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역시 생각한 대로야. (4)
가신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반박할 말이 없었다.
“저, 저기 대공자님. 이미 대공자님 때문에 레이폴드와 관계가 어긋나서 그걸로는 조금 영지의 상황이 힘든…….”
“그래서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말씀입니까?”
당연히 부족하다.
페르디움에는 일시금보다 꾸준하게 들어오는 돈이 중요했다.
이곳에는 돈을 벌어들일 수단이 없었으니까.
네 탓이라고 화내며 돈을 달라고 하기도 난감했다.
돈을 쥐고 있는 사람이 지셀이니 완전히 관계가 역전되어 버린 것이다.
‘우, 우리도 개척을 시작해야 하나?’
호메른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룬스톤은 이미 지셀이 확보했고, 다른 자원을 찾으려면 예전과 똑같은 결론이 날 뿐이다.
위험을 감수하고 손해를 볼 각오로 움직여야 했다.
‘젠장! 어쩌다 저런 귀한 자원이 저놈 손에! 뺏을 방법이 없잖아!’
마수의 숲은 엄밀히 말하자면 페르디움의 영토가 아니다.
그저 영지와 붙어 있기에 관습적으로 인정되는 영토일 뿐이었다.
그러니 강제로 뺏는 것 말고는 지셀이 가진 룬스톤을 확보할 방법이 없었다.
다들 어쩔 줄 몰라 쩔쩔매고 있을 때, 지셀이 다시 입을 열었다.
“흐음, 다들 조금 곤란하신 모양이군요. 대공자로서 영지의 어려움을 모른 척할 수는 없죠.”
능글능글한 말투였지만 그래도 가신들은 살짝 기대 어린 눈빛을 보냈다.
즈발터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아들의 말에 빠져들었다.
지셀은 모두의 반응에 미소 짓고는 말을 이었다.
“애초에 룬스톤을 구해 온 것도 영지를 위해서였습니다. 레이폴드에서 빠진 만큼은 제가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지셀의 말에 가신들은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혼자 쓰겠다고 난리를 치면 진짜 싸워서라도 뺏어야 했는데, 조금이라도 주겠다니 일단은 한시름 놓은 것이다.
“단, 조건이 몇 개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에 가신들은 긴장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저 성격 더러운 대공자가 대체 무슨 조건을 내밀지 무서워질 정도였다.
“경비대의 스코반이 안 보이더군요. 듣기로는 감옥에 갇혔다던데, 맞습니까?”
그러자 호메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님께 거짓 보고를 한 죄로 감옥에 가뒀습니다. 기사 자격도 박탈할 예정입니다. 충성을 맹세한 기사가 거짓을 말하는 건 큰 죄입니다, 죄. 크흠흠!”
호메른의 목소리는 확실히 전보다 누그러져 있었다.
지셀과 밀고 당기기를 해 봤자 손해라는 걸 확실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대답에서는 스코반이 잡혀간 건 너 때문이라는 어조가 은근히 묻어 나왔다.
고개를 끄덕인 지셀은 손가락을 하나 들고 말했다.
“첫 번째로, 스코반을 풀어 주시지요. 제가 강제로 시킨 일이니, 그도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아마 억울해서 죽고 싶을 겁니다.”
“으음…….”
가신들은 조금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영주에게 거짓을 고한 죄를 용서하는 건 영주의 권위가 달린 문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핑곗거리가 없는 것도 아니고, 영지 운영에 비하면 작은 문제이니 딱히 반대 의사를 표하지는 않았다.
지셀은 가신들이 별다른 말이 없자 계속 말을 이었다.
“둘째, 주둔지 건설은 이제 공식적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인부들과 병력이 머물러야 하니까요.”
이번에도 수용할 수 있는 조건이라 가신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셋째, 마수의 숲은 지금까지처럼 접근 금지입니다. 괜히 쓸데없는 욕심으로 영지에서 희생자가 나오는 건 바라지 않습니다.”
순간 가신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 나쁜 놈! 혼자 다 먹겠다는 거잖아!’
‘우리는 왜 못 들어가는데!’
‘너는 들어가지 말랬는데 들어갔잖아!’
물론 속으로만 불만을 내뱉고 감히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다들 별말 없이 가만히 있자 지셀은 마지막 조건을 꺼냈다.
“마지막, 용병들을 비롯한 경비 병력은 앞으로 영지와 상관없이 제가 알아서 충원해 움직이겠습니다. 영지 내에서 병력을 움직일 때마다 간섭이 들어오면 곤란하니 그 정도 권한은 받아야겠습니다.”
가신들은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지금 지셀은, 앞으로도 영지 내에서 사병들을 거느리겠다고 선포한 것이다.
‘대공자가 사병을 가지려고 한다니…….’
‘돈을 쥐더니 이제 아주 막 나가는구나!’
‘저 사고뭉치가 병력을 이끈다고?’
가신들은 벌써 등골이 오싹해졌다.
갈수록 기행이 심해지는 대공자가 병력까지 이끌게 된다면 얼마나 더 큰 사고를 칠지 모른다.
지금도 그가 거느린 용병들 때문에 건드리기가 어려워졌지 않은가.
“저, 대공자님. 다른 건 몰라도 따로 병력을 이끄는 건…….”
한 가신이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지만, 지셀은 뚱하게 답했다.
“그러면 뭐 다 없던 일로 하죠. 저 이만 나갈까요?”
“저는 찬성한다는 뜻입니다. 찬성하고말고요.”
가신은 바로 꼬리를 말고 자리로 쏙 들어가 버렸다.
“아, 저는 또 반대하는 줄 알고 조금 상처받을 뻔했네요. 저 소심한 거 아시죠? 그냥 나갈 뻔했네.”
‘니미럴, 어차피 네 마음대로 할 거잖아!’
은근한 협박에 가신들은 속으로 욕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혹시 반대하시는 분?”
지셀이 손을 살짝 들고 물었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갑질도 이런 갑질이 없었지만, 대공자의 심기를 거슬러서 좋을 게 없었다.
잠깐 기다린 지셀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제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가신들은 제 의견에 모두 찬성하는 거 같습니다. 이제 아버지께서 결단을 내려 주시지요.”
왠지 그 웃음이 사악해 보였다. 즈발터는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 변했구나.’
레이폴드에서 항의가 들어왔을 때는 결국 대형 사고를 쳐 버렸구나 싶었다. 이번에야말로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셀은 과감한 행동력으로 그 모든 잘못을 상쇄시킬 만한 공을 세웠다.
물론 아직은 완전히 믿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이번 일도 사실 운이 좋았으리라.
그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마수의 숲을 개척하겠다고 검토했었던가.
즈발터도 위험성과 효율을 따져 본 바가 있어 잘 알았다.
자원을 이렇게 빨리 발견한 건 천운이 따라 주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그래도 엄청난 일을 해낸 건 맞지만…….’
즈발터는 잠시 고민했다.
이번에는 성공했지만, 앞으로도 계속 일이 안전하게 잘 풀릴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엄청난 재력을 손에 쥐더라도 단명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게다가 아들은 영지와 가문의 후계자였다. 목숨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되었다.
막을 거라면 지금부터 모든 권한을 박탈하고 막아야 한다.
하지만 아버지로서는, 겨우 달라지기 시작한 아들의 가능성을 짓밟고 싶지도 않았다.
‘과한 부탁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못 들어줄 만한 것도 아니다.’
결국 지셀을 믿어 주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지금 잠깐 달라진 모습만 보고 온전히 믿기에는 그동안 행실이 너무 개판이었다.
그렇다고 안 믿고 강제로 압박한다면 상황은 최악으로 흐를 수도 있다.
지금도 지셀은 병력을 끌고 와서는 아버지와 가신들에게 과한 조건을 내밀고 있다.
무력 충돌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를 하고 왔다는 뜻이다.
‘내 아들이 저런 성정이었나?’
즈발터는 제 아들을 새삼스럽게 뜯어보았다.
지셀은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상관없다는 듯 당당하게 서 있었다.
즈발터는 모르지만, 사실 지셀은 지금도 최대한 예의를 지키며 일을 부드럽게 풀어 가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용병왕 시절에는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잔혹하고 과격하게 굴곤 했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즈발터는 결국 숨을 크게 내쉬며 말했다.
“좋다. 원하는 대로 해 줄 테니 어디 한번 마음껏 해 봐라.”
“영주님!”
“형님!”
모든 가신이 놀라서 즈발터를 바라보았다.
설마 모든 조건을 흔쾌히 수락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놀란 가신들을 둘러보며 즈발터가 별거 아니란 투로 말했다.
“이왕 권한을 줄 거면 확실하게 주고 믿어 보는 게 낫겠지. 어설프게 줄 거면 안 주느니만 못하다.”
지셀이 감사 인사를 하기도 전에, 즈발터가 강렬한 기세를 쏘아 내며 말을 이었다.
“단, 영지에 피해를 주거나 북방을 지키는 데 방해가 된다면…… 네가 가진 모든 권한을 박탈하고 정신을 차릴 때까지 탑에 감금할 것이다. 이것이 너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라는 걸 절대 잊지 말아라.”
그 정도의 권한을 쥐면 책임도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즈발터도 확실한 경고를 보낸 것이다.
아버지로서의 기대와 영주로서의 우려가 섞인 그 말에, 지셀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염려 놓으시지요.”
“나머지 돈은 어디에 쓸 생각이냐?”
“생각한 바가 있습니다. 급한 일이 어느 정도 해결되면 영지를 위해서도 쓸 생각입니다.”
급한 일이라. 묘한 여운이 남는 말이었다.
영지 상황보다 급한 일이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즈발터는 더 묻지 않았다.
“알겠다. 알아서 잘하겠지. 믿어 보겠다.”
다시 평소와 다름없는 무뚝뚝한 말투가 되었지만, 그 속에는 예전과는 다른 감정이 듬뿍 실려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큰일을 한 아들의 모습이 대견하면서도 기쁜 것이다.
이렇게 되자 가신들만 난감해졌다.
특히 호메른과 란돌프, 알버트는 지셀을 잔뜩 몰아붙였으니 다른 가신들보다 더 곤란한 처지가 되었다.
호메른은 머리에 김이 날 정도로 눈을 굴리며 생각에 빠졌다.
‘젠장, 큰일이다. 이제 저 사고뭉치한테 잡혀 살아야 하는구나.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지.’
지셀이 마수의 숲을 개척한다고 했을 때 가장 많이 반대한 사람이 호메른이었다.
차라리 그때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지원해 줬다면 지분을 가져올 수 있었을 텐데.
너무나 아쉬웠다.
‘아니, 진짜 멋대로 가서 성공할 줄 누가 알았겠냐고! 말이 안 되잖아!’
애송이라고 생각했던 대공자가 저런 행동력을 보여 주고 진짜로 성공시킬 줄이야 누가 예상했겠는가.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제는 처지가 바뀌었으니 예전처럼 뻣뻣하게 굴 수는 없었다.
호메른은 갑자기 만면에 웃음을 띠고 말했다.
“어휴, 정말 장합니다. 장해요. 대공자님 한 분이 레이폴드 영지와 맞먹는다는 뜻 아닙니까? 정말 잘 컸어요. 벨린다가 참 잘 가르친 거 같습니다. 하하하.”
진심이라고는 티끌만큼도 담기지 않은 호메른의 말을 뒤로 흘리며 알버트가 나섰다.
“대공자님이 평소에 돈 개념이 철저하다는 건 제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지원금에 관련해서는 앞으로 저랑 얘기를 나누시죠. 당장 급하게 쓸 곳이 많아서……. 크흠흠!”
란돌프는 얼굴은 묘하게 일그러트린 채였지만, 입으로는 달콤한 말을 쏟아 냈다.
“대공자님이 과감한 행동력으로 언젠가는 큰 성과를 거둘 거라…… 당연히 믿었습니다! 영지에 병력이 부족한 건 아시죠? 아무렴 병력이 든든해야 영지를 지킬 수 있는 법이죠. 하하하. 저 밖에 있는 놈들 참…….”
안면을 싹 바꾸고 노골적으로 아부하는 세 사람을 보고 지셀이 살짝 거리를 두며 웃었다.
“세 분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제가 넉넉히 챙겨 드릴 테니 영지 일은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그제야 세 사람이 얼굴을 활짝 펴고 웃었다.
진심이야 어쨌든 간에 챙겨 준다고 하니 괜히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애송이한테 완전히 당한 기분이지만 뭐 어쩌겠는가.
당장 힘이 있는 쪽은 지셀이었으니 별수 없었다.
그냥 체면 불고하고 친한 척하는 수밖에.
호메른은 대표로 지셀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앞으로 기대하겠습니다. 아휴, 우리 영지에 참 큰 복이 내렸어요. 큰 복이.”
지셀은 호메른에게 잡힌 손을 슬그머니 빼고, 즈발터를 바라보았다.
“앞으로도 영지 일은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까지처럼 북방을 방비하는 데에만 전념하실 수 있도록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허허, 네놈이 그런 말도 할 줄 아는구나.”
즈발터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몇 달 전과는 다르게 부쩍 성장한 아들의 모습이 신기하기만 했다.
물론 그는 지셀의 말을 진담으로 듣지는 않았다.
그저 인사치레 정도로만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몸을 돌려 나가는 지셀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생각한 대로 되었다. 이제 다음을 준비할 차례야.’
영지를 발전시키는 것보다 급한 일.
이제 전쟁을 대비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