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공격은 최선의 방어다. (2)
“모두 따라와라!”
그 외침과 함께 지셀의 모습이 사라졌다.
“꺄아아악! 도련님! 미쳤나 봐!”
“어서 공자님을 따라라!”
벨린다가 뾰족한 비명을 내질렀다. 상황을 예의 주시하던 길리언은 바로 명령을 내리며 뛰쳐나갔다.
“크하하하! 진짜 저거 미쳤다니까? 정상이 아니라고!”
카오르는 신나서 검을 뽑아 들고 달려 나갔다.
용병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일단 따라 달렸다.
그들에게는 생각할 시간도, 고민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저 평소 훈련받던 대로 대장을 따라 움직일 뿐이었다.
혼란에 빠진 건 그들만이 아니었다.
즈발터와 란돌프는 전투 중인 것도 잊고 입을 쩍 벌렸다.
그러다 지셀과 용병들이 우르르 움직이는 걸 보고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지셀! 돌아와라! 그냥 성벽을 막으란 말이다! 뭐 하는 짓이냐!”
“대공자! 멈추시오! 돌아와! 돌아오라고! 이 미친놈아아아아!”
세상에 공성전 와중에 밖에 나가 돌격을 하는 미친놈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물론 적들 또한 지셀의 기행에 당황한 건 마찬가지였다.
타모스 백작은 빅토르를 돌아보며 물었다.
“저기…… 성문이 갑자기 열렸소만? 저 검은 갑옷을 입은 놈들은 뭐지?”
“…….”
빅토르는 말 한마디 내뱉지 못하고 눈만 껌뻑거렸다.
한참 열세인 페르디움 군이 성문을 열고 먼저 튀어나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심지어 성벽 한쪽에는 구멍까지 나 있는데.
빅토르가 배운 군사학에는 저따위 전술은 없었다.
“뭐지? 무슨 작전인 거지? 놓친 게 있는 건가? 왜 나온 거지? 왜 저러는 거지?”
빅토르는 얼이 빠진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상식을 벗어난 의외의 사태에 지휘관마저 당황했다.
당연히 병사들도 즉각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어?”
페르디움의 성벽에 거의 도착한 한 병사는 무언가가 제 쪽으로 날아오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태양을 가리며 떨어져 내려오는 검은 그림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거대한 무기를 치켜든 사람의 모습.
그것이 병사가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콰아아아앙!
“으아아아아악!”
병사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후우우우우…….”
거대한 양손 도끼를 든 채 적의 한복판에 뛰어든 자는 바로 지셀이었다.
그가 숨을 내쉬자 투구의 틈 사이로 붉은색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곧 지셀을 뒤따라 용병들이 전장에 난입하기 시작했다.
중병기로 무장한 그들은 눈앞에 적이 보이자 일단 무기를 휘둘렀다.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 무슨 작전인지조차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콰직! 콰직!
“으아아악!”
“뭐야, 이놈들은!”
“갑자기 어디에서 튀어나온 거야!”
전쟁에서 병사들은 잔뜩 긴장해 오직 명령받은 목표를 향해서만 움직인다.
멋대로 움직여서도 안 되지만, 움직이려 해도 제대로 주변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난데없이 지셀과 용병들이 들이닥치자, 병사들은 혼란에 빠졌다.
콰앙! 콰아앙!
“크아아악!”
허무하게 쓰러지는 적들을 보며 오히려 용병들이 당황했다.
“뭐야? 이놈들 왜 이렇게 약해? 그냥 여기서 싸우면 돼?”
“일단 닥치고 정신 바짝 차려! 대장님 놓치면 다 죽는다!”
용병들은 적들이 쓸려 나가는 모습에 쾌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선두에 선 지셀의 열기에 이끌려 모두의 몸이 점점 달아올랐다.
“공자님! 다음 명령을! 용병들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길리언이 주변 적들을 죄다 박살 낸 뒤 크게 외쳤다.
지셀은 빠르게 전장을 훑어본 후 손가락을 길게 그었다.
“카오르는 절반을 데리고 뚫린 성벽 주변에 퇴각로를 만들어라. 내가 돌아올 때까지 버티고 있으면 된다.”
“그 정도야 쉽지! 가자, 이놈들아!”
촤아아악!
카오르가 이끄는 용병들이 적들을 밀어내며 순식간에 방패의 벽을 만들었다.
방패의 열을 확인한 지셀의 고개가 다시 빠르게 움직였다.
그가 목표로 삼은 것은 바로 공성탑.
“나머지는 나를 따라와라! 공성탑으로 간다!”
지셀이 크게 외치며 양손 도끼를 들고 달려 나갔다.
“도련님, 도대체 무슨 생각이에요!”
“그런 건 나중에 따지고, 지금은 빨리 공자님을 따라라!”
벨린다와 길리언, 그리고 방패를 든 남은 용병들이 지셀을 뒤따랐다.
특히 마수의 숲 출신 용병들은 이를 악물고 미친 듯이 쫓아갔다.
그들은 이미 경험해 봐서 알고 있다.
저 젊은 대장이 하라는 대로 바로바로 움직여야 살아날 확률이 높다는 것을.
생각하고 움직이면 늦는다. 움직이는 즉시 따라야 한다.
“빨리 움직여! 대장을 쫓아간다! 하라는 대로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생각하지 말고 일단 움직여! 훈련한 대로만 하면 된다!”
한 명이 큰 소리로 재촉하자, 나머지 용병들도 무언가에 홀린 듯이 따라 움직였다.
“뚫어라!”
콰아아앙!
지셀이 혼란에 빠진 적들의 대열을 무너뜨리며 전진했다.
용병들 또한 방패를 앞세우며 나머지 적들을 파죽지세로 밀어붙였다.
기병 돌격만큼은 아니지만, 갑작스러운 공격은 꽤 좋은 효과를 보였다.
적과 아군이 모두 당황하는 사이, 지셀과 용병들은 공성탑의 입구 근처에 도착했다.
“이곳을 막아라! 방패!”
철컹! 철컹! 철컹!
용병들이 2단으로 방패를 들어 올리며 공성탑의 입구를 빙 둘러막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적군의 궁병대가 기존 명령을 무시하고 화살 방향을 돌렸다.
하지만 이미 진형을 갖추고 방패를 들어 올린 용병들에겐 소용이 없었다.
탕! 탕! 탕!
용병들이 진형을 갖춘 걸 확인한 지셀이 다시 크게 외쳤다.
“성벽! 아군을 엄호해라!”
적 궁병대의 공격 목표가 바뀌었으니, 성벽 쪽은 다소 여유가 생겼다.
이쪽 성벽에서 싸우던 자는 란돌프다.
예상치 못한 지셀의 행동에 잠시 넋이 나갔지만, 그도 전장에서 쌓아온 경험을 토대로 금방 정신을 차렸다.
란돌프는 순식간에 달라진 전장 상황을 확인하자마자 목이 쉬도록 소리쳤다.
“쏴! 적 궁병대를 노리고 쏴라!”
얼떨떨해하던 성벽 위의 병사들이 모두 일어나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방심한 적의 한쪽 진영이 화살을 맞고 허무하게 쓰러져 갔다.
방패병들이 다급하게 궁병들을 보호했지만 이미 공성탑으로 향하는 길은 뺏긴 상태.
“공성탑은 나 혼자 가겠다! 모두 내가 올 때까지 버티고 있어라! 벨린다, 길리언하고 같이 용병들을 도와!”
“뭐라고요? 도련님!”
“공자님! 안 됩니다!”
벨린다와 길리언이 지셀을 말리려 했지만, 정신없이 적과 싸우느라 바빠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지셀이 향하는 곳은 탑 안에 있던 병사, 탑에 들어가려던 병사들이 몰려 있어 위험한 위치였다.
그런 곳에 지금 혼자서 가겠다는 것이다.
“이쪽은 신경 쓰지 마라!”
지셀은 재차 강조하고 홀로 적들이 모여 있는 공성탑으로 향했다.
순식간에 망가진 전장을 보며 빅토르가 이를 갈았다.
예쁘게 짜 놓은 판이 웬 미친놈들 때문에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성문 쪽의 정예들을 그냥 데리고 나온 건가!”
공성전 중에 이렇게 갑자기 튀어나올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전장은 난장판이었다. 수많은 병사가 성벽에서 맞붙었고 비명이 끊임없이 울려 퍼진다.
바로 옆에 있던 아군이 죽어도 모를 만큼 어지러운 상황에서 전체를 보기는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내 생각을 읽고 허를 찌른다고?”
병력이 아무리 우세해도 전쟁에 나선 이상 죽음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무리하면 그만큼 피해가 커진다.
하루 정도는 병력을 아끼며 틈을 노리려 했다. 보급이 끊겼다지만 페르디움 정도는 그 정도로도 충분하리란 생각이었다.
공성탑을 먼저 이용한다면 아군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면서 상대편의 힘을 뺄 수 있으니까.
그리고 병력이 적은 저들이 지치면 곧장 대군으로 밀어붙일 계획이었다.
즉, 지금까지의 전투는 적의 힘을 가늠하기 위한 절차였다.
승리가 당연한 상황에서, 손해를 입는 전쟁을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설령 그 의도를 눈치채더라도 상대방은 움직이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페르디움 군은 대부분 양쪽 성벽에 몰려 있었고, 구멍 난 성벽에도 병력을 제대로 배치하고 있지 못했다.
“아니,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성문의 병력을 분산시켜서 힘을 더 빼고 그 뒤에 총공격을…….”
빅토르의 전략은 정석에 가까웠다.
해자도, 탑도 없는 성. 성문 앞에 조잡한 함정조차 없는 곳이지만, 그는 조금의 손해도 보지 않으려고 미리 모든 것을 확인했다.
공성탑을 이용해 적들의 힘을 빼 놓고 나면, 중요한 성문을 더 이상 막지 못할 테니까.
아군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완벽한 방법이었다.
병사들이 구멍 난 성벽에 오를 때까지도 그는 자신에 차 있었다.
이제야 슬슬 다른 병력을 움직이려던 참이었는데, 지셀과 용병들이 난입한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지금 움직인다고? 정말 그 틈을 노렸단 말인가.”
생각의 간극, 그 잠깐의 틈을 노린, 사고의 속도를 뛰어넘은 움직임이었다.
저 혼란과 위험 속에서 적은 빅토르의 생각을 읽고, 전장의 흐름을 파악해 단 하나의 기회를 포착했다.
이 압도적인 병력을 앞에 두고 성문을 열고 나오다니.
적은 아마 아무 생각 없는 멍청이이거나…….
무시무시한 사냥 본능을 발휘하는 야수일 것이다.
“이익, 성문! 성문을!”
빅토르가 눈을 크게 뜨고 전황을 살폈다.
하지만 성문은 어느새 다시 닫혀 있었다.
이대로 전부 밀어붙여야 하는가?
‘아니, 아니다. 이 상태로는 피해가 클 거다. 무리할 수밖에 없어.’
그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이미 아군의 한쪽 진영은 측면을 공격당해 순식간에 무너진 상태였다.
“엄청난 속도군. 저 전투력을 믿고 무작정 뛰쳐나온 건가?”
공성탑이 무너지면 타격이 있긴 하겠지만, 그 탑에 묶여 있던 병력은 다른 쪽으로 돌릴 수 있다.
생각지도 못한 수에 당했지만, 전쟁 결과를 바꿀 정도로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다.
“기사들과 병력을 좌측 공성탑 쪽으로 더 보내라! 어서 공성탑부터 다시 확보해! 공성탑 병사들은 몸을 돌려 적의 배후를 쳐라!”
저 검은 갑옷을 입은 놈들은 꽤 실력 있는 자들로 보이니 공성탑을 확보하려면 기사들을 투입해야 할 듯했다.
진형도 붕괴했고 대열이 끊겼지만, 아직 공성탑 아래에 병력이 남아 있으니 적장을 포위할 수 있을 것이다.
스무 명의 기사와 추가 병력이 좌측 공성탑으로 이동했다.
“저놈들을 밀어 버리면 병력이 부족할 테니 성문도 동시에 친다! 충차와 사다리를 앞으로 이동시켜라! 진군을 준비해라!”
빅토르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이 대열을 바꾸기 시작했다.
공성탑에 들어가려고 대기하던 병력도 이상을 눈치채고 몸을 돌렸다.
“저 새끼 뭐야?”
홀로 다가오는 지셀을 기사 하나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드드드.
지셀이 들고 있는 양날 도끼는 그 크기가 큰 만큼 자루도 꽤 길었다.
그는 그걸 한 손으로 땅에 질질 끌며 공성탑에 다가가고 있었다.
“지금 혼자 뒤쪽을 막겠다고 오는 건가?”
기사는 일그러진 웃음을 지은 채 몸을 돌렸다.
공성탑의 길목을 끊은 적들은 앞쪽에 있던 아군들을 막기에 바빴다.
공성탑 안에 들어간 병사를 제외하고도, 대기하던 병력이 백 명은 넘게 이곳에 있었다.
뒤통수가 비어 있으니 이쪽에서 들이치면 바로 포위 공격이 가능하다.
“올라가던 인원은 신경 쓰지 말고 계속 올라가라! 나머지는 바로 적의 배후를 친다!”
지휘하던 기사가 크게 외치자 대기 중이던 병력이 모두 몸을 돌렸다.
홀로 이 인원을 상대하겠다고 나서는 자가 누구인지는 모르나, 기사가 알기로 페르디움에는 그만한 강자는 없었다.
‘저놈도 그저 객기를 부리고 있을 뿐이겠지.’
단숨에 쳐 죽이고, 멍청하게 길을 끊고 있는 저놈들까지 죽이면 끝날 일이었다.
“차앗!”
마나를 뿜어낸 기사가 뛰어올라 순식간에 지셀과의 거리를 좁혔다.
기사가 지셀 바로 앞까지 다가가 검을 휘두르려던 그때였다.
지셀의 도끼가 크게 반원을 그리며 땅을 찍었다.
콰앙!
쩌억!
기사를 뒤따르던 병력이 순간 걸음을 멈췄다.
앞서가던 기사의 몸은 깔끔하게 반으로 갈라졌다.
두 조각이 난 시체가 양옆으로 쪼개지며 드러난 공간 사이에서, 검은 투구를 쓴 악마가 붉은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