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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67화 (67/269)

67화 내가 직접 판을 바꾸는 수밖에. (3)

디갈드의 가신이자 보급 부대의 지휘관인 파브로 남작은 잠도 못 자고 천막 안을 서성거렸다.

전략이나 부대 정비 따위를 고민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기분이 너무 좋아 잠들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흐흐, 드디어 나도 봉토를 받는구나.”

파브로는 자기 영지가 없었다.

그가 섬기는 디갈드의 땅도 작고 보잘것없는 수준이니, 그 가신인 파브로가 봉토를 받을 기회가 있었을 리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이번 일만 잘 풀리면 페르디움의 영토 일부를 받을 수 있었다.

“데스몬드 쪽에 붙기를 잘했어. 내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지.”

파브로는 데스몬드로부터 뇌물을 받고 언제나 그쪽을 대변하는 의견을 냈다.

파브로뿐만 아니라 디갈드의 가신들 대부분이 그랬다. 영지를 그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후훗, 이번에는 나도 이름을 좀 알릴 수 있겠지?”

보급 부대이긴 하지만 전쟁에 참여했으니 조금이나마 명성도 얻을 것이다.

사교계에서는 전쟁에 참여한 것만으로도 주목받는 법이니까.

게다가 자신은 후방 부대이니 위험할 일도 전혀 없었다. 본대에 물자만 지원하면 된다.

안전한 데서 이득만 볼 수 있다니, 이런 꿀 같은 전쟁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나저나 데스몬드 백작에게 이렇게 병사가 많을 줄이야. 이 정도면 레이폴드보다 강한 거 아니야?”

디갈드 영지의 징집병과 용병이라고 꾸미기는 했지만, 도저히 모를 수가 없는 규모였다.

데스몬드는 중소 영지 몇 개는 모여야 나올 병력을 지원으로 보내 주었다.

본대가 워낙 크다 보니 디갈드의 병사들로는 후발 보급 부대를 꾸리기에도 아슬아슬했다.

“어휴, 페르디움은 이제 끝이네. 끝이야.”

수준이 비슷해야 치고받기라도 하지, 이 정도면 페르디움을 압살하고도 남을 것이다.

하물며 공성 병기까지 있으니, 아마 페르디움은 하루도 버티지 못하리라.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는 전쟁.

그래서 파브로는 요새 매일같이 기분이 좋았다.

드드드드.

“응? 이게 무슨 소리지?”

행복한 꿈에 젖어 있던 파브로는 묘한 진동을 느끼고 정신을 차렸다.

막사 밖으로 나가니, 몇몇 기사들이 의아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게 보였다.

“어이, 무슨 일인가?”

파브로가 묻자 기사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모르겠습니다. 지진인지…….”

이들은 적의 기습일 수도 있다는 조그만 가능성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가뜩이나 병력이 적은 페르디움이 별동대까지 마련해 공격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한 것이다.

앞서가고 있는 본대에서도 별다른 소식이 없었으니까.

드드드드.

잠깐 사이에 진동은 더욱 강해졌다.

파브로는 턱을 긁으며 고민에 빠졌다.

“뭘까? 어디 소 떼라도 우르르 지나가는 건가?”

소 떼라는 말을 떠올리자마자, 파브로는 이 진동이 말발굽 소리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이, 설마.”

그는 제 허무맹랑한 상상에 피식 웃었다.

횃불을 켜 두긴 했지만, 구름이 많이 낀 탓에 시야가 어두워 멀리 볼 수가 없었다.

그저 소리만 듣고 판단해야 하니 상황을 파악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드드드드드!

그들이 소리의 정체를 알아차린 건 지셀의 군대가 완전히 가까워지고 난 뒤였다.

“기상! 기상! 기습이다! 기습! 움직여라!”

그나마 빠르게 반응한 기사들이 외쳤다.

정작 지휘관인 파브로는 그때까지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만 짓고 있었다.

“기습이라고? 대체 어떻게? 왜?”

두두두두두!

“으허허헛!”

적이 코앞에 다가오고 나서야 파브로는 정신을 차렸다.

그는 다급하게 소리를 지르며 뒤로 도망갔다.

“적이다! 적! 모두 나와서 막아!”

그 와중에도 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적은 많아 봤자 몇백 명 수준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빨리 본대를 우회해서 올 수 있을 리가 없다.

비록 보급 부대이긴 하지만, 이쪽은 병력이 천 명이나 되었다. 이런 기습 정도는 막아 내고도 남는다.

“빨리 움직여라! 빨리! 충분히 막을 수 있어! 우리가 더 많아!”

병사들이 천막에서 다급하게 무기를 들고나왔다.

몇몇은 장비도 미처 챙기지 못했고, 전열은 엉망이었다.

모두가 황망하게 움직이는 그때.

콰아아아앙!

지셀의 군대가 어둠 속에서 튀어나왔다.

“으아아아악!”

외곽에 있던 병사들이 순식간에 쓸려 나갔다.

곳곳에 세워 둔 횃불들이 튕겨 나간 시체에 부딪혀 넘어졌다.

곧 화염이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혼란에 빠진 병사들은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디갈드의 기사 몇 명이 다급하게 병사들을 지휘했다.

“모여라! 모여서 진을 형성해라!”

하지만 전열을 가다듬는 것은 불가능했다.

적은 뛰어난 기동력을 바탕으로 일렬로 길게 늘어서서 진로를 막는 것들을 그대로 박살 내 버렸다.

어찌나 강하게 짓쳐 들었는지 아예 천막을 찢어발기며 뚫고 지나간 용병도 있었다.

두두두두!

디갈드의 기사가 가장 선두에서 달려오는 지셀을 발견하고 검을 뽑았다.

남들과는 다른 복장, 누구보다 앞서는 기마술.

기사는 눈앞에 있는 자가 적들의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놈을 죽이면 된다!’

단숨에 말과 함께 베어 버리겠다는 생각으로 검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두두두두!

곳곳에 번진 화염 탓에 다가오는 자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역광을 받아 윤곽만 겨우 보이는 그림자 속에서, 기사는 보고야 말았다.

무시무시하게 붉게 타오르는 상대방의 두 눈을.

그 안에 담긴 알 수 없는 증오와 끝없는 분노를 느낀 순간, 기사는 몸이 굳어 버리고 말았다.

“으아아아아!”

기사는 마나를 잔뜩 끌어올리며 애써 공포를 떨쳐 내고 힘껏 앞으로 달려 나갔다.

“죽어라아!”

지셀은 살짝 옆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리고 온 힘을 담아 아래에서 위로 도끼를 강하게 휘둘렀다.

콰지지직!

단 일격에, 다가오던 기사는 사타구니부터 머리까지 반으로 갈라져 쓰러졌다.

지셀을 뒤따르던 용병들이 환호를 내지르며 휘파람을 불었다.

콰직! 콰직!

지셀의 앞에 선 병사들은 모두 도끼에 머리가 찍혀 박살이 나거나 목이 날아갔다.

벨린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직접 사람을 죽이는 것은 처음일 텐데, 동요를 감추고 있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되었다.

한편, 그대로 숙영지의 반대 끝까지 순식간에 도착한 지셀이 바로 말 머리를 돌리며 말했다.

“마저 쓸어라.”

무미건조한 명령에 용병들이 다시 방향을 틀어 적들에게 달려들었다.

몇 안 되는 기사들을 잃은 디갈드의 병력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다.

기마병을 막기 위한 구덩이도, 장애물도 없었던 탓이다.

기습당하기 쉬운 장소와 시기를 파악해 대비하는 것도 지휘관의 역량이었다. 그리고 파브로는 그리 좋은 지휘관이 아니었다.

“길리언과 카오르는 남은 기사들을 상대해라.”

두두두두!

용병들은 두 패로 나누어져 적들을 빙 둘러쌌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게 마치 숙련된 기마병단 같았다.

“훈련이 잘되었군.”

지셀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에도 가장 즐겨 쓰던, 기동력을 이용한 기습과 돌격.

지셀은 바로 이 충격 전술을 위해 돈을 털어 용병들에게 장비와 군마들을 맞춰 주었다.

용병왕 개인의 무력은 대륙 7강의 일곱 번째로 평가받았지만, 전쟁 수행 능력은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갔었다.

그는 학살자인 동시에 전장의 왕이었다.

디갈드의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막아야 해! 방패, 방패 어디 있어!”

“모여! 모이라고!”

장비도 없이 급하게 나온 그들이 작정하고 공격해 오는 용병들을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보병은 진형을 갖추지 못하면 아무리 수가 많아도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할 수 없다. 게다가 이런 난전 속에서는 지휘가 통할 리 없었다.

다시 한번 시작된 학살.

디갈드의 병사들은 하나둘씩 무기를 버리고 몸을 피하기 시작했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지셀의 명령에 따라, 용병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병사들을 쫓아갔다.

말을 탄 그들에게 겁을 먹고 도망가는 병사들은 쉬운 사냥감이었다.

몇몇 상대 기사가 분전했으나 길리언과 카오르에게 잡혀 하나씩 죽어 갔다.

보급 부대라 기사도 몇 명 없었던 탓에 적들은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크하하핫! 이거 진짜 기분 째지잖아!”

특히 카오르와 광견단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뛰었다.

마수의 숲에서는 몬스터들이 워낙 많고 위험해 그들도 버티기에 바빴다.

하지만 상대가 인간이라면 자신들의 광기를 마음껏 터뜨릴 수 있었다.

몇몇은 아예 말에서 내려 가까이 있는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다.

“으하하핫! 죽어! 죽어!”

“너무 약하잖아! 벌레 같은 새끼들아!”

몇몇 디갈드의 병사들이 뭉쳐서 대항했지만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지셀은 쉬지 않고 전장을 돌아다녔다.

조금이라도 적이 많이 모이거나 용병들이 위험해 보이면, 어김없이 달려가 도끼로 적의 머리를 쪼개 버렸다.

천 명이 넘는 디갈드의 병사들은 그렇게 허무하게 쓸려 나갔다.

“끝났군.”

벨린다는 당연하다는 듯 중얼거리는 지셀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뭐지? 분명 전쟁은 처음일 텐데?’

몬스터를 죽이는 것과 인간을 죽이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누구라도 전쟁을 처음 겪으면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힘들다.

그런데 그녀의 걱정은 기우일 뿐이었다.

‘왜 이렇게 담담한 건데!’

지셀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처럼 적들을 처치했다.

이 정도면 타고난 전쟁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담담한 게 아니야.’

전장을 휩쓰는 지셀은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억지로 삼키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지셀이 디갈드에 저렇게 큰 원한을 품을 만한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가 의아해하는 동안 적들의 비명 소리가 잦아들었다.

이 싸움이 끝나 가고 있다는 뜻이었다.

잠시 후, 길리언이 누군가를 질질 끌고 와 지셀의 앞에 던져 놓았다.

“이놈이 지휘관인 거 같습니다.”

파브로는 덜덜 떨며 지셀을 올려다보았다.

아무리 디갈드의 병사들이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아 약하다 하지만, 천 명이 넘는 병력이 순식간에 전멸했다.

“으으, 사, 살려 주시오.”

파브로는 병사들의 수만 믿고 있다가 도망갈 시기를 놓쳐 버렸다.

뒤늦게 어찌어찌 몸을 빼긴 했는데 뒤따라온 길리언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이렇게 억울하게 죽을 수는 없었다.

‘어차피 본대는 승리할 것이다.’

어떻게든 목숨만 붙어 있으면 풀려날 수 있었다.

보통 전쟁에서 귀족을 사로잡으면 죽이기보다는 포로로 삼는다.

그의 주군이나 가족에게 몸값을 받아 내는 쪽이 이득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파브로도 마음 놓고 항복할 수 있었다.

“살려 주시오! 디갈드 백작이 분명 몸값을 줄 것이오! 항복하겠소! 항복! 항복!”

지셀은 말없이 파브로의 얼굴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지셀과 눈이 마주친 순간, 정신없이 애원하던 파브로는 숨이 막힐 듯한 공포에 입을 꾹 다물었다.

차가운 뱀과 같은 눈빛,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표정.

번들거리는 포식자의 눈이 자신을 관찰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먹을지 말지 고민하는 것처럼.

“이름.”

“파, 파브로 남작이오. 그, 그대는 누구요?”

“지셀 페르디움.”

“지셀……? 페르디움의 대공자?”

파브로는 입을 쩍 벌렸다.

지셀의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디갈드의 후계자였던 길모어와 더불어 북부에서 쌍벽을 이루는 망나니 아니던가?

그런 자가 이런 식으로 대담하게 기습해서 천 명이나 되는 병사들을 학살했다고?

차라리 페르디움 백작의 정체가 드래곤이라는 말이 더 신빙성이 있었다.

하지만 본인 앞에서 지셀 페르디움을 망나니라 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파브로는 내색하지 않고 냉큼 고개를 숙였다.

“대공자, 항복을 받아 주시오. 그대에게도 나쁜 일이 아닐 터. 큰 몸값을 받을 수 있을 것이오.”

하지만 지셀은 엉뚱한 대답을 건넸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안 나.”

“그, 그게 무슨 말이오?”

“네가 기억에도 남지 않을 정도로 매우 하찮은 놈이라는 뜻이다. 뭐, 어느 쪽이든 결과는 똑같을 테지만.”

지셀은 한 손으로 파브로의 머리카락을 휘어잡아 끌어올린 뒤, 다른 손으로 도끼를 들어 올렸다.

“아아악! 살려 주시오! 몸값, 몸값을 후하게 내겠단 말이오!”

“나는 네놈들과 거래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게 무슨 소리요! 나는 귀족이란 말이오! 귀족답게 관례를 지켜 주시오!”

“전장에 관례가 어딨어.”

지셀이 우습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표정에는 웃음기 하나 없었다.

“그래, 너희들한테 받을 게 하나 있긴 하지.”

무심한 목소리와 함께 도끼가 떨어져 내렸다.

콰직!

“목숨.”

* * *

철컥, 철컥!

지셀은 성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갑옷을 입은 용병들이 시끄럽게 낄낄대며 그를 뒤따랐다.

성안의 사람들은 모두 지셀을 보자마자 고개를 숙이고 옆으로 몸을 피했다.

지셀의 걸음걸음마다 그린 듯한 핏자국이 남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핏물이 바닥까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지셀은 얼굴도 닦지 않았다.

더욱 공포스러운 것은 지셀의 두 눈이었다.

평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무심한 눈동자.

차라리 살기로 번들거렸다면 덜 무서웠을 것이다.

예전의 지셀이 얽히기 싫은 난감한 골칫덩이였다면, 지금은 얽히면 안 될 것 같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쿠웅!

지셀은 대전 문을 열고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회의하고 있던 즈발터와 가신들은 갑자기 나타난 지셀을 보고 놀라 입을 떡 벌렸다.

도망간 줄 알았던 대공자가 다시 나타났다.

그것도 어디서 싸우고 왔는지 피에 범벅이 된 채 말이다.

“너,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온 것이냐?”

즈발터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셀은 대답 없이 고개만 숙여 인사한 후 들고 온 상자를 탁자 위에 텅 얹었다.

피범벅이 된 상자를 보고 가신들이 숨을 들이켰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 지셀의 목소리가 대전에 울렸다.

“보급 부대는 전멸시켰습니다. 이제 농성을 시작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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