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똑같은 놈들끼리 만나겠네. (1)
지셀과 길리언이 다시 나갈 채비를 하던 그때였다. 벨린다가 급하게 찾아왔다.
“도련님! 마수의 숲을 개척한다는 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벌써 도련님이 또 사고 칠 뻔했다고 소문이 다 났어요!”
그새 이야기가 퍼진 모양이었다. 벨린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지셀을 찾아온 것이다.
“오, 벨린다. 그렇지 않아도 찾아가려 했는데 잘됐네. 부탁할 게 좀 있어.”
“뭔데요?”
“인부들을 모아 줘. 우선 숲 근처에 주둔지를 만들 거야. 규모는 약 삼백 명이 머물 수 있을 정도. 필요한 식량과 자재들도 주문해 주고. 돈이 꽤 많이 들겠군.”
벨린다는 말없이 눈을 끔뻑끔뻑하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거 영주님이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응. 그냥 몰래 하려고. 준비 좀 도와줘. 해 줄 거지?”
해맑게 웃는 얼굴이 한 대 때려 주고 싶을 정도로 얄미웠다. 벨린다가 빽 소리쳤다.
“아니, 하지 말라는데 왜 해요? 예전에는 사고를 쳐도 작게 많이 쳤는데, 갑자기 왜 이렇게 스케일이 커졌어요!”
벨린다는 지셀의 그릇이 커졌다고 흐뭇해했던 걸 후회했다.
설마 그릇이 커졌다고 사고 치는 규모도 같이 커져 버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너무 열 내지 마. 도와주기 싫으면 어쩔 수 없지.”
지셀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난 벨린다가 도와주지 않아도 반드시 진행할 거야. 숲에 준비도 없이 들어갔다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정말 안 도와줄 거야?”
“돕긴 뭘 도와요? 영주님한테 다 말할 거예요!”
“아, 호메른이 그러더라. 이번에 사고 치면 진짜로 탑에 가둬 버릴 거라고. 벨린다가 아버지한테 말해도 그렇게 되겠지?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도망쳐야겠네. 어쩌면 무척 화가 나서 더 큰 사고를 칠지도 몰라. 예를 들어…… 숲에 불을 지른다든가.”
“미쳤어요?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벨린다가 기겁했지만, 지셀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이었다.
“어차피 못 들어갈 거 속 시원하게 불이라도 지르는 거지. 와, 정말 끝내주게 재미있겠다. 스코반이랑 리카르도도 끼워 줄까?”
“지금 협박하는 거예요? 네? 대놓고 사고 치겠다고 저 협박하는 거냐고요!”
“협박이 아니라,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이거지. 그것보다는 그냥 숲에 들어가는 게 낫지 않아?”
“으아아아! 내가 미쳐 정말!”
벨린다는 안 된다고 길길이 날뛰었지만, 지셀이 몇 번이나 협박을 섞어 부탁하자 결국 포기한 듯 물었다.
“하아, 정말 진행하실 거예요? 위험한 일을 굳이 자초할 필요는 없잖아요. 총관님도 단단히 벼르고 있다면서요. 이번에는 정말로 감금당할 수도 있다고요.”
“꼭 필요한 일이니까. 벨린다가 도와주면 성공할 수 있어. 해 줄 거지?”
벨린다는 유난히 지셀에게 약했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지셀이 조르면 뭐든 다 들어주곤 했다.
지셀은 이번에도 결국 그녀가 져 줄 것을 알고 더 뻔뻔하게 굴었다.
역시나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아, 정말 그릇이 커져도 너무 커졌어.”
“칭찬이지?”
“칭찬이겠어요?”
지셀이 모른 척 웃으며 말을 돌렸다.
“아무튼 준비 잘 부탁해. 나는 용병을 구하러 갔다 올 거야.”
“다녀오세요. 이번에는 같이 못 가서 아쉽지만…… 길리언 씨가 있으니 괜찮겠네요.”
벨린다의 배웅을 받으며 지셀과 길리언은 바로 영지를 떠났다.
그들이 향한 곳은 페르디움에 가까이 붙어 있는 짐바르 영지.
켈베로스 용병단이 머물고 있는 곳이며, 주변 영지 중 가장 용병들이 많은 영지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짐바르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용병 길드를 찾아가 머릿수를 채울 용병들을 모집해 달라고 의뢰했다.
용병 길드의 사무장은 오십 대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마수의 숲을 개척하는 데 참가할 사람을 찾는다고 하자,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페르디움 영지에 있는 마수의 숲을 개척하겠다고요?”
“그래.”
“거기를 왜요?”
“그런 것까지 설명해야 고용할 수 있나?”
“그런 건 아닙니다만, 왜 그런 위험한 일을 하나 궁금해서…….”
용병 길드에서 일하면 당연히 주워듣는 소문도 많다. 그중에는 마수의 숲에 대한 소문도 있었다.
마수의 숲을 정복하겠다고 용감하게 들어간 탐험가들은 종종 있었지만, 그들이 다시 모습을 보이는 일은 없었다.
어떤 생물이 사는지, 얼마나 위험한지, 길이 어떻게 나 있는지 제대로 밝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위험한 숲.
그런 숲을 개척하는 건 돈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고생할 게 뻔한 일이었다.
돈이 없는 페르디움 영지에서는 애초에 시도할 생각조차 못 하는 사업.
이득을 본다는 확신도 없기에 다른 영지에서도 같이 개척해 보자고 제안조차 하지 않는다.
그렇게 몇십 년간 버려져 있던 숲인데, 갑자기 정체 모를 남자가 나타나서 개척하겠다 하니 호기심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혹시 뉘신지…….”
지셀은 가문의 문장을 보여 주며 위엄 있게 말했다.
“지셀 페르디움. 페르디움 영지의 대공자다.”
‘니미럴, 꼴통 망나니 공자잖아?’
사무장이 영업용 미소를 띠며 속마음을 티 내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지금껏 쌓아 온 연륜 덕분이었다.
직업상 소문에 민감한 그는 당연히 바로 옆 영지의 대공자인 지셀에 대한 소문도 들었다.
‘이번에는 무슨 사고를 치려고 용병들을 구하는 걸까?’
그는 지셀이 정말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손님을 가릴 수는 없다.
용병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상대가 바보라도 돈만 준다면 일단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할지, 그 결과물이 어떨지를 결정하는 건 고용주의 역량이다.
사무장은 수염을 긁으며 대충 말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검증된 일이 아니라 위험 수당이 조금 더 붙을 겁니다. 괜찮겠습니까?”
“그래, 최대한 빨리 모아 줘.”
“인원이 많으니 며칠은 걸릴 겁니다.”
“될 수 있으면 용병단 말고 개인 용병 위주로 채워 줘. 정 어려우면 용병단을 넣어도 되지만, 서른 명 이하인 곳으로만.”
“알겠습니다. 알뜰하시군요.”
지셀은 큰 용병단을 통째로 고용하지 않고 대부분 개인 용병들로 인원수를 채울 생각이었다.
큰 용병단을 고용하면 돈도 훨씬 많이 드는 데다, 위험한 상황에 빠졌을 때 단체로 배신할 가능성도 크기 때문이었다.
용병 모집을 맡기고 지셀은 사무장에게 슬쩍 물어보았다.
“혹시 켈베로스 용병단이 어디에 머무는지 알아?”
사무장은 질문을 듣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이름만 들어도 짜증이 확 솟구치고 위가 아파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켈베로스…… 그 광견단 말씀인가요?”
“그래, 그놈들.”
“그 꼴통 새끼들…… 아니, 그놈들은 왜 찾으십니까?”
“그놈들도 고용하려고.”
사무장이 기겁해서 지셀을 말렸다.
“아, 그건 좀. 포기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놈들, 성격이 보통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놈들 때문에 제가 위장병이…….”
“괜찮으니까 알려 줘.”
지셀이 고집을 꺾을 기미가 없자 사무장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에휴, 똑같은 놈들끼리 만나겠네.’
사무장은 지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짐작했다.
켈베로스 용병단은 그 실력에 비해 고용비가 싸다. 가난하기로 유명한 페르디움이니 한 푼이라도 덜 쓸 수 있다면 덜 쓰고 싶겠지.
하지만 값이 싸다는 건 뭔가 하자도 있다는 뜻이다.
꼴통과 꼴통들이 만나면 어떻게 될지 기대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손님에게 그놈들을 추천하기는 양심에 찔렸다.
“저는 정말 반대했습니다. 나중에 원망하면 안 됩니다.”
사무장은 몇 번이나 강조하고는 종이쪽지에 무언가를 적어 지셀에게 건네주었다.
“그놈들은 여기 머물고 있습니다.”
“고맙군. 자, 그럼 놈들을 만나러 가자.”
켈베로스 용병단은 이 북부에서 제법 유명한 소규모 용병단이다.
실력은 좋기로 유명하지만, 고용비는 다른 용병단보다 쌌다. 의뢰 성공률이 낮기 때문이었다.
하도 사고를 많이 치고 제멋대로 구니 의뢰가 제대로 성공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미친개’.
켈베로스 용병단이라는 본래 이름보다 광견단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렸다.
그렇게 평판이 바닥인데도 아직 용병단이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개개인의 실력이 다른 용병들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용병 주제에 준기사와 맞먹는 실력인 데다가 싸울 때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길리언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지셀에게 걱정스럽게 말했다.
“공자님, 꼭 그들을 써야 합니까? 차라리 더 검증된 좋은 용병단을 쓰는 게 어떻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 용병단을 쓰려면 지금 있는 돈으로는 부족해. 인부들부터 식량과 자재까지 구해야 하니까.”
“하지만 그놈들은 소문이 너무 더럽습니다. 제대로 통제되지 않을 가능성도 큽니다. 산적 출신이라는 소문도 파다합니다.”
“괜찮아. 어차피 몬스터들과 싸울 놈들이다. 오히려 거친 편이 더 나아. 너무 걱정하지 마.”
지셀이 단호하게 자르자 길리언은 일단 물러났다. 모시는 분이 결정한 일이니 따르는 게 도리였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지셀을 배신하거나 사고를 친다면 제 손으로 다 죽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잠시 후, 켈베로스 용병단이 머무는 곳에 도착한 지셀은 주변을 둘러보고 혀를 찼다.
“휘유, 정말 더럽네.”
그들은 도시 외곽에 대충 천막 몇 개를 쳐 놓고 살고 있었다.
몇몇은 도박을 하고 있었고 몇몇은 그냥 누워서 자고 있다.
씻지도 않았는지 하나같이 머리는 산발이고, 옷은 누런 게 보기만 해도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누워 있던 용병 하나가 지셀과 길리언을 보더니 코를 파며 물었다.
“뉘슈?”
일단은 옷차림을 보니 귀족 같아서 나름대로 예의를 갖춘다는 게 이 모양이었다.
“의뢰를 하러 왔다. 단장은 어디 있지?”
코를 파던 용병이 여전히 누운 채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단장님 바쁘시니 내일 오쇼.”
“그러지.”
지셀은 별다른 말 없이 돌아섰다.
어차피 용병 모집 때문에 며칠은 기다려야 하니 일단은 물러난 것이다.
그는 다음 날 다시 켈베로스 용병단을 찾아갔다.
“단장을 만나러 왔다.”
어제 코를 파던 용병이 킬킬 웃으며 답했다.
“오늘도 바쁘니 내일 오쇼.”
“알겠다. 팔자 좋아 보이는군.”
지셀은 다시 순순히 물러났다.
길리언은 슬슬 부아가 치밀었다. 저들이 무슨 수작을 걸고 있는지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공자님, 저놈들 일부러 저러는 겁니다. 자신들을 찾아올 정도면 그만큼 아쉬운 상황이라는 걸 알기에 장난치는 겁니다. 고용주의 우위에 서려고 길들이는 거죠.”
“알고 있어. 하지만 오늘은 그냥 물러나도록 하지.”
지셀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길리언을 달래며 숙소로 돌아갔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같았다.
그때마다 용병들은 조롱하듯이 지셀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오 일째가 되는 날.
지셀이 찾아오자 용병은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 보이며 말했다.
“우리 단장님을 만나려면 약간의 성의가 좀 필요할 거 같은데…… 워낙 바쁘신 분이시라.”
지셀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에게 금화 하나를 던져 주었다.
갑자기 큰돈이 나오자 용병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침을 꿀꺽 삼켰다.
생각보다 귀족 손님의 통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 더 욕심을 부렸다.
“크흠, 이 정도로는 부족한 거 같은데. 아직 상황 파악을 못 한 거 같으니 내일 다시 찾아오쇼. 젊어서 그런지 눈치가 없으시구려.”
주변에서 구경하던 용병들이 킬킬거리며 웃었다.
애송이 귀족을 하나 잡아서 가지고 노니 그들이 보기에도 재미있었던 것이다.
길리언이 분을 못 참고 나서려는 순간, 지셀이 살짝 막으며 말했다.
“손님으로서 예의를 지키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다. 내일 다시 보겠다. 이번이 마지막 경고다.”
“예, 살펴 가십쇼. 내일은 두둑하게 챙겨 오십쇼.”
용병들이 낄낄거리며 인사를 건넸고 지셀은 그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날, 용병은 똑같이 웃으며 돈을 요구했다.
지셀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예의를 갖춘 거 같군. 일단 다리 하나.”
턱.
길리언이 이를 갈고 웃으며 용병의 목을 잡았다.
“어? 뭐야? 안 놔? 이 새끼 죽고 싶어?”
용병이 품에서 잽싸게 단검을 꺼내 길리언을 찌르려는 순간이었다.
빠각!
“크아아악!”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고통스러운 비명이 크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