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상황이 바뀌었다. (2)
부관이 나가고, 땅거미가 내려 창밖이 어두워질 때까지도 해럴드는 제 관자놀이를 툭툭 건들며 고민을 멈추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페르디움은 부강해질 것이다. 병력도 더 많아지겠지.’
룬스톤은 엄청난 가치를 지닌 보물이다. 그 자체로도 가치가 있지만, 현금화하기도 쉽다.
룬스톤을 팔아 그 돈을 바탕으로 영지를 키운다면 금세 병력과 물자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와서 디갈드 영지와 싸움을 붙이더라도 페르디움은 피해를 금방 복구할 것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건들기 어려워질 것이다.
“내가 당장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군.”
시간을 들여 모략을 꾸미면 어떻게든 약화시키거나 문제를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왕국에서도 흔치 않은 룬스톤의 자원지를 발견한 건 자신의 선에서 묻어 둘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해럴드는 가장 빠른 말을 이용해 급하게 전령을 보냈다.
― 페르디움, 마수의 숲 일부 개척. 룬스톤 확보. 지시 요망.
짧은 몇 마디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
며칠을 기다리자 공작가의 답변이 도착했다.
― 페르디움은 멸문시켜라. 이후 공작가에서 개입하겠다. 디갈드를 이용해서 영지전을 일으켜라. 단, 반드시 쓰고 버릴 것. 다소의 위험은 감수해도 좋다.
공작가의 답변도 구구절절한 얘기는 없었다. 그저 깔끔하게 명령만 내려왔을 뿐이다.
해럴드는 돌아온 명령을 다시 곱씹었다.
‘멸문…… 주인 없는 영지로 만들라고?’
가주도, 후계자도 없으면 영지는 왕실로 귀속된다.
그 뒤 공작가가 개입한다는 건 새로운 주인을 그쪽에서 정하겠다는 말이다.
디갈드를 쓰고 버리라는 명령도, 페르디움 영지를 디갈드가 점령하지 못하게 하라는 뜻이다.
인척인 로게스 백작에게도 페르디움 영지를 차지할 명분이 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는 공작가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로게스 영지도 깔끔하게 쓸어버리면 된다.
“그렇군. 이제야 알겠어. 마수의 숲 때문이었군.”
그동안 이해할 수 없었던 명령이 드디어 이해됐다.
페르디움을 꾸준히 약화시키되 멸망하지는 않도록, 다른 영지에서 점령하지 못하도록 관리하라는 명령.
그건 바로 페르디움을 포함하여 누구도 마수의 숲을 차지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페르디움이 마수의 숲을 건드렸으니, 이제는 봐주지 않고 쓸어 버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왜 마수의 숲을 차지하려는 거지?”
현재 공작가는 반역을 준비하며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다.
확실한 승리를 위해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영지전을 일으킨다면 혹시나 그들 세력이 겉으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마수의 숲을 확보해야 하는 이유를 해럴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룬스톤이 발견됐다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이렇게까지 하는 건 과했다.
눈을 내리깔고 잠시 고민하던 해럴드는 곧 고개를 흔들었다.
방향을 정하는 건 어디까지나 공작의 몫이었다. 자신의 역할은 그 과정에서 위험을 최소화하는 것뿐이다.
“때가 되면 알겠지.”
이유 따위를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바뀐 방향에 맞춰 계획을 짜기에도 바빴다.
해럴드는 집무실로 돌아가 참모들을 소집했다.
“페르디움에 우리 쪽 사람이 몇이나 있지?”
“가신 둘에 기사 하나가 남아 있습니다.”
“가신 둘을 디갈드로 보내. 길모어가 페르디움에서 죽었다는 명분을 대고 영지전을 일으키게 해라.”
갑작스러운 명령에 참모들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페르디움을 서서히 말려 가던 기존 계획과는 차이가 컸다.
“갑자기 방침이 달라진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상황이 바뀌었다.”
해럴드는 그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참모들은 당혹스러워했지만, 곧 그들 나름대로 이해한 듯 별말이 없었다. 그들도 룬스톤 소식을 들은 것이다.
“목표는 페르디움의 멸문. 우리도 참전한다.”
참모들은 재차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영지전은 하고 싶다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명분 없이 영지전을 일으킨다면 다른 영주들이 위협감을 받아 견제할 것이 뻔했다.
참모 중 하나가 고개를 숙였다.
“디갈드의 힘만으로는 페르디움을 점령하기 힘든 건 맞습니다만, 저희는 참전할 명분이 없습니다.”
둘 다 고만고만한 영지라 어느 한쪽이 이길 거라 장담할 수 없었다.
단지 페르디움 영지를 약화시키는 게 목적이라면 디갈드가 적임이었지만, 멸망시키는 게 목적이라면 디갈드만으로는 부족했다.
“직접 나서지는 않는다. 우리 병력은 징집병과 용병으로 꾸며서 밀어 넣어.”
디갈드의 가신들은 대부분이 해럴드의 손아귀에 있다. 그러니 그가 원하는 대로 디갈드를 몰아가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두 달 안에 준비해라. 페르디움과 디갈드 양쪽 다 빠르게 전멸시킬 것이다.”
“알겠습니다. 더 준비할 건 없겠습니까?”
“빅토르도 함께 보내라.”
참모들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빅토르는 데스몬드에서 심혈을 기울여 키운 영지 최고의 기사였다. 숨겨 두었던 무기이기도 했다.
그 정도의 패를 사용한다는 건 정말 해럴드가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는 뜻이다.
참모들은 이제 페르디움 영지가 멸망하는 건 정해진 결과라 생각했다. 지고 싶어도 질 수 없는 싸움이라고.
그러나 참모들과는 달리, 해럴드는 불안한 마음을 지우지 못했다.
그는 다시 한번 한 사람의 이름을 되뇌었다.
계속 불길한 예감을 불러일으키는 그 이름을.
‘지셀 페르디움…….’
* * *
아멜리아는 화창한 날씨를 핑계로 베르나프와 함께 차를 즐기고 있었다.
그녀는 우아하게 찻잔을 내려놓고 무릎 위에 올려놓은 바스테트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요새 기분이 꽤 좋았다. 직접 나서서 정보를 조작하고 여론을 움직여 페르디움에 가는 지원을 끊어 버렸기 때문이다.
‘지셀 페르디움, 그놈이 어떻게 됐을까.’
그것만 생각하면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페르디움은 레이폴드의 지원이 없으면 제대로 유지조차 못 할 정도로 가난한 영지다.
지원이 끊기자마자 난리가 났을 테고, 그 원인 제공자인 지셀은 꼼짝없이 잡혀 벌을 받고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친 사고와 평판을 생각하면 최소한 감금 정도는 당했을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지셀의 목을 자르는 건 더욱더 쉬워진다. 감금된 놈을 대단하게 호위할 리 없으니까.
오랜만에 기분 좋게 웃는 그녀를 보고 베르나프 또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 계책에 정말로 감탄했습니다. 어지간한 무력을 쓰는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습니다.”
냐앙!
바스테트도 아부를 떠는 듯 골골거리며 아멜리아의 품에 고개를 비볐다.
“살쾡이 놈들한테 기회를 봐서 지셀 목을 꼭 날려 버리라고 해. 그리고 그 하녀 년도.”
“알겠습니다. 마무리는 확실히 짓겠습니다.”
베르나프는 아멜리아의 행동력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숨겨야 할 약점이 있는데도, 그게 밝혀질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진실을 조작해 함정을 팠다.
그 과감한 한 수로 페르디움 영지와 지셀이 동시에 몰락하게 되었으니, 도박이 성공했다고 볼 수도 있으리라.
어지간한 자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강단과 지략이었다.
한껏 기분이 좋아진 아멜리아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쿠키 조각을 집어 들어 고양이에게 먹여 주었다.
“자, 바스테트 너도 하나 먹어 보렴.”
냐아앙!
바스테트가 맛있게 쿠키를 받아먹을 때, 하녀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아멜리아에게 종이쪽지 하나를 건넸다.
“뭐지?”
하녀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페르디움에서 온 소식입니다.”
“그래? 흐음, 지셀이 감옥에 갇혔다고 적혀있으려나?”
아멜리아는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종이를 펼쳐 천천히 읽어 갔다.
잠시 후, 소식을 읽어 내려가는 그녀의 얼굴에서 점점 표정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살기가 느껴질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이 종이를 찢을 듯 노려보았다.
곁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아멜리아의 표정을 지켜본 베르나프는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앞에서 사람이 죽어 가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 같던 아멜리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멜리아가 종이를 구기며 소리를 질렀다.
“지셀 페르디움!”
바스테트가 상황을 파악하고 잽싸게 베르나프의 뒤로 도망을 갔다.
“어떻게 이런 일이!”
아멜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충격으로 탁자가 흔들리며 찻물과 쿠키가 쏟아졌다.
베르나프는 잽싸게 그것을 피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지셀이 또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아멜리아는 대답 대신 구겨진 종이를 집어 던졌다.
베르나프는 얼굴 쪽으로 날아오는 종이를 잡아채 읽어 보고는, 경악해서 외쳤다.
“이, 이런…… 룬스톤을 발견했다고요?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떻게 되긴! 페르디움 영지는 축제 분위기고 지셀 그놈은 공을 세운 게 되는 거지!”
아멜리아는 입술을 짓씹으며 말을 이었다.
“그것도 나한테 뜯어간 2만 골드를 밑천으로 쓴 거라고!”
아멜리아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
지셀은 그녀에게 인생 최대의 굴욕을 안겨 주었다.
형편없는 남자한테 협박을 당해 돈을 뜯긴 귀족가의 영애는 아마 자신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대우와 수모는 태어나서 처음 받아 보았다. 이 분은 반드시 지셀을 죽여야 풀릴 터였다.
겨우 속 시원하게 치워 버렸나 했는데, 오히려 승승장구하고 있다니!
아멜리아는 당장이라도 지셀을 끌고 와 눈앞에서 죽여 버리고 싶어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지셀! 지셀 페르디움!”
실핏줄이 다 터진 눈으로 지셀의 이름을 저주하듯 되뇌는 아멜리아의 모습에, 베르나프는 입을 꾹 다물었다.
대외적으로 그녀는 상냥하고 마음씨도 곱고 우아한 여자로 알려져 있다. 베르나프도 처음에는 아멜리아가 그런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실제로 그런 면을 보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심기를 거슬렸다가 남몰래 죽어 나간 사람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도무지 어떤 게 진짜 모습인지 알기가 힘든 여자였다.
‘성격이 좋다고는 못하겠지만……. 저렇게까지 화를 낸 적은 별로 없었는데.’
누구를 죽일 때도 우아하게 명령하던 그녀가 지셀만 엮이면 분노를 참지 못한다.
그런 형편없는 놈한테 당한 게 어지간히 참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입 닥치고 가만히 있자.’
지금 잘못 눈에 띄어 불똥이라도 튀었다간 아무리 베르나프라고 해도 곱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
아멜리아가 노기로 붉어진 눈으로 베르나프를 노려보았다.
“살쾡이 놈들, 그리고 다른 놈들도 전부 소집해.”
“어쩌시려는 겁니까?”
“그 거지들이 룬스톤을 얻어서 어디다 쓰겠어? 팔 거 아냐! 습격해서 다 죽여 버리고 뺏어 오라고!”
베르나프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룬스톤을 운반하는 것이라면 경비가 만만치 않을 겁니다. 페르디움 쪽에서 움직이지 않고 상단을 영지로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테니까, 일단 애들부터 소집해. 주변의 산적들도 모두 움직일 준비 하고!”
“알겠습니다. 일단 진정하시지요.”
베르나프가 만류했지만, 아멜리아는 쉬이 분노를 진정시키지 못했다.
“지셀, 반드시 죽여 주마. 룬스톤도 내가 차지하고 말겠어.”
화창한 오후의 티타임은 지셀의 소식에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