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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26화 (26/269)

26화 똑같은 놈들끼리 만나겠네. (3)

단검이 지셀의 눈을 노리며 날아왔다.

그는 고개만 슬쩍 움직여 가볍게 피해 낸 뒤, 카오르의 옆구리에 단검을 찔러 넣었다.

“큭, 이, 이 새끼가…….”

카오르가 인상을 쓰며 지셀을 노려보았다.

‘우연이겠지!’

그는 곧바로 팔을 뻗으며 지셀의 관자놀이를 찌르려 했다.

하지만 지셀은 가볍게 고개를 젖히며 피한 뒤, 순식간에 손가락을 돌려 단검을 역수로 쥐었다.

“최선을 다해야 할 거다.”

지셀은 그 말과 동시에 그대로 카오르의 팔을 그었다.

“크윽!”

첫 번째 공격도 우연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고 카오르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쉼 없이 공격을 시도했지만, 공격하는 족족 지셀에게 막히고 오히려 상처만 늘어 갔다.

“이 새끼!”

카오르가 분노에 찬 외침을 내뱉으며 함께 묶인 쪽 손을 갑자기 휙 잡아당겼다.

지셀의 자세를 흐트러트린 뒤 목을 베려는 속셈이었다.

그 순간, 지셀의 몸이 기묘하게 흔들리더니 공격을 가볍게 피해 내었다.

상대의 힘까지 이용해 움직이며 균형을 잡은 것이다.

그야말로 극에 이른 기술.

지셀은 피하면서도 카오르가 보인 빈틈을 놓치지 않고 단검을 그어 내렸다.

스각!

“크으윽!”

카오르의 가슴에 붉은 균열이 하나 더 늘어났다.

두 사람의 대결을 구경하던 용병들은 입을 쩍 벌리고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지셀의 움직임이 보통이 아니란 걸 알아본 것이다.

직접 마주하고 있는 카오르와 달리 떨어져서 보기에 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마나도 안 쓰고 저렇게 움직이다니.”

“아직 젊어 보이는데 도대체 저 기술들은 뭐야?”

“기사들도 저렇게는 못 할걸?”

용병들이 놀라서 떠들었지만, 길리언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카오르를 공격하겠다고 검을 쥐었던 손은 이미 검 자루에서 떨어진 상태였다.

지셀의 움직임에 집중하느라 자신도 모르게 힘을 뺀 것이다.

‘대단한 기술이다! 어떻게 저 나이에 저렇게 움직일 수 있지?’

지셀이 싸우는 걸 처음 본 길리언은 큰 충격에 빠졌다.

천재라서?

아니, 아니다.

자신 역시 수많은 전장을 경험했기에 알 수 있었다.

번뜩이는 깨달음이 천재의 영역이라면, 저 침착함과 노련함은 수만 번 단련하고 경험해야 쌓이는, 노력과 연륜의 영역이었다.

그렇기에 길리언은 더 혼란스러웠다.

지셀의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세월의 굳건함과 거대함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길리언이 고심하는 사이에도 대결은 계속 이어졌다.

피륙이 뚫리는 소리와 고통 섞인 신음이 얽히고설키듯 이어졌다.

푹! 푸욱! 푹!

“크어억!”

카오르의 공격은 계속 실패했고 지셀의 단검은 매번 사정없이 그의 몸을 파고들었다.

“어, 어째서! 네놈이 이 정도로!”

카오르는 단 한 번도 지셀에게 상처를 내지 못했다.

단검을 들고 있는 팔은 이미 상처로 가득했고, 고통 때문에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했다.

애송이처럼 보이던 귀족에게 이런 기술이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그는 자기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

용병들 사이에서도 손꼽힐 만큼 강한 데다, 담력이 크고 독기가 있어 기사들도 자신에게는 한 수 접을 정도였다.

그런데 눈앞의 애송이 귀족에게는 그 실력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크으윽!”

카오르는 이미 상처투성이가 된 팔을 다시 들어 올려 지셀의 급소를 노렸다.

상대방의 급소를 노려 일격에 죽이는 건 그의 장기였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지셀의 급소에 닿을 수가 없었다.

카앙!

지셀은 카오르가 휘두른 단검을 가볍게 막아 냈다.

“무조건 급소만 노리는 게 능사는 아니다. 그 정도는 짐승도 할 수 있어.”

지셀은 마치 카오르를 가르치듯 말하며 다시 단검을 사방에 찔러 넣었다.

옆구리, 어깨, 가슴, 배 등 절묘하게 급소만 피하는 공격이었다.

“크흐…….”

카오르는 결국 피로 범벅이 된 채, 팔을 늘어뜨리고 말았다.

하지만 여전히 이를 악물고 지셀을 노려보는 독기 어린 눈빛은 그대로였다.

죽기 직전임에도 절대 항복하지 않는 그 모습에 지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성이 대단하군. 이 상황이 될 때까지 마나를 사용하지 않은 건 칭찬해 주마.”

“웃기지 마라. 아직 안 끝났다. 반드시 죽여버리겠다.”

“그 몸으로 되겠어? 여기서 더 찔리면 죽어.”

지셀은 이죽거리더니 단검을 뒤로 휙 던졌다.

“……?”

카오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승부에서 다 이겨 놓고 왜 단검을 던진단 말인가?

설마 이미 승부가 났다고 멋대로 판단하고 끝내려는 것인가?

“이놈이……!”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이 내기는 한쪽이 항복하거나 죽어야 끝나는 내기다.

카오르는 분노에 차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가 지금 날 우습게 보는 거냐? 누구 멋대로 내기를 끝내! 당장 다시 단검을 들어! 아직 안 끝났다! 죽여 버리겠다!”

발작하는 카오르를 보며 지셀은 귀를 한번 판 뒤 말했다.

“누가 끝났대?”

“뭐?”

“나도 아직 끝낼 생각 없는데?”

“그러면 왜 단검을 집어던지는…….”

카오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셀이 주먹을 들고 웃었다.

“이제부터는 교육받을 시간이다. 그 성질을 죽이는 법을 좀 배워야겠어.”

“뭐?”

갑작스러운 말에 카오르가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얼떨떨하게 반문했다. 그때, 그의 관자놀이로 지셀의 주먹이 날아왔다.

퍼억!

“컥!”

불시에 얻어맞은 카오르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하지만 그는 그 와중에도 단검을 휘두르며 지셀을 공격했다.

놀라울 정도로 빠른 반응 속도였다.

지셀은 내심 감탄하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감탄과 교육은 별개 문제. 그는 단검을 쥔 카오르의 손목을 붙잡아 반대로 틀어 버렸다.

으드득!

“크윽!”

뼈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리며 카오르가 단검을 떨어뜨렸다. 지셀은 그걸 발로 툭 쳐내 다시 공중에 띄웠다.

그는 단검을 낚아챈 뒤, 바로 서로의 손을 묶고 있는 줄을 끊었다.

투둑!

지셀과 묶인 손을 힘주어 당기며 버티던 카오르는 갑자기 구속이 풀리자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단 몇 걸음이었으나, 원 밖으로 나가기엔 충분했다.

‘앗차!’

규칙상, 죽거나 항복하지 않아도 패배하는 경우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원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카오르는 곧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껏 살면서 죽음을 두려워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퉤.”

카오르는 피가 섞인 침을 땅에 뱉고는 지셀을 노려보며 말했다.

“나도 모르게 원 밖으로 나가고 말았군. 운 좋은 줄 알아라, 애송이. 안타깝지만 이쯤에서 승부를 내도록 하지. 내가 진 걸로 쳐 주마. 살다 보니 이런 날이 다 있군.”

자신은 죽지도 않았고 항복하지도 않았다.

저놈이 갑자기 줄을 끊어서 실수로 원 밖으로 나갔을 뿐이다.

실력이 모자라서 진 게 아니라 규칙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적당히 체면을 살리면서 내기를 끝낼 수 있게 되었다.

카오르로서는 최선의 결말이었다.

주변에서 구경하는 용병들이 짠한 표정을 지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솔직히 저 새끼 너무 세다고.’

카오르는 머리를 쓸어올리며 오만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면 네가 원하는 대로 의뢰에 대해 자세한 얘기를…….”

“아직 안 끝났다고.”

지셀이 카오르의 말을 끊으며 주먹을 어깨 뒤로 당겼다.

파앙!

공기가 터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지셀의 주먹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깜짝 놀란 카오르가 팔을 교차해 막았지만 소용없었다.

콰앙!

“크으으윽!”

카오르는 단 한 방을 버티지 못하고 뒤로 날아갔다.

아프다. 단검으로 찔리고 베일 때보다 훨씬 더 아팠다. 뼈가 부러진 듯 팔이 시큰거렸다.

바닥을 구른 카오르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하지만 자세를 제대로 취하기도 전에 다시 지셀의 주먹이 날아왔다.

퍼억!

“잠깐! 규칙상 원 밖으로 나가면…….”

“규칙은 무슨 규칙. 전쟁터에서도 규칙 따지면서 싸울래?”

“아니, 네가 이걸로 대결하자며!”

“나를 규칙 따위로 속박하려고 하지 마라.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패고 싶으면 패는 거야.”

지셀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퍼억!

‘아, 이거 그냥 미친 새끼네.’

동네에서 소문난 미친개가 미친놈한테 단단히 걸리고 말았다.

“그래, 한번 끝까지 가 보자! 기필코 죽여 버릴 테다!”

카오르는 이를 악물고 반격했다.

스륵.

하지만 그 공격은 상대에게 닿지 않았다. 지셀의 몸이 흐릿해질 때마다 카오르의 주먹은 허공을 갈랐다.

마치 유령을 상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인정할 수 없다!”

카오르는 독기 어린 눈으로 지셀을 노려보았다.

운 좋게 괜찮은 마나 연공법을 얻고,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덕분에 살면서 무서울 게 없었다.

그런데 이런 애송이 같은 귀족한테 손도 못 쓰고 얻어터질 줄이야.

“으아아아!”

고함을 지르며 달려드는 카오르에게 지셀은 가차 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미친개한테는 매가 약이지.”

퍼억!

“크윽!”

퍼억!

“어억!”

타격이 이어질수록 카오르는 점차 정신이 몽롱해졌다.

이미 내기와 증명에 대한 건 카오르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왜지? 왜 난 여기서 맞고 있는 걸까?’

퍼억!

‘지금 뭐 하고 있었더라?’

피를 많이 흘린 상태로 구타까지 이어지니 아무리 튼튼한 용병이라도 버티기 어려웠다.

약에 취한 것처럼 눈빛이 흐릿해져서는 비틀거리는 카오르를 보며 용병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사람을 저렇게 팰 수도 있구나…….”

“저러다 진짜 죽겠어. 어떻게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내기는 이미 끝난 거나 마찬가지잖아.”

“차라리 그냥 아까 죽이지……. 역시 귀족은 건드리는 게 아니야.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그리고 이런 반응이야말로 지셀이 노리는 바였다.

확실하게 분위기를 휘어잡지 않으면 언제든지 주인을 잡아먹으려고 달려들 놈들이었으니까.

퍼억! 퍼억! 퍼억!

그 사이에도 지셀의 주먹질은 멈추지 않았다.

카오르의 몽롱한 시야에 어릴 적 돌아가신 할머니의 얼굴이 비쳤다.

‘아, 할머니! 언제 왔어? 나 할머니가 해 줬던 오믈렛이 먹고 싶어!’

아련한 추억에 젖은 카오르의 눈빛을 본 지셀이 주먹질을 멈추었다.

정말 절묘할 정도의 타이밍이었다.

“흐음, 여기까지인가?”

쿠웅!

지셀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마자 카오르는 바닥에 쓰러져 기절하고 말았다.

“단장!”

용병들이 다가와 카오르를 살피더니 고개를 저었다.

“끝났어. 숨이 너무 가늘어. 곧 죽을 거 같아.”

“단장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줄이야.”

용병들은 지셀의 눈치를 보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저 성질 더러운 카오르도 무릎 꿇을 정도로 거대한 폭력 앞에서 뻣뻣이 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쓰러진 카오르를 가만히 지켜보던 지셀이 입을 열었다.

“길리언, 불러 둔 사람을 데려와.”

“아, 알겠습니다.”

길리언은 지셀이 보여 준 실력에 놀랄 틈도 없이 바로 자리에서 사라졌다.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는 사제 한 명을 등에 업고 나타났다.

이미 지셀이 여기 오기 전, 많은 돈을 주고 가까운 여관에 대기시켜 뒀던 것이다.

‘주군께서는 다 계획이 있으시구나.’

길리언은 처음에 왜 굳이 사제까지 불러 놓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셀은 이런 상황까지 염두에 둔 모양이었다. 아니, 이렇게 만들려고 작정했을 것이다.

보면 볼수록 자신의 주군은 모든 걸 예상하고 준비하는 것만 같았다.

“바로 치료를 시작하시오.”

지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제는 헐레벌떡 카오르에게 다가가 신성력을 쏟아부었다.

상처는 생각보다 빠르게 아물었다. 상처가 많고 피를 많이 흘렸지만 절묘하게 급소와 장기는 다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카오르의 상처가 나아가는 것을 보며 용병들이 감탄을 내뱉었다.

그들도 실전 경험이 많기에 지셀이 무슨 의도로 어떻게 공격했는지 금세 알아본 것이다.

“그렇게 찔렀는데 급소는 멀쩡하다고?”

“도대체 검술이 얼마나 뛰어난 거야?”

용병들은 연신 감탄하며 카오르가 회복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치료가 끝나고 잠시 시간이 지나자 카오르가 천천히 눈을 뜨고 중얼거렸다.

“……할머니?”

“할머니는 무슨…… 정신 안 차려?”

지셀의 목소리에 카오르가 번쩍 고개를 들고 바닥을 기듯이 뒤로 물러났다.

“내가…… 살아 있는 건가? 분명 돌아가신 할머니를 만났는데!”

“나한테 맞고 나서 그리운 사람을 만났다는 놈들이 많긴 하지. 어쨌든 계약서는 오늘 바로 썼으면 좋겠는데. 내가 좀 바빠서 말이야.”

싸울 때와 달리 호쾌한 미소를 짓는 지셀을 올려다보던 카오르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는 머리를 몇 번 긁더니 땅에 침을 탁 뱉고는 말했다.

“지금 바로 써…… 시죠.”

이제는 따지거나 개길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손 쓰는 걸 보면 이건 무슨 귀족이 아니라 악마라 해도 믿을 정도였다.

내기에도 졌으니 결과에 따라야 했다.

순순히 따르는 카오르의 모습에 지셀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실망하지 않을 거야.”

지셀이 켈베로스 용병단, 흔히 미친개라 불리는 자들의 목줄을 쥐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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