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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77화 (77/269)

77화 역시 제법인 놈들이야. (4)

둥! 둥! 둥!

날이 밝자 적들이 다시 몰려오기 시작했다.

적들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한꺼번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성을 넘을 생각인지 이동식 사다리차까지 끌고 왔다.

페르디움의 병사들은 그 모습을 보고 잔뜩 긴장해 얼어 버렸다.

이틀간 공성을 버텨 낸 덕분에 사기는 높았지만, 대군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 심한 압박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힘을 내라! 오늘도 막을 수 있다!”

즈발터의 독려를 들으며 병사들은 자리를 잡고 적들을 향해 열심히 화살을 날렸다.

터엉! 터엉!

방패병을 앞세우고 진군하는 적들에게 화살은 잘 통하지 않았다.

그래도 간간이 후열의 보병과 궁병들이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견제 사격을 뚫고 한 무리가 드디어 성벽 밑까지 다가왔다.

구멍 난 성벽은 이미 나무와 흙, 바위 등으로 메워서 막아 두었다.

적들도 그쪽은 신경 쓰지 않고 성벽 곳곳에 사다리를 붙였다.

쿠웅! 쿠웅! 쿠웅!

성벽에 걸쳐진 사다리로 적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막아라! 적들을 떨쳐 내라!”

즈발터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은 수많은 무기를 사다리 위로 뿌렸다.

가시가 달린 원통을 굴려 떨어뜨리고, 뜨거운 물과 녹인 금속 따위를 쉬지 않고 들이부었다.

“으아아악!”

방패를 받쳐 들고 올라오던 적들은 과격한 대응에 못 이겨 하나둘씩 밑으로 떨어졌다.

페르디움의 병사들도 성벽 밑에서 날아오는 적들의 견제 사격에 몸을 사리면서 힘겹게 싸워야 했다.

그나마 적의 공세가 거세지 않아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뭐지? 왜 공성탑은 움직이지 않는 거지?’

즈발터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사다리를 이용해서 성벽을 오르면 공격하는 측은 공성탑을 이용할 때보다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적들은 사다리만 쓰고, 공성탑은 아예 움직이지도 않고 있었다.

적들이 적극적으로 밀고 들어오지 않는 것도 의심스러웠다.

점령하면 좋고, 아니면 그만이라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워낙 수가 많으니, 이쪽은 적군처럼 설렁설렁 막을 수가 없었지만.

즈발터는 계속 적의 의도를 고민했다.

‘성벽 토대를 깎아서 무너뜨리려는 건가? 아니면 땅굴을 파서 진입할 생각인가.’

공성전에서 자주 쓰이는 다른 방법들을 떠올려 봤지만, 영 감이 오지 않았다.

성벽 아래쪽에서 뭔가 작업하는 낌새는 보이지 않았고, 땅굴을 파기에는 저쪽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적들은 끝내 성벽을 넘지 못하고 해가 기울어질 때쯤 물러났다.

“와아아아! 오늘도 막았다!”

병사들은 환호를 내질렀지만, 어제와 같은 찝찝한 승리였다.

즈발터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밤이 되자 금방 적들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와아아아아! 쳐라!”

적들은 밤에도 쉬지 않고 공격해 왔다. 그것도 병력의 절반 정도만.

절반이라 해도 페르디움의 전체 병력보다 많다.

“이놈들! 우리 힘을 완전히 뺄 작정이구나!”

즈발터가 이를 갈며 외쳤다.

‘우리는 병력을 빼면 곳곳이 비어 버린다!’

병력의 규모가 다르니, 적들과 같은 전략을 취하기가 어려웠다.

적들이 조심스럽게 공격하니 인명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피로는 쌓였다.

다음 날이 되면 밤에 쉬었던 나머지 반이 다시 쳐들어온다.

즈발터는 적군과 똑같이 병력을 절반 정도 빼 보기도 했다.

그러나 적군은 병력을 빼자마자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취약한 부분을 노려 달려들었다.

‘적이지만 지휘관의 실력이 대단하구나!’

만약 지셀과 용병대가 활약하지 않았다면 이미 성벽 한쪽을 점령당했을 것이다.

“형님! 병사들이 너무 지쳐 있습니다.”

란돌프가 조심스럽게 말을 전해 왔다. 하지만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어떻게든 병사들을 조금씩 빼 쉬게 하고 있지만, 그 비율이 상대방과 너무 크게 차이 났다.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충분히 휴식을 취한 적군은 비교적 쌩쌩한데, 아군은 힘이 빠진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아, 안 돼……. 피곤해 죽겠어.”

“계속 이렇게 싸워야 하는 건가?”

“도대체 언제 끝나는 거야? 저쪽도 보급이 없다고 하지 않았어?”

페르디움 병사들은 사기가 급속도로 떨어졌다.

벌써 사흘 동안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전쟁은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긴장과 피로를 몰고 온다.

그런데 밤에도 쉬지 못하고 싸워야 하니, 병사들의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지셀이 성벽에서 뛰어내리는 초강수를 다시 취했지만, 적들의 전략은 변함이 없었다.

검은 갑옷을 입은 용병들이 나타나면 병사들은 피하고, 기사들이 몰려가 지셀을 견제했다.

결국 지셀은 큰 피해를 주지 못하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는 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래, 잘하고 있다. 빅토르. 조금 더 힘을 내 봐라.’

그 뒤로 지셀과 용병들은 성벽을 방어하는 데만 전념했다.

“공자님, 이대로 가다가는 필패입니다.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길리언이 걱정스레 속삭였지만, 지셀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저쪽이 아주 이를 갈았네. 그래도 아직은 때가 아니야. 조금만 더 기다려라.”

이런 전략은 수성 측의 병력과 물자가 충분하면 잘 쓰이지 않는다. 시간만 뺏기기 때문이다.

자칫 잘못하면 오히려 공성 측에서 큰 피해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페르디움을 상대하기에는 상당히 효과적인 수였다.

즈발터는 새삼 이 전쟁의 배후와 그 목적이 무엇인지 의심하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준비한 거지?’

페르디움에 물자가 부족한 거야 워낙 유명하니 숨길 것도 아니다. 그러나…….

‘저 사다리. 분명 전쟁 전부터 준비한 것이다.’

페르디움의 성벽은 다른 곳보다 낮은 편이다.

공성탑의 다리조차 성벽에 걸면 내리막길이 된다.

그런데 적군이 가져온 사다리는 모두 페르디움 성벽의 높이에 딱 맞게 제작되어 있었다.

적어도 몇 달 전부터 페르디움을 노리고 준비했다는 뜻이다.

‘배신자들이 넘어갔을 때부터 계획된 게 아니었구나. 룬스톤이 발견되자마자 준비한 건가?’

영지 안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첩자가 득실거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로게스 백작은 오지 못하겠구나.’

지원이 올 거라는 희망은 버려야 할 것 같았다.

로게스 백작과 연락이 끊긴 이유는 뻔했다.

‘전령은 다 저놈들에게 잡혔겠지.’

이제 마지막 희망은 적들이 보급 문제로 후퇴하는 것뿐이다.

지금은 가만히 서 있는 공성탑이 움직이는 날이, 마지막 전투일 것이다.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즈발터가 피곤한 눈으로 멀리 있는 공성탑을 바라보았다.

* * *

한편, 빅토르도 마지막 전투를 가늠하고 있었다.

전장을 유리하게 이끌고는 있지만, 병력이 소모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늘어나는 피해가 달갑지는 않았다.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여야 지휘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저 버티고 있을 수도 없으니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했다.

“물자가 다 떨어져 가는데 괜찮겠소?”

타모스가 옆에서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떻게든 결판을 내서 룬스톤을 얻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디갈드는 이번 전쟁으로 입은 피해를 복구할 수 없다.

그사이 페르디움에서 역으로 쳐들어오기라도 하면 디갈드는 그대로 멸망하고 말 것이다.

“걱정하지 마시오. 곧 끝나오.”

빅토르가 단호하게 답했다.

페르디움이 끝나는 날, 디갈드도 끝이 날 거라는 진실은 마음속에만 묻어 두었다.

‘버틸 수 있는 건 이틀 정도인가? 슬슬 저쪽도 문제가 생길 때가 됐는데.’

사나흘 정도만 더 밀어붙이면 좋을 테지만, 이쪽도 보급 때문에 그 정도 여유는 없었다.

“조금 더 강하게 밀어붙여라.”

빅토르는 다소 피해를 감수하고 전투 시간을 조금 더 늘렸다.

쪽잠을 자며 버티던 페르디움 군은 더욱더 버티기가 힘들어졌다.

그 와중에도 지셀은 용병들을 절반씩 나눠 꼬박꼬박 재우고 휴식을 취하게 했다.

문제는 용병들이 쉬는 만큼 지셀이 더 움직여야 한다는 거였다.

“도련님! 미쳤어요? 이러다 죽어요!”

“공자님! 공자님도 조금 쉬셔야 합니다!”

벨린다와 길리언이 말렸지만, 지셀은 한번 결심한 일은 무조건 밀고 나가는 사람이었다.

“괜찮아. 죽어서 영원히 쉬는 것보단 낫잖아? 지금 열심히 움직여야지.”

완고하다 못해 태평한 대답에 벨린다만 가슴을 쳤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페르디움 군은 더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다.

“화살이…… 떨어졌습니다.”

“수성 물자도 이제 없습니다.”

기사들의 보고가 이어지자 즈발터는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밤낮없이 쳐들어오는 적을 막느라 결국 모든 물자가 소모된 것이다.

호메른이 열심히 영지의 물자를 긁어다 주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이걸 노렸겠지.’

적의 지휘관은 이쪽의 약점을 너무나도 잘 이용했다.

항상 힘이 넘치던 란돌프마저도 퀭한 눈만 끔뻑이고 있었고 병사들은 죄다 피곤에 절어 있었다.

‘끝이구나.’

저렇게 신중하게 나오는 적들을 상대로, 지금까지 버틴 게 놀라울 정도였다.

지셀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너는 그나마 좀 괜찮아 보이는구나.”

즈발터의 말에 지셀이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실제로 지셀의 얼굴은 피곤해 보이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만큼 죽을상은 아니었다.

즈발터는 잠시 고민하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투가 시작되면…… 너는 용병들을 이끌고 이곳을 떠나거라.”

“무슨 말씀이십니까?”

평소와는 다른 아버지의 모습에 지셀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언제나 귀족의 의무와 명예를 강조하던 사람이었는데, 도망치라니.

“로게스 백작에게 몸을 의탁해라. 사적으로는 백작 부인이 너의 고모니 모른 척하지는 않을 터. 그가 널 보호해 줄 것이다.”

“그건 귀족의 의무가 아니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나도 사람인지라 어쩔 수가 없구나. 영주가 아니라 아비의 마음이다. 엘레나도 함께 데리고 가거라.”

“이미 질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이제 네 병력이 영향을 미치는 시기는 지났다. 이긴다면 네가 없어도 이길 것이고, 진다면 네가 있어도 질 것이다.”

“…….”

“케인은 때리지 말고 친하게 지내거라. 괜히 사고치고 눈칫밥 먹지 말고.”

“……하하.”

즈발터가 농담하는 건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이었다. 지셀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란돌프도 다가와 지셀의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올렸다.

“대공자, 아니 조카 같으니까 이제 편하게 말할게.”

“뭐 언제는 편하게 안 하셨습니까?”

퉁명스럽게 답하자 란돌프가 이를 내보이며 씩 웃었다.

“함께해서 더러웠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 항상 미덥잖았는데 그래도 마지막은 정말 가문의 대공자이자 영지의 계승자다웠다. 가서 가문의 명맥을 이어라.”

“저는 도망가지 않습니다.”

“그냥 가라. 네가 살아야 나중에라도 우리 복수를 할 거 아니냐.”

복수라.

지셀이 씨익 웃으며 답했다.

“복수는 이미 시작됐습니다.”

“뭐?”

둥! 둥! 둥!

란돌프가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을 새도 없이, 적들의 북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드드드드드!

남아 있던 공성탑 세 대도 움직이고 있었다.

드디어 마지막 결전의 때가 왔다는 걸 모두가 피부로 느꼈다.

지셀은 적군이 다가오는 모습을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이제 제 생각대로 움직이겠습니다.”

성문 쪽으로 내려가는 지셀을 보며 즈발터와 란돌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즈발터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언제는 저놈이 말을 듣는 놈이었던가. 그래도 마지막은 귀족답구나.”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해봅시다. 공성탑을 움직인 거 보면 오늘이 마지막 날 같습니다. 무기가 없으면 주먹으로 싸우면 되는 거 아닙니까?”

다시 의욕을 불사르는 란돌프를 보며 즈발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모두 힘을 내라! 오늘이 마지막 전투다!”

“와아아아!”

영주의 확언에 병사들은 무기를 들고 크게 함성을 내질렀다.

사실 누구도 페르디움이 이길 수 있을 거라 믿지는 않았다.

그저 죽기 싫어서 내지른 비명에 더 가까웠다.

페르디움 쪽에서 함성이 들려오자 빅토르는 비웃음을 지었다.

“이제 끝이다. 지겨운 놈들.”

어제부터 화살이 거의 날아오지 않았다.

적들의 물자가 거의 다 떨어졌다는 증거였다.

이제 압도적인 전력으로 몰려가 승리를 취할 때였다.

“중앙군은 성문 근처까지 가서 대기한다!”

특히 그는 중앙군의 전열에 두텁게 방패병을 세웠다.

“한계에 몰리면 적들이 성문을 열고 뛰쳐나올 것이오. 그때 마법으로 선두를 날려 주시오.”

빅토르 옆에 서 있던 마법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빅토르는 공성이 시작되면 검은 갑옷을 입은 놈들이 뛰쳐나올 거라고 확신했다.

최후의 순간에는 자신들의 장기를 살려 돌격을 감행할 것이다.

‘그게 승리할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겠지.’

하지만 마법사가 불시에 일격을 가하면 그놈들도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 순간을 위해 마법사를 숨겨 왔다.’

페르디움에도 제법 머리를 쓰는 놈이 있는 거 같지만, 그것도 여기까지였다.

“전군! 진격하라!”

빅토르의 외침에 따라 모든 병력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쿵! 쿵! 쿵!

페르디움의 병사들은 절망감에 휩싸여 몸을 떨었다.

지금까지 잘 막아 내었다. 하지만 오늘은 도저히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오직 용병들만이 날카로운 눈으로 적군을 노려보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용병들을 한번 둘러보던 지셀의 시선이 바로 옆에 있던 이에게서 멈췄다.

“바네사, 준비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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