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역시 생각한 대로야. (3)
지셀의 말에 란돌프는 크게 성을 내며 외쳤다.
“투자? 투우자아? 네가 투자가 뭔지 알기는 해? 맨날 밥 먹고 똥이나 쌀 줄 알지! 이제 아무도 나 말리지 마! 내가 오늘 반드시 저놈을 죽여……. 와, 그게 뭡니까? 대공자님!”
란돌프가 지셀에게 달려오다가 걸음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순간적으로 퍼져 가는 빛에 모두가 눈을 부릅뜨고 궤짝 안을 살펴보았다.
“어, 저, 저건…….”
“설마…….”
궤짝 안에 돌무더기처럼 섞여 있는 광석들을 본 가신들의 표정이 점점 기이하게 변해 갔다.
길리언이 지셀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대전 밖으로 나갔지만, 가신들은 그가 나가는 걸 의식하지도 못할 만큼 궤짝 안의 물건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숨 막히는 침묵이 모두를 감쌌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즈발터가 더듬거리며 힘겹게 내뱉었다.
“이, 이게 무엇이냐?”
무엇인지 알면서도 제 눈을 믿지 못하고 확인하는 즈발터의 말에 지셀이 웃으며 답했다.
“룬스톤입니다. 마수의 숲에서 찾아낸 겁니다.”
“저, 정말이냐? 그 짧은 사이에 어떻게?”
“숲을 전부 뒤져 가며 개척한 게 아니니까요. 자원이 있는 곳을 탐색한 뒤 바로 그곳까지 돌파해 길을 뚫었습니다. 이제 길을 다지고 목책을 쌓아 꾸준히 채취할 예정입니다.”
즈발터는 지셀의 말에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설마, 룬스톤이 더 있다는 말이냐?”
“네, 아주 많습니다. 이건 그중 일부일 뿐입니다.”
즈발터는 당혹감에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호메른이 떨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이, 이거 다 거짓말입니다. 그렇죠? 대공자님 그런 사람 아니잖습니까! 어디서 훔쳐 온 거 아닙니까? 아니면 2만 골드로 사 와서 거짓말하는 거죠? 빨리 그렇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왜 거짓말을 합니까? 밖에 있는 수레에 잔뜩 실려 있으니 직접 확인해 보시지요.”
지셀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가져온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이 남아 있습니다. 제가 앞으로도 룬스톤을 더 가져오는지 확인해 보면 될 일이죠. 믿는 자에게 복이 있는 거 모르십니까?”
털썩.
즈발터는 멍하니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들이 해 온 일에 도무지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상황이 꿈인지 생시인지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재무관인 알버트는 눈만 끔뻑거리며 눈앞에 있는 룬스톤을 바라보았다.
정말 룬스톤이 그렇게나 많다면 레이폴드 영지에서 지원을 끊어도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알버트는 바로 궤짝으로 다가가 쭈그려 앉더니 룬스톤을 만져 보았다.
“지, 진짜 룬스톤이 이렇게나……. 이, 이걸 다 팔면 얼마야 도대체…….”
“우, 우리도 봅시다!”
가신들이 모두 달려가 궤짝 앞에 옹기종기 모였다.
그들은 연신 룬스톤을 만져 보며 감탄을 내뱉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며 지셀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멜리아가 조금만 더 빨리 움직였다면 엄청난 곤경에 빠졌겠군.’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마수의 숲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손발이 꽁꽁 묶일 뻔했다.
아멜리아에게서 뜯어낸 돈을 뺏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룬스톤도 찾지 못하게 되어 버렸을 것이다.
간발의 차이로 결과가 뒤바뀐 것이다.
‘역시 똑똑한 여자야. 이런 방법을 쓸 줄이야. 이제 시작인 건가?’
그녀가 여기서 멈출 리는 없었다.
이번 일은 그저 지셀을 곤란하게 하고 움직임을 묶기 위해 행한 일.
그를 무시하기에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지셀이 룬스톤을 얻은 걸 알게 되면 분명 다시 방해하고 수작질을 부려 올 테지.
‘아멜리아만 있는 것도 아니고.’
델파인 공작도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들 또한 엘레나를 죽이는 일에 실패했으니까.
지금은 다른 영지들을 약화시키느라 정신이 없겠지만, 룬스톤의 존재가 밝혀지면 모든 시선은 이곳에 집중될 것이다.
그 전에 최대한 대비해 둬야 했다.
‘더 빨리 움직여야 한다.’
이번에는 빨리 움직인 덕에 별 탈 없이 넘어갔지만, 아멜리아도 그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이번 일로 확실하게 깨달았다.
시간은 자신의 편이 아니다.
그가 움직이는 동안 적들도 움직이고 있다.
지셀은 딴생각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궤짝을 휙 닫아 버렸다.
“자자, 구경은 이제 끝났습니다. 계속 보면 닳아요. 흐흐흐.”
사기꾼 약장수 같은 천박한 말투였지만 가신들은 제대로 말도 못 하고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보며 지셀이 여유가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죠? 저를 압송해서 레이폴드로 끌고 간다는 얘기였던가요.”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을 지셀이 저질러 버렸다.
마수의 숲을 개척한다니. 당연히 실패할 거라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공자가 멋대로 용병들을 끌고 들어가더니 진짜로 성공해 버렸다.
역대 페르디움 영주들 그 누구도 해결하지 못했던 일을, 그 무능한 망나니 지셀이 한 달도 채 안 되는 사이에 뚝딱 해치운 것이다.
고작 며칠 만에 이런 성과를 내다니.
행동도, 그 결과도 자신들의 생각을 뛰어넘었다.
평소에 그렇게 무시하던 대공자가 한 일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가신들은 떠듬떠듬 한마디씩 중얼거렸다.
“크흠, 흠흠. 대공자님이 도대체 어떻게 이걸…….”
“허허, 이럴 수가! 정말 마수의 숲에 룬스톤이 있었다니.”
“이, 이게 어째서 마수의 숲에…….”
이렇게 되면 레이폴드 영지에서 깽판을 치고 온 것도 문제가 안 된다.
오히려 잘했다고 칭찬해야 할 판이었다.
언제나 그들이 생색내는 걸 받아 주며 비위를 맞춰 줘야 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다른 가신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호메른은 옆에 있는 기사에게 눈짓을 보냈다.
바로 병사들을 끌고 오라는 신호였다.
지셀을 잡으려는 건 아니었다.
지은 죄는 이번 공으로 상쇄하고, 압박을 가해 룬스톤과 권한을 뺏어 올 속셈이었다.
닳고 닳은 귀족들의 정치판에서 살아온 그다운 생각이었다.
하지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는 법.
끼익.
“뭐, 뭐야!”
“대공자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대전의 문이 열리자 가신들이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대전 앞에서는 무장한 용병들이 험악한 웃음을 지으며 병사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란돌프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검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문밖에서 인기척을 느꼈지만, 당연히 병사들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용병들이 모여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호메른도 이를 갈며 외쳤다.
“대공자님! 이곳까지 병력을 끌고 오다니, 미쳤습니까? 지금 반란이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그러자 지셀은 과장되게 놀란 척하며 고개를 저었다.
“반란이라뇨! 모두 저를 기다리고 있는 것뿐입니다. 뭐,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저를 호위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호메른 이상으로 닳고 닳은 지셀은 이미 그가 보일 반응을 예상하고, 길리언을 시켜 용병들을 데려다 두었다.
물론 영지의 가신들은 적이 아니다.
하지만 이들은 영지를 위한 일이라고 판단하면 주저 없이 지셀에게 검을 들이밀 것이다.
그게 바로 이 시대에 영지를 운영하는 자들의 사고방식이다.
페르디움에 충성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지셀은 이들의 생각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지게 움직일 수밖에 없다.
결국 그는 어쩔 수 없이 무력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자신을 건들면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지만 즈발터는 오히려 흥미 어린 눈빛을 내보일 뿐이었다.
‘허어, 지셀에게 저런 모습이 있었단 말인가?’
룬스톤을 구해 온 것보다 지금 행동이 더 놀라웠다.
언제나 심약하고, 아랫사람을 괴롭히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던 아들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영주님! 아무리 대공자라도 이런 무례한 행동을 용납하면 안 됩니다!”
“형님! 제가 저 무엄한 놈들을 다 쓸어 버리겠습니다!”
호메른과 란돌프가 길길이 날뛰었지만, 즈발터는 편하게 의자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됐다. 병력도, 룬스톤도 제가 얻어 온 것이라 제 것이라는데 어쩌겠나.”
“영주님!”
“형님!”
호메른과 란돌프가 당황해서 반발했지만, 즈발터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지셀은 언젠가 영지를 물려받을 후계자다.
이전에는 자신이 죽고 지셀이 영지를 물려받으면 필시 얼마 지나지 않아 망하고 말 거라는 확신으로 걱정이 태산이었다.
‘차라리 지금처럼 설치는 게 낫지, 빌빌대는 것보다야.’
오히려 내심으로는 지셀이 가신들의 행동을 예측하고 준비했다는 게 기껍기도 했다.
‘저놈에게도 북방의 늑대다운 모습이 있었구나.’
그래도 아들이 아주 구제 불능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자 좀 흐뭇하기도 했다.
결국 즈발터는 이번 일을 그냥 넘기기로 했다.
괜히 압박했다가 아들이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까 봐 무서웠다.
정말로 선을 넘으면 그때 가서 버릇을 고쳐 주면 될 일이었다.
“용병들이 이렇게까지 너를 따른다니 신기한 일이긴 하구나. 이번에는 넘어가마. 하지만 다음에 또 명을 어긴다면 그때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즈발터가 너그러이 용서하자 지셀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미소 지었다.
지셀도 아무 생각 없이 무력시위를 벌인 건 아니었다.
제 아버지의 성정을 알기에 시도한 일이었다.
자신의 인생까지 버린 채 전장에서만 지내는 남자가 어디 평범하겠는가?
고리타분하게 자신의 권력만 붙잡고 있는 기존의 영주들과는 다르다는 확신이 있었다.
어정쩡해진 분위기 속에서 재무관인 알버트는 머리를 굴려 앞일을 계획했다.
‘어떻게든 룬스톤을 받아야 한다.’
가신들은 모두 반대했던 일이고 개척도 대공자 혼자서 성공시켰기에 영지에서 소유권을 내세울 명분이 없었다.
어떻게든 강제로 뺏어가는 방법도 생각해 봤지만, 지셀은 영지의 후계자며 가문의 적장자다.
결국 언젠가는 영지의 주인이 될 사람.
여기서 부딪쳤다간 장기적으로 득보다는 실이 클 거다.
차라리 살살 구슬려서 돈을 받아내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로 싸워서 좋을 건 없지.’
이백여 명에 가까운 용병들을 끌고 갔다고 하는데 돌아온 건 오십여 명이 조금 넘었다.
대부분이 죽고 저 정도가 살아남았다는 뜻이다.
백 명이 넘게 죽을 만큼 위험한 숲에서 살아남은 용병들이 만만한 실력일 리가 없었다.
그런 용병들을 거느리고 있는 저 꼴통이 순순히 돈을 뺏길 리도 없었다.
알버트의 계획은 간단했다.
어차피 대공자의 돈을 뺏을 수 없다면 적당한 명분을 통해 지분을 나눠 받는 것.
생각을 마친 알버트는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크흠흠, 어쨌든 일이 성공한 걸 축하드립니다. 그래도 대공자님이 받아 온 2만 골드는 원래 영지의 돈입니다. 그것 때문에 지원이 끊겼고 그 돈으로 개척을 시작했으니 영지도 어느 정도 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알버트의 말에 가신들이 잽싸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시도를 해야 성공할 수도 있는 법이다.
어쨌든 그 2만 골드가 있었기에 개척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은 확실했다.
확실히 그의 말은 일리가 있었지만, 상대는 남의 돈은 뺏어도 자기 돈은 그냥 내준 적이 없는 용병왕이었다.
“흠.”
지셀은 여유롭게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고민하다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그것참 흥미로운 의견이군요. 일리 있습니다. 참으로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그, 그렇죠? 그러니 영지에 적어도 40퍼센트…… 아니, 30퍼센트의 지분은 주셔야…….”
“2만 골드 드리면 되죠?”
“네?”
알버트의 반문에 지셀은 윙크하며 손가락으로 동전 모양을 만들었다.
“2만 골드, 돌려드린다니까요. 이자도 쳐 드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