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공격은 최선의 방어다. (1)
디갈드의 본대가 페르디움의 성 앞에 도착했다.
그들은 페르디움의 남쪽 성문과 성벽을 노리고 자리를 잡았다.
성과 조금 떨어진 곳에 진지를 꾸리는 그들을 보며 즈발터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버틸 수 있을까?’
들었던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은 느낌이 너무나도 달랐다.
길게 늘어진 막사와 병력을 보니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아니다. 해내야지. 어떻게든 막아 내야지.’
자신뿐만 아니라 영지민들을 위해서라도 막아 내야 한다.
즈발터가 재차 마음을 다잡는 사이, 성벽에 배치된 병사들과 기사들도 침을 삼키며 조금씩 떨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막아?’
‘우린 끝났어. 성문도 바로 뚫릴 거야.’
‘그냥 밀고 들어와도 다 죽을 거 같은데?’
북방의 경험도, 끈끈한 전우애도, 오랜 충성심도, 이 순간만큼은 모두 쓸모가 없었다.
압도적인 전력이란 그런 것이다.
그저 서 있기만 해도 상대방의 전의를 꺾어 버린다.
다들 어찌할 바를 모르고 긴장해서 적들을 지켜보았다.
디갈드 군은 바로 쳐들어오지 않았다.
경계병을 충분히 세운 뒤, 공성 병기들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거대한 공성탑 네 대와 투석기 한 대가 완성되었다.
그 위용을 마주한 페르디움의 병사들은 말할 수 없는 공포심에 휩싸였다.
‘고, 공성탑이다.’
‘저런 건 처음 봐.’
‘저런 게 온다고? 이 허접한 성벽에?’
공성탑이 뭔지는 알아도 실물은 처음 보았다.
동요하는 병사들의 모습을 본 즈발터의 안색도 어두워졌다.
‘큰일이구나. 싸우기도 전에 이렇게 겁을 먹다니.’
저 거대한 공성탑을 본 것만으로도 페르디움 군은 전의를 잃어 갔다.
그들과는 반대로 타모스는 매우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페르디움 백작이 북방 요새에만 신경을 쓴다더니 사실이었군. 우리 성보다 더 상태가 안 좋은 거 같은데?”
빅토르가 걱정하지 말라 했지만, 사람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
천성이 소심한 타모스는 전쟁이 길어지지 않았으면 했다.
어차피 병력 차이가 크니, 차라리 한 번에 맞붙어 밀어 버리길 바라고 있었다.
“성이 이렇게 초라하다니. 으하하하! 다행이군. 다행이야. 이 정도면 정말 금방 끝낼 수 있겠소이다. 안 그렇소?”
빅토르는 그를 힐끔 곁눈질할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타모스는 신경 쓰지 않고 홀로 웃고 떠들었다.
병력 배치가 끝나자 기사가 다가와 빅토르에게 보고를 올렸다.
“진군 준비, 완료했습니다.”
“투석기부터 시작하라.”
빅토르가 손을 들어 올리자 좌측에 있는 투석기에서 거대한 바위들이 날아가기 시작했다.
바위가 부족해 투석기는 한 대만 쓰게 되었지만,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콰앙! 콰아앙!
“으아악! 피해!”
페르디움 병사들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화들짝 놀라며 몸을 피하기 바빴다.
보통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전령이 먼저 달려와 ‘명예로운 항복’을 요구한다.
그런데 적군은 그런 것도 없이 다짜고짜 공격해 오기 시작한 것이다.
전부 쓸어 버리겠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보였다.
즈발터는 검을 휘두르며 목이 터지게 소리 질렀다.
“모두 피해라!”
적의 병력은 움직이지도 않았으니 공격할 수가 없었다.
투석기는 공격 속도가 느리고 방향 조절이 어렵기 때문에 피하기가 수월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콰아앙! 콰앙!
성벽이 조금씩 깨지는 걸 보며 즈발터가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도 투석기가 있었다면 맞대응할 수 있었을 텐데.’
적들은 이곳에 투석기가 없다는 걸 확신하는 듯, 대비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아마 배신자들이 말했겠지.’
콰앙! 콰아앙!
투석기를 이용한 공격은 어느 순간 멈추었다. 탄환으로 쓸 바위가 모두 떨어진 것이다.
하지만 잠깐의 공격만으로도 페르디움의 성벽은 거의 다 허물어져 버렸다.
그 광경을 보고 빅토르는 한쪽 입술을 끌어 올리며 웃었다.
“시작이 좋군.”
성벽의 잔해가 쌓여 사다리가 없이도 올라갈 수 있을 듯했다.
빅토르가 손을 들자 비로소 병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둥! 둥! 둥! 둥!
장대한 북소리와 함께 디갈드의 병력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모두 준비해라! 적이 진군한다!”
즈발터가 외치자 병사들이 덜덜 몸을 떨며 전투를 준비했다.
훈련된 병사들이 진형을 이루고 다가오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엄청난 압박감이 느껴졌다.
게다가 병사 수도 상대편 쪽이 월등하게 많다.
“괜찮다! 충분히 막을 수 있다! 우리는 성을 끼고 싸운다!”
즈발터는 쉬지 않고 소리를 지르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병사들은 무기를 제대로 쥐지 못할 정도로 손을 떨면서도 영주의 외침에 어떻게든 마음을 가다듬었다.
드드드드드!
적의 중앙군은 일정 거리 이상 진군하지 않았다.
대신 좌우 측에 서 있던 두 개의 공성탑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가오는 공성탑을 보며 즈발터가 외쳤다.
“쏴라!”
후드드득!
수없이 많은 불화살이 날아가 공성탑에 꽂혔다.
하지만 목재에 가죽을 씌우고 물을 먹인 공성탑에는 쉽게 불이 붙지 않았다.
저만한 크기를 불태우려면 탑 전체를 기름에 흠뻑 적셔야 할 텐데, 페르디움에 그만한 기름이 있을 리가 없었다.
거기다 상대방도 페르디움의 공격을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촤아아아악!
방패병의 보호를 받는 궁병들이 앞으로 나서고, 곧 엄청난 수의 화살이 성벽을 향해 날아들었다.
“으아악!”
“몸을 숙여!”
“벽에 붙어서 쏴라!”
몇몇 병사들이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남은 자들은 어떻게든 몸을 낮추며 대응 사격을 했다.
그러나 병력의 차이가 워낙 심해 겨우 화살을 날리며 견제만 하는 정도였다.
그사이, 공성탑이 성벽 양쪽에 하나씩 달라붙었다.
쿠웅! 쿠웅!
공성탑에서 들다리가 내려와 성벽에 걸쳐지고, 탑 안에서 미친 듯이 적군이 쏟아져 내렸다.
“막아라! 란돌프는 반대쪽으로 가라!”
즈발터와 란돌프가 갈라져 성벽에 있는 병사들을 지휘하며 싸우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
차앙! 차앙! 차앙!
제대로 검을 휘두르기도 힘든 좁은 성벽 위에서 난전이 벌어졌다.
“버텨라!”
즈발터와 란돌프는 어떻게든 틈을 파고들어 적들을 베어 나갔다.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을 유기적으로 지휘한다.
개인의 무력도 뛰어나, 디갈드 쪽에서 병사들을 계속 밀어 넣어도 어떻게든 성벽을 내주지 않고 버틴다.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던 빅토르가 흥미로운 듯 눈을 빛냈다.
“역시 제법이야. 이곳에서 썩기에는 아까운 인재군.”
옆에서 보고 있던 타모스가 초조해하며 재촉했다.
“그냥 기사들을 이끌고 성문을 부수면 안 되는가? 그게 더 빠를 거 같은데?”
빅토르가 한심해하는 기색을 감추지도 않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성문을 부수려면 이쪽 전력도 한곳에 모아야 한다.
이미 성벽에 오른 병력이 있는데 굳이 다른 곳을 공략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겨우 성문을 여는 데 기사를 쓰자니.
기사는 매우 귀중한 전력이었다. 수백의 병사가 죽어 나가도 기사 하나를 살리는 게 낫다.
“지금 성문이 뚫리면 적들도 성벽을 포기하고 모두 성문 쪽에 모일 것이오.”
“그러면 그대로 밀어 버리면 되지 않나?”
“페르디움 성안은 좁은 편이오. 밀고 들어가 봤자 한 번에 진입할 수 있는 인원에는 한계가 있으니, 축차 투입을 할 수밖에 없게 되오.”
축차 투입은 부대를 쪼개서 계속 투입하는 전법이다.
그런 식으로 싸우면 적을 지치게 할 수는 있겠지만, 저쪽에도 제법 괜찮은 지휘관이 있으니 재수 없으면 성문을 끼고 며칠을 싸워야 할 수도 있다.
빅토르는 다시 한번 손가락으로 성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성벽도 사실 마찬가지지만, 일단 통로를 많이 만들어 적을 흩어 놓으면 각개 격파를 할 수 있소. 우리가 훨씬 병력이 많으니까. 병력의 이점을 살려서 피해를 최대한 줄여야 하오.”
빅토르가 짜증을 참고 설명해 주었지만, 그래도 타모스는 못 알아듣고 다시 물었다.
“그래? 그러면 오늘 내로 끝이 나는가?”
‘그냥 지금 죽일까?’
빅토르의 마음에 슬슬 살의가 차올랐다.
어차피 죽을 놈이고 곧 전쟁도 끝날 테니 당장 죽여도 괜찮을 것이다.
빅토르는 잠시 고민하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디갈드 백작 옆에 호위 기사와 병사들이 남아 있었다.
수가 몇이든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괜히 후방에서 소란을 피워 적들의 사기를 높여 줄 필요는 없었다.
“좁은 공간에서 병력이 맞붙으면 승패가 나는 데 오래 걸릴 수밖에 없소.”
타모스는 절반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빅토르의 표정이 안 좋은 걸 보고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빅토르의 말처럼 페르디움은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성벽을 사수하지 못하면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성벽을 넘어온 적들에게 포위당해 싸우다가 후퇴하게 될 테니까.
그렇다고 긴 성벽을 다 지키기에는 적의 병력이 너무나 많았다.
즈발터와 란돌프가 활약해 어찌어찌 버티고는 있지만, 페르디움 군은 죽여도 죽여도 끝없이 밀려오는 적들에 지쳐 가고 있었다.
‘그래도 버텨야 한다!’
즈발터는 이를 악물었다. 병사들이 지치기 전에 한 사람이라도 더 적을 죽여야 했다.
빅토르는 소강상태가 된 성벽을 지켜보다 미소를 지었다.
“무너진 성벽 쪽에 병력을 투입해라. 성벽과 성문 쪽의 병력을 분산시킨다. 점령에 성공하면 그대로 버티기만 해라.”
둥! 둥! 둥!
다시 북소리와 나팔 소리가 들리며 대기하고 있던 중앙의 병력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투석기에 무너진 성벽 쪽이었다.
적들이 더 투입되자 즈발터는 다급해졌다.
공성탑에서 쏟아지는 적들을 막느라 허물어진 성벽에 투입할 병력이 부족했다.
‘란돌프 혼자서는 저걸 다 막을 수가 없어! 성벽의 병력이 너무 적다!’
성문을 노리는 적의 중앙군과 후열의 기마병들은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아군의 전력을 분산시키려는 적의 의도가 빤히 보였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막아야만 했다.
뚫린 성벽 쪽이 점령당하면 투입 거점을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즈발터는 다급하게 외쳤다.
“지셀! 무너진 성벽 쪽을 막아라!”
지셀은 성문 안쪽에서 용병들과 함께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검은색 투구와 갑옷으로 중무장하고 있었다.
투구와 갑옷 위에는 무언가를 정성스럽게 덧대어 붙인 듯했다.
성문 개폐 장치 근처에는 스코반과 마수의 숲 경비대가 모여 있었다.
“공자님! 영주님의 명이 떨어졌습니다! 지원하러 가셔야 합니다. 기사단장님이 위험합니다!”
스코반이 다급하게 외쳤다. 지셀이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성벽을 막지 않는다.”
“네?”
스코반과 병사들이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셀은 위험한 쪽을 지원하기로 하고 용병들의 지휘권을 사수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성벽을 지키지 않으면 어쩌자는 것인가?
스코반과 병사들은 어쩔 줄 모른 채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자신들이라도 지원하러 가야 하는지 고민하는 모양새였다.
용병들도 의아한 눈빛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성벽을 안 막는다면 자신들을 데리고 무얼 하겠다는 것인가?
그때, 즈발터의 고함이 다시 들려왔다.
“지셀! 움직여라! 뭐 하고 있느냐!”
란돌프 또한 포효하듯이 외쳤다.
“대공자! 대공자 이 새끼야! 뭐 하냐고! 적들이 오고 있잖아!”
적들은 어느새 무너진 성벽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지셀은 시간을 가늠하고 스코반에게 명령했다.
“열어라.”
“네? 뭘요?”
“성문.”
스코반이 기겁하며 손을 휘저었다.
“아, 아니! 대공자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성문을 왜 엽니까!”
“지금이 아주 좋은 기회다.”
“무슨 기회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십쇼!”
스코반이 제 명령을 듣지 않을 듯 보이니 지셀은 옆에 있는 용병들에게 고갯짓했다.
용병들은 잠시 멈칫했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그들은 고용주의 명에 따라 우르르 몰려가 내리닫이 창살 문을 올리고 성문을 열기 시작했다.
“아, 안 됩니다! 성문을 열면 안 됩니다!”
스코반이 허둥지둥 막으려 했지만, 용병들이 달라붙어 그대로 끌어냈다.
드드드드드!
천천히 열리는 성문 사이로, 저 멀리 적의 중앙군이 보인다.
여전히 여유가 넘치는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역시 이쪽에서 움직이기 좋은 상황이네.”
철컥!
지셀이 웃으며 투구의 안면 가리개를 내렸다.
그의 투구도 검은색의 무언가가 꼼꼼하게 덧대어진 상태였다.
철컥! 철컥! 철컥!
용병들도 모두 투구로 얼굴을 가렸다.
지셀을 따라 준비하기는 했지만, 용병들은 슬슬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벨린다는 낯빛이 창백하게 질린 채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고, 길리언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오직 카오르만이 선물을 앞에 둔 아이처럼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때, 즈발터가 다시 외쳤다.
“지셀! 뭐 하느냐! 왜 아직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냐!”
그는 적들을 떨쳐 내고 재빨리 성벽 아래를 확인하더니 기겁하며 말을 더듬었다.
“너, 너 지금! 뭐, 뭐 하는 거냐! 서, 성문을 왜 열었어!”
성문이 열려 있고 아들과 용병대가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분명 지휘를 따르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다, 닫아라! 성문을 닫고 성벽으로 가란 말이다!”
즈발터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지셀과 용병들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놈―! 영주의 명령이다! 어서 란돌프를 도와 성벽을 방어해!”
란돌프도 성벽 아래 상황을 확인하고는 기겁하며 소리쳤다.
“대공자! 성문을 왜 열어, 이 미친놈아!”
지셀은 두 사람이 뭐라고 떠들든 못 들은 척하며 천천히 몸을 낮췄다.
거대한 양손 도끼를 쥔 채, 다리 쪽에 마나를 잔뜩 모으고 그가 말했다.
“성벽 방어라……. 스코반, 그거 알아?”
지셀의 말에 스코반이 나라 잃은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뭘요? 우리 다 망했다는 거요?”
“아니.”
“그럼 어떤 거요?”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거.”
“네?”
“기회가 왔을 때는 망설이지 말고 일단 움직여야 해.”
투구 안쪽에서 붉은 빛이 번뜩였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앙!
지셀의 몸이 엄청난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