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이게 최선이다. (1)
“어흐, 무슨 아침부터 모이래.”
“고용주가 완전 애송이래. 페르디움 영지의 그 망나니 공자라나?”
동도 제대로 트지 않은 이른 아침부터 용병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지셀이 짐바르 용병 길드를 통해 모집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용병 길드 건물의 뒤쪽에 있는 널따란 공터에 모여, 고용주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애송이네. 대충 해도 되겠는데?”
“그래, 철없는 것이 공을 좀 세워 보겠다고 나서는 거 같은데 세상 무서운 줄 알게 해 주자고.”
“대충 싸우는 척하고 돈이나 받고 빠지는 게 어때?”
그들은 다들 지셀을 우습게 보고 적당히 일하는 척이나 할 생각이었다.
고용된 용병들이 모두 지셀을 아는 건 아니었지만, 몇몇 정도는 한심한 공자라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소문은 용병들 사이에 빠르게 퍼졌다.
“페르디움 영주는 자리를 자주 비운다며?”
“더 잘됐네. 애송이 놈이 용병들을 제대로 다룰 수나 있겠어?”
“사고나 치고 다니는 놈이라는데, 진짜 사고가 뭔지 전문가인 우리가 보여 줄까?”
용병들이 낄낄대며 떠들던 사이, 머리가 벗어지고 근육질 체구를 자랑하는 거한이 앞으로 나서서 크게 외쳤다.
“어이, 다들 들어 봐. 애송이 고용주를 좀 편하게 다루려면 대표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
대머리 거한의 이름은 고든.
근방에서 제법 힘 좀 쓰는 용병으로 유명한 자였다.
그는 언제나 쉬지 않고 운동하기에 ‘근육의 고든’이라 불렸다.
얼마나 운동에 강박 관념이 있냐면, 근손실이 온다며 술도 마시지 않고 눈물도 절대 흘리지 않는다.
오직 근육을 더 크고 단단하게 키우는 것에만 관심을 두는 남자였다.
고든이 보란 듯이 가슴 근육에 힘을 주며 말했다.
“고용주를 편하게 길들이려면 우리 의견이 통일되어야 한다고. 다들 따로 놀면 패가 갈리잖아. 내가 몰이꾼을 할 테니 힘을 좀 실어 주는 게 어때? 수고비는 일 끝나고 알아서들 적당히 챙겨 주고.”
몰이꾼은 대표로 나서서 고용주를 압박하는 자를 지칭하는 용병들의 은어다.
그 덕분에 일이 편해지면 다른 용병들이 조금씩 돈을 챙겨 주는 관례가 있었다.
고든의 말에 용병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표를 하나씩 던졌다.
“흠, ‘근육의 고든’이라면 나쁘지 않지.”
“난 찬성이야. 애송이라면 고든의 근육만 보고도 무서워서 벌벌 떠는 거 아니야?”
“돈도 조금 더 올려 받는 게 어때?”
“좋지! 애송이 고용주한테 세상 쓴맛도 좀 보여 주고!”
“와하하하, 그렇지. 우리가 세상에 대해 알려 주는 거니 수업료를 받아야지.”
용병들이 저들끼리 신나서 박수를 쳐 댔다.
몇몇 용병들은 이런 행태에 눈살을 찌푸리고 끼지 않았지만, 이미 대부분은 고든을 대표로 선출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소규모 용병단의 단장들도 자신들이 손해 보는 일은 아니라는 생각에 은근히 고든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고든은 사람들이 자신을 지지하자 자신감 넘치게 웃었다.
“이 정도 인원이면 고용주도 함부로 못 하겠지.”
모인 용병은 약 160여 명.
단체로 반항한다면 고용주로서는 꽤나 골치 아플 만한 인원이었다.
이런 경우 보통 고용주는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더 얹어 주거나 계약 조건을 완화한다.
예를 들면, 위험하다고 판단할 시 위약금을 물지 않고 빠질 수 있게 해 준다든가.
이런 일은 이 바닥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고용주가 만만할수록 정도가 심했다.
용병들도 신뢰도나 평판이 떨어지니 매번 막 나가지는 않고, 일반적으로는 적당히 신경전을 벌이는 정도였다.
“거, 다른 건 몰라도 계약 해지에 관련된 건 확실히 해 놓자고.”
“그래, 진짜로 위험하면 도망가야 하니까.”
“그런데 거기 사실 별거 아닌 거 아니야? 진짜 거기서 몬스터를 봤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냥 소문만 무성하잖아?”
마수의 숲이 위험하다고 소문이 났지만, 그 실체는 사실 아무도 모른다.
용병 중 일부는 그저 몬스터 사냥 정도로만 생각했고, 일부는 싸우다가 위험하면 도망갈 생각으로 모인 상태였다.
또 어떤 이들은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돈을 벌기 위해 찾아왔을 뿐이고.
용병들이 저들끼리 의기투합하고 있을 때, 말을 탄 두 사람의 형체가 새벽안개를 뚫고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오, 드디어 애송이 고용주가 나타났군. 역시 귀족이라고 느긋하게 다니는 건가. 따끔한 맛을 좀 보여 줘야겠어. 하하하.”
고든의 말에 용병들이 와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도 고든이 고용주를 어떻게 다룰지 슬슬 기대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형체 뒤로 말을 타지 않은 서른여 명의 형체가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본 고든이 휘파람을 불었다.
“역시 귀족이라 그런가, 병사들을 꽤 많이 데리고 다니는데?”
“그래 봤자 우리가 더 많잖아.”
“크큭, 빙 둘러싸서 겁을 좀 줘 볼까?”
용병들은 고든의 말을 거들며 슬금슬금 앞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기선을 제압할 생각이었다.
고든이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자자, 모두 자제하라고. 처음부터 너무 겁을 주면 쓰나. 일단 내가 먼저…….”
자신 있게 떠들어 대던 고든은, 안개를 헤치고 나타난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입을 닫았다.
눈을 비비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다시 자세히 살폈지만,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그의 입에서 경악 어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과, 광견단?”
모든 용병이 딱딱하게 굳어 제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타각타각.
여유롭게 말을 타고 지척까지 다가온 지셀이 고든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네놈이 몰이꾼인가?”
“네? 네?”
“이름은?”
“고든…….”
“역시 단순한 놈들이구나.”
지셀은 피식 웃으며 고든을 지나쳤다.
용병들이 서 있는 위치만 봐도 상황이 딱 보였다. 전생에 자신도 많이 했던 짓이니 모를 리가 없었다.
막상 당하는 처지에서 보니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짓이지만, 그래도 옛날 생각도 나고 그리운 마음이 들어서 화는 나지 않았다.
지셀에 이어 카오르가 고든을 서늘한 눈으로 노려보며 지나쳤다.
고든이 식은땀을 흘리며 쩔쩔맬 때, 제 단장을 뒤따르던 켈베로스의 용병 하나가 말했다.
“고든, 오랜만에 보네. 눈 안 깔아?”
고든은 결국 고개를 푹 숙였다.
실력만 놓고 보면 켈베로스 단원 하나 정도는 이길 자신이 있다.
하지만 광견단은 워낙 악바리처럼 싸우는 놈들이라 건드렸다가는 괜히 벌집을 들쑤신 꼴이 될 터였다.
다른 용병들도 켈베로스 용병단이 나타나자 눈을 피하며 저들끼리 속삭였다.
“광견단이 왜 고용주랑 함께 있지?”
“몰라, 고든은 왜 가만히 있는 건데?”
“고든이라고 별수 있겠냐. 저 미친개들이 덤비면 골치 아파.”
합심해서 지셀을 벗겨 먹으려 했던 용병들은 켈베로스 용병단을 보고는 슬슬 눈치를 살폈다.
왜 저들이 고용주를 따라오는지 상황을 파악한 뒤에 일을 벌여도 늦지 않았다.
고든 또한 찍소리도 못 한 채 일단은 자리로 물러났다.
지셀이 공터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앉자, 켈베로스 용병단이 그 뒤에 호위를 서듯 시립했다.
그것만으로도 보기 드문 일이었는데, 켈베로스 단원들이 보이는 분위기도 뭔가 이상했다.
“광견단 놈들…… 왜 저렇게 눈치를 보고 있지?”
“설마 고용주한테 쫄아 있는 거야?”
아닌 게 아니라, 켈베로스 용병단 모두가 지셀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특히나 단장인 카오르는 지셀이 손짓을 한번 할 때마다 움찔거리는 게 뻔히 보일 정도였다.
“보니까 광견단이 고용주한테 납작 엎드린 거 같은데…….”
“고용주가 그렇게 권력이 엄청난 건가? 페르디움이 그 정도였어?”
“어쨌든 광견단이 고용주 쪽에 붙은 이상 건드릴 수는 없어. 저놈들이랑 싸우면 피곤하다고.”
용병들은 그 모습을 보고 지셀을 벗겨 먹긴 글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괜히 수작 부리다가 시비가 붙으면…… 저쪽도 멀쩡하지는 않겠지만, 자신들 쪽이 더 손해가 클 것이 뻔했다.
지셀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는 듯, 용병 길드 사무장이 건물에서 나와 계약서를 용병들에게 나눠 주었다.
“자, 이분이 페르디움 대공자님이시다. 다들 계약서 잘 확인하고 따라가라.”
용병들은 섣불리 계약을 진행하지 못했다.
켈베로스 용병단의 악명이 워낙 높다 보니 그들과 함께하기가 왠지 껄끄러웠던 것이다.
용병들이 서로 눈치만 보고 서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든이 콧김을 뿜으며 제일 먼저 나섰다.
그는 자신이 광견단 따위의 눈치를 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고든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는 지셀에게 꾸벅 인사하고 계약서에 다짜고짜 지장을 찍었다.
지셀은 고개를 기울이며 고든에게 물었다.
“내용은 안 읽어 봐도 되나?”
그러자 옆에 있던 사무장이 낄낄 웃으며 대신 답했다.
“저놈은 글을 모릅니다. 뇌까지 근육이에요. 그냥 무슨 일이고 얼마 준다고 하면 그대로 믿는 놈입니다.”
“글공부를 하면 근손실이 온다고! 하나를 더 하면 하나를 잃는 게 세상의 이치인 거 몰라?”
사무장은 씩씩거리며 자신을 노려보는 고든을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염병, 공부하는데 잃긴 뭘 잃어? 저거 공부하기 싫어서 우기는 거 봐라.”
“아, 몰라! 아무튼 나는 그렇다고!”
글을 모르기에 고든은 사기도 많이 당했었다.
항상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운동하고 휴식을 취하느라 바빠 시간이 정말 없었다.
지셀은 피식 웃으며 고든을 바라보았다.
그도 전생에 글을 제대로 모르는 무식한 수하들을 많이 데리고 있었다.
고든의 모습이 왠지 남 같지 않아 한 마디 건넸다.
“일이 끝나고 기회가 되면 가르쳐 줄 사람을 붙여 주지.”
“감사합니다!”
고든이 힘차게 외치고 자리로 돌아가자 눈치 보던 용병들이 하나둘씩 나와 계약을 진행했다.
어차피 몬스터와 싸우는 것도 알고 온 것이다.
켈베로스 용병단이라면 실력은 있는 놈들이니 고용주가 제대로 통제만 하면 오히려 더 안전할 터였다.
그저 고용주를 마음대로 벗겨 먹지 못하게 된 게 조금 아쉬운 정도였다.
켈베로스 용병단과 사이가 껄끄러운 소규모 용병단 하나가 빠지고 계약이 마무리되었다.
사무장이 계약서들을 정리해 지셀에게 건네주었다.
“총 148명입니다.”
켈베로스 용병단까지 합하면 180여 명에 이르는 수.
영지전에서나 고용할 법한 수였기에 용병들은 은근히 마음을 놓았다.
같은 편은 많을수록 든든한 법이니까.
모든 계약서를 확인한 지셀은 용병들을 둘러보았다.
“페르디움의 대공자 지셀이다. 사무장에게 들었다시피 마수의 숲을 개척할 생각이다. 앞으로 할 일은 영지에 가서 하나씩 설명해 주겠다. 잘 부탁한다.”
그는 바로 용병들에게 출발 준비를 시켰다.
말이 없는 용병들에게는 말을 사서 빌려주었고, 노숙에 필요한 물품들도 잔뜩 사들였다.
준비를 마치자마자 그들은 페르디움 영지를 향해 출발했다.
아침부터 험악한 용병 무리를 본 사람들은 기겁하며 피하기 바빴다.
‘옛날 생각이 나는군.’
시끄럽게 떠들며 따라오는 용병들을 보며 지셀은 잠시 옛 추억에 빠졌다.
그때도 이렇게 용병들을 이끌고 대륙을 떠돌아다녔었다.
‘다시 만날 수 있겠지.’
과거로 돌아왔으니 예전의 수하들도 각자의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기회가 된다면 그들을 다시 찾는 것도 지셀의 목표 중 하나였다.
* * *
일행은 곧 페르디움 영지 경계에 도착했지만, 용병들은 영지 인근에 머물러야 했다.
허락받지 않은 무장 병력을 이끌고 영지 안으로 들어갔다가는 가신들과 충돌이 날 테니 어쩔 수 없었다.
용병들을 대기시킨 뒤 지셀은 길리언과 함께 바로 벨린다를 찾아갔다.
“벨린다, 준비는 어떻게 됐지?”
“생각보다 늦으셨네요. 일단 말씀하신 건 다 준비했어요.”
“역시 벨린다야.”
벨린다가 우쭐하며 좋아하다가 이내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레이폴드에서 받아 온 돈을 벌써 절반 넘게 썼어요. 앞으로 병력 유지 비용이나 추가로 들어갈 자재비 따위를 생각하면 남은 돈으로는 모자랄 거 같은데, 괜찮겠어요?”
“초기 자금이 많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어. 빨리 시작해야겠군.”
2만 골드는 한 사람이 평생을 편하게 살 수 있을 정도로 큰돈이지만, 영지 단위로 큰 사업을 벌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돈이다.
지셀도 아멜리아에게서 뜯어낸 자금이 대부분 초반 준비 작업에 소모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최대한 빨리 수익을 내야 사업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일단 인부들에게 전해 줘. 내일부터 바로 공사를 시작할 거야.”
“도련님, 지금이라도 멈춰야 해요. 남은 돈은 차라리 다른 곳에 쓰세요. 이대로는 정말 아무것도 못 해요. 공사를 시작하면 돈이 줄줄 나갈 거라고요.”
“아냐, 이 일은 절대 멈추면 안 돼. 우리 영지에 꼭 필요한 일이거든.”
벨린다가 보기에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남은 돈으로 마수의 숲을 개척하기는 불가능했다.
지셀이 고집을 꺾지 않을 듯 보이자 결국 그녀는 역정을 냈다.
“사람과 물자들을 준비하는 데만 벌써 1만 골드 이상을 썼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개척은 불가능하다고요!”
벨린다의 말에 지셀은 기묘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우리는 개척을 할 게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