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이 꽉 깨물고 잘 버텨라. (3)
다시 마나가 훅 빨려 들어가며 마법진이 완성되었다.
바네사가 5서클까지 익혔다 했으니, 아마 5서클 마법일 것이다.
게다가 지셀의 마나를 잡아먹고 나온 것이니 그 파괴력도 만만치 않을 터.
이것들이 전부 발동된다면 연무장은 박살 나고, 밖에 있는 사람들도 크게 다칠 것이다.
구우우웅!
지셀은 재빠르게 바네사의 몸 안에서 휘몰아치는 마나의 흐름을 하나둘 차단하기 시작했다.
마나의 흐름이 줄어들자 마법진들이 깜빡이며 일그러졌다.
‘이대로면 위험하다.’
언제까지 자신이 이렇게 붙잡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지셀이 손을 떼면 바네사의 생명력이 모두 빨려 나갈 것이다.
그녀가 스스로 멈추지 않는 이상 마법은 끊임없이 발동될 테니까.
위험하더라도 그녀의 정신을 강제로 깨워야 했다.
“흐읍!”
지셀은 마나를 뿜어내어 그녀의 몸속에 있는 모든 마나 로드를 순식간에 차단했다.
동시에 모든 길이 막히자 바네사의 몸속에서 정신없이 휘몰아치던 마나도 순간 흐름을 멈추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지셀은 크게 소리쳤다.
“눈을 떠라!”
쩌엉!
연무장을 진동시킬 정도로 커다란 외침에 겨우 바네사가 정신을 차렸다.
파스슥…….
허공에 무수히 떠 있던 마법진들이 빛을 잃고 사라졌다.
지셀은 요동치던 마나가 가라앉은 것을 확인하고 바네사에게서 천천히 손을 떼었다.
“쿨럭!”
바네사가 허리를 숙이며 피를 토했다.
그녀는 속이 진탕된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희열을 느꼈다.
드디어 마나가 어떤 느낌인지 확실히 깨달았다.
몸 안에 자리 잡은, 티끌만 한 마나가 확신을 더해 주었다.
“우에엑!”
피를 계속 토하면서도 그녀는 웃었다. 막혔던 속이 뚫리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지셀을 바라보았다.
자신에게 마나를 느끼게 해 준 사람. 이 순간만큼은 몸서리치게 고마웠다.
지셀 또한 그녀를 보며 만족스럽게 웃음을 지었다.
‘생각대로 되었군. 그래도 자칫 잘못하면 큰일 날 뻔했어.’
마나를 느끼자마자 다중 영창이라니.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기분 좋아 보이는 지셀에게 바네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처음 본 저한테 이렇게까지 해 주신 건가요?”
“뭐, 네 힘이 필요하니까. 도와줄 거지?”
“제가…… 공자님께 도움이 될까요?”
그러자 지셀이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 웃으며 답했다.
“그럼, 아주 큰 도움이 될 거야. 이제 마나를 느꼈으니 내가 본격적으로 마나 연공법을 알려줄게. 네게 딱 맞는 게 있거든.”
장난기 어린 지셀의 얼굴을 보고 바네사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운 좋게 좋은 스승을 만나 북부 제일이라는 마탑에 들어갔지만, 현실은 잔혹했다.
저열한 재능, 주변 사람들의 멸시, 아무리 노력해도 변하지 않는 현실.
그것은 스승이 죽고 나서 더 심해졌다.
하녀로 전락해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지만, 누구도 그녀를 인정해 주지 않았다.
오히려 같은 하녀들마저 마법사의 제자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녀를 괴롭히고 따돌렸다.
마탑에서 자신은 마법사도 하녀도 아닌 이방인일 뿐이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그녀에게 지금 믿을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다.
바네사가 조그맣게 입을 달싹거렸다.
“……되고 싶어요.”
“응? 뭐라고?”
진심으로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눈앞에 있는 저 공자는 알 수 없는 힘으로 자신을 묶고 있던 모든 족쇄를 끊어 주었다.
그에게 꼭 은혜를 갚고 싶었다.
바네사는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말했다.
“공자님께 도움이 되고 싶어요.”
“그건 걱정하지 마. 내가 사람은 잘 굴리거든. 각오해야 할 거야.”
지셀이 유쾌하게 웃었다. 바네사도 미소 지었다.
지셀은 몸을 낮추고 쭈그리고 앉아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지셀 용병단에 들어온 걸 환영한다. 바네사.”
* * *
바네사는 지셀에게 가르침을 받아 본격적으로 마나 연공법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는 페르디움의 마나 연공법을 뜯어고쳐 안전하게 마나만 모을 수 있는 방식으로 바꾸어 가르쳐 주었다.
페르디움 백작과 가신들이 알면 기절할 일이었다.
가문의 비전을 멋대로 뜯어고치는 것도, 가문과 아무 관련 없는 자에게 가르치는 것도 귀족들 사이에서는 암묵적으로 금기시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셀은 그런 건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익히고 있는 연공법을 쓸 수 있으면 더 빠를 텐데.”
지셀이 쓰는 마나 연공법은 그의 몸에 딱 맞춰 만든 방식이니 누구에게 전수해 줄 수가 없었다.
자신조차도 불안정한 흐름을 제어하기 어려울 정도니 다른 이가 익힌다면 몸이 터져 버릴 것이다.
“곧 전쟁이 일어날 거야. 그때, 네 마법이 정말 중요해.”
지셀은 바네사에게도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갑작스럽게 일이 터지면 허둥지둥하다 시기를 놓치기 쉽다.
미리 각오해 두어야 일이 닥쳤을 때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 터였다.
“저, 저는 아직 마법을 제대로 쓰지 못해요.”
“괜찮아. 술식은 5서클까지 마스터했잖아?”
“그, 그렇지만 마력이 부족해서…….”
바네사는 아직 마력을 얼마 모으지 못했다.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도 시간이 부족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녀가 모아 둔 마나 양으로는 아주 간단한 마법밖에 시전할 수 없었다.
파악.
바네사의 손바닥 위에서 주먹만 한 빛이 둥둥 떠올랐다.
1서클 마법 ‘라이트’. 지금은 이 정도가 한계였다.
그녀가 울상을 지으며 지셀을 바라보았다.
고작 이걸로 어떻게 전쟁에 도움이 된단 말인가?
“어, 어떡하죠? 이걸로는 별로 도움이 안 될 거예요…….”
“마력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어.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열심히 수련이나 하라고.”
바네사는 불안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이 언제 일어나나요?”
“아마 빠르면 한 달? 늦어도 두 달 내에 일어나겠지.”
마수의 숲에서 나온 지도 벌써 한 달 하고도 보름이 지났다.
적들은 이미 소식을 듣고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을 터였다.
지셀도 그동안 손 놓고 지낸 건 아니었다.
한 달 동안은 룬스톤을 판 돈으로 용병들을 소집했다.
그 뒤 보름은 바네사에게 마나 연공법을 가르치며 보냈다.
시간이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전쟁에서 이기려면 꼭 필요한 준비 과정이었다.
* * *
바네사가 스스로 마나를 모을 수 있는 단계에 이르자, 지셀은 그녀에게 할애하던 시간을 줄이고 그동안 밀려 있던 일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길리언, 용병들의 훈련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지?”
“문제없습니다. 이제 어지간한 영지의 병사들보다 훌륭합니다.”
길리언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용병들은 개개인의 무력을 높이기보다는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데 중점을 두고 훈련했다.
애초에 기본 실력이 있는 자들을 모은 것이니, 그것만으로도 성과가 금세 나타났다.
지셀은 잠깐 고민하다 길리언에게 명령했다.
“그럼 슬슬 마수의 숲에 데리고 가자.”
지셀은 삼백여 명의 용병들을 이끌고 마수의 숲에 다시 들어갔다.
처음 경로를 개척할 때 몬스터의 서식지는 모두 파괴했지만, 빈자리에는 다시 몬스터가 꼬이기 마련이다.
몬스터들이 자리를 잡지 못하도록 주기적으로 주변을 소탕해야 했다.
“이번에는 처음보다 쉬울 테니 걱정들 하지 마라.”
숲에 들어가 본 용병들은 편하게 웃었다.
새로 영입된 용병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들의 뒤를 따랐다.
이미 길을 내고 블러드 퓌톤의 살과 피까지 제대로 확보한 상황.
경로만 벗어나지 않는다면 처음보다는 안전할 터였다.
인원이 늘어난 덕에, 지셀과 용병들은 주변의 떠돌이 몬스터를 쉽게 소탕하고 룬스톤을 다시 잔뜩 가져왔다.
지셀은 남은 룬스톤 양을 헤아려 보다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는 좀 아껴야겠네.”
룬스톤도 무한정 나는 자원이 아니다. 아직 많이 남아 있긴 하지만, 두 번이나 대량으로 캐 왔더니 처음보다는 눈에 띌 정도로 줄었다.
지셀은 길리언과 카오르에게 용병들 관리를 맡기고 성으로 돌아왔다.
“좋아, 그럼 이제 나도 수련을 좀 해 볼까.”
자신이 조금이라도 강해져야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릴 수 있다.
연무장으로 향하려는 그의 앞에 가신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룬스톤을 또 가져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잔뜩 기대하며 달려 온 것이다.
“대공자님! 룬스톤 좀 주십시오!”
“쓸데가 있습니다.”
“좀 달라고! 내놔!”
가신들은 고집스럽게 버텼다. 지셀은 어쩔 수 없이 룬스톤을 아주 약간 떼어 주었다.
이번에도 쓸 계획이 있어 가져온 것이기에 무작정 나눠 줄 수 없었다.
지금은 매일 가서 몬스터와 싸우고 힘을 빼며 캐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가신들은 부족하다며 난리를 쳤지만, 지셀은 콧방귀를 뀌며 그들을 쫓아냈다.
그러고 나서 한동안은 수련에만 몰두했다.
육체 단련, 검술을 비롯한 무기술 수련, 그리고 마나 연공까지 끝내야 하루치 수련이 마무리되는 식이었다.
“몸이 하나라는 게 정말 아쉽군.”
수련이 마무리되면 마수의 숲에 도로와 목책을 내는 일이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검토했다.
게다가 바네사의 수련까지 봐줘야 하니 조금의 시간도 허투루 보낼 수가 없었다.
거슬리는 문제가 있었는데 당장 할 일이 많으니 제대로 살펴볼 시간조차 낼 수가 없었다.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군. 왜 이렇게 된 거지?”
블러드 퓌톤과 싸운 이후부터 미세하게 회복력이 좋아졌다.
회복력이 좋아지니 쉬는 시간이 줄어들고, 그만큼 다른 일을 할 여유가 늘었다.
지금처럼 급한 상황에서는 좋은 변화이지만, 체질이 변한 이유를 모른다는 게 영 찝찝했다.
자신이 잘 알지 못하고 통제할 수 없는 힘은 제대로 된 힘이 아니다.
“역시 그것과 관계가 있는 건가?”
몸에 이상이 생길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지셀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예상이 맞는지 확인할 방법이 한 가지 있긴 했지만, 그러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전쟁이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전쟁이 끝나면 확인해 봐야겠군.”
당분간은 기본적인 수련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지셀이 개인 수련에 집중하는 동안, 용병들은 꾸준히 손발을 맞추는 훈련을 지속했다.
지셀도 짬이 날 때마다 길리언을 찾아 훈련 상태를 점검했다.
새로 영입된 용병들은 지금 상황을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했다.
실제로 그들이 하는 일은 훈련을 받는 것, 가끔 숲에서 몬스터를 처리하는 것, 길을 내는 인부들을 지키는 것뿐이었다.
수레가 다닐 수 있게 도로를 정비하고 양옆에 목책을 쌓는 일은 전부 인부들이 한다.
블러드 퓌톤의 피를 뿌려 둔 데다, 지셀이 한 번 더 돌며 몬스터를 소탕한 덕분에 용병들이 나설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이야,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편하네. 훈련만 하다가 가끔 몬스터나 좀 상대하면 되고.”
“마수의 숲도 소문만큼 위험하지는 않잖아? 뚫을 때는 고생했다고는 하지만…… 정말인지도 모르겠고.”
“대우도 전쟁 고용비로 받고 말이지. 으하하핫.”
고용비를 많이 주고 비싼 장비들까지 지급하니 용병들의 사기는 매우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모든 용병이 지셀을 진심으로 따르는 건 아니었다.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는 지셀이 특별히 활약한 일이 없었고, 끈끈한 정이 쌓이기엔 부대낀 시간이 짧았다.
그러나 그들은 함부로 지셀을 무시하지도 못했다.
지셀에게 충성을 바치는 기존 용병들이 그들을 힘으로 휘어잡고 있기 때문이다.
용병들의 수를 늘릴 때부터 지셀은 기존 용병들을 통해 그들을 통제하고 관리할 심산이었다.
돈과 무력, 이 두 가지가 충족되니 거친 용병들을 관리하면서도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훈련은 정말 열심히 하네. 정말 누가 쳐들어온다는 정보라도 입수한 거 아냐?”
“아서라. 전쟁이 그렇게 쉽나? 영지전 같은 건 준비만 해도 일 년은 걸린다.”
“우리 젊은 대장이 전쟁 경험이 없어서 그래. 맘에 안 들면 그냥 쳐들어올 수 있는 줄 아나 봐.”
“룬스톤이 있다고 소문나면 군침 삼키는 영주들이 많을 테니 겁먹을 만도 하지.”
“그런데 실제로 쳐들어오면 막을 수는 있나? 여기 그렇게 강한 영지 아니잖아?”
“지금은 괜찮아. 소문 다 퍼지고 영주들이 눈독을 들일 때쯤에는 눈치 보고 빠지든지 하자고.”
용병들도 지셀과 계약하기 전에, 소문이 퍼지는 시간과 다른 영주들이 전쟁을 준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따져 봤다.
그렇게 바로 쳐들어오지는 못할 거라 여기고 계약한 것이다.
물론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지만, 용병 일을 하려면 이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 했다.
조금 불안하다는 점만 제외하면 그들에게는 상당히 만족스러운 시골 생활이었다.
“아, 진짜 편하다. 항상 이런 일만 있었으면 좋겠네.”
“다 좋은데 이 영지는 놀 만한 곳이 없어.”
“시골이라 좀 심심하긴 하지. 게임이나 한판 하자.”
용병들이 평소처럼 마음 편하게 쉬고 있던 어느 날, 한 용병이 헐레벌떡 달려와 외쳤다.
“크, 큰일이야! 큰일 났어! 큰일 났다고!”
도박을 준비하던 용병들은 달려오는 자를 심드렁하게 쳐다봤다.
이 영지에서 큰일이라고 해 봤자 별거 아니었다.
인부가 공사를 하다가 좀 다치거나, 누가 카오르한테 까불다가 얻어터지거나, 훈련을 게을리해서 길리언한테 까이는 게 전부다.
“뭔데? 누구 다쳤어?”
“또 개기다가 광견인가 걔네한테 맞았냐?”
“아니면 훈련 영감이 또 모이래?”
용병들은 낄낄대며 웃었다.
하지만 달려온 용병의 말을 듣고는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
“전쟁이야! 정말 전쟁이 일어났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