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똑같은 놈들끼리 만나겠네. (2)
길리언의 공격에 다리가 부러진 용병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러자 구경하던 용병 다섯 명이 천천히 일어나 살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 새끼들이 귀족이라고 겁을 상실했구나.”
“귀족이면 우리가 무서워할 것 같아?”
“우리가 누군지 소문을 못 들어 본 모양이군.”
용병들은 각자 무기를 꺼내 들고 두 사람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미친개라 불리는 이유.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상대가 귀족이라도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반골 기질이 가득한 놈들만 뭉쳐 있는 곳이 켈베로스 용병단이었다.
그러니 제대로 통제가 될 리 없고, 고용주와 툭하면 사이가 틀어지니 의뢰 성공률도 낮을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막 나가는 놈들이 맞네.”
지셀의 얼굴에 잔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마수의 숲에 투입하기에 너무나도 안성맞춤인 놈들이었다.
이성이 없는 몬스터들을 상대하려면 저런 거친 자들이 필요했다.
지셀은 길리언을 보며 말했다.
“죽이지는 말고.”
“알겠습니다.”
길리언이 무기를 든 ‘미친개’ 다섯 명과 맞붙었다.
준기사급 실력자인 데다 인원이 많다고 해도 길리언의 상대가 될 순 없었다.
그들이 순식간에 팔과 다리가 꺾여 쓰러지자 누워 있던 용병들이 모두 일어났다.
천막에서 자고 있던 자들까지 무기를 들고 기어 나와 두 사람을 포위했다.
“이대로 몸 성히 돌아갈 생각은 말아라.”
“우리를 건드렸으니 각오는 되어 있겠지?”
“애송이가 귀족이라고 겁이 너무 없군.”
길리언의 실력이 만만치 않다는 걸 알게 되자 용병들은 모두 눈빛이 달라졌다.
손쉬운 사냥감을 가지고 노는 느낌이 아니라, 신중하게 맹수를 상대하는 듯한 모습으로 변한 것이다.
지셀은 그 변화를 보고 흡족하다는 듯 웃었다.
“이런 모습들도 있다니 의외네?”
제멋대로인 거 같아도 위기가 닥치면 나름대로 협력해서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확실히 소문처럼 꼴통들이긴 하지만 전투에는 꽤 쓸 만해 보였다.
“하긴 그러니까 사고를 몇 번이나 치고도 아직 용병단이 유지되는 거겠지. 그만 덤비고 너희 단장이나 불러와라.”
“뭐?”
“너희를 고용할 건데 모두 병신으로 만들면 써먹을 수가 없잖아?”
“이 미친 새끼가!”
켈베로스 용병단의 용병들은 황당하다 못해 어처구니가 없었다.
제법 괜찮은 호위 하나 달고 있다고 웬 애송이 귀족 하나가 오만하게 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여기서 토막 내 버리자고.”
“살아 돌아갈 생각은 말아라.”
“우리가 괜히 외곽에서 살고 있는 게 아니야. 여기서 뒤지면 시체도 못 찾아.”
잔인한 눈빛을 보이며 서서히 두 사람을 포위하는 용병들.
길리언은 천천히 허리에 찬 검을 뽑았다.
‘이번에는 공자님이 잘못 판단했다. 차라리 다른 용병단을 찾는 게 낫겠군.’
길리언이 보기에는 이들을 정상적으로 고용할 방법은 없었다.
그는 켈베로스 용병단의 용병들을 모두 죽일 생각이었다.
미친개 중 하나가 말한 대로, 이곳은 어차피 외곽이고 지나가는 사람도 없다.
정말 누가 죽어도 상관없는 상황이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 용병 무리 너머에 있는 천막에서 한 젊은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날 왜 찾지?”
그가 나타나자 살기등등하던 용병들도 조금은 진정한 듯,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타오르는 듯한 붉은색 머리카락이었다.
반항기 가득한 눈빛은,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도리어 물어뜯길 수도 있다는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지셀은 사내를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이 단장인가?”
“그래, 내가 켈베로스 용병단장 카오르다.”
“의뢰를 하러 왔다.”
“의뢰를 하겠다는 놈이 감히 내 부하들을 저렇게 만들어?”
카오르가 으르렁거리자 지셀은 그를 노려보았다.
“길들이기가 실패하니 불쾌한가? 장난은 적당히 치는 게 좋아. 그러다가 상대 잘못 만나면 다 죽는다.”
스산한 눈빛을 받고 카오르가 순간 멈칫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험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귀족이라고 겁먹을 거 같아? 이 자리에서 널 죽이고 다른 나라로 뜨면 그만이다.”
“패기는 마음에 드는군.”
지셀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누구 덕분에 꽤 오래 지체되어서 말이야. 이 이상 실랑이하고 싶지 않으니 용건부터 말하지. 마수의 숲을 개척하는 데 너희들을 쓰고 싶다.”
카오르는 잠깐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되물었다.
“마수의 숲? 페르디움 영지에 붙어 있는 그 숲 말하는 건가?”
“그래, 그곳을 개척할 생각이다.”
“페르디움 영주가 사람을 구하는 건가?”
“아니, 내가 진행하는 사업이야.”
“네가 누군데?”
“페르디움의 대공자, 지셀이다.”
카오르는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잠시 당황했다가 이내 크게 웃기 시작했다.
“으하하하, 그 망나니 공자? 너 같은 애송이가 마수의 숲을 개척하겠다고? 으하하하!”
한참을 웃던 카오르는 지셀에게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꺼져라. 너 같은 애송이 밑에서 그런 위험한 일을 할 생각은 없다. 차라리 영지전에 참여하고 말지.”
켈베로스 용병단은 다른 용병단에 비해 위험한 의뢰도 잘 받는 편이지만, 그것도 고용주의 역량에 따라 달라진다.
애송이의 뜻대로 움직여야 한다면 그만큼 위험도가 높아지니 거절하는 것이다.
카오르의 대답에 지셀은 피식 웃었다.
“생각보다 겁이 많군.”
“뭐?”
“귀족은 안 무서운데 숲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몬스터는 겁나나 보지?”
“이 새끼가 어디서 주둥아리를…….”
두 사람이 마주 노려보자 분위기가 다시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길리언은 검을 뽑을 준비를 했고 다른 용병들도 무기를 고쳐 쥐고 언제든 공격할 자세를 취했다.
한참 입술을 씰룩거리던 카오르가 결국 몸을 돌리며 한마디 내던졌다.
“너 같은 애송이는 죽일 가치도 없지. 그냥 보내 줄 테니 적당히 치료비나 내놓고 꺼져라.”
카오르는 지셀을 그냥 무시하고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천지 분간도 못 하고 설치는 귀족 애송이는 아예 상대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때 지셀이 카오르의 등을 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켈베로스 용병단의 단장에게 ‘모리아나의 인정’을 요청한다.”
주위에 있던 용병들이 그 말을 듣고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뭐, 뭣?”
“저 귀족 새끼가 그게 뭔지나 알고 말하는 거야?”
카오르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지셀을 노려보았다.
용병들만 얼이 빠진 게 아니었다. 길리언마저 당황해 크게 외쳤다.
“공자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셀이 요청한 것은, 예전부터 용병들에게 내려오던 내기 방법이었다.
룰은 간단하다.
작은 원 안에서, 서로의 한쪽 팔을 함께 묶은 채 단검 하나만 가지고 싸운다.
마나를 사용할 수 없으며, 원의 바깥으로 나가도 패배다.
룰은 오직 두 가지뿐인 간단한 내기이지만, 노련한 용병들도 이 내기를 기피하곤 했다.
공간이 한정되고 움직임이 제한되니 제대로 피하기가 힘들다. 그러니 단검에 몇 번만 찔려도 죽기 십상이었다.
실제로 이 룰 때문에 내기에서 이기고도 죽어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카오르는 지셀을 노려보며 눈을 씰룩거렸다.
“이 애송이 귀족 놈아. 그게 뭔지나 알고 요청하는 거냐?”
“잘 알고 있지. 내가 이기면 날 따라라.”
이 방식은 보통 용병들끼리 목숨을 건 내기를 할 때 사용한다.
어지간히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이 방식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일단 요청을 받으면 거절할 수 없었다.
거부한다면 상대보다 약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만약 단장 정도 되는 인물이 대결을 피하면 부하들의 신뢰를 잃고 조직도 와해되기 마련이었다.
카오르 또한 전 단장에게서 이 방식으로 자리를 빼앗았었다.
‘재미있겠다!’
황당해하던 것도 잠시, 용병들이 눈을 반짝이며 카오르를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면 제법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아닌가. 애송이 귀족과 단장과의 싸움이라니.
정상적인 용병들이라면 단장을 말리거나, 지셀을 비웃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놈들이라면 이들이 미친개라 불리지도 않았을 터였다.
용병들의 반응에 카오르는 이를 갈았다.
“넌 용병이 아니다. 그런데 감히 용병의 방식을 내밀어? 애송이 귀족 주제에 내 자리라도 뺏고 싶은가 보지?”
“이런 허접한 용병단 자리는 관심 없는데. 내가 애송이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려면 용병의 방식으로 보여 주는 게 가장 좋겠지. 안 그래?”
카오르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애송이의 요청을 거절한다면 자신의 권위는 추락하게 된다.
가뜩이나 제정신이 아닌 놈들뿐인데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잡아먹히게 될 것이다.
“크큭, 그래. 애송이 귀족 나리가 용병의 방식으로 인정받고 싶다는데 더 따질 필요는 없겠지. 죽어도 후회 안 하겠지?”
“물론. 대신 내가 이기면 너희는 의뢰를 받고 나를 따라라.”
“좋다. 약속하지. 네 호위와 내 수하들이 이 대결의 공증인이다.”
“동의하겠다.”
카오르가 승낙하고 용병들이 대결을 준비하려고 할 때, 길리언이 지셀의 앞을 막으며 크게 외쳤다.
“안 됩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 겁니까!”
길리언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벨린다의 마음이 이해되었다. 그의 젊은 주군은 끝도 없이 위험을 자초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길리언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수의 숲에 들어가겠다는 거야, 젊어서 패기가 넘치니 그럴 수 있다 치자.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담보 삼아 위험한 내기를 하다니,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선 일이었다.
그래도 평생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다. 이대로 이런 위험한 놀이에 말려들어 죽게 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제가 하겠습니다! 공자님은 뒤로 빠져 계십시오!”
길리언도 용병 생활을 오래 했기에 이 내기가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다.
뛰어난 실력자인 그도 이 짓은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니 순수한 힘과 기술로만 싸워야 하는 내기다.
실력 차이가 크다면 모르겠지만, 상대가 어느 정도 실력이 있다면 자신도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셀은 길리언의 격한 반응에도 여유롭게 답했다.
“괜찮아. 내가 할게. 믿어 봐.”
“안 됩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길리언은 강경했다. 지셀은 진중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았다.
“길리언, 나에겐 꼭 필요한 일이야. 지금은 내가 미덥지 않겠지만 그래도 믿어 줘.”
길리언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저 눈빛은 자극을 원하는 것도, 권태에 찌든 것도 아니었다.
신념을 품은 자만이 보일 수 있는 눈빛이었다.
길리언은 그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주군이 위험을 겪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의 눈은 날카로운 살기로 가득 찼다.
‘공자님 몸에 칼 하나라도 들어간다면 바로 목을 날리리라.’
길리언은 검을 잡고 마나를 모은 뒤 온 정신을 집중했다.
만약 지셀이 한 번이라도 찔릴 거 같으면 바로 카오르의 머리를 쪼개고 이곳에 있는 모든 자를 없애 버릴 생각이었다.
그런 길리언의 각오를 아는지 모르는지, 지셀은 카오르와 손을 묶고 작은 원 안에 들어갔다.
카오르는 번들거리는 눈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신파극은 끝났나? 도망갈 기회는 이제 없다. 감히 귀족 주제에 용병의 방식을 택한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깨닫게 해 주마.”
카오르는 정말로 지셀을 죽일 생각이었다.
귀족이 용병의 대결 방식을 택한 것은 엄청난 오만이었다. 이것은 자신을 무시한 행동이다. 그런 자를 용서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대결 준비가 끝나자 카오르는 지셀을 노려보며 말했다.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서 겁도 없이 덤볐나 본데…… 난 이걸 다섯 번이나 해 봤다.”
아무리 용병이라도 평생에 한 번 하기도 힘든 내기를, 카오르는 젊은 나이에 다섯 번이나 경험했다.
당연히 그 다섯 번 모두 승리했기에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얼마나 독하고 실력이 뛰어난지 알 수 있는 증거였다.
하지만 지셀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난 백 번 넘게 해 봤는데?”
“뭐?”
카오르가 황당해하는 사이, 옆에 서 있던 용병이 크게 외쳤다.
“시작!”
신호와 동시에 지셀과 카오르의 단검이 서로를 향해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