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역시 제법인 놈들이야. (1)
“으으으으! 고작 이런 곳에서!”
빅토르는 참을 수가 없었다.
병력 피해는 크지 않지만, 비싸고 귀한 공성탑 하나를 잃은 건 큰 실수였다.
거기에 전술상 의도적으로 후퇴한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후퇴했다는 데 자존심이 크게 상했다.
“후우, 후우…….”
씩씩거리는 빅토르의 옆에서 타모스가 미덥지 않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새끼 그냥 허당 아니야?’
전략이 어쩌니 공성이 어쩌니 잘난 척을 하더니 결국 별 피해도 못 주고 물러났지 않은가.
그래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성문에서 튀어나왔던 그 검은 기사들은 전투에 문외한인 자신이 봐도 상당히 강해 보였다.
만약 데스몬드의 도움 없이 자신들만 쳐들어왔다면 공성을 시작하기도 전에 박살이 났을 것이다.
“크흠흠. 그나저나 저쪽, 그 검은색 기사들이 좀 강해 보이던데. 괜찮은 거요?”
“기사가 아니오. 마나를 사용하는 움직임이 아니었소.”
“기사가 아닌데 그렇게 강하다고?”
“훈련이 잘되었고 지휘를 잘 따르면 가능한 일이지. 애초에 기사가 수백 명이라면 그냥 성문을 열고 돌격해 왔을 것이오. 페르디움에 그런 병력이 있을 리 없잖소.”
“크흠, 그러면 이제 어찌할 생각이오? 이 상태로 계속 간만 볼 생각이오? 안 통하는 거 같은데 그냥 다 몰려갑시다.”
그러자 빅토르는 그를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타모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양손을 들었다.
“그냥 의견이오, 의견. 알아서 잘하시겠지.”
빅토르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타모스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눈치를 보다 또 슬그머니 물었다.
“여기에 4서클 마법사가 두 분이나 계신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분들의 힘을 빌리면 되지 않겠소?”
“아직 때가 아니오.”
노골적으로 불쾌해하는 어조였다.
타모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소리 없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쯧쯧, 누가 기사 아니랄까 봐 자존심은…….’
그동안 타모스가 지켜본 바로는 빅토르와 마법사들의 사이가 영 좋지 않았다.
타모스는 비록 전투에는 깡통이었지만, 음험한 정치 구도는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빅토르와 마법사들이 마주칠 때마다 느끼는 불쾌함과 어색함이 너무나도 잘 보였다.
‘하긴, 기사들과 마법사들은 사이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지.’
4서클 마법사라면 어지간한 영지의 전속 마법사가 될 수 있다.
빅토르가 나서 달라고 부탁한들, 자존심 강한 그들이 빅토르의 지시에 고분고분하게 따를지는 의문이었다.
타모스는 고개를 저으며 슬쩍 막사를 나가 버렸다.
계속 있어 봤자 말도 안 통하고 핀잔만 받으니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혼자 남은 빅토르는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젠장……. 이런 굴욕이라니.”
지금껏 금방 처리할 수 있을 거라 믿고 무시하던 페르디움에 허를 찔렸다는 사실이 더 치욕스러웠다.
아군 병력을 유린하듯 휩쓸고 공성탑까지 무너뜨린 그 검은 기사가 자꾸 떠올랐다.
‘전투력은 강했지만……. 그 짧은 순간에 그렇게 빨리 판단했을 리는 없다. 그냥 힘을 믿고 일단 나와 본 거겠지.’
빅토르는 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든 상대방을 깎아내렸다.
아무 생각 없이 밀리는 것 같으니 급한 마음에 나왔을 것이라고 합리화했다.
생각이 많아지다 보면, 가끔 무식하고 운 좋은 이들에게 당하기도 하니까.
어쨌든 이만 갈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천천히 화를 삭이며 새로운 계책을 사용하기로 했다.
“우습게 보긴 했지.”
빅토르는 생각했던 것보다 상대가 강하다는 걸 인정했다.
하찮은 시골 영지이지만, 역시 북방에서 오랫동안 싸워 온 자들이라 그런지 만만치가 않았다.
“안쪽에서 흔들어 주마.”
빅토르는 은밀히 열 명의 기사를 불러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내일 밤, 페르디움에 잠입해 동쪽 성문을 점령해라. 근처에 기병 오백과 보병 천 명을 대기시켜 놓겠다. 동문을 확보하면 신호를 보내라. 바로 들어갈 것이다.”
기사들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저희만으로 가능하겠습니까? 그쪽도 단단히 지키고 있을 겁니다.”
페르디움이 아무리 병력이 적더라도 경계는 확실히 서고 있을 터였다.
적군이 대규모로 침입해 오면 바로 연락을 취해 본대를 불러올 것이다.
하지만 빅토르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내통하는 이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만약 동문을 제압하기 어렵다면 곳곳에 불을 내고 소란을 일으켜라. 그리고…….”
살기를 내뿜으며 빅토르는 말을 이었다.
“소란을 틈타 즈발터를 암살해라. 페르디움의 기사가 안내할 것이다.”
* * *
이튿날, 빅토르의 군대는 다시 페르디움 성을 공격했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전날과는 다르게 소극적이었다.
그저 방패병을 앞세우고 성벽에 화살을 쏘아 댈 뿐이었다.
페르디움 군도 대응 사격을 하며 몸을 사렸다.
반나절을 서로 별다른 피해 없이 싸운 뒤, 빅토르의 군대는 물러났다.
“와아아아아!”
뭔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페르디움의 병사들은 어쨌든 또 하루를 버텨 냈다며 환호했다.
지휘부는 상대에게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닌가 고민했지만, 무슨 생각인지 모르니 별수가 없었다.
팡! 팡! 팡!
밤이 되자 적의 진영에서 폭죽이 몇 개 터졌다.
그걸 보고 페르디움의 병사들은 어처구니없어했다.
“벌써 승리의 축포를 터뜨리는 거야?”
“오늘 우리가 이겼잖아? 누가 실수로 쓴 건가?”
병사들이 불꽃을 보며 수군거리는 동안 지셀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저건…….’
묘한 표정으로 폭죽의 불빛이 사라진 밤하늘을 바라보던 지셀은 조용히 몸을 돌려 어디론가 향했다.
밤이 깊어지자, 빅토르의 군대 일부가 어둠을 틈타 은밀하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기사들은 눈에 띄지 않도록 검은 로브로 몸을 가리고, 가장 경계가 취약한 성벽을 찾아 움직였다.
“빨리 움직여. 이쯤이 좋겠군.”
병력이 적은 페르디움이 모든 성벽에 병사를 빽빽하게 세워 두는 건 무리다.
기사들은 어렵지 않게 보초가 적은 곳을 찾아, 마나를 이용해 훌쩍 성벽을 뛰어넘었다.
요인 암살은 전쟁 중에 종종 쓰이는 방법이라 경험이 있었다.
게다가 내통자까지 있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내통자와 접선할 장소로 가는 길은 외워 두었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기사 한 명을 마주쳤다.
“당신이 드렌이오?”
어둠 속에 서 있던 기사, 드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해럴드가 페르디움에 심어 둔 첩자 중 하나였다.
배신한 가신 둘은 디갈드의 영지로 가 전쟁의 명분을 만들었지만, 드렌은 이곳에 남아 있었다.
데스몬드 백작은 신중하고 치밀한 성정으로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해 수많은 대비책을 마련해 두었다.
드렌 역시 그 대비책 중 하나였다.
“그렇소. 시간이 없으니 빨리 움직입시다. 내가 있으니 병사들은 의심하지 않을 거요.”
드렌은 다급하게 말했다. 혹시나 발각될까 봐 잔뜩 긴장한 티가 났다.
고개를 끄덕인 기사들이 드렌을 따라 발을 떼었다.
그러나 채 몇 발자국 가지도 않아서, 누군가가 지붕에서 뛰어내려 그들 앞을 막았다.
쿵!
“읏차! 이 늦은 시간에 다들 바쁘게 어디 가시나? 저녁 못 먹었어?”
스릉!
드렌과 기사들이 잽싸게 검을 뽑아 들었다.
상대의 얼굴을 알아본 드렌이 중얼거렸다.
“대, 대공자?”
언제나 우습게 보던 대공자였지만, 이번 전쟁에서 그가 활약하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드렌은 자신의 실력으로 대공자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하지만 그건 일대일 승부일 때의 이야기다.
아무리 대공자라도 기사 열한 명을 동시에 상대할 수는 없을 터.
드렌이 다급하게 말했다.
“소리치지 못하게 막아야 하오!”
지셀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한쪽 손을 들었다.
철컹! 철컹!
신호를 기다렸다는 듯, 주변의 인가에서 검은 갑옷을 입은 자들이 우르르 뛰쳐나왔다.
빅토르의 기사들이 기겁해서 외쳤다.
“이미 알고 있었구나! 어떻게 우리 움직임을 이렇게 정확히 알고 있는 거지?”
“드렌! 네놈이 말한 것이냐?”
드렌은 식은땀을 흘리며 손을 마구 저었다.
“아니오! 내가 말한 게 아니오!”
순식간에 그들을 완전히 둘러싼 용병들은 모두 쇠뇌를 꺼내 들었다.
차르륵!
수백 개의 쇠뇌를 마주한 기사들은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마나를 다룰 수 있는 기사라 한들, 수백 발이나 되는 화살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지셀이 바지를 툭툭 털며 말했다.
“드렌, 너도 배신자였구나. 이놈의 영지에는 간첩이 왜 이렇게 많지? 다들 돈을 얼마나 먹은 거야?”
“빌어먹을! 어떻게 안 거지?”
빠져나가는 게 불가능한 상황임을 안 드렌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지셀은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래. 누가 배신자인지는 몰랐지. 하지만 오늘 몰래 기어들어 올 거라는 예상 정도는 했지. 내가 너희랑 전쟁을 한두 번 해 본 게 아니거든.”
해럴드 데스몬드와는 전생에 참 많이도 싸웠다.
결국은 지셀이 그놈 대가리를 박살 내면서 승부가 갈렸지만.
“뭐……?”
그러나 과거로 돌아온 지셀의 비밀을 모르는 사람이 듣기엔 그저 헛소리일 뿐이었다.
드렌이 황당해하고 있는 동안, 빅토르의 기사들은 검을 꼬나쥐고 천천히 앞으로 다가갔다.
대공자인 지셀을 인질로 삼아 탈출할 생각이었다.
슬금슬금 다가오는 기사들을 보며 지셀이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 데스몬드의 기사들이야. 제법 수준이 높아 보이네.”
기사들이 얼굴을 굳혔다.
그들은 디갈드의 이름을 걸고 참전했다.
병력이 갑자기 늘어났으니 외부 세력이 끼어들었다는 건 예상할 수 있었겠지만, 그들이 데스몬드의 기사라는 건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당황하는 기사들을 보며 지셀이 히죽 웃었다.
“어서 와, 페르디움은 처음이지?”
“……쳐라!”
어차피 전부 다 들켰다면 오히려 거리낄 것이 없었다.
기사들이 모두 지셀을 향해 검을 내질렀다.
카앙! 카앙!
그들의 공격은 지셀의 양옆에서 번개같이 나타난 길리언과 카오르에게 막히고 말았다.
휘리릭!
지셀의 뒤, 그림자 속에서 단검 몇 개가 갑자기 튀어나와 기사들을 덮쳤다.
푸욱! 푸욱! 푸욱!
“커억!”
기사 셋이 생각지도 못한 기습에 목이 뚫리며 허무하게 쓰러졌다.
동시에 용병들이 쇠뇌의 방아쇠를 당겼다. 볼트가 온 허공을 덮으며 기사들에게 날아들었다.
파바바박!
“크아악!”
쇠뇌는 가까운 거리에서 맞는다면 갑옷도 뚫을 정도로 강하다.
기사들이 고슴도치가 되어 나가떨어졌다.
그나마 몇몇은 검으로 쳐 내며 최대한 마나를 뿜어내 막았지만, 급소만 겨우 피했을 뿐이었다.
“으으…….”
끝까지 살아남은 기사는 드렌을 포함해 다섯 명뿐이었다.
“와, 다섯 명이나 살았네. 데스몬드 놈들이 정말 작정하고 보냈구나?”
지셀은 감탄하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조차도 이런 좁은 공간에서 쇠뇌 수백 개로 겨냥당하면 부상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비록 전투 불능이 되긴 했지만 어쨌든 이런 공격에도 살아남았다는 건 그만큼 실력이 있다는 뜻이다.
“그래도 서 있기는 힘들어 보이네.”
기사들은 피를 흘리며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드렌은 다가오는 지셀을 향해 숨을 헐떡이며 애원했다.
“으으……. 살려 주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 대공자님, 제발…….”
“가뜩이나 우리 영지는 기사도 부족한데……. 이런 뛰어난 기사가 우릴 배신하다니, 마음이 아프군. 왜 이렇게 됐을까?”
지셀은 길리언에게 도끼를 하나 건네받으며 정말 아쉽다는 듯 탄식했다.
살아날 가능성이 있어 보이자 드렌은 다급하게 매달렸다.
“살려 주십시오! 다시는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제가 이들의 계획을 알고…….”
콰직!
머리가 쪼개진 드렌의 시체가 모로 쓰러졌다.
“필요 없어.”
지셀은 도끼에 묻은 피를 대충 흔들어 털어내며 남은 기사들에게 다가갔다.
기사 한 명이 눈치를 보다 다급하게 외쳤다.
“항복하겠소! 항복! 우리를 포로로 대우해 주시오! 몸값을…….”
콰직!
말을 하던 기사도 머리가 쪼개져 쓰러졌다.
무지막지한 행동에 기사들은 경악해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항복한 기사를 죽이는 건 관례에 어긋난다.
말도 제대로 듣지 않고 저렇게 다짜고짜 죽이는 놈은 기사로 살면서 단연코 처음 보았다.
“왜? 너무한 거 같아? 그럼 암살하러 오면서 죽을 거란 생각도 안 했나?”
히죽대던 지셀은 어느 순간 무표정하게 얼굴을 굳혔다.
상식대로, 관례대로, 법대로, 전부 따지며 양보해 주면 이놈들한테 끌려다니게 될 뿐이다.
체면이니 명예니,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지셀의 목적은 이들에 대한 복수였다.
중요한 것은 오직 적들의 멸망뿐.
지셀은 천천히 기사들의 앞에 쭈그려 앉아 나지막이 속삭였다.
“먼저 입을 여는 놈은 죽는다.”
“…….”
“손가락 하나만 움직여도 죽는다.”
“…….”
싸늘한 눈빛에 기사들은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묻는 말에만 대답해라. 대답이 늦어도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