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이제 좀 쓸 만해졌구나. (5)
공포에 사로잡힌 용병들은 블러드 퓌톤이 죽었는데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만! 그만! 이제 죽었다!”
길리언이 몇 번이나 외치고 나서야 용병들은 무기를 놓고 뒤로 물러섰다.
어느새 해가 지기 시작해 붉은 노을이 주변을 물들이고 있었다.
수백 개의 무기가 꽂힌 채 쓰러져 있는 거대한 뱀의 사체는, 노을빛을 받아 더욱더 어둡고 붉게 보였다.
그 장엄한 광경에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기다려도 블러드 퓌톤은 움직이지 않았다. 용병들은 그제야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 하하……. 이겼다……. 이겼다고!”
한 용병의 탄성을 필두로 모두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잡았다! 이 괴물을 잡았어!”
“으하하하! 정말 이놈이 죽었어!”
절대 이길 수 없을 거 같았던 몬스터를 자신들이 죽였다.
아니, 이건 그들의 고용주가 혼자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고용주는 괜찮나?”
“가 보자!”
용병들이 우르르 지셀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지셀은 누운 채 살짝 손만 들고 힘겹게 말했다.
“어……. 다들…… 고생했다…….”
그 모습에 용병들은 환호를 내질렀다.
“살았다! 고용주가 살아 있어!”
“와아아!”
이길 수 없는 적을 마주하고도 살아남은 기쁨에 용병들의 환호는 끝이 날 줄 몰랐다.
지셀이 대단한 활약을 보여 준 점도 그들의 흥분을 부채질했다.
“으하하하, 지셀 용병단 만세다!”
“지금은 그냥 지셀 용병단으로 하자고!”
용병들이 신나게 지셀의 이름을 연호했다.
분위기에 휩쓸려 웃고 떠드는 용병들을 보며 지셀은 옅게 미소 지었다.
“단순한 놈들…….”
그리고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지셀은 잠에서 깨어나듯 천천히 눈을 떴다.
옆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던 길리언이 놀라며 말했다.
“공자님, 정신이 드십니까? 괜찮으십니까?”
지셀은 누운 채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갈라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벨린다는?”
“생명에 지장은 없습니다. 안정을 위해 약초를 먹고 잠들어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용병들 피해는?”
“절반 이상이 죽었습니다. ……그래도 공자님이 아니었으면 전멸했을 겁니다.”
“……그래.”
“하지만 공자님,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마십시오. 공자님이 죽으면 이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길리언은 답답한 듯 그를 다그쳤다.
차라리 용병들이 다 죽을지언정 시간을 들여서 잡아야지, 자신의 목숨을 거는 고용주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알겠어. 길리언도 점점 벨린다를 닮아 가는군.”
지셀이 농담을 건네자 길리언이 굳은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 올렸다.
카오르가 다가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살면서 미친 짓 하는 인간을 많이 봤지만, 공자님만큼 미친 사람은 처음입니다. 저 괴물을 그런 식으로 잡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미쳤다는 소리를 자꾸 들으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군.”
지셀은 대답하며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곧 엄청난 고통이 몰려왔다.
“으윽!”
“이런, 조심히 움직이셔야 합니다. 상처가 심합니다.”
길리언이 놀라며 그를 부축했다.
지셀이 천천히 제 몸을 살펴보았다. 온몸에 붕대가 빠짐없이 감겨 있었다.
아직도 전신이 저릿저릿한 걸 보니, 들어온 독이 다 빠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몸 안의 나쁜 기운이야 마나를 운용해 뽑아내면 되겠지만, 망가진 뼈와 근육이 회복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았다.
이번 생에 이 정도로 마나를 쓴 건 처음이었다.
지금 몸 상태로는 짧은 시간만 써도 버티기 어려운 기술을, 정신을 잃을 때까지 계속 사용했으니…….
몸이 완전히 엉망이 된 것도 당연한 결과였다.
‘시간이…….’
지셀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부실 정도로 햇빛이 내리비치고 있었다.
블러드 퓌톤을 잡은 건 해가 질 즈음이었는데, 지금은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생각보다 오래 기절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때 지셀이 깨어난 걸 확인한 용병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대장이 드디어 깨어났다!”
“대장, 괜찮수?”
“오오, 믿고 있었다고!”
용병들은 기쁜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지셀 주변에서 쉬지 않고 떠들어 댔다.
지셀은 그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그들의 얼굴에는 자신감과 여유가 가득했다.
그리고 눈빛에서 느껴지는 신뢰감.
목숨을 거는 전투를 거듭하며 지셀과 이들의 유대감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끈끈해졌다.
비록 계약으로 시작한 관계지만, 이제는 목숨을 걸고 함께하는 사이로 변한 것이다.
‘옛날 생각 나네.’
지셀은 왠지 그리운 기분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하루를 더 쉴 테니 충분히 쉬고 부상을 살펴라. 몬스터들은 이제 나타나지 않을 거야.”
용병들은 긴가민가했지만, 지셀을 믿고 편히 휴식을 취했다.
놀랍게도 정말 몬스터는 단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았다.
덕분에 일행들은 체력을 충분히 회복하고 좋은 컨디션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얼마간 움직인 후, 주변을 둘러본 지셀이 용병들에게 말했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이 앞이다.”
용병들은 기대 어린 눈빛을 감추지 못하고 떠들기 시작했다.
“정말 돈이 되는 게 있을까?”
“금이나 은 같은 걸 수도 있어.”
“어쨌든 결국 도착하긴 하는군.”
설레는 마음으로 다들 마지막 목표를 향해 바쁘게 움직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난 광경에, 모두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이건…….”
“이거 실화야?”
“어, 엄청나잖아!”
용병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랐다.
길리언은 흔들리는 눈빛을 감추지 못한 채 지셀을 돌아보았다.
“고, 공자님. 정말, 정말 돈이 되는 게 있었군요. 이, 이건…….”
떠듬거리는 길리언을 마주 보고 지셀이 웃으며 답했다.
“그래, 아주 비싼 물건이지.”
그들의 눈앞에는 돌에 붙어 푸른 빛을 내뿜는 수정 조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조각 하나하나가 내는 빛은 희미하지만, 무수히 많은 조각이 모이니 어둠으로 가득 찬 숲도 환했다.
자체적으로 빛을 내는 수정은 온 세상을 통틀어 단 한 가지뿐이다.
바로 룬스톤이라 불리는 광물이다.
룬스톤은 마력을 품고 있어, 마법 도구나 결계 등을 만들 때 사용된다. 마법사라면 환장할 수밖에 없는 물건이었다.
게다가 채취할 수 있는 곳도 적고, 그 양도 극히 적다 보니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었다.
그런 룬스톤이 이곳에는 돌멩이처럼 지천으로 깔려 있는 것이다.
“우와아아아!”
“엄청나다! 이게 죄다 룬스톤이야!”
“이, 이게 얼마야 도대체?”
용병들이 흥분하며 날뛰었다. 지셀 또한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전생에 들었던 것보다 훨씬 더 많구나.’
기록만 읽고 막연하게 상상한 것과 직접 본 것은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눈앞에 장대하게 펼쳐진 룬스톤을 보니 그동안의 고생을 잊을 만큼 기쁨이 차올랐다.
용병들은 떠들다가 뒤늦게 놀라서 지셀을 돌아보았다.
“정말 돈이 되는 게 있었잖아?”
“도대체 이걸 어떻게 알고 있던 거지?”
“우리가 한 게 정말 미친 짓이 아니었다고!”
용병들은 쉽게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룬스톤이 가득 깔린 이 엄청난 광경을 보면 누구라도 제정신을 차릴 수는 없을 것이다.
지셀이 용병들을 보며 말했다.
“모두 고생했다. 너희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용병들은 모두 숙연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많은 이들이 죽었고, 살아남은 자들 또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싸움을 치러 왔다.
그 모진 고통을 이겨 내며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지셀은 다시 용병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무사히 도착했으니 추가 수당을 지급하겠다. 기존 의뢰비의 세 배를 주지. 죽은 자들도 그 유가족에게 같은 위로금을 보내 주겠다.”
“와아아아! 화끈하다!”
“역시 돈 자랑은 대장님이 최고다!”
“완전 대박이야! 대박!”
용병들은 무기까지 집어 던지며 신나게 외쳤다.
엄청나게 고생하고,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겨우 도착한 곳이다.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기쁜데 수당이 세 배로 늘어났다.
확실히 그들의 대장은 쓸 때는 통쾌하게 쓰고 자신들을 다룰 줄 알았다.
그때 길리언이 지셀에게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
“공자님, 이미 많은 보수를 지급했습니다. 굳이 돈을 더 줄 필요가 있습니까? 죽은 자들의 가족한테까지 지급하려면 돈이 많이 들 겁니다.”
세상에 고용된 용병이 죽었다고 그 가족한테 위로금까지 보내는 고용주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용병들이 받는 보수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는 수당까지 포함한 것이었다.
일단 돈을 받았으면 죽든 살든 그걸로 끝이다.
가끔 일이 성공해서 보너스를 주는 고용주도 있긴 하지만, 수당의 세 배는 말도 안 되는 금액이었다.
“괜찮아. 안 쓸 거면 모르겠지만 쓸 거면 확실히 쓰는 게 낫지. 그동안 목숨 걸고 고생한 이들에게 이 정도 보상은 당연하다.”
지셀은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길리언은 말없이 지셀을 바라보았다.
아까워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돈이 아깝지 않은가?’
그간 길리언이 본 지셀은 귀족치고는 검소한 편이었다.
보통 지셀 또래의 젊은 귀족들은 허영심 때문에 엄청나게 돈을 쓰는 편인데, 지셀은 단 한 번도 사치를 부린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영지가 가난하니 어쩔 수 없이 아끼는 줄 알았다.
그런데 마수의 숲을 개척하는 동안 본 바로는 그런 것도 아니었다.
지셀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돈을 아끼지 않고 써 댔다.
‘다른 건 몰라도 공자님의 그릇은 정말 범상치가 않구나.’
길리언도 용병단을 이끌어 봤기에, 지셀처럼 후하게 보상해 주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다.
제 어린 주군은 돈 따위에 구속되지 않는 대범한 성격인 모양이라며, 길리언은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강력한 안정 약초를 먹고 잠들었던 벨린다도 깨어나 상황을 알게 되었다.
“아……. 정말 룬스톤이 저렇게나 많이……. 정말 성공하셨네요……. 말도 안 돼…….”
고통 때문에 입술이 갈라지고 초췌해진 그녀가 애써 밝은 웃음을 지었다.
지셀은 누워 있는 그녀를 보고 웃었다.
“벨린다 덕분이지. 그때 몸으로 막아 주지 않았으면 아마 성공하지 못했을 거야. 생각보다 몸도 단단한데? 운동 열심히 하나 봐.”
벨린다는 쓸데없는 소리 말라는 듯 입술을 씰룩거리며 답했다.
“하, 다음부터 그런 짓 하지 마세요……. 더럽게 냄새나는 괴물 입에는 왜 들어간대…….”
“그래, 그래. 어쨌든 다 해결됐으니 이제 마음 놓아도 돼. 돌아가면 바로 치료부터 하자고. 충격 때문에 마나가 역류해서 내부가 완전히 진탕 된 거 같아. 그나마 장기가 안 터져서 다행이야.”
벨린다는 한참을 쉬었는데도 여전히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강력한 충격을 받고서도 목숨을 건졌지만, 그 대가로 내부가 완전히 엉망이 되어 버린 것이다.
마나 흐름이 망가진 데에는 포션과 약초도 큰 효과가 없었다. 흐름이 안정될 때까지 쉬는 것이 최선이었다.
“흥…… 제가 잘 피한 거죠……. 갑작스러워서 그랬지, 평소 같았으면 안 맞았을걸요…….”
몸져누운 채로도 여전히 자부심 넘치는 그녀에게 지셀은 웃으며 모포를 덮어 주었다.
만약 벨린다를 영지에 두고 왔다면 길을 내는 일이 더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벨린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알았어. 이제 푹 쉬어. 곧 돌아갈 테니까 조금 더 자도록 해.”
지셀의 말에 벨린다는 눈을 감으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육포 그냥 먹지 말고…… 양념 꺼내서…… 수프 끓여 먹어요…….”
“알겠어, 알겠어. 걱정하지 말고 쉬어.”
지셀이 타박하자 그녀는 흐릿하게 웃더니 금세 잠이 들었다.
벨린다가 잠든 걸 확인하고 지셀은 용병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자, 그럼 돈 복사를 시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