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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69화 (69/269)

69화 내가 직접 판을 바꾸는 수밖에. (5)

“이익! 전멸이라니! 보급 부대가 어쩌다가!”

화려한 막사 안에서, 타모스 디갈드 백작은 화를 내며 길길이 날뛰었다.

이미 페르디움은 회전을 포기하고 성에 틀어박혔다.

결국 공성에 나서야 하는데 보급 부대가 없으면 시간을 오래 끌 수가 없었다.

“이 멍청한 파브로 새끼! 그 새끼한테 부대를 맡기는 게 아니었어! 고작 페르디움 따위에 기습당한단 말이냐!”

파브로는 디갈드의 휘하 가신 중 가장 큰 파벌을 이끄는 자였다.

그래서 영 시원찮은 놈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보급 부대라도 맡긴 건데, 이렇게 큰 실수를 할 줄은 몰랐다.

아니, 애초에 페르디움의 기습 자체를 상상도 하지 못했다.

“도대체 그놈들이 무슨 여력이 있어서 기습을 한 거야!”

전력이 적을수록 이런 과감한 전략을 펼치기 어려워진다는 건 상식이다.

실패했을 때의 위험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상식적인 지휘관이라면 시도하지 않을 수였다.

‘으으, 젠장! 이대로 가면 승리해도 점령지를 관리할 병력이 없잖아?’

보급 부대는 전부 디갈드의 병력이라 타격이 컸다.

최대한 아끼려고 후방으로 빼돌렸던 게 오히려 최악의 수가 되고 말았다.

“진정하시오. 백작.”

타모스의 옆에는 체구가 크고 인상이 냉엄한 사내가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다.

그의 이름은 빅토르.

데스몬드 백작이 심혈을 기울여 키운 실력자였다.

“어떻게 진정한단 말이오. 투석기에 쓸 바위들은 대부분 보급 부대가 옮기고 있었소. 여기에는 얼마 없단 말이오.”

“그건 좀 아쉽지만, 어차피 성벽 한두 군데만 허물면 되오. 공성탑과 본대 병력은 멀쩡히 남아 있으니 문제없소.”

“그, 그래도 시간이 오래 걸리면 힘들지 않겠소? 식량도 며칠 치밖에 없소이다.”

타모스는 공성에 막연한 두려움을 품고 있었다.

전쟁 경험이 없기에 전술이며 전략 따위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애초에 단번에 끝낼 생각이었소. 페르디움은 수성할 준비가 제대로 안 되어 있으니까.”

“으음, 그걸 어떻게 아시오?”

타모스가 의아해했다. 빅토르는 얼굴 가득 비웃음을 띠고 답했다.

“경험의 산물이지. 빨리 끝날 테니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만 알아 두시오.”

“크흠, 뭐 그러면 나야 좋지요. 허허허.”

어차피 병력도 이쪽이 압도적이다. 맞붙어서 쓸어 버리든, 공성을 하든 쉽게 끝날 것이다.

타모스는 웃으면서도 속으로 욕해 댔다.

‘건방진 놈. 백작인 나한테 저따위 말투라니. 고작 기사 나부랭이 주제에.’

빅토르와 대화를 이어 갈수록 불만이 쌓여 갔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실제로 본대 병력을 지휘하는 사람은 타모스가 아니라 빅토르였기 때문이다.

“크흠, 그러면 로게스 백작이 지원해 오기 전에 끝낼 수 있겠소?”

“그들은 오지 못할 것이오.”

페르디움에서 로게스 영지로 가는 길목에는 이미 아멜리아가 진을 치고 있었다.

“흐흐, 데스몬드 백작이 꼼꼼하게 준비했구려. 멍청한 페르디움, 룬스톤을 얻자마자 다른 영주한테 달라붙었어야지.”

타모스가 히죽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페르디움이 더 크기 전에 이렇게 밟을 수 있으니, 길모어의 죽음이 헛된 게 아니었구려. 속만 썩이던 놈인데 그래도 자식이라고 마지막에는 효도하고 갔네. 어휴, 장한 놈.”

길모어가 죽은 거야 아무래도 좋았다. 자식이야 또 낳으면 되니까.

중요한 건 이 전쟁만 끝나면 자신도 대영주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마수의 숲을 절반으로 나눠야 하는 게 아쉽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지.’

데스몬드는 병력을 빌려주는 대가로 마수의 숲 개척 권리의 절반을 요구했다.

어차피 디갈드 영지의 힘만으로는 페르디움을 칠 수 없기에, 타모스는 울며 겨자 먹기로 수락했다.

물론 룬스톤을 얻어 부강해진 뒤에는 어떻게든 데스몬드를 몰아낼 계획이었다.

앞으로의 일을 상상하며 싱글벙글하던 타모스가 넌지시 말했다.

“크흠, 그런데 이렇게 되면……. 우리 쪽 병력이 부족해서 페르디움을 제대로 안정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소. 바로 징집하더라도 시간이…….”

“점령 후 일부 병력을 빌려드리겠소.”

“허허, 고맙소. 데스몬드 백작에게는 꼭 은혜를 갚겠소이다.”

타모스는 그제야 안심한 듯 다시 기분 좋게 웃었다.

빅토르는 그에게 마주 웃어 주며 살기 어린 눈빛을 감추었다.

‘한심한 놈. 페르디움을 점령하는 즉시 네놈도 죽을 것이다.’

타모스는 전쟁 중에 안타깝게 사망한 것으로 처리될 예정이었다.

그렇게 되면 남는 건 디갈드 영지의 후계자가 된 타모스의 둘째 아들뿐.

그놈을 어찌 처리할지는 데스몬드 백작이 결정할 것이다.

‘보급 부대가 전멸한 건 잘된 일이군.’

어차피 쓸어 버릴 병력인데, 페르디움 쪽에서 없애 버렸으니 손 안 대고 코 푼 격이었다.

‘그래도 의외로군. 설마 란돌프인가? 아니면 역시 즈발터?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어차피 모두 죽을 테니.’

빅토르는 상념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 보겠소. 곧 페르디움에 도착할 테니 준비하시오.”

“크흠, 알겠소.”

막사 밖으로 나온 빅토르는 천천히 진영을 훑어보았다.

무려 6천에 이르는 대군은 한 명 한 명이 어느 곳에서도 빠지지 않는 정예병들이었다.

작은 영지에서는 구경조차 하기 힘든, 어마어마하게 비싼 공성탑도 있었다.

“이 정도면 레이폴드도 단박에 쓸어 버릴 수 있을 텐데.”

북부의 대영주로 손꼽히는 레이폴드도 노려 볼 수 있을 만큼 훌륭한 병력이었다.

페르디움 따위는 사실 그의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식후 차 한잔 마시듯 가볍게 처리하고 돌아가면 될 일이었다.

페르디움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미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또 하나의 가문이 멸망하는군.”

빅토르는 별다른 감흥 없이 중얼거렸다.

데스몬드 백작이 자신을 보냈다는 건, 확실하고 완벽하게 적의 숨통을 끊으라는 뜻이었다.

그에겐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다.

자신이야말로 북부 제일의 기사였으니까.

* * *

“또 잡았습니다.”

베르나프가 아멜리아 앞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보고했다.

아멜리아는 천막 아래에 앉아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금까지 몇 명이었지?”

“다섯 명입니다.”

“다른 곳도 빠짐없이 잘 지키고. 하나도 놓치지 마.”

“알겠습니다.”

“지루해 죽겠네.”

아멜리아는 로게스 영지로 가는 모든 길목을 막고 페르디움의 병사를 때려잡는 중이었다.

데스몬드 백작의 부탁을 받아 마지못해 움직였지만, 고작 전령이나 잡자고 이런 곳까지 나와서 시간을 버리는 건 상당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슬슬 짜증이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냐앙.”

바스테트도 심심한지 그녀의 품에서 연신 하품을 해 댔다.

베르나프는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아, 나도 옆에서 같이 놀고 싶다.’

아멜리아 옆에는 하녀들이 붙어 부채를 흔들고 있었다. 손이 닿는 곳에는 과일도 종류별로 가져다 놓았다.

전령을 잡는다고 해 봐야, 명령만 내리고 정작 본인은 소풍을 나온 듯이 놀고 있을 뿐이었다.

조금 지나자 병사들이 또 다른 전령의 시체를 옮겨 왔다.

그 모습을 본 아멜리아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하, 뭘 이렇게 많이 보냈대. 페르디움 백작님이 은근히 집요하시네.”

영지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으니 이해는 가지만, 그래 봤자 의미 없는 발버둥이다.

“아니다 싶으면 남자답게 포기할 줄도 알아야지. 하여튼 아들이나 아비나 다를 게 없어요. 쯧쯧.”

아멜리아도 이미 전쟁이 일어난 걸 알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조금 아쉬운 일이었다. 지셀의 목은 직접 베고 싶었는데 말이다.

“룬스톤도 아깝네. 데스몬드 백작이 깔고 앉으면 뺏어 오기도 쉽지 않을 텐데.”

가장 아쉬운 건 역시 룬스톤이었다.

하지만 아직 그녀의 세력으로는 데스몬드 백작을 이길 수가 없었다.

“뭐, 나중에 기회를 보고 뺏어 오면 되겠지.”

욕심 많고 집요한 그녀가 룬스톤을 그냥 포기할 리가 없다.

아멜리아가 앞일을 계획하며 여유를 즐기고 있을 때, 수하 하나가 달려와 외쳤다.

“아가씨! 급한 소식입니다!”

“뭐야?”

짜증 섞인 시선에 수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서찰 하나를 건네주었다.

“디갈드 보급 부대가 전멸했다고?”

서찰을 읽던 아멜리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흐음, 농성을 하시겠다?”

보급 부대를 전멸시켰으니 공성 측이 물러나기를 기다리며 성안에 틀어박힌 모양이었다. 지원이 오면 승리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 지원이 오지 못하게 전령을 척살하고 있는 사람이 보기에는 그저 비웃음만 나는 계획이었다.

로게스 백작에게 소식이 들어갈 때쯤에는 이미 모든 게 끝나 있을 터였다.

“대군을 상대하면서 그런 작은 희망에 목숨을 건다고? 설마 정신력으로 버티겠다, 뭐 그런 거야?”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자신이라면 전혀 다르게 움직일 것이다.

영지민과 성은 그냥 버리고, 그대로 병력을 밖으로 빼서 유격전을 진행하면 된다.

보급까지 끊긴 상황에서 끈질기게 주변을 괴롭히면, 잃을 게 많은 데스몬드로서는 물러설 수밖에 없을 테니까.

영지민을 끝까지 지키려는 페르디움 백작의 긍지는 아멜리아가 보기에 너무나도 비효율적이었다.

전쟁에서 승리만 한다면 영지민들도 바로 되찾을 수 있다. 영지민들은 그 잠깐만 버티면 되는 것이다.

“참 마음도 약하셔라. 그게 더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간다는 걸 모르시나?”

그녀가 보기에 이건 그냥 다 같이 죽자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아멜리아는 서찰을 대충 옆으로 던져 버리려다 잠깐 멈칫했다.

“뭔가 이상한데? 수상한 냄새가 나.”

페르디움, 아니 지셀 그놈과 관련된 일은 늘 마음대로 풀리지 않았었다.

“무슨 냄새요?”

아멜리아는 의아해하는 베르나프를 무시하고 잠시 고민하다 말을 이었다.

“애들 페르디움 쪽으로 더 보내. 전쟁 결과 나오자마자 달려오라고 해.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똑똑히 확인하고.”

“굳이 신경 쓰실 필요 없지 않겠습니까? 그 정도 병력 차이면 못 이기는 것도 힘들 텐데요.”

그러자 그녀는 짜증 섞인 눈빛으로 베르나프를 돌아보았다.

“보내. 뭔가 이상하니까.”

“……알겠습니다.”

묘한 예감이 자꾸 그녀의 뒷덜미를 간지럽혔다.

‘지셀 그놈이 가만히 있을 리 없지. 평범한 전략에 따라 남이 시키는 대로 순순히 움직인다고? 그럴 리가.’

아멜리아는 2만 골드를 강탈당하고, 암살까지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페르디움에 대한 지원 중단을 핑계로 지셀의 입지를 좁히려고 했지만, 그것도 무산되었다.

지셀을 싫어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는 경험으로 습득한 사실을 무시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그놈이라면 또 뭔가 상상치도 못한 수작질을 부리겠지.’

불길한 예감이 자꾸 뒤통수를 찔렀다.

아멜리아는 찝찝한 기분을 떨쳐 내려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튼 빨리 진행해. 혹시 모르니 여러 명을 보내서 지켜봐.”

베르나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과감하게 기습을 해서 보급을 끊은 건 제법입니다. 보통 대담한 게 아닌데요?”

“그러게.”

아멜리아는 무성의하게 답했지만, 베르나프는 그녀가 제 말을 받아 주자 괜히 신이 나서 다시 말을 이었다.

“역시 페르디움 백작이 한 거겠죠? 아니면 기사단장 란돌프? 두 사람이 같이 갔을 수도 있겠군요.”

그러자 아멜리아가 푸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왜 그러십니까?”

“정말 그 두 사람이 했다고 생각해?”

“아닙니까? 그 두 사람 말고는 할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아멜리아는 콧방귀를 뀌었다.

“란돌프는 분명 용감하고 저돌적이긴 하지만 전장에서 칼 휘두르는 것밖에 못 하지. 기습해서 보급을 끊겠다는 생각 자체를 못 하는 머리라고. 시도한다 해도 어설프겠지. 들켜서 실패할지도 모르고.”

“그러면 페르디움 백작이?”

“페르디움 백작은 제법 괜찮은 지휘관이긴 하지만……. 함부로 병사들의 목숨을 걸고 도박하는 성격은 아니야. 그렇기에 북방의 요새를 오래도록 지킬 수 있던 거지.”

“그러면 누가 했다는 겁니까? 설마…….”

기습이 성공했기에 망정이지, 객관적으로 보면 말도 안 되는 도박 수였다.

그리고 그런 짓을 서슴지 않고 해 대는 미친놈이 마침 페르디움에 하나 있긴 하다.

아멜리아가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서늘하게 말했다.

“그래. 지셀, 그 새끼가 분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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