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싫으면 말고요. (2)
마탑 로비에 들어선 용병들은 신기한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넓은 로비는 생전 처음 보는 식물들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조각상들이 곳곳에 놓여 있어, 이게 마탑인지 부유한 귀족의 성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용병들이 입을 벌린 채 주변을 구경하는 꼴을 보고, 로비를 지키고 있던 견습 마법사 실뱅은 인상을 찌푸렸다.
‘쯧, 뭐야? 바닥 더러워지게 웬 거지 떼들이 이렇게 몰려왔어?’
적염의 마탑 출신 마법사다운 반응이었다.
실뱅도 처음부터 이런 성격이었던 건 아니다. 적염의 마탑에서 지내다 보니 탑의 분위기에 물든 것이다.
‘문지기 놈이 겁먹고 들여보낸 건가?’
행색이 비루하기는 했지만, 지셀 일행은 다들 허리춤에 무기 하나 정도는 차고 있었다.
마탑의 문지기라고 해도 마법을 쓰지 못하는 일반인일 뿐이니, 떼 지어 밀고 오는 자들을 막기는 어려웠으리라.
실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저 비렁뱅이들은 그가 나서서 처리해야 할 모양이었다.
실뱅이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용병들에게 다가가자, 문지기가 다급한 표정으로 그에게 달려왔다.
“쯧쯧, 아무나 들이지 말라니까. 숫자가 많다고 그리 쫄아서야, 어찌 북부 최고인 적염의 마탑을 지키는…….”
실뱅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지기가 그에게 귓속말했다.
실뱅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몇 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지셀에게 직각으로 허리를 숙였다.
“귀하신 분이 오셨군요! 어디서 오신 분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지셀 페르디움, 페르디움의 대공자다.”
실뱅은 감탄 어린 기색을 비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페르디움의 대공자이셨군요! 고귀하고 용맹한 페르디움의 명성은 익히 들어 왔습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범상치 않은 분이라 생각했는데 역시 제 눈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말은 번지르르하게 했지만, 사실 실뱅은 페르디움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몰랐다.
일단 귀족이고, 귀한 물건을 가져왔으니 아첨부터 떨고 본 것이다.
지셀도 그걸 알기에, 꿀이 떨어지도록 간드러진 아부에도 넘어가지 않고 그저 웃었다.
“룬스톤을 팔러 왔는데 양이 좀 많아. 책임지고 거래를 이어 갈 수 있는 고위 마법사를 만나고 싶다. 웬만하면 마탑주를 직접 보고 싶군.”
“기별을 넣겠으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실뱅은 바로 고개를 숙이고 지셀 일행을 접견실로 안내했다.
그는 접견실을 나서자마자 하녀들에게 단단히 경고했다.
“손님들이 불편해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모셔라.”
몇 번이나 강조한 뒤, 실뱅은 허겁지겁 마탑주에게로 달려갔다.
지셀 일행은 수레를 몇 대나 끌고 왔다. 그게 다 룬스톤이라면 엄청난 양이었다.
적염의 마탑이 최고로 꼽히던 시절, 거래 상단에서 구해 오던 룬스톤도 이 정도로 많지는 않았다.
평소라면 말단 중의 말단인 실뱅이 마탑주를 직접 만나는 건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지금은 일일이 중간 단계를 거쳐 가며 보고를 올릴 시간이 없었다. 지셀이 언제 마음을 바꿔 돌아갈지 몰랐다.
‘저 정도 룬스톤이라면 혼내시진 않겠지.’
실뱅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마탑주에게 달려갔다.
그즈음, 탑의 최상층에서는 심각하게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룬스톤이 다 떨어져 간다고요?”
머리는 살짝 벗어졌지만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중년 남자가 심기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다. 이대로면 진홍의 마탑과 격차가 더 벌어질 겁니다.”
흰 수염을 길게 늘어트린 노인이 답했다. 중년인은 탄식을 내뱉었다.
“허, 어쩌다 이 지경까지…….”
우울해 보이는 이 남자는 바로 적염의 마탑주이자 6서클 마법사인 휴베르트다.
그는 육십이 넘은 나이에도 높은 마력 덕분에 젊음을 오래 유지하는 편이었다.
외모를 꾸미는 데에도 관심이 많기에 나이에 비해 젊어 보였다.
하지만 요새 들어 그의 얼굴에는 주름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었다.
“뭐 좋은 방법이 없겠습니까?”
휴베르트가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의 양옆에 앉아 있는 다섯 장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휴베르트는 답답하다는 듯 큰 소리로 재촉했다.
“아니, 이래서야 진홍의 마탑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그놈들 우리보다 밑이었다고요, 밑! 자존심 상하지도 않습니까?”
장로들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아니, 그러니까 귀족들하고 좀 적당히 놀고 수련 좀 하시지.’
‘그쪽은 마탑주가 7서클이라 잘 나가는 거잖아. 우리 마탑주는 6서클인데 어떻게 이겨?’
‘매일 치장하고 사치 부리는 데에만 신경 썼으면서 이제 와서 난리는…….’
마법사들은 애초에 개인주의적 성향이 무척이나 강한 족속들이다.
그렇기에 남 탓도 매우 잘한다. 아니, 일단 남 탓부터 하고 본다.
진홍의 마탑에 밀려난 것도, 장로들은 마탑주의 경지가 부족해서 밀렸다고 생각했다.
반면 마탑주는 적염의 마탑 마법사들이 전체적으로 나태해서 밀린 거라고 봤다.
결국 장로 하나가 손을 들며 말했다. 같은 탑에 소속되어 있는데 서로 책임만 미루고 있을 수는 없었다.
“당연히 마법사들의 실력을 올려야겠죠. 누가 이 북부에서 진정한 정통인지 확실하게 보여 줘야 합니다.”
적염의 마탑과 진홍의 마탑은 같은 화염계 마법 학파로, 오랜 시간 경쟁해 온 관계였다.
마법 계통도 비슷하고, 같은 북부에 근거지를 두고 있으니 그들이 라이벌이 되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아니, 그러니까 어떻게 끌어올릴 거냐고요! 모두 맨몸으로 실험할 겁니까?”
마법사의 실력을 가늠할 때는 얼마나 많은 마법을 발동할 수 있는지를 기준으로 삼는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술식을 해석하고 의지를 실어야 마법이 발동되는데, 자칫 잘못하면 그냥 마법이 폭주해 몸이 터져 버리거나 불구가 될 수 있었다.
당연히 맨몸으로 연구를 할 수는 없고, 그 충격을 대신 받아 주는 룬스톤이 꼭 필요했다.
“룬스톤이 다 떨어지면 수련도 제대로 못 할 거 아닙니까!”
“……그건 그렇죠.”
룬스톤이 있어야 마법사의 안전이 보장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룬스톤을 쓰면 마력을 쉽게 늘릴 수 있고, 그 자체로도 보조 마력으로 쓸 수 있기에 마법사에게는 필수 재료라 할 수 있었다.
“우리가 거지입니까? 돈이 없어요? 몸으로 때우는 건 가난한 마법사들이나 하는 거고!”
“진홍의 마탑주도 맨몸으로 수련을…….”
“그놈 얘기는 하지 말고! 그리고 그게 진짜인지 어떻게 알아! 룬스톤만 있으면 나도 금방 7서클 올라갈 수 있다고!”
휴베르트는 흥분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장로들은 겉으로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지만, 속으로는 그를 잔뜩 흉보기 시작했다.
‘염병, 그게 쉽나? 말처럼 되면 역대 마탑주들도 전부 7서클에 올랐겠지.’
‘솔직히 이제 진홍의 마탑이 왕국 제일이 되는 건 시간문제 같은데.’
델파인 공작가에 있다는 전속 마법사를 제외하면 왕국에서 7서클에 오른 자는 진홍의 마탑주인 델무드가 유일했다.
장로들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휴베르트는 이를 악물며 씩씩거렸다.
‘아오! 룬스톤만 많으면 나도 7서클에 오를 수 있다고! 델무드 따위도 됐는데 내가 못 할까!’
휴베르트는 델무드와 비교당할 때마다 민감하게 반응했다.
거지 같은 델무드는 스승에게 구박받고 마탑에서 생활비도 못 받으면서도 7서클의 경지에 올랐다고 한다.
최고의 환경에서 듬뿍 지원받으며 후계자로 키워진 휴베르트로서는 열등감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장로 한 명이 휴베르트의 눈치를 살피다 헛기침하며 말을 돌렸다.
“그런데 상단들에게 물어도 하나같이 물량이 없다고 합니다. 진홍의 마탑에서 가격을 엄청 올려놓기도 했지만…… 그 가격에 맞춰 준다고 해도 무조건 없다고 하니 룬스톤을 구할 방법이 없습니다.”
적염의 마탑과 거래하던 상단들 대부분은 룬스톤 공급을 줄이거나 아예 멈춰 버렸다.
룬스톤이 귀한 물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요즘 들어 유난히 룬스톤 물량이 적어졌다.
“하아, 왜 이렇게 된 거지? 왜 갑자기 이렇게 룬스톤을 구하기가 힘들어진 거냐고!”
그들은 평생 마탑에서 마법만 익히며 살아온 터라 세상 물정에 어두웠다. 그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들을 쓰며 지내 왔을 뿐이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도 어디가 어떻게 잘못됐는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휴베르트는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비비며 피곤한 음성으로 물었다.
“아티팩트 제작은 어떻게 돼 가고 있습니까?”
“룬스톤이 부족해서 그것도 이제 조금 힘들 거 같습니다.”
마법 도구와 스크롤을 만들어 파는 건 마탑의 가장 큰 수입원이다.
룬스톤이 부족하면 마법 도구들도 만들지 못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휴베르트는 울고 싶어졌다.
본래 최고로 손꼽히던 적염의 마탑이, 자기 대에서 북부 제일이라는 칭호를 뺏긴 것도 모자라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정말 마탑이 아니라 스크롤 상점이 될 판이었다.
“룬스톤을 구할 방도가 정말 없습니까?”
“다른 지역까지 가서 소량으로 구해 오는 게 전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도 많고 써야 할 곳도 많지 않습니까?”
“진홍의 마탑도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거기가 다 쓸어 가는 게 맞죠?”
“그런 소문도 있고 대부분 다 그곳에 판다고는 하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쪽도 구하기 힘드니까 가격을 높여서라도 사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쪽보다 돈을 더 주겠다고 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우리 돈 많잖아요? 아직은 자금 여유가 있을 텐데.”
“아니, 그냥 물건이 없다니까요? 씨가 말랐습니다, 씨가. 그리고 지금도 웃돈 주고 사 오느라 돈도 엄청나게 쓰고 있고요.”
그들은 진홍의 마탑이 룬스톤을 쓸어 가는 건지, 아니면 정말 물량이 부족해진 건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최고라는 자만심에 빠져 나태하게 산 이들의 현주소였다.
“돈은 점점 떨어져 가는데…… 룬스톤은 구하지 못하고 있고…… 그러니 제자들의 수준은 점점 떨어지고…… 허허허. 이게 뭐람?”
마탑주인 휴베르트조차 겁나서 맨몸으로 마법 실험을 못 하는데 누가 하겠는가?
이 상태로 가다가는 더 발전하기는커녕, 의미 없이 현상 유지만 하다 자멸할 게 분명했다.
“하아…….”
“후우…….”
“흐어…….”
똑똑하지만 멍청한 마법사들이 전부 고개를 숙이고 한숨만 내쉬었다.
“유능한 상인을 포섭해야 합니다. 이런 건 그냥 전문가에게 맡깁시다.”
한 장로가 제안했다. 휴베르트를 비롯한 나머지 장로들도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세상의 이치를 연구하고 모든 진리를 안다고 자부했지만, 상행위에는 영 재주가 없었다.
“하아, 진작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선대에는 마법사뿐만이 아니라, 상재가 뛰어난 자도 마탑에 있었다.
하지만 최고라는 명성을 얻은 후에는 자만에 빠져 그런 인물을 중용하지 않았다.
알아서들 몰려와 가격을 좋게 쳐 주니 그저 돈 계산하는 사람 정도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여긴 것이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전문가를 영입해야 한다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했다.
“그러면 일단 괜찮은 인물을…….”
쿵쿵쿵!
그때, 밖에서 누군가가 소란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휴베르트가 짜증을 억누르며 말했다.
“회의 중이다. 나중에 오거라.”
쿵쿵쿵!
“회의 중이라니까!”
쿵쿵쿵!
몇 번이고 물러나라 했지만, 상대는 계속 문을 두드렸다. 휴베르트는 이를 갈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으드득, 어떤 놈인지 대가리를 태워 버려야겠군.”
“좀 들어가겠습니다!”
벌컥!
계속 문을 두드리던 상대는 허락도 없이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휴베르트는 그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너 누구야? 누가 들여보냈어? 경비병은 뭐하고? 일단 머리부터 대. 머리털을 태워 주마.”
마탑은 도제 방식으로 운영되어 위계질서가 대단히 엄격하다. 마탑주가 말단 마법사를 볼 일이 없었다.
당연히 휴베르트도 실뱅을 알아보지 못했다.
실뱅은 서릿발 같은 분위기에 눌려 덜덜 떨며 말했다.
“루, 룬스톤을 팔겠다고 누가 찾아왔습니다.”
“뭐? 룬스톤?”
휴베르트를 비롯한 장로들이 고개를 쑥 내밀며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실뱅을 바라보았다.
마탑주도 기세를 가라앉혔지만, 실뱅은 여전히 긴장을 풀지 못했다.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을 느끼고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다른 상단처럼 조금 가져온 게 아닙니다. 양이 엄청납니다. 수레가 열 대도 넘는데 모두 룬스톤으로 꽉 차 있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