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이제 좀 쓸 만해졌구나. (2)
전생의 정보를 이용해 최대한 대비했지만 모든 게 완벽하게 생각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여기서 죽을 수는 없다.’
살면서 도망간 적이 없던 것도 아니다. 도망가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큰 것도 아니다.
필요하다면 도망갔다가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것 또한 전략의 일환이다.
자신이 죽는다면 가문과 영지는 결국 전생과 같이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 암울한 상황이 오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굳이 마수의 숲까지 들어와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니 절대로 이곳에서 죽어서는 안 된다.
페르디움의 미래를 아는 사람은 자신뿐이니까.
‘하지만…….’
도망가면 안 되는 때가 있다.
다음 기회가 없을 때 도망간다면 그 뒤로 남은 것은 내리막길뿐이다.
영지의 사정, 자신의 힘, 외부의 위협, 자신이 아는 정보를 전부 고려해도 지금 목적지까지 가는 게 최선이자 유일한 돌파구였다.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가문과 영지는 전생과 같은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없다.
지셀은 눈을 뜨고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잔뜩 긴장한 채로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얼굴들을.
앞으로도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다.
그들을 모두 살리며 목적을 이루겠다는 오만한 생각은 전혀 없다.
전생에서도 수많은 동료와 수하들을 잃으며 전진했다.
‘하지만……. 그게 여기서 전부 죽어도 괜찮다는 핑계는 안 되지.’
지셀이 마음의 결정을 내렸을 때, 용병들 사이에서 한 남자가 튀어나와 소리쳤다.
“이 병신들아! 이제 끝났어! 고용주도 방법이 없는 거라고! 도망 안 가고 뭐 하는 건데!”
튀어나온 남자는 마누스였다.
마누스는 연신 뒷걸음질하며 외쳤다.
“지금이라도 도망가야 한다고! 다 같이 죽을 필요 없어! 저걸 정말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 한꺼번에 사방으로 흩어지면 몇 명은 살아남을 수 있어!”
용병들의 얼굴에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마누스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더욱더 크게 외쳤다.
다 같이 흩어지며 도망가야 자신이 살 확률이 더 높아진다.
“빨리 도망가자고! 귀족의 미친 놀음에 우리까지 목숨을 걸 필요 없어! 애초에 이따위 숲에 들어오는 게 비정상이었다고!”
그때 카오르가 한 손에 쥐고 있던 검을 휘휘 돌리며 입을 열었다.
“아, 저 쪽팔린 새끼. 도망가기 전에 저 새끼는 죽이고 가야겠네.”
카오르가 무기를 던져 마누스를 죽이려고 할 때, 지셀이 손을 들며 제지했다.
“됐어. 그럴 필요 없다.”
지셀은 바로 마누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가라. 그동안 고생 많았다.”
“뭐? 뭐요? 그냥 가라고?”
마누스는 당황했다.
보통 이런 경우 고용주는 자신을 잡아 죽이겠다고 길길이 날뛰어야 정상이었다.
게다가 도망가는 자는 직접 죽이겠다고 엄포까지 놓았었다.
그랬던 사람이 이렇게 선뜻 보내 주다니.
놀란 마음이 미처 가라앉기도 전에 지셀은 더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도망갈 사람은 가도 좋다.”
담담한 말에 용병들이 모두 당황했다.
도망가라니, 그렇다면 고용주는 어떻게 하겠다는 말인가?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고용주님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지셀은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툭 내뱉었다.
“나는 여기서 저놈을 잡을 거다.”
“도련님!”
“공자님!”
벨린다와 길리언이 잔뜩 화가 나서 지셀의 앞을 막았다.
하지만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검을 뽑아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반드시 이번 일은 성공시켜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모든 게 끝장날 테니까.
가장 신이 난 건 역시 마누스였다.
그는 기쁜 표정을 감추지 않고 용병들에게 손짓했다.
“뭐 해! 고용주가 도망가라잖아! 빨리들 가자고!”
하지만 용병들은 지셀과 마누스를 번갈아 볼 뿐, 쉽게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앞장서서 싸우며 용병들을 구해 준 지셀이었다.
그런 그가 혼자서라도 싸우겠다고 하는데 쉽게 도망갈 수가 없었다.
뭉그적거리는 용병들을 보며 마누스가 답답하다는 듯 다시 외쳤다.
“빨리 오라고! 여기서 다 죽을 셈이야? 뭐 하냐고!”
재촉하는 마누스와 담담한 지셀을 번갈아 보던 토란이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저놈만 뚫으면 정말 끝나는 겁니까?”
“그래, 목적지는 코앞이다.”
확고한 대답에 토란은 크게 심호흡을 한 뒤 답했다.
“저도 함께 싸우겠습니다.”
“토란! 미쳤어? 죽으려고 환장했어!”
마누스가 소리치자 고든이 그를 돌아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나는 이대로 도망가면 아마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자서 근손실이 올 거야. 마음이 계속 불편할 테니까.”
“뭐?”
“그러니까 안 간다고!”
“이 무식한 놈아! 너도 미쳤냐?”
그때 여기저기서 용병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대로 가면 쪽팔려서 용병 짓 못 하지.”
“지금까지 고용주 덕분에 목숨 건졌는데 그냥 도망가면 사람 새끼가 아니지.”
“병신은 너다, 마누스! 갈 거면 너나 가라! 이 양심도 없는 새끼야! 너 고용주한테 치료도 받았잖아!”
“고용주가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싸워 보자고!”
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지셀이 눈을 크게 뜨고 용병들을 돌아보았다.
이제 그들의 얼굴에는 할 수 있는 데까지 함께 싸워 보겠다는 결의만이 남아 있었다.
지셀은 이런 표정을 본 적이 있다.
이길 수 없을 거 같은, 불리한 전투를 앞둔 때마다 봤던 표정.
‘이건 마치…….’
전생에 함께했던, 그의 수하들이 보여 주던 모습이었다.
비록 용병들의 실력은 그때보다 한참 부족하지만, 각오만은 그들과 다를 게 없었다.
지셀은 저도 모르게 씨익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 이제 좀 쓸 만해졌구나.”
그 광경을 지켜보던 카오르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얼굴 한가득 띄우고 용병들을 바라보았다.
‘내가 아는 놈들이 맞나?’
위험한 일을 즐겨 다른 지역까지 휩쓸고 다니는 켈베로스 용병단과 달리, 짐바르 영지에 머무는 용병들은 항상 빈둥거릴 뿐 위험한 임무에 덤벼드는 적이 없었다.
그런 놈들이 지셀을 따라다니더니 이 며칠 사이에 완전히 바뀐 것이다.
‘정말 놀랍군. 제대로 휘어잡았어.’
카오르는 새삼스레 지셀의 능력을 인정하고 감탄했다.
길리언 또한 용병단장 출신이니만큼, 지금 벌어진 상황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벨린다는 이 바보 같은 짓거리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도련님, 잘됐어요. 용병들을 다 앞으로 내보내고 도련님은 빨리 몸을 빼세요.”
지셀은 벨린다의 속삭임을 무시하고 허리에 찬 검집을 풀어내 바닥에 버렸다.
“공자님! 좀!”
검집을 버린다는 건 죽을 각오를 하고 싸운다는 뜻이다.
그 모습을 보고 벨린다는 성난 표정을 지었지만, 카오르는 피식 웃었다.
“겁 없는 건 정말 마음에 든단 말이지. 왕년의 나를 보는 거 같아.”
지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전생에 지셀이 이끄는 용병단이 가장 많이 맡은 의뢰는 바로 몬스터 사냥이었다.
대륙을 휩쓴 괴수들은 블러드 퓌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한 존재들이었다.
비록 신체 능력도, 용병들의 실력도 그때보다 부족하지만, 그가 쌓은 경험으로 그 부족함을 조금이나마 메울 수 있을 것이다.
“싸워 보자.”
지셀이 한마디를 내뱉자 모두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무기를 들고 전열을 정비했다.
“아아, 늙는다. 늙어……. 주름이 늘어나면 전부 다 도련님 탓이에요.”
벨린다는 체념한 듯 축 늘어져 중얼거렸다.
“이 멍청한 놈들! 너희는 다 뒤질 거다!”
마누스는 악에 받친 말을 던지며 숲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누구도 그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블러드 퓌톤이 천천히 일행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카아아아아!
블러드 퓌톤은 즐거운 듯 괴성을 지르며 용병들을 향해 그 큰 입을 벌렸다.
“산개!”
지셀의 외침과 동시에 용병들의 대열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콰아아앙!
입을 벌린 채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블러드 퓌톤은 잠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카아아악!
분노한 블러드 퓌톤은 곧 가장 가까이 있는 용병을 향해 입을 들이밀었다.
용병 하나가 다시 잡아먹히기 직전, 지셀이 번쩍 뛰어올라 블러드 퓌톤의 머리를 검으로 그으며 소리쳤다.
“길리언, 카오르는 나와 함께 머리 쪽의 시선을 끈다! 벨린다는 우리를 엄호해! 나머지는 그 틈을 이용해 몸통을 공격해라!”
블러드 퓌톤의 머리에 작은 생채기가 생겼다.
평범한 공격은 통하지 않지만 마나가 담긴 무기에는 작은 상처라도 입은 것이다.
“카아아아아!”
제 몸에 상처가 난 것을 안 블러드 퓌톤은 분노로 가득 찬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비늘보다 더 붉은 눈으로 지셀을 노려보았다.
자신에게 상처를 낸 인간을 용서 못 한다는 듯, 뱀은 곧 거대한 입을 벌린 채 엄청난 속도로 쇄도했다.
콰아아아앙!
지셀은 재빠르게 몸을 굴려 피했다.
블러드 퓌톤의 머리가 다시 땅에 처박히며 먼지를 뿜어내었다.
그사이 다가온 길리언이 도끼에 마나를 가득 담아 블러드 퓌톤의 머리를 강하게 찍었다.
콰아앙!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지며 블러드 퓌톤의 거대한 머리가 들썩였다.
마나의 양으로만 따지면 길리언이 일행 중 가장 강했다.
그만큼 큰 파괴력에 블러드 퓌톤도 꽤 타격을 입은 듯했다.
카아아아아!
블러드 퓌톤이 다시 괴성을 지르며 머리를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상처 자국이 확실히 눈에 띌 정도로 크게 나 있었다.
하지만 그 상처가 깊지는 않았고, 오히려 블러드 퓌톤의 분노만 더 돋우었을 뿐이다.
휘이익!
거대한 머리가 길리언을 향해 날아들었다.
갑자기 달려드는 통에 미처 피하지 못한 길리언은 마나를 잔뜩 뿜어내며 한 손에 들고 있던 방패로 제 앞을 막았다.
콰아앙!
“크윽!”
방패가 찌그러지며 길리언의 몸이 튕겨 나갔다.
그사이 카오르가 블러드 퓌톤의 뒤에 다가가 검을 찔러 넣으며 외쳤다.
“빨리 붙어!”
그그극!
카오르의 검이 뱀의 몸통에 깊숙하게 꽂히자 블러드 퓌톤이 몸을 뒤틀며 그를 공격했다.
“쳇!”
카오르가 검을 놓고 몸을 굴려 피하는 사이, 용병들은 블러드 퓌톤의 몸에 붙어 공격하기 시작했다.
카아앙! 카앙!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무기를 휘두르고 찔러도 단단한 비늘은 모든 공격을 막아 내었다.
무기에 마나를 충분히 싣지 않으면 강철과도 같은 비늘을 뚫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지셀과 길리언, 카오르가 번갈아 가며 블러드 퓌톤의 몸 곳곳에 작은 상처를 냈다.
“벨린다! 시선을 끌면서 상처들을 공격해! 기회가 되면 눈을 노려!”
“알겠어요! 아휴, 속상해!”
지셀의 말에 벨린다는 수많은 단검을 쏘아 내 블러드 퓌톤의 상처에 꽂아 넣었다.
벨린다가 정교하게 다루는 단검은 다른 사람들이 낸 작은 상처들을 벌리는 데 가장 효과적이었다.
벨린다는 상처를 벌리면서도 계속 블러드 퓌톤의 눈을 노려 공격했다.
협공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지 블러드 퓌톤은 귀찮은 듯 연신 머리를 흔들어 댔다.
지셀을 비롯한 인물들에게 시선이 쏠려 용병들을 노린 공격도 많이 줄어들었다.
“지금이야! 상처를 공격해!”
그 틈을 타 용병들이 뱀의 몸에 난 상처에 검을 찔러 넣었지만, 블러드 퓌톤은 근육까지 단단한 탓에 제대로 날이 들어가지 않았다.
카아아아아!
벌레 같은 인간들이 달라붙는 게 거슬린 듯 블러드 퓌톤이 괴성을 지르며 꼬리를 강하게 휘둘렀다.
콰아아앙!
“커억!”
“으아악!”
꼬리 근처에 달라붙어 있던 용병들이 모두 튕겨 나갔다.
뱀이 꼬리로 쓰러진 용병들을 찍어 내리려 할 때였다.
지셀이 머리 쪽으로 달려들어 다시 블러드 퓌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모두 둔기를 들어라! 안이 물러질 때까지 두들겨! 작은 상처를 더 크게 벌려야 한다! 길리언, 카오르! 다시 시선을 끌어! 벨린다는 계속 엄호해!”
지셀의 말을 듣고 용병들이 눈을 크게 뜨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지.”
“메이스! 메이스 어디 있어!”
“남는 거 하나 줘!”
“없으면 수레에서 가져와! 다 달라붙어!”
곧 용병들이 무기를 둔기로 바꿔 들고 뱀의 몸통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블러드 퓌톤의 비늘을 내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