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미친놈아 그걸 왜 해! (2)
아버지의 물음에 겨우 정신을 차린 지셀이 자세를 바로 하며 답했다.
“별일은 없었습니다. 그저 아멜리아와 할 이야기가 조금 있어서요.”
“그러하냐.”
즈발터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예전부터 지셀은 그를 피하고 도망 다니기 바빴다.
먼저 찾아와 인사를 하기는커녕, 즈발터가 찾아도 핑계를 대고 숨어 다니기 일쑤였다.
부자가 직접 대면하는 건 지셀이 사고를 치고 잡혀 올 때뿐이었다.
그러던 지셀이 이렇게 먼저 자신을 찾아오다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말이나 행동에서도 당당함이 느껴졌다. 그가 알던 지셀이 맞나 싶을 정도로 생소한 모습이었다.
사람이 안 하던 행동을 하면 의심부터 드는 법이다.
‘저놈 진짜 왜 저러지? 어디 아픈가?’
즈발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지셀을 이리저리 관찰하듯 뜯어보았다.
‘음, 역시 수상해.’
즈발터가 계속 입을 다물고 있자 분위기가 점차 가라앉았다.
지셀은 일단 인사부터 건넸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번에도 잘 막아 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니다. 완전히 밀어붙여야 했는데 영지 일 때문에 그러질 못했어. 그래도 제법 큰 피해를 줬으니 당분간은 그놈들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조금 쉬었다가 정비를 마치는 대로 다시 출정할 생각이다.”
지셀은 아버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본의는 아니었지만, 영지의 사정이 얼마나 힘든지 이미 밖에서 듣고 말았다.
하지만 즈발터는 그렇게 힘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아들 앞에서 내색하지 않고 앞으로 할 일만을 얘기했다.
‘여전하시구나.’
오랜만에 아들을 봤음에도 무뚝뚝한 얼굴에는 변화가 없다.
남들이 본다면 감정도 없는, 멋대가리도 재미도 없는 아저씨로 보일 것이다.
어린 시절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딱딱하고 엄하기만 한 아버지가 얼마나 싫었던가.
하지만 이제는 저 표정 뒤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알고 있다.
그것은 피로와 고단함, 그리고 포기할 수 없다는 책임감이었다.
‘저 책임감에 모두가 기대어 살고 있다.’
모두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이 평화는 사실 즈발터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그저 싸움만을 좋아하고 가정은 신경도 쓰지 않는, 그런 몰상식한 사람인 줄로만 알고 싫어했다.
영지에서 편하고 호화롭게 사는 다른 귀족 자제들을 보며 부러워하기도 했다. 왜 자신들만 이렇게 궁핍하고 힘들게 사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책임감의 무게를 알게 된 지금은 아버지의 마음이 어떨지 알 것 같았다. 그처럼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도.
지셀은 그대로 감상에 빠졌다. 다시 입을 열 기미가 없는 아들을 보고 이번에는 즈발터가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쟈말과 필립을 직접 처단했다고 들었다. 사실이냐?”
‘음, 이걸 뭐라고 말해야 하지?’
가뜩이나 그 일에 대해 이런저런 소문이 돌아 귀찮을 지경이었다.
지셀이 잠시 고민하자 기사단장인 란돌프가 고개를 쭉 빼며 말했다.
“맞다, 요새 말이 많던데요. 솔직히 말씀해 보시지요. 직접 죽인 거 맞습니까?”
“제가 직접 다 죽인 건 아닙니다.”
그러자 페르디움의 가신들이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그들은 지셀이 기사 두 명을 직접 죽였다는 말을 전혀 믿지 않고 있었다.
란돌프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역시 그렇군요. 그럼 그놈들이 서로 싸운 겁니까?”
“네, 자기들끼리 싸우긴 했습니다.”
프랑크가 쟈말과 필립을 죽였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대공자님은 그냥 마무리만 지으신 거군요?”
“뭐,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됐네요.”
프랑크를 포함해서 남은 놈들은 죄다 그가 죽였으니 마무리를 지었다고 볼 수도 있었다.
솔직한(?) 답변에 란돌프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는 영지에 배신자가 나온 것도 그렇지만, 자신이 데리고 있던 기사가 저 사고뭉치에게 당했다는 게 너무 어이가 없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운이 좋았구나. 그래도 기사를 상대하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 잘했다.”
즈발터가 조금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지셀에게 말했다.
영지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한심한 녀석이 그 정도 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그가 아는 지셀은 여동생을 내팽개치고 도망갔대도 그러려니 할 놈이었다.
그래도 제 동생을 지키겠다고 남아 있었던 걸 보면 아직 최악의 수준까지 떨어지진 않은 모양이었다.
“케인과의 대련에서도 이겼다고 들었다. 앞으로도 그렇게 수련을 열심히 하거라.”
“알겠습니다.”
란돌프는 케인을 이긴 것까지는 진짜 맞냐며 괜히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대련을 직접 본 기사한테 보고받기도 했고, 어차피 고만고만한 놈들끼리 싸웠다 생각한 것이다.
오크 토벌에서 지셀이 활약했다는 소문은 케인과의 대결 이후 ‘지셀이 스코반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정도로 가라앉은 상태였다.
모든 논란이 정리됐지만 란돌프가 지셀을 보는 눈길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어휴, 형님 아들만 아니었으면 그냥 날 잡아서 허리를 반대로 접어 버렸을 텐데.’
이번에는 호메른이 앞으로 나섰다.
“대공자님, 언제나 행실을 바로 하셔야 합니다. 페르디움의 후계자라는 사실을 항상 자각하고 계십시오. 절대 명예를 잃지 마시고…… 언제나 영지를 위해…… 대공자님의 조부이신 단테 페르디움 백작께서는…….”
호메른의 잔소리가 끝도 없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가 보기에 지셀은 대공자인 주제에 영지의 골칫덩어리이자, 후계자의 자격도 갖추지 못한 한심한 인간이다.
그러니 항상 그를 볼 때마다 못마땅해하며 잔소리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전생에 지셀이 반항심을 키운 건 그 잔소리 탓도 있었다. 호메른이 그걸 알 리 없었지만.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지요.”
지셀은 적당히 잔소리를 끊어 냈다.
‘어휴, 듣기 싫어서 말 끊는 거 봐라. 백날 얘기해 봤자 소용이 없어. 소용이.’
호메른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
예전에는 바르게 자라라고 잔소리를 했다면, 이제는 사고 칠까 무서워서 잔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호메른의 잔소리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알버트가 툭 한마디를 던졌다.
“품위 유지비를 줄일 예정입니다.”
‘빵 한 조각도 아깝다.’
영지에 돈이 없으니 당연히 가장 쓸모없는 식충이의 품위 유지비부터 줄일 생각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산뜻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시지요.”
‘음? 저놈이 왜 순순히 알았다고 하지?’
알버트는 지셀을 향해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평소 같았으면 욕지거리를 하며 행패를 부리고 돈을 내놓으라 공갈 협박도 서슴지 않았을 텐데.
‘흐음, 수상한데.’
그는 평소에 지셀에게 잔소리도 하지 않고, 그저 소 닭 보듯 했다. 한마디씩 건네는 건 그저 돈에 관해 이야기할 때뿐이었다.
‘일단은 지켜보자.’
알버트는 여차하면 지셀 앞으로 배정된 예산을 더 삭감할 생각을 하며 입을 다물었다.
이 세 사람이 처음부터 지셀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건 아니다. 어렸을 때는 그들도 지셀을 정말 친자식처럼 예뻐했다.
하지만 지셀이 치는 사고가 ‘어려서 그렇겠지’ 하고 이해할 수준을 넘긴 뒤로는 다들 포기하고 말았다.
이제는 얼굴만 봐도 원수 같았다.
다른 가신들도 돌아가면서 대공자인 지셀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들도 지셀 때문에 모두 한 번쯤은 고생해 본 터라 다들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즈발터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가신들이 모두 지셀을 보고 잔뜩 경계하는 모습을 보니 피로가 훅 몰려왔다. 어찌 보면 나름 존재감이 대단한 아들이었다.
‘내 아들이지만 정말 기묘한 존재로다.’
혀를 찬 즈발터가 조금은 피곤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단순히 인사를 하러 온 거 같지는 않구나. 할 말이 무엇이냐.”
지셀은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부터가 정말 중요했다.
“제가 하려는 일이 있는데 아버지가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네가…… 뭔가를 하겠다고?”
“네,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아무것도 안 하면 안 되겠느냐?”
지셀이 뚱한 표정을 지으며 내뱉었다.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래, 그게 무엇이냐?”
즈발터가 조마조마한 마음을 감추고 물었다.
북방에서 이어지는 전투로 단련되어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꿈쩍 않는 자신도, 아들만 보면 일단 가슴이 두근거린다.
자식은 전생의 원수라더니, 전생에 자신이 지은 죄가 많은 모양이었다.
긴장감이 가득한 즈발터의 표정을 보고 지셀이 속으로 혀를 찼다.
‘거참, 아들을 보고 이렇게 긴장하는 아버지라니.’
아버지뿐만 아니라 가신들까지 모두 야만인이라도 본 것처럼 긴장하고 있었다.
지셀은 냉대를 당하면서도 기분이 상하기는커녕, 조금 즐거워졌다.
이쪽은 수십 년 만에 만나는 사람들이니 마냥 반갑기만 한데, 평소와 영 딴판인 자신을 귀신 보듯 하는 게 웃겼다.
이들에게 지셀은 얼마 전까지 사고만 치고 다니던 인물이니 경계하는 것도 당연했다.
‘뭐, 그래도 이 정도면 양호하지.’
전생에 왕국을 쓸어 버리면서 하도 욕을 많이 먹어서 그런지, 가신들의 저런 반응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영지 사정이 이렇게 어려운데 대공자라는 놈이 사고만 치고 다니니 이들이 얼마나 고생했겠는가.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지셀에게는 영지의 암담한 상황을 타파할 지식과 능력이 있다.
‘어차피 영지에도 좋은 일이니까.’
지셀은 마음을 다잡고 단호하게 선언했다.
“마수의 숲을 개척하겠습니다.”
즈발터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옆에서 듣고 있던 가신들도 모두 황당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순식간에 주변 공기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숨 막힐 듯 조용해져 눈 깜박이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어처구니가 없어 한참 동안 아무 말도 못 하던 호메른이 지셀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공자님, 지금 마수의 숲을 개척한다고 하신 겁니까?”
“맞습니다.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숲 옆에 주둔지를 짓고 병력을 모으는 것만 허락해 주십시오.”
마수의 숲은 어둠의 숲, 침묵의 숲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불길한 이름이라는 것이다.
페르디움 북쪽에 넓게 퍼진 그 숲에는 강력한 몬스터들이 가득했다. 지금껏 누구도 마수의 숲 탐험에 성공하지 못했다.
페르디움에서도 섣불리 건드리지 못하고, 가끔 숲에서 튀어나오는 몬스터를 막을 뿐이었다.
호메른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마치 지셀을 가르치듯 말했다.
“대공자님, 마수의 숲이 어떤 곳인지 알고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지셀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요, 잘 알고 있습니다. 몬스터가 아주 많고 위험한 숲이죠.”
가신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없는 일이 있다. 지금 지셀이 주장하는 건 그들이 보기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 갑자기 찾아와서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말도 안 되는 요구였다. 대공자가 또 사고를 친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호메른은 굳은 얼굴로 다시 말했다.
“개척도 불가능할뿐더러, 공자의 신분으로는 영지 내에서 병력을 모집하고 주둔지를 건설할 수 없습니다.”
“예, 그래서 아버지께 허락받으러 왔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지셀의 모습에, 호메른은 점점 머리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지셀이 나이를 먹더니 이제는 아주 스케일이 큰 사고를 칠 모양이었다.
‘영주님 앞이다.’
호메른은 그래도 참으려고 했다.
하지만 지금도 지셀이 친 끔찍한 사고들이 수없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데, 그 범인의 뻔뻔한 표정까지 보고 있으려니 그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즈발터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결국 폭발한 호메른이 침을 튀기며 외쳤다.
“미친놈아, 그걸 왜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