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이 꽉 깨물고 잘 버텨라. (2)
“뭐, 뭐요? 보조 마력?”
알포이가 당황하며 물었다.
3서클 마스터는 기사와 비슷한 수준으로 평가되는 고급 전력이다.
전장에서는 오히려 기사보다 높이 대접받기도 했다. 어지간한 병사들은 단번에 수십 명도 쓸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마법사들을 겨우 보조 마력 취급하다니, 알포이로선 생전 처음 겪는 모욕이었다.
“그냥 그런 게 있다. 그렇게만 알고 있어.”
지셀은 마차에 남은 짐을 보며 혀를 찼다.
“짐은 직접 들고 가라. 마차 부숴 버리기 전에.”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말 머리를 돌려 주둔지로 향했다.
바네사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안절부절못하다가 후다닥 지셀의 뒤를 따랐다.
마법사들과 같이 있다가 보복당할까 무서워하는 티가 났다.
용병들도 다시 무기를 집어넣고 마법사들 곁을 지나가며 한마디씩 던졌다.
“웬 샌님들이 이렇게 길을 막고 있어.”
“저런 비리비리한 몸으로 용병을 한다고?”
“고용주가 마력 어쩌고 하던데 마법사 아냐?”
“에이, 마법사가 뭐 하러 이런 시골에 와. 그냥 머리나 좀 쓰는 사람들이겠지.”
“돈 많아 보이는데 상단 출신인가?”
지셀과 마법사들이 마탑이라는 단어를 아예 꺼내지 않았기에, 대화를 곁에서 들은 용병들도 마법사들의 정체를 제대로 짐작하지 못했다.
알포이는 이를 갈며 용병들을 노려보았다.
“이…… 천박한 놈들이 감히…….”
하지만 정체를 대놓고 밝힐 수도 없으니 당장은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두고 보자……. 내가 탑주가 되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다른 마법사들은 귀족인 지셀에게 감히 복수할 생각을 못 할 것이다.
하지만 알포이는 절대 오늘 겪은 굴욕을 잊을 생각이 없었다.
그는 다른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아 아픈 몸을 치료했다. 다행히 뼈는 부러지지 않아 하급 치유 마법으로도 몸 상태가 금세 좋아졌다.
지셀에게 이를 갈면서도 알포이는 궁금증을 버리지 못했다.
‘으으,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살만 터지게 때린 거지?’
겉가죽만 상했으니, 다쳤다는 핑계로 짐을 옮기는 일에서 빠질 수도 없게 되었다. 알포이는 다른 마법사들과 함께 낑낑대며 짐을 내렸다.
“으으윽, 왜 이렇게 무거워!”
일 년 동안 지낼 생각으로 왔다 보니 짐이 상당히 많았다.
게다가 어차피 바네사가 옮길 거라는 생각에 마법사들은 다들 무게는 생각하지 않고 잔뜩 짐을 꾸렸다.
육체노동이라고는 한 번도 안 해 본 마법사들이 옮기기에는 부피도 크고, 무게도 무거웠다.
근력 강화 마법을 쓸 수는 있지만, 겨우 짐을 옮기는 데 마법을 쓰기는 자존심이 상했다.
알포이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벨린다를 발견하고 근엄하게 말했다.
“당장 하인들을 불러와서 짐을 옮기게 해라.”
“도련님이 직접 옮기라고 하셨잖아요. 마차 부서져도 괜찮아요? 비싸 보이는데.”
“이익……!”
“여섯 명인데 그 정도도 못 옮겨요? 아까 바네사라는 분은 혼자 잘 들고 내리던데.”
벨린다가 능청스럽게 잡아뗐다.
알포이의 얼굴이 벌게졌다.
복장을 보아하니 저 여자도 고작해야 하녀인 모양인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자신의 말을 무시한단 말인가.
“이 영지는 도대체 제정신인 놈들이 없구나! 이 몸은 이런 하찮은 일을 안 해 봤단 말이다! 이런 건 너희 같은 천한 것들이 해야 하는 게 아니냐!”
하지만 알포이가 열을 내도 벨린다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저도 도련님한테 혼나기 싫어요. 도련님 성질이 얼마나 더러운데요.”
“으으, 두고 보자, 두고 봐. 이 건방진 것들. 내 기필코 가만두지 않겠다.”
알포이는 어쩔 수 없이 근력 강화 마법을 사용하려고 마력을 풀어 냈다.
그때, 성안에서 두 사람이 하녀들을 이끌고 나왔다. 엘레나, 그리고 길리언의 딸 레이첼이었다.
“벨린다! 이제 돌아온 거야?”
“어머, 아가씨! 오랜만이네요. 레이첼도 잘 지냈니?”
“네, 벨린다님도 잘 지내셨나요?”
레이첼은 약을 꾸준히 먹고 건강해져서 엘레나의 말동무가 되었다.
마침 비슷한 또래라 금세 친해진 두 사람은 어딜 가든 항상 붙어 다녔다.
“뭔가 시끄럽던데, 무슨 일이야?”
엘레나의 물음에 벨린다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손님들인데, 짐이 무거워서 못 옮기고 있더라고요.”
“흐음, 그래? 그러면 하인들을 부르지 그랬어. 많이 무거운가?”
엘레나가 슬쩍 다가가 마법사들의 짐 몇 개를 훅 들어 올렸다.
“응? 괜찮은데? 별로 안 무거워.”
양손에 짐을 가볍게 든 그녀를 보고 마법사들은 경악했다.
벨린다는 손뼉을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안 무거우세요? 요새 운동하시나 봐요!”
“아이참, 그런 거 안 해. 이거 그렇게 무겁지도 않은걸. 내가 들어 줄게. 그래도 손님인데 잘해 줘야지.”
아가씨가 짐을 드는데, 따르는 하녀들이 어찌 가만히 있으랴.
하녀들은 다 같이 달라붙어 무거운 짐을 척척 옮겼다. 벨린다도 어쩔 수 없이 도왔다.
여러 사람이 손을 보태니 남은 짐은 몇 개 되지 않았다.
마법사들은 괜히 자존심이 상해서 이를 악물고 나머지 짐을 들었다.
하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혹사당한 그들의 가녀린 팔은 짐을 들어 올리기도 전부터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결국 그간의 과정을 한심하게 지켜보던 마부가 마차에서 내리며 한마디 툭 던졌다.
“이건 그냥 돈 안 받고 도와주겠수. 운동들 좀 하셔야겠네.”
장기 고용된 마부는 마탑 도시에서 왔기에 딱히 마법사들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매일 보는 것이 마탑이고 마법사들이기 때문이다.
‘으으으, 죄다 죽여 버리고 싶다. 전부 그 새끼 때문이야. 절대 용서하지 않으리라.’
연달아 받은 굴욕에 알포이가 이를 갈았다.
한편, 지셀은 용병들을 이끌고 주둔지에 도착했다.
한 달 전만 해도 토대를 잡는 중이던 주둔지는 이제 제법 모양새를 갖고 있었다.
“후우, 꽤 많이 진행됐는걸?”
지셀은 만족스럽게 웃은 뒤 용병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당분간 이곳에서 마수의 숲을 경계해라. 다음 할 일은 준비되는 대로 지시하겠다.”
“알겠습니다!”
용병들이 큰 소리로 외쳤다.
이들은 모두 지셀이 북부의 영지를 돌며 모아 온 자들이었다.
마수의 숲에 들어갔던 기존 용병들도 당연히 재계약했다.
새로운 용병들을 통제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새 인원을 들일 때마다, 덤벼드는 놈들을 길리언과 카오르가 잘근잘근 밟아 줬기 때문이다.
마수의 숲에서 함께 싸운 용병들도 지셀에 대한 충성심이 높으니, 새로운 용병들은 차마 그에게 덤벼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조금 특이한 점이라면, 기존의 용병들이 만든 분위기 때문인지 새로운 용병들도 지셀을 대장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지셀은 떠나기 전 한마디를 덧붙였다.
“장비와 말을 잘 관리해라. 도박 같은 애먼 짓으로 날려 먹는 건 용서하지 않겠다.”
“알겠습니다!”
이들의 갑옷과 말들은 전부 지셀이 사비를 털어 마련해 준 것이었다.
용병들은 각자 자금 사정에 맞춰 장비를 마련하기에 품질이 천차만별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싸고 조악한 무기를 사서 대충 쓰다가 갈아치우곤 했다.
그런 무장으로는 사람이 많아 봐야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지셀은 이왕 준비하는 김에 아예 제대로 무장까지 시켜 주었다.
지셀은 용병들의 훈련과 관리 방법, 편제 따위를 길리언, 카오르에게 일임하고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에는 왜 가십니까? 이제 막 돌아오셨는데 쉬지 않으시고요.”
길리언이 의아해했다.
“두 사람은 먼저 쉬도록 해. 바네사에 대해 확인할 게 있어서.”
지셀은 연무장으로 들어가자마자 팔을 걷어붙이며 말했다.
“앉아 봐.”
바네사는 긴장해서 눈치만 보다가 조용히 연무장 한가운데에 앉았다.
“마나를 느끼지 못한다고 알고 있는데, 맞아?”
“네, 그렇습니다.”
“스승에게 마법은 어디까지 배웠지?”
“이론적으로는…… 5서클까지 배웠습니다.”
바네사는 자신 없어 하며 웅얼거렸다.
지셀은 조금 감탄했다.
‘역시 전생에 들은 것과 같다. 예상대로야.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해.’
마법 술식은 단순히 외우기만 한다고 익힐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름대로 깨달음과 이해가 필요하고 거기에 의지를 담을 줄 알아야 한다.
젊은 나이에 5서클 술식까지 이해했다는 건 보통 총명한 게 아니란 뜻이다.
“벌써 5서클이라니 대단한데? 상당히 똑똑한 모양이야.”
“아, 아닙니다. 실제로 시전하지는 못하니 제가 이해한 게 맞는지도 확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괜찮아, 그건 이제부터 해 보면 되니까.”
“네? 저는 마나를…….”
“난 너에게 마나 연공법을 알려 줄 생각이다.”
바네사의 낯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마나 연공법 몰라?”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스승님께서 간단한 마나 연공법을 구해 와 알려 주셨습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흐음, 과연……. 시도는 했었군.”
지셀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또한 전생에 간단하게나마 들었다. 마나 연공법도 시도해 봤다고.
애초에 마나를 느끼지 못하면 마나 연공법도 소용이 없다.
마나를 느껴야 그걸 받아들이고 몸 안에 쌓을 게 아닌가?
게다가 마법사가 마나 연공법을 제대로 이해했을 리도 없었다.
“괜찮아. 나는 좀 다르게 가르쳐 줄 테니까. 일단 마나부터 느껴야겠지?”
“네?”
지셀은 진중한 태도로 물었다.
“지금도 마법을 익히고 싶은가?”
바네사는 떨리는 눈빛을 감추려고 눈을 내리깔았다.
당연히 그러고 싶었다.
계속 지셀의 눈치를 본 것도, 나중에 마법을 익혀도 된다는 허락을 받고 싶어서 그랬던 게 아닌가.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계속 공부하고 싶어요.”
“좋아. 그러면 이 꽉 깨물고 잘 버텨라. 잘못하면 너는 죽고 나는 안 죽는다.”
“그게 무슨…….”
“시작한다.”
지셀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바로 그녀의 등에 손바닥을 대었다.
구우우웅!
마나가 지셀의 손바닥을 통해 바네사의 몸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지셀은 마나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훑은 마나가 배꼽 아래에 뭉치기 시작했다.
“이건…….”
난생처음 느껴 보는 기운에 바네사가 눈을 크게 떴다.
“입 닫아라. 지금 들어간 건 내 마나다. 마나가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놓치지 말고 느껴야 한다.”
바네사는 지금 자신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눈을 꼭 감고 자기 몸에 들어온 이질적인 기운을 느끼려 애썼다.
구우우웅!
마나의 흐름이 안정되자 지셀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은 성공이다.’
지셀은 그녀의 몸에 임시로 아주 작은 마나 코어를 만들었다.
바네사는 몰랐지만, 지셀이 지금 시도한 방법을 쓰려면 섬세한 마나 운용 능력과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했다.
‘대륙 7강’급 실력자가 아니라면 감히 시도할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방식이었다.
원래는 마나를 느끼고, 호흡법을 배워 스스로 코어를 만드는 게 정석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바네사가 언제 성공할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은 마나를 느끼게 하는 게 우선이었다.
지셀의 마나로 만든 코어이니, 시간이 지나면 다시 흩어지고 말 것이다.
그 전에 조금이라도 스스로 마나를 느끼고 흡수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우우우웅.
지셀이 의지를 실어 마나를 움직이자, 바네사의 몸에 생성된 코어가 세차게 돌아가며 마나를 흡수하기 시작했다.
호흡을 통해 자연스럽게 마나를 흡수하는 게 아니라, 마나를 순환시켜 주변에 있는 마나를 강제로 빨아들이는 것이다.
“으으읏.”
바네사는 고통에 이를 악물면서도 어떻게든 견뎌 내었다.
꿈에도 그리던 마나였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감각은 고통스러웠지만, 황홀했다.
‘조금만 더.’
바네사는 이 느낌이 더 이어지기를 원했지만, 지셀은 슬슬 마나 유도를 끝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번쩍!
그때, 바네사는 그동안 익혔던 수많은 마법 술식을 번뜩 떠올렸다.
언제나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그것들은 실낱같은 마나를 만나자 세상 밖으로 뛰쳐나가려 발버둥 쳤다.
바네사는 마나를 처음 느껴 본 황홀감에 무아지경에 빠진 상태였다.
지잉―! 지잉―! 지잉―!
허공에 마법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동안 억눌러 왔던 게 터졌는지 그녀 자신도 모르게 마법들이 시전되고 말았다.
하나씩 늘어나던 마법진은 어느새 다섯 개를 훌쩍 넘어갔다.
“벌써 다중 영창을 한다고?”
지셀이 화들짝 놀라며 불어 넣던 마나 양을 줄였다.
마법진들은 바네사의 콩알만 한 마나가 아니라 지셀의 마나를 미친 듯이 잡아먹으며 생성되고 있었다.
막무가내로 손을 뗀다면 바네사가 위험해지니, 천천히 마나를 줄인 것이지만……,
지셀이 마나를 끊으니 다른 문제가 생겼다.
푸스스스…….
바네사의 머리카락이 끝부분부터 조금씩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마나가 부족해지자 그녀의 생명력을 끌어다 쓰고 있는 것이다.
“젠장! 정신 차려!”
생명력을 태우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지셀이 다시 마나를 뿜어내며 고함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