다 고개를 번쩍 들었다.

사방을 가로막은 불의 장벽 때문에 공성전은 불가능해졌다.

마법이 다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불길이 사방을 막고 있지만 빠르게 달린다면 어떻게든 뒤로 빠져나갈 수는 있을 것이다.

“후퇴한다! 뒤에서 정비하고 불이 꺼지면 다시 진군하겠다! 최대한 빨리 이 지역을 빠져나가라!”

크게 외치고 말머리를 돌리려던 그때, 마법사 하나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이곳이 유난히 마력의 농도가 짙은데. 뭔가 이상…….”

쿠르르릉!

순간, 그들이 타고 있던 말이 휘청거렸다. 마법사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고삐를 잡아챘다.

바네사가 다음 단계의 마법을 시전한 것이다.

그녀의 눈에 새겨진 황금색 마법진이 한 바퀴 돌아갔다.

파삭!

그녀와 알포이 일행이 차고 있던 룬스톤 팔찌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불의 장벽은 상대를 한자리에 잠시 묶어 놓으려는 방편일 뿐. 진짜는 지금부터였다.

주변에 녹아들었던 마력이 서서히 실체를 갖추었다.

그것은 곧 땅 곳곳에 스며들어 땅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무언가와 만났다.

드디어 조건이 완벽하게 충족되었다.

바네사가 작게 읊조렸다.

“……플레임 스트라이크.”

대지가 들썩이며 마력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쿠웅!

쿠르릉!

콰아아아앙!

천지를 뒤흔들 듯한 굉음과 함께 거대한 불기둥 수십 개가 곳곳에서 솟아올랐다.

“으아아아악!”

빅토르의 병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불에 타들어 갔다.

불기둥의 중심에 있던 자들은 미처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재가 되어 사라졌다.

“이건!”

콰아아앙!

빅토르와 마법사들도 폭발을 피하지 못했다.

전장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살아남은 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무기를 던지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살려 줘!”

“뒤로 빠져! 뒤로 가라고!”

불과 불이 이어져 사방을 가득 채운다.

거대한 불기둥들은 공성탑과 사다리차를 잡아먹으며 몸집을 키웠다.

몸에 불이 붙은 병사들이 바닥을 구른다.

성문 안에 있던 페르디움의 병사들은 침만 삼키며 지옥 같은 현장을 지켜보았다.

도대체 누가 이런 걸 준비했다는 말인가?

넋이 나가 있던 즈발터는 비틀거리다 간신히 중심을 잡고 바로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혼란스러운 병사들과 달리 지셀과 용병들은 침착해 보였다.

“설마…… 지셀 네가?”

그때, 바네사가 피를 뿜어내며 쓰러졌다.

공중에서 떨어지는 그녀를 가까이 있던 용병이 붙잡았다.

지셀은 잠시 뒤를 돌아보고 입을 열었다.

“벨린다, 마법사들을 돌봐 줘.”

“네? 네, 네!”

벨린다와 병사 몇 명이 쓰러진 마법사들을 업고 뒤로 물러났다.

지셀이 돌아서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용병들이 뒤를 따른다.

즈발터가 크게 외쳤다.

“지셀! 무슨 짓이냐!”

하지만 지셀은 대답하지도, 멈추지도 않았다. 즈발터가 다시 다급하게 외쳤다.

“그만! 그만! 이제 그만해라! 우리가 이겼다! 저 불 속에서는 다 도망갈 것이다! 도대체 왜 나가려고 하느냐! 바깥은 불바다란 말이다!”

그제서야 지셀이 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무미건조한 대답이 돌아왔다.

“죽여야 하니까요.”

“뭐?”

“도망가는 놈들도 죄다 잡아 죽일 겁니다. 페르디움을 넘본 대가가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 줘야 합니다.”

“너 진심으로…….”

“앞으로 이곳을 노리는 적들은 한 번 더 생각하게 될 겁니다. 목숨을 걸 용기가 있는지 말입니다.”

쿠웅.

지셀에게서 거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시체를 쌓아 올리며 살아온 자만이 낼 수 있는 기세였다.

처음 보는 아들의 모습에 즈발터는 온몸에 소름이 올라왔다.

대체 어떻게 저런 기세를 보일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지금은 아들을 말리는 게 우선이었다.

“뜻은 알겠다만, 저 불 속에 무슨 수로 들어간다는 말이냐!”

마나로 몸을 보호해도 저런 엄청난 불길 속에서는 한계가 있다.

어설프게 뚫고 들어가려다가는 죽는 이가 태반일 것이다.

그러나 즈발터의 애타는 외침에도 지셀은 말없이 씨익 웃어 보일 뿐이었다.

* * *

뒤에서 구경하던 타모스 백작은 갑자기 솟아오른 불길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뭐, 뭐야? 이게 뭔데? 왜 갑자기 불이 솟아올라! 아무것도 없는데!”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인지, 무슨 현상인지조차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나마 외곽에 있던 병사들은 겨우 빠져나왔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병사들이 죽었다.

불이 붙은 채로도 어떻게든 뛰쳐나온 자들도 있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죽고 말았다.

타모스가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젊은 참모 하나가 크게 외쳤다.

“정신 차리십시오! 후퇴 명령을 내려야 합니다! 나팔을 불고 남은 병사들을 앞에 보내십시오! 부상자를 구해야죠!”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는 타모스에게 참모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이곳은 산림이 아닙니다. 주변은 뻥 뚫려 있고 탈 것도 없으니 빠져나오기만 하면 다시 정비해서 군사를 모을 수 있습니다!”

화공이 무서운 이유 중 하나는 불길이 순식간에 주변의 나무 등을 태우며 번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별것도 없는 이런 평야에서라면, 크게 번지지 못하고 금방 꺼질 것이다.

“너, 너는 서기관 밑에 있는…… 이름이 로웰이었나? 적이 쫓아오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이냐? 지, 지금이라도 우리가 도망가야…….”

“불길을 뚫고 올 수 없는 건 적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우리가 도망가거나 타 죽기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다른 성문 쪽으로 우회해서 오는 것도 시간이 걸리겠죠.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합니다.”

로웰의 말에 타모스는 더듬더듬하며 다시 물었다.

“아니, 그치만…… 병력을 모으기도 전에 놈들이 오면……. 그냥 도망치는 게 낫지 않을까?”

“아오, 씨……. 아니, 영주님! 어차피 병력이 없으면 항복하더라도 우리는 끝입니다! 병력이 남아 있어야 항복 협상이라도 해 볼 거 아닙니까! 한 명이라도 더 살려서 가야 합니다!”

“그, 그래. 그렇지. 부상자를 옮겨라! 어느 정도 모이는 대로 퇴각한다!”

타모스가 급히 외치자 후방에 남아 있던 호위 병력이 움직였다.

고작 백여 명밖에 안 되는 수지만 그에게 남은 병력은 이게 전부였다.

* * *

한편, 지셀은 자신의 갑옷을 툭툭 치며 용병들을 돌아보았다.

“오래 버티지는 못한다. 최대한 빨리 죽이고 남은 놈들을 쳐라.”

지셀과 용병들이 입고 있는 검은 갑옷은 디루스 엔트의 내피를 덧붙인 것들이었다.

4서클의 화염 마법을 막을 수 있는 재료이니만큼, 저 거대한 마력의 불도 잠시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길리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아마 역사상 가장 비싼 함정일 겁니다.”

“그렇겠지. 이번에 캐 온 룬스톤을 죄다 날렸으니까.”

“룬스톤이 아깝지 않으십니까?”

“돈은 목적을 이루는 수단일 뿐이거든.”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명령을 따랐던 용병들도 그제야 지셀의 전략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지셀은 전쟁이 선포됐을 때부터 용병들을 시켜 룬스톤을 성 밖의 땅에 잔뜩 묻도록 했다.

“혹시나 뺏길까 봐 숨기는 건 줄 알았는데, 이렇게 쓸 줄이야. 그 많던 놈들이 그냥 다 쓸려 나가는구먼.”

“아깝지도 않은가?”

“나중에 몰래 파내서 조금 가져가려고 했는데 결국 다 터지고 말았네.”

용병들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보통은 그 룬스톤을 다 들고 도망갈 것이다. 그 정도면 한평생 놀고먹어도 되는 양이었으니까.

그런데 단 한 번 쓸 함정을 위해 그 많은 룬스톤을 모조리 터트려 버리다니.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너무하다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저 여자 대단하네. 진짜 마법사였어.”

“이 정도면 몇 서클이야? 혹시 대마법사 아냐?”

“그냥 하녀인 줄 알았는데.”

용병들은 결과물만 보고 감탄했지만, 사실은 조금 달랐다.

아무리 마력 전이를 받았다고 해도 지금 바네사의 경지로는 이 많은 룬스톤을 동시에 폭발시킬 수 없었다.

그저 룬스톤 중 몇 개를 터트렸을 뿐이다.

하지만 모든 룬스톤에는 집속, 연쇄, 폭발 등의 술식이 골고루 새겨져 있었다.

전쟁이 선포되기 전까지 바네사는 지셀의 명에 따라 열심히 술식을 새겼다.

마법적 이론과 감각이 특출난 그녀가 있어야 가능한 작업이었다.

지셀은 마수의 숲에서 룬스톤을 캐 올 때부터 이 함정을 준비했다.

바네사를 마탑에서 데려온 것도 그 일환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이곳을 침공한 놈들에게 대가를 치르게 할 시간이 되었다.

참고 참았던 분노를 터뜨릴 때였다.

“보이는 놈들은 모두 죽여라!”

지셀이 크게 외치며 뛰어나갔다.

길리언과 카오르가 뒤를 따르자, 머뭇거리던 용병들도 이를 악물고 쫓았다.

“에라이! 일단 가자!”

“괜찮다고 했으니 괜찮겠지!”

“도망가기 전에 다 잡자고!”

치이이익!

디루스 엔트의 내피는 불과 접촉하자 수증기를 뿜어내며 말라 가기 시작했다.

“오, 따뜻해! 따뜻하다고!”

“버틸 만한데?”

“빨리 죽이고 빠지자!”

불지옥이 된 전장에는 아직 살아남은 자들이 꽤 되었다.

용병들은 탈출하려고 온 힘을 다해 도망치는 그들을 쫓아가며 무기를 휘둘렀다.

“크아아악!”

불 속에서 몸부림치던 적들이 허무하게 쓰러졌다.

용병들이 생존자들을 학살하는 동안, 지셀은 불길 속에서 누군가를 찾아다녔다.

‘빅토르 이 새끼부터 죽여야 해.’

지금도 빅토르는 강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강력한 적수가 될 게 분명했다.

이번 전쟁에서 반드시 찾아 죽여야 했다.

‘불기둥에 직격으로 맞아 죽었다면 다행이지만……. 시체 조각이라도 확인해야 한다.’

지셀은 사방에서 들려오는 적군 병사들의 끔찍한 비명을 뚫고 달려 나갔다.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화염 속에 홀로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크아아아! 내 군대를! 감히 나를!”

빅토르는 분노로 가득 찬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수포로 뒤덮인 얼굴 반쪽은 아직도 절절 끓었고 갑옷도 이곳저곳이 깨지고 찌그러졌다.

그래도 그는 살아 있었다.

“모두 죽여 버리겠다! 배를 가르고 목을 잘라 성벽에 매달아 주마!”

두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혼자서라도 페르디움 영주와 그 가신들의 목을 모두 베어 버려야 한다.

설사 여기서 죽더라도, 그게 자신의 명예와 체면을 살릴 마지막 방법이었다.

빅토르가 마나를 줄기줄기 뿜어내며 페르디움 성 쪽으로 뛰어들려던 그때.

파악!

불길을 가르며 무언가가 그에게 쏘아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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