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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78화 (78/269)

78화 이날을 기다렸다. (1)

지셀을 중심으로 뭉쳐 있던 용병들이 좌우로 갈라졌다.

그러자 용병들이 가리고 있던 마법진 여러 개가 보였다.

마법진 하나를 중심으로 주변에 여섯 개의 마법진이 더 그려져 있었다.

바네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중앙에 새겨진 마법진 위에 올라섰다.

바네사뿐만 아니라 알포이와 마법사들도 이곳에 끌려와 있었다.

그리고 모든 마법사의 팔에는, 술식이 새겨진 룬스톤 팔찌가 채워진 상태였다.

“이건 무슨 마법진이냐? 언제 새겨 놓은 거야?”

알포이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지셀은 별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답했다.

“알포이와 친구들도 여기에 올라서라.”

“아니, 이게 뭔지 알아야 올라서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니야?”

어느 순간부터 알포이는 대놓고 말을 놓고 있었지만, 지셀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말투 같은 게 아니었다.

지셀은 머뭇거리는 마법사들을 설득하는 대신 행동으로 보여 주기로 했다.

“올려.”

그의 손짓을 본 용병들이 알포이와 마법사들의 목에 무기를 들이밀며 강제로 마법진 위에 세웠다.

“허 참,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알포이가 대놓고 꿍얼거렸다. 지셀은 그를 무시하고, 바네사 쪽으로 돌아섰다.

“바네사, 할 수 있겠지?”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지셀을 마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결심은 했지만, 막상 실행하려니 자신감이 다시 사라지고 있었다.

“제, 제가 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있어. 반드시 성공해야 해.”

단호한 대답에 바네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성공시킬 각오로, 바네사는 눈을 감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구우우웅!

바네사의 몸이 점점 공중으로 떠오르며 마력이 그녀에게 몰려들기 시작했다.

1서클의 마법도 제대로 못 쓰는 그녀가 이렇게 마력을 끌어당길 수 있을 리가 없다.

“마, 마력 전이!”

알포이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갑자기 그의 몸에서 마력이 미친 듯이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옆을 둘러보니 다른 마법사들도 당황하며 손을 휘적거리고 있었다.

알포이는 절규하며 외쳤다.

“미친 새끼야! 왜 하필 저년에게 통제를 맡긴 거야!”

마력 전이는 한 사람에게 다른 이들의 마력을 몰아줘 그 힘을 증폭시키는 마법이다.

중심이 되는 인물이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면, 참여한 마법사들 모두가 마력뿐만 아니라 생명력까지 뽑혀 죽고 만다.

중심 인물에게 섬세한 제어 능력과 엄청난 정신력, 그리고 술식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없으면 실패하는 위험한 마법.

“1서클도 제대로 못 쓰는 년이 성공할 리가 없잖아!”

“걱정하지 마라. 바네사를 믿어 보라고.”

“믿긴 뭘 믿어! 이 미친 새끼야!”

알포이와 마법사들은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려 했지만, 늦었다. 이미 마력의 폭풍에 휘말리고 만 것이다.

마법사들은 옴짝달싹 못 한 채 마법진에 모든 마력을 빼앗기고 있었다.

“으윽…… 안 돼……. 이렇게 죽을 순 없어…….”

알포이와 마법사들이 괴로워하는 만큼, 바네사도 이를 악물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녀의 코와 귀에서 조금씩 피가 흘러나왔다. 온몸의 핏줄이 기묘한 검은색으로 빠르게 물들기 시작했다.

몸이 몰려드는 마력에 제대로 버티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미친 듯이 떨리는 몸은 지금 그녀가 얼마나 버티기 힘든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으으으으…….”

결국 그녀의 입에서도 신음이 터져 나왔다. 마력의 압력을 견디지 못해 감은 눈에서는 피눈물이 새어 나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주변 사람들도 무거운 마나의 기운을 느끼기 시작했다.

광폭하진 않지만, 쌓이고 쌓여 공간을 내리누르는 그 무언가를.

“아으으윽…….”

바네사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점점 정신이 희미해져 갔다.

‘역시 무리였어. 나는 안 돼. 내 주제에 무슨…….’

언제나 실패만 한 인생이었다.

잠깐 기적을 맛봤을 뿐인데, 자신에게 능력이 있다고 착각해 버렸다.

고오오오오오!

이제 한계다. 더는 버틸 수가 없다. 너무나 아프고 고통스럽다.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고통을 한 번에 받는다면 이런 기분일까?

단호한 결심도 아픔 속에서는 눈 녹듯이 녹아버리고 말았다.

그냥 다 잊고 포기하고 싶었다.

‘……그래, 나는.’

공중에 떠 있던 바네사가 고개를 툭 떨구었다.

쿵! 쿵! 쿵!

적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대군이 발맞춰 움직이니 성안까지 땅이 울려 왔다.

페르디움 병사들은 각자 마지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자신이 믿는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또 누군가는 전의를 불태웠고, 다른 누군가는 가족을 생각했다.

반면 성벽 아래의 용병들은 말없이 지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바네사.”

“……나, 나는.”

그녀는 지셀의 부름을 듣지 못한 듯, 눈을 감은 채 혼자 계속 중얼거렸다.

― 제가…… 공자님께 도움이 될까요?

― 그럼, 아주 큰 도움이 될 거야.

“바네사.”

― 공자님께 도움이 되고 싶어요.

바네사가 힘겹게,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는…….”

모든 용병이 숨죽인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바네사.”

― 할 수 있지?

지셀은 안타까움과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 바네사를 바라보았다.

쉴 새 없이 떨리던 그녀의 몸이 덜컥 멈췄다.

거대하게 쌓이던 마력의 흐름도, 새어 나오던 피도 언제 그랬냐는 듯 멎었다.

그러자 지셀은 어금니가 깨지도록 이를 악물며 고개를 돌렸다.

“성문을 열어라. 스코반.”

“대, 대공자님? 지금 무슨 생각을…….”

“열어라.”

스코반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도 지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

이대로 가면 질 수밖에 없다. 믿을 건 지셀과 용병들의 돌격뿐이다.

‘그래, 어차피 죽을 거라면…… 차라리 저번처럼 날뛰다가 죽는 게 낫겠지.’

성벽에서 버티다 허무하게 죽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지도 몰랐다.

물론 적들이 처음처럼 당해 줄 리는 없겠지만…….

만약에 지셀이 적의 진형을 붕괴시킬 수만 있다면, 성안의 모든 병력이 뛰쳐나가 활로를 찾을 수도 있다.

결단을 내린 스코반이 병사들과 함께 성문을 천천히 열었다.

끼이이익.

성문이 열리기 시작하자 성벽 위의 사람들은 기겁했다.

특히 즈발터와 란돌프는 지셀의 의도를 금세 눈치챘다.

이미 한번 겪어 봤는데 모를 리가 있을까?

“안 된다! 지셀! 무슨 짓이냐!”

“미쳤냐, 대공자! 당장 멈춰!”

그들도 지셀이 이끄는 용병대가 얼마나 뛰어난지 그동안 지켜봤다.

하지만 그것도 상대가 어지간한 숫자여야 통하는 거다.

즈발터가 다시 소리쳤다.

“그런 건 두 번이나 통하는 게 아니다! 신중 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느냐!”

적들이 처음과 같은 상황을 대비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적의 진형을 보니 이미 방패병들이 빽빽하게 앞을 메우고 있었다.

용병대가 튀어나오는 것까지 대비해 피해를 최소화하겠다는 의도가 뻔히 보였다.

“성문을 닫아라! 성문을 닫으란 말이다!”

“차라리 도망을 가! 너라도 도망가서 살아남으라고! 이 멍청한 자식아!”

즈발터와 란돌프가 목이 터질 듯 외쳤지만, 지셀은 들은 척도 안 했다.

스코반마저 못 들은 척 고개를 숙인 채 영주의 명을 무시하고 있었다.

“이놈! 끝까지 그렇게 목숨을 쉬이 버리려 하느냐!”

즈발터가 분노로 몸을 떨며 성문으로 내려가려 했다. 그러나 란돌프가 그의 팔을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늦었수, 형님.”

이런 상황에서 영주가 자리를 비우면 그 순간 끝이다.

즈발터는 멀리 있는 지셀을 노려보다 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좋다. 어차피 성문이 열렸다. 우리도 하나로 뭉쳐 싸운다.”

화살도 없고 수성 물자도 없다. 성벽에 있어 봤자 다가오는 적을 견제할 수단이 없었다.

기어코 맞붙어 싸워야 한다면, 모두가 함께 싸우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지셀과 용병대의 돌격은 대비하더라도 만만치 않을 테니까.

“전군! 성벽을 포기하고 모두 성문 주위로 집결하라!”

영주의 명령에 따라 페르디움 군 병사들이 성문 앞으로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하지만 공간이 워낙 좁아 용병들의 뒤쪽에 서는 게 고작이었다.

즈발터와 란돌프, 기사들이 아직 성벽 위에서 남은 병력을 움직이는 사이.

지셀이 용병들에게 말했다.

“준비해라. 아군이 모두 모이기 전에 끝낸다.”

몸이 잔뜩 달아오른 용병들이 무기를 들고 뛰쳐나갈 준비를 했다.

그들은 긴장했지만 겁먹지는 않았다.

언제나처럼 대장이 하라는 대로 따르면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카오르는 그냥 마음을 편하게 놓았다.

‘싸우다 죽으면 그만, 살아도 그만이지. 뭐, 아쉬운 게 없지는 않지만……. 이런 전쟁에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아. 속은 시원하겠지.’

지셀이 나서서 싸울 때마다 그를 말리려고 난리를 치던 벨린다도 평소와 달리 조용했다.

어차피 성문을 열고 싸우든 닫고 싸우든 위험한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죄송해요, 영주님. 도련님은 제가 어떻게든 살려 갈게요. 가능하다면 아가씨도요.’

지셀이 지칠 때쯤 기절이라도 시켜서 전장을 빠져나갈 계획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길리언은 벨린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했지만, 말없이 자신의 무기를 점검했다.

마법사들로 함정을 준비했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지셀의 표정을 보니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지셀을 알고 지낸 시간은 짧지만, 길리언은 제 젊은 주군이 절대 도망가지 않을 사람임을 알았다.

자신은 이미 그에게 남은 인생을 바치기로 한 몸. 이곳에서 지셀과 함께 죽을 생각이었다.

‘레이첼, 일이 잘못되면 엘레나 아가씨와 함께 도망가거라.’

한편, 성문이 열린 걸 확인한 빅토르는 환한 웃음을 지었다.

“이제 정말 끝낼 시간이구나.”

예상대로 적들은 마지막 돌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심지어 모든 병력을 성문 쪽으로 집결하려는 듯했다.

“멍청한 놈들. 한꺼번에 달려든다면 더 쉬워질 뿐이지.”

빅토르가 손을 들어 올리자, 뒤쪽에 대기하던 기병대가 중앙군의 양옆으로 포진하며 나아갔다.

이들은 페르디움 군의 측면을 노리고 움직일 것이다.

“기병대는 적들이 패주하면 바로 추격하여 섬멸해라.”

빅토르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드디어 당했던 걸 갚아 줄 때가 왔다.

“모두 밀집 대형으로 천천히 움직여라!”

쿵! 쿵! 쿵!

적군의 진형이 촘촘해지고 더 견고해졌다.

대기하고 있던 스코반과 병사들이 그 위압감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스코반의 옆에 있던 리카르도는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그런데 왜 대공자님 말을 안 타고 계시지? 용병들도 그렇고.’

지셀과 용병들 주변에도 말은 보이지도 않았다.

‘말을 타지 않고 돌격한다고?’

물론 처음처럼 그냥 달려 나갈 수도 있겠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용병들이 타는 말들은 성문에서 가까운 곳에 두었으니 준비할 시간도 충분했다.

리카르도는 지셀에게 말을 준비하지 않느냐고 물으려다가 멈칫했다.

아무리 바보라도 말 타는 걸 잊었을 리가 없었다.

자신도 아는 걸 과연 지셀이 몰랐을까?

그는 다시 지셀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의 눈빛은 마지막 발악을 하려는 사람보다는, 줄곧 기다리던 기회를 포착한 사람 같았다.

순간, 리카르도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지셀은 언제나 아무렇지도 않게 상식을 뛰어넘는 행동으로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 내곤 했다.

‘그래, 믿어 보자. 그냥 포기할 사람이 아니야.’

페르디움에서는 처음으로 대공자를 믿는 사람이 생겼다.

리카르도의 예상은 그리 틀리지 않았다.

지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성문 밖에서 다가오는 적군을 노려보았다. 승리를 확신하는 얼굴이었다.

‘네놈들도 많이 참았겠지.’

평범한 지휘관이었다면 보급이 끊겼을 때부터 바로 병력을 갈아 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빅토르는 신중하게 움직이며 이쪽의 약점을 철저하게 공략했다. 역시 만만치 않은 놈이었다.

‘너만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니야.’

이쪽도 터질 듯한 가슴을 부여잡으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매일 매일, 달려 나가 적들의 머리를 박살 내고 싶은 충동을 참고 또 참았다.

적을 남김없이 모조리 잡아 죽이기 위해서.

으드득.

지셀은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바로 이 성벽에, 아버지와 가신들의 목이 장대에 꽂혀 비참하게 썩고 있었다.

그 광경은 평생 지셀을 따라다녔다. 그는 매일같이 고통에 몸부림쳤다.

두근.

그 광경을 떠올리니 머리에 피가 몰리고, 몸 안의 마나가 뛰쳐나가려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한 놈도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하지 마라.’

지셀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완벽하다는 건 아니다. 단 한 번만 실수해도 영지가 멸망하고 모두가 죽고 말 것이다.

작정하고 나타난 저 대군 앞에서, 누가 과연 자신 있게 승리를 장담한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지셀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돌아오자마자 전쟁을 막았다. 엘레나로 인해 벌어지는 최초의 싸움을.

시간은 약간 벌었지만 결국 전쟁은 일어나고야 말았다.

오히려 그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크게 말이다.

막으면 막을수록 위험이 더 커져만 갔다.

마치 하늘이 페르디움의 멸망을 강렬하게 원하는 것처럼.

‘어쩌면 이 영지를 옭아맨, 피할 수 없는 운명인지도 모르지.’

지셀은 머릿속에 떠오른 비관적인 상념을 흩어 버리며 사납게 웃었다.

‘웃기지 마라. 두 번은 없다.’

철컥!

지셀이 투구의 면갑을 내리자 모든 용병이 똑같이 투구를 고쳐 썼다.

후우, 후우, 후우.

용병들의 긴장된 숨소리가 울려 퍼진다.

성문 옆에 대기하고 있던 스코반과 병사들이 심상치 않은 기세에 뒤로 물러났다.

오직 지셀과 용병들만이 전의를 불태우며 성문 앞에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지셀은 천천히 옆으로 팔을 뻗으며 용병들에게 말했다.

“기다려라.”

모두의 긴장감이 최고에 이르렀다.

심장이 터질 듯 뛰고, 근육이 땅겨 몸이 경직되었다.

머리에 피가 몰려 어지러웠다. 어떻게 서 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할 정도였다.

“아직.”

용병들이 극도로 집중한 채 시간의 흐름마저 잊을 즈음이었다.

지셀이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바네사!”

바네사가 감고 있던 두 눈을 번쩍 떴다.

그 눈동자에는 황금빛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작은 입술이 달싹이듯 무언가를 읊조렸다.

그녀의 염원과 이해가 세계를 관통하고 하나의 이치에 닿았다.

그것은 한계를 무시하고 서클을 뛰어넘는 힘을 불러왔다.

고오오오오!

거대한 마력이 사방으로 올올이 풀려 나갔다. 마력은 곧 문자로 형상화되어 바네사의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타오르던 마법 문자들은 이내 붉은 점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지고, 다시 세계에 녹아내리며 사라졌다.

고오오오오!

순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모두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똑같은 광경이 비치고 있었다.

성벽과 적군 사이에 피어오르는, 마치 노을처럼 끊임없이 넘실거리는 붉은 장벽이.

즈발터가 놀라서 검을 놓쳤다. 란돌프도 체면도 잊고 입을 벌렸다.

고오오오오!

적군은 더 이상 페르디움 성에 다가가지 못했다. 빅토르도 급히 말을 멈추었다.

놀라 경직된 사람들 사이에서 단 한 사람만이 움직였다.

넘실거리는 붉은 불길처럼 그의 눈도 붉게 빛났다.

쿠르릉!

땅이 거세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날을 기다렸다.”

마치 용암이 끓어오르는 듯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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