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온 힘을 다해 나를 따라와라. (4)
“흥.”
벨린다는 콧방귀를 뀌며 지셀 근처로 몸을 움직였다.
그녀는 특별히 디루스 엔트들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이미 용병들이 달려들고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도 없어 보였고, 오히려 지셀이 싸우는 데 방해가 될지도 몰랐다.
그녀는 정말 위험한 순간에 지셀만 쏙 빼내 올 생각으로 조용히 주변을 경계할 뿐이었다.
“와아아아!”
크아아아아!
용병들이 모두 몰려들자 디루스 엔트들이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개개인의 힘은 부족할지 몰라도 무려 백 명이 넘는 인원이다.
용병들은 디루스 엔트 하나에 수십 명씩 달라붙어 공격을 시도했다.
크아아아!
무차별적으로 난도질당한 디루스 엔트들은 하나둘 검은 액체를 뿜어내며 쓰러지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으아아악!”
물론 용병들도 멀쩡하지 않았다.
디루스 엔트가 팔을 휘두를 때마다 제대로 막지 못한 용병들이 멀리 나가떨어졌다.
크오오오!
눈앞의 용병들을 날려 버린 디루스 엔트 하나가 넘어진 용병을 향해 거대한 발을 내질렀다.
이대로 밟아서 아예 짓이기려는 것이다.
“아, 안 돼!”
자신에게 닥쳐오는 거대한 그림자를 본 용병이 공포에 질려 비명을 내질렀다.
그는 자신의 최후를 직감하며 눈을 감았다.
퍽!
예상했던 고통은 느껴지지 않고 둔탁한 타격음만 들려오자 용병이 살짝 눈을 떴다.
그의 눈앞에는 거대한 대검으로 디루스 엔트의 발을 막고 있는 지셀이 있었다.
“어, 어?”
“어이, 괜찮나?”
“네, 네! 가, 감사합니다.”
크아아아!
드드득.
분노한 디루스 엔트가 온 힘을 실어 누르자 지셀의 발이 점점 뒤로 밀리며 땅이 파이기 시작했다.
“빨리 피해라.”
“네, 넵!”
용병은 허겁지겁 대답하고 잽싸게 몸을 굴려 자리를 피했다.
그와 동시에 지셀이 몸을 돌리며 대검을 거두었다.
디루스 엔트의 발이 땅을 강하게 찍었다.
콰아앙!
지셀은 몸을 다시 제자리로 돌리며 대검을 강하게 휘둘렀다.
콰지지직!
대검은 디루스 엔트의 발목을 그대로 훑고 지나갔다.
쿠오오오!
발이 잘린 디루스 엔트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비틀거렸다.
지셀은 멈추지 않고 디루스 엔트의 몸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콰직! 콰직! 콰지직!
지셀 덕분에 몸을 피한 용병은 질린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지셀이 싸우는 모습은 그가 지금까지 봐 왔던 기사나 귀족들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거칠고 무자비했으며 소름 끼칠 정도로 잔인했다.
오히려 기사보다는 용병이나 산적들이 싸우는 모습과 흡사했다.
‘무, 무서운데 세잖아?’
용병이 감탄하며 정신을 못 차리는 동안, 지셀은 디루스 엔트를 걸레짝으로 만들고 자리를 옮겼다.
사방을 종횡무진 다니며 활약한 지셀 덕분에 디루스 엔트는 수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쿠오오오…….
시간이 좀 걸리기는 했지만 결국 디루스 엔트들은 모두 쓰러지고 말았다.
“이, 이겼다!”
용병들이 숨을 헐떡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으로 환호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침묵을 지키며 바라보는 방향에는 지셀이 눈을 감고 고개를 든 채 서 있었다.
쿠웅!
지셀이 대검을 바닥에 꽂고 몸을 돌리자 용병들이 움찔거렸다.
그가 보여 준 무위에 압도된 탓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지셀은 애송이 귀족이 아니라 무시무시한 전사였다.
“흠.”
지셀은 무표정한 얼굴로 모두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구경은 잘들 했나?”
용병들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돈을 받고 고용되었음에도 무섭다고 도망가려 했다.
고용주가 목을 베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애송이 귀족이라며 지셀을 비웃었지만, 실상은 자신들이 그보다 못했던 것이다.
“싸울 수 있는데도 겁부터 먹으면 결국 죽는다.”
그 언젠가, 오크를 만났을 때 겁먹었던 병사에게도 같은 말을 했었다.
그때처럼 지셀은 일부러 용병들을 부르지 않고 혼자 싸웠다.
목적이 생존이든, 돈이든, 성장이든 스스로의 의지로 싸우는 게 중요하다.
싸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는 것.
가장 위험한 곳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것.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압도적인 무력을 보여 주는 것.
그것이 언제나 그의 역할이었다.
그렇기에 전생에도 모든 용병이 그를 믿고 뒤를 따랐다.
“이제부터 도망가는 자는 제일 먼저 목을 베겠다.”
차가운 표정과 무시무시한 눈빛에 눌려 용병들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지셀이 말을 이었다.
“모두가 살아 나갈 수 있다고 장담은 못 하지만, 최대한 많은 사람을 살려 나가겠다.”
용병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언제나 가장 앞에 서겠다.”
그 말에 벨린다는 인상을 썼지만, 용병들은 표정을 굳힌 채 지셀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온 힘을 다해 나를 따라와라.”
지셀의 말이 끝나자, 용병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무기를 들고 일어섰다.
벨린다는 용병들을 휘어잡는 지셀을 보고 살짝 놀랐다.
‘갑자기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잖아?’
최근 지셀은 여유 있고 장난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예전의 신경질적인 모습보다야 훨씬 낫긴 했지만, 다른 귀족들처럼 무게 잡는 행동은 보여 준 적이 없었다.
‘마수의 숲이라 긴장했나……. 좀 뭔가 다른 것 같은데.’
지금 용병들은 지셀의 말 한마디에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그가 보인 활약 덕분이다.
별거 없는 애송이로만 보이던 자가 순식간에 분위기를 압도하고 있으니 모두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정작 지셀은 언제 그런 진지한 모습을 보였냐는 듯, 이번에는 용병들의 치료를 도와주고 어깨를 툭툭 치며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었다.
‘참 갈수록 종잡을 수가 없네. 다중 인격이라도 된 건가?’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이 변해 버렸으니, 그를 오랫동안 보아 온 벨린다로서도 이제는 지셀이 어떤 사람인지 정의할 수가 없었다.
부상자들을 치료하며 잠시 휴식을 취한 일행은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이전과 조금 달라진 건 용병들이 처음처럼 건들거리지 않고 빠릿빠릿하게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저것들의 내피를 적당히 챙겨라.”
“네? 저걸 왜 가져갑니까?”
지셀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용병들이 머뭇거렸다.
몬스터의 살덩이 따위를 뭐 하러 챙겨 간다는 말인가?
“가져가서 방화복이나 소화용 물품을 만들 생각이다.”
지셀이 덧붙인 설명을 듣고 용병들이 감탄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하긴 열기도 잘 막고 불이 붙어도 금세 꺼졌으니.”
“잘만 사용하면 쓸 만하겠는데?”
용병들이 보기에도 불을 끄거나 막아 내는 데 확실한 효능이 있는 소재였다.
화재가 발생했을 때 열기를 차단하는 물건을 만들면 꽤 쓸모가 있을 것이다.
부지런히 내피를 벗겨 내는 용병들을 보며 지셀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제법 쓸 만하겠어.’
전생의 기록에 따르면 디루스 엔트의 가죽은 무려 4서클 화염 마법까지 견딜 수 있다고 한다.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엄청난 결과를 낼 수 있는 물건인 것이다.
지셀은 이것을 어디에 쓸지도 계획해 둔 상태였다.
“전부 챙길 필요는 없다. 다음에 다시 와서 가져갈 테니까.”
어차피 이곳에 출입하는 사람은 없으니 다음에 길을 정비할 때 들고 가도 괜찮을 것이다.
소재를 적당히 챙긴 용병들은 디루스 엔트들의 시체를 한곳에 몰아넣은 뒤 다시 길을 내는 작업을 진행했다.
첫날에는 그 이상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튿날부터는 시도 때도 없이 몬스터가 습격해 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자 용병들은 이 숲이 자신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지옥이라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젠장! 미쳤어! 여긴 미친 숲이야!”
“무슨 몬스터가 끝도 없이 튀어나와!”
“쉴 시간이 없잖아!”
용병들은 끝도 없이 튀어나오는 몬스터들에 질려 버렸다.
마수의 숲에 온다고 했을 때부터 몬스터와 싸울 각오는 했지만, 그건 그들이 생각하는 ‘상식적인’ 수준일 때의 이야기였다.
“이런 곳인 줄은 정말 몰랐다고…….”
한 용병이 중얼거리자 근처에 있던 용병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사는 몬스터는 숲 밖의 몬스터보다 훨씬 더 크고 강력했다.
바깥에서 용병 대여섯 명이 붙으면 잡을 수 있는 몬스터도 이곳에서는 몇 배가 되는 인원이 붙어야 처리할 수 있었다.
마수의 숲에 사는 몬스터들은 강할 뿐만 아니라, 생김새도 기괴해서 보는 사람을 질리게 했다.
사람을 잡아먹는 거대한 식인 식물쯤은 귀여워 보일 정도로 기상천외한 몬스터들이 즐비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습격에 끝이 없다는 점이었다.
“잠이라도 편하게 자고 싶어.”
사흘 동안 용병들은 제대로 잠조차 잘 수 없었다.
몬스터들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찾아왔기 때문이다.
“흐흐, 이게 초입이라고? 도대체 저 깊숙한 곳에는 뭐가 살고 있는 거지?”
한 용병이 자조적인 웃음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사흘이나 지났지만 실제로 이동한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았다.
길을 내는 작업도 오래 걸렸고, 몬스터들과의 전투가 끊이질 않아 시간을 계속 잡아먹었다.
고작 초입부도 이 지경인데 숲의 깊은 지역에는 얼마나 무시무시한 놈들이 살고 있을지 예상조차 되지 않았다.
용병들은 지금껏 마수의 숲을 개척하려는 사람이 없었던 이유를 이해했다.
이런 곳을 개척하려면 영지 수준이 아니라 국가에서 나서야 할 것이다.
“그래도 고용주가 날뛰는 덕분에 피해가 적은 편이야.”
“그러게. 무섭지도 않나 봐.”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용병들이 지치고 무서워도 버틸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지셀 때문이었다.
그는 공언한 대로 언제나 가장 앞에 서서 싸웠다.
벨린다와 길리언이 여러 번 말렸지만, 전혀 듣지 않았다.
가장 선두에 있으니 당연히 위험도도 가장 높다.
그래도 지셀은 몬스터가 나타나는 족족 뛰어나가 용병들의 피해를 최소화했다.
“어떨 때는 몬스터보다 고용주가 더 무서워. 싸울 때는 완전히 악귀 같다니까?”
“그래도 덕분에 목숨 건진 놈들이 한두 명이 아니잖아. 고용주 아니었으면 진작에 우리 다 죽었을 거다.”
시간이 지날수록 용병들은 진심으로 지셀에게 감화되기 시작했다.
“정말 살아서 돌아갈지도 모르겠군.”
“고용주만 잘 따라가면 될 거 같아.”
각자 생각은 달라도 지셀이 최선을 다해 싸운다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했다.
그건 용병들이 힘을 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크아아앙!
“으아아악!”
“살려 줘!”
디루스 엔트처럼 서식지가 기록되어 있는 몬스터들은 미리 대비해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셀이 언제나 모든 위험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 숲은 몬스터들 천지다.
서식지가 없이 떠돌아다니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옮겨 다니는 몬스터들도 존재했다.
그런 몬스터들은 일행의 정면이 아니라 옆이나 뒤에서도 갑자기 튀어나왔다.
“버텨라! 내가 가겠다!”
그럴 때면 지셀은 누구보다 빨리 그곳으로 달려가 용병들을 구해 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셀의 몸은 곳곳이 상처투성이로 변했다.
누구보다 앞서 싸우고 누구보다 몸을 사리지 않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도련님! 용병들에게 맡기라고요! 그만 좀 나서요! 미쳤나 봐! 왜 이래!”
벨린다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어떤 고용주도 이렇게 몸을 직접 굴리며 싸우지 않는다.
전쟁에서도 지휘관은 최대한 몸을 사린다.
무리를 이끄는 자가 무사해야 무리 전체도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셀은 무식할 정도로 과격하게 스스로를 혹사시켰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벨린다는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하아, 자기 몸이 아깝지도 않나?’
지셀의 실력은 충분히 보았다. 인정할 만한 실력이었다.
몬스터가 나타나면 상대하기에 가장 나은 방법을 찾아 지시하기도 한다.
판단력과 지휘력도 놀라운 수준이지만, 미친 듯이 싸우는 모습에 가려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벨린다의 걱정이 늘어 갈수록 용병들이 지셀에게 의지하는 마음은 더 커졌다.
“이번에도 고용주가 구해 줬어.”
“차라리 고용주 옆에 있는 게 더 안전하다니까.”
“무슨 귀족이 저래? 전생에 어디 돌격대 대장쯤 되었던 거 아닐까.”
“으하하, 그러네. 돌격대가 딱 잘 어울리네.”
규모가 큰 용병단에서는 가장 위험한 일을 맡는 돌격대를 따로 구성한다.
지금까지 지셀이 한 행동은 그런 돌격대를 이끄는 돌격대장과 다를 게 없었다.
실제로 지셀은 전생에 대부분 돌격대로서 임무를 수행했으니 용병들의 말도 틀리지는 않았다.
몬스터 사이에서 날뛰는 그를 볼 때마다 용병들은 묘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단지 경외감뿐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지셀에 대한 믿음이 생겨나고 있었다.
“고용주가 저렇게 하는 건 우리를 위해서라고.”
누군가가 흘린 말에 용병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용병은 가장 천한 취급을 받는 직업 중 하나다.
돈을 받고 목숨을 파는 비천한 자들이라는 인식이 뿌리 깊게 박혀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셀에게서는 용병들을 무시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그들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고, 용병보다 더 털털하고 호쾌한 모습을 보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점점 지셀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물론 모든 이가 그런 건 아니었다.
끊임없는 전투와 강력한 몬스터들 때문에 아예 전의를 상실한 자들도 있었다.
얍삽한 쥐처럼 생긴 용병, 마누스도 그런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