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상황이 바뀌었다. (1)
지셀은 이틀 정도 더 휴식을 취하며 몸을 추스른 뒤 바로 용병들을 소집했다.
최상의 몸 상태는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움직일 수 있는 것만 해도 상당히 긴 시간을 단축한 셈이다.
길리언은 용병들을 적당히 정렬시키다 갑자기 멈칫하더니, 슬쩍 지셀을 돌아보았다.
의아해하던 지셀도 곧 이유를 알아챘다. 저택 쪽에서 벨린다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뭐야, 배웅 나온 거야?”
지셀이 농담하듯 내뱉었다. 벨린다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저었다.
“배웅은 무슨 배웅이에요? 저도 같이 갈 거예요.”
지셀은 이맛살을 슬쩍 찌푸렸다.
꼬였던 마나를 어느 정도 안정시켜 두기는 했지만, 아직 완전히 낫지는 않았을 텐데.
“벨린다는 더 쉬고 있는 게 어때? 굳이 따라올 필요는 없어.”
“안 돼요. 가다가 산적이라도 만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누구든 저만한 룬스톤을 보면 덤벼들지 않고는 못 배길걸요. 안 따라가면 걱정되어서 더 못 쉬어요.”
그녀는 딱 잘라 말하며 로브를 걸쳐 입었다.
지셀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벨린다가 저렇게 단호하게 나오니 고집을 꺾을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셀을 어릴 때부터 돌봐 준 사람이다. 마음이 약해지는 건 그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지셀은 한숨을 내쉬며 다짐했다.
“혹시라도 도중에 힘들면 꼭 얘기해.”
“알았어요. 지금 바로 영지 밖으로 나가실 거예요?”
“아니, 일단 두고 온 걸 가지러 가자.”
지셀은 용병들을 이끌고 다시 마수의 숲으로 들어갔다. 디루스 엔트의 내피와 블러드 퓌톤의 남은 시체를 챙기기 위해서였다.
처음 들어갈 때와는 달리 일행들은 말을 타고 빠르게 이동했다.
“남은 룬스톤도 추가로 캐실 겁니까?”
길리언이 묻자 지셀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시간은 없어. 시체들만 챙기고 바로 룬스톤을 팔러 갈 거다.”
룬스톤을 판매하러 간다는 말을 듣자 용병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룬스톤을 팔아야 자신들도 보수를 두둑하게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자, 빨리 움직이자고.”
휴식을 충분히 취한 덕에 용병들도 힘이 넘쳤다. 일행은 고작 반나절 만에 몬스터의 시체를 모두 수거해 다시 영지로 돌아왔다.
“내피는 썩지 않으니 그대로 보관하고, 퓌톤의 시체는 독과 피, 살, 가죽을 따로 분류해서 썩지 않도록 보관해라.”
대기하고 있는 인부들에게 시체 손질과 보관을 맡긴 지셀은 그대로 용병들을 이끌고 영지 밖으로 나갔다.
무언가에 쫓기듯 바쁘게 움직이는 지셀을 따르며 용병들은 신이 난 듯 소리 질렀다.
“우와, 대장 몸이 아주 근질근질한가 봐.”
“크크큭, 룬스톤을 이렇게 많이 팔면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어올 테니까. 생각만 해도 막 심장이 벌렁벌렁하겠지.”
용병들이 떠드는 것과 별개로 길리언은 조금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공자님,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급히 움직이실 필요까지야 있겠습니까? 아직 몸도 성하지 않은데 무리하지 마시지요.”
길리언도 지셀에게 이야기를 들은 덕분에 상황이 급한 건 알았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다급하게 움직일 줄은 몰랐다.
어찌나 빠르게 말을 달리는지 룬스톤을 실은 수레들이 제대로 따라오지 못할 정도였다.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란 걸 언제나 명심해야 해.”
지셀은 말을 하면서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수레를 끄는 말들이 따라오지 못해 대열을 이탈하면, 그제야 마지못해 속도를 조금 늦춰 줄 뿐이었다.
“속도는 이대로 유지한다. 최대한 빨리 이동하도록 하지.”
용병들도 돈을 빨리 받아서 나쁠 건 없기에 속도를 내는 지셀의 뒤를 열심히 따라갔다.
“와, 그런데 우리 대장은 말도 잘 타네. 켄타우로스야?”
“어지간한 기사들 저리 가라 할 정도인데?”
“나이도 젊은데 못하는 게 없네.”
아무리 승마가 귀족의 필수 소양이라지만, 지셀의 승마술은 교양 수준이 아니었다.
수많은 전장을 구른 용병들도 그처럼 말을 잘 다루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볼 때마다 나이에 맞지 않는 노련함과 실력을 보여 주니 이래저래 신기할 따름이었다.
제 뒤에서 용병들이 감탄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지셀은 묵묵히 남쪽으로 말을 달렸다.
아무 생각 없이 지셀을 따르던 용병들은 한참 뒤에야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그런데 왜 이쪽으로 가는 거지?”
“그러게. 큰 상단을 찾아갈 거면 레이폴드가 가장 빠를 텐데 말이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달리는 거 아냐?”
북부에서 가장 부유한 영지는 레이폴드다. 큰 상단도 그만큼 많으니 무언가를 팔려면 레이폴드로 가는 게 제일 쉽고 빨랐다.
하지만 지셀은 짐바르 영지를 우회하여 더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며칠에 걸쳐 이동하는 동안 용병들 사이에서 의문 섞인 목소리도 점차 커져 갔다.
카오르는 용병들을 대표해서 지셀에게 물었다.
“공자님,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이미 큰 상단이 있는 영지는 다 지나쳤습니다.”
지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브리반트 영지로 간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목적지였다. 카오르를 비롯한 용병들이 놀라서 되물었다.
“왜 굳이 거기까지 갑니까?”
“거기에 큰 상단이 있나요?”
브리반트 영지는 북부에 있는 작은 영지이지만, 왕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웅성거리던 용병들은 브리반트가 유명한 이유를 떠올리고 곧 감탄을 내뱉었다.
“브리반트라면…… 아, 설마!”
“그곳으로 가는 겁니까?”
지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탑으로 갈 거다.”
용병들은 마탑이라는 단어 하나만 듣고도 지셀이 무슨 생각인지 금방 깨달았다.
“그렇군! 상단이 아니라 마탑에 직접 팔려고 그러는 거지? 그러면 돈을 더 받을 수 있겠네!”
“맞아, 맞아. 공자님이 생각보다 알뜰하네.”
룬스톤을 대량으로 매입할 수 있는 상단은 북부에 몇 되지 않는다. 그나마도 상단의 이윤을 제하고 값을 쳐줄 것이다.
하지만 마탑에 직접 판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마법 연구에 가장 많이 쓰이는 재료가 바로 룬스톤이기 때문이다.
룬스톤에 환장한 마법사들이라면 양이 많더라도 무조건 다 사들일 것이다. 가격도 상단보다는 마탑 쪽에서 더 비싸게 받을 수 있을 것이고.
북부의 끝에서 지내 촌놈이나 다름없는 용병들은 그 유명한 마탑을 구경하게 되었다며 흥분한 눈치였다.
다들 돈도 생기고 관광도 할 수 있으니 지셀을 따라오길 잘했다며 히죽대었다.
하지만 카오르는 잠깐 생각하더니 지셀에게 물었다.
“공자님, 브리반트에 있는 마탑은 적염의 마탑입니다. 거기보다 진홍의 마탑으로 가는 게 훨씬 더 가격을 잘 쳐줄 텐데요?”
“어, 그렇네? 그럼 굳이 브리반트 영지까지 갈 필요는 없잖아?”
“그렇지. 요새는 진홍의 마탑이 북부 최고인데. 가격도 제일 후하게 줄걸?”
카오르의 말을 듣고 용병들이 떠들기 시작했다.
이왕 마탑에 판다면 당연히 룬스톤의 가격을 가장 후하게 쳐줄 수 있는 곳에 파는 게 맞았다.
소규모 마탑들은 지금 있는 룬스톤의 물량을 소화하지 못할 테니, 세력이 큰 마탑으로 가야 했다.
북부에서 가장 세력이 큰 마탑은 진홍의 마탑이다. 룬스톤의 가격을 후하게 쳐주고 가장 많이 매입해 주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다른 상단들도 대부분 진홍의 마탑과 주로 거래했다.
하지만 지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는 적염의 마탑으로 간다.”
“네? 어째서요?”
카오르를 비롯한 용병들이 당황해서 되물었다.
적염의 마탑은 한때 북부에서 가장 돈이 많고 가장 세가 강력한 곳이었다.
하지만 라이벌이었던 진홍의 마탑에서 탑주 델무드가 7서클의 대마법사가 되어 위명을 떨친 뒤에는 완전히 상황이 역전되었다.
옛 영광을 노리며 절치부심하고는 있지만, 이미 커질 대로 커진 진홍의 마탑을 따라잡기가 쉽지는 않았다.
“저기, 착각하시는 건 아니시죠?”
“브리반트에 있는 건 진홍이 아니라 적염의 마탑이라고요.”
“이 정도 물량이면 제일 잘 나가는 곳으로 가야죠.”
용병들은 지셀이 착각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돈을 더 받을 수 있는데 뭐 하러 손해를 보면서 판단 말인가?
용병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떠드는 꼴을 보며 벨린다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식하고 예의 없는 놈들이 지셀에게 기어오르는 꼴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지셀 몰래 길리언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그가 돌아보자, 벨린다는 입 모양으로만 교육 좀 제대로 하라며 눈꼬리를 세웠다.
하지만 정작 지셀 본인은 그런 버릇없는 태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착각하는 게 아니라, 적염의 마탑으로 가는 게 맞다. 생각하는 바가 있으니 따라오도록.”
용병들은 그의 속내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이상은 말을 얹지 않고 얌전히 지셀을 따라갔다.
마수의 숲에서 그랬듯 뭔가 생각이 있겠거니 지셀을 믿는 마음이 반이었고, 손해를 보든 말든 자기들 일이 아니라고 신경 쓰지 않는 마음이 반이었다.
몇 개의 영지를 더 지나자 드디어 높이 선 탑이 보였다.
용병들이 마탑을 보고 저들끼리 시시덕거리기 시작했다.
지셀은 피식 웃으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 * *
지셀이 브리반트 영지에 도착했을 즈음, 데스몬드 백작 해럴드는 문서 한 부를 꾹 쥔 채 떨리는 눈으로 읽고 있었다.
페르디움 영지에 침투시킨 첩자들로부터 전달된 보고서였다.
해럴드는 보고서를 책상 위에 던지며 한숨처럼 한탄을 내뱉었다.
“룬스톤…… 룬스톤이라니. 그것도 그렇게 대량으로?”
지셀이 예상한 대로, 그가 룬스톤을 얻은 사실이 고작 며칠 만에 해럴드의 귀에 들어간 것이다.
해럴드는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눈을 감고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고민에 빠졌다.
‘계획이 완전히 어그러졌군.’
천천히 페르디움 영지를 약화시켜 놓을 계획이었지만, 그쪽이 룬스톤을 구한 이상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쯧, 그냥 강제로 싸움을 붙였어야 했나.’
길모어 디갈드의 시체가 사라졌어도 억지로 싸움을 붙이려면 붙일 수는 있었다.
하지만 대체 누가 그 시체를 없앴는지 이해할 수 없어 조금만 더 지켜보려고 했는데……. 그게 이런 결과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마수의 숲에 용병들을 데리고 들어갔다기에 웬 미친 짓을 하나 했건만.’
프랑크와 연락이 끊겼을 때 지셀의 이름이 나왔던 게 찝찝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뒤로 해럴드는 꾸준히 지셀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받았다.
성격이 조금 바뀐 거 같긴 하지만, 프랑크를 이길 만큼 실력이 좋아졌다는 보고는 없었다.
그러다 용병들과 마수의 숲에 들어갔다는 보고를 받은 뒤에는 지셀에게서 완전히 신경을 꺼 버렸다.
어차피 그곳에서 죽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셀이 결국 룬스톤을 구해 왔다는 소식을 듣자, 찝찝한 마음은 이제 완전한 불안감으로 변했다.
‘그 정도 그릇이 아니었을 텐데.’
북부 영지를 삼키기 위해 오랜 시간을 들여 조사를 진행했다.
당연히 주요 인물들에 대해서도 조사했지만, 당시 정보만 보면 지셀은 아예 신경을 쓸 가치조차 없는 자였다.
그런데 최근 들어 두 번이나 그 이름을 들었다. 정보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다.
해럴드는 제 옆에 대기하고 있는 부관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북부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정보를 다시 수집해라. 이전 조사 결과는 신경 쓰지 말고, 처음부터 다시.”
“알겠습니다.”
새로 임명한 부관은 모략을 짜는 능력보다는 정보를 수집하는 역량이 더 뛰어나니 맡긴 일은 잘 해낼 것이다.
해럴드는 묘한 불안감을 느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붉은 노을이 그의 방을 물들여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