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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19화 (19/269)

19화 변수가 필요해. (4)

길리언은 언제든 떠날 수 있다고 했지만, 막상 떠날 준비를 하는 데에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짐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집 안 전체에 널려 있는 수많은 무기가 문제였다.

마차가 너무 작고 낡아서 집 안에 있는 무기들을 제대로 챙겨 담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보다 못한 지셀이 돈을 내놓았다.

“괜찮은 마차로 하나 사 와. 레이첼이 편하게 이동할 수 있게.”

짐을 전부 챙기고 난 뒤, 두 마리 말이 끄는 아담한 마차는 흉악하다 못해 기괴한 모습이 되었다.

각 말의 안장에 스몰 랜스들이 달려 있었다. 마차 각 면에도 다양한 무기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길리언 자신도 검과 손도끼를 허리에 찬 뒤, 등에는 쇠뇌까지 장착했다. 누가 보면 바로 전쟁터라도 나가는 듯한 모양새다.

기사들은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지었다.

‘무슨 이동식 산적 요새 같군. 무기가 저렇게 많이 필요한가?’

정말 강한 자들은 자신이 주로 쓰는 무기만 단출하게 챙겨 다닌다.

전쟁터에서 중무장한 기사라도 무기는 두어 개만 챙기고, 나머지는 굳이 필요하다면 종자들을 시켜서 가지고 다니기 마련이다.

기사들에게는 길리언의 모습이 무기가 아까워서 못 버리고 꾸역꾸역 들고 가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셀은 무기를 챙기는 길리언의 모습에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 별말은 하지 않았다.

“출발하지. 빠진 물건은 나중에 사람을 보내 가져와도 된다.”

길리언은 마차를 몰고, 나머지 일행은 처음 레이폴드에 올 때처럼 말을 타고 이동했다.

벨린다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지셀을 흘끔거리며 조용히 고민에 잠겼다.

‘단순히 성격만 변한 게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처음에는 정신을 차리고 철이 들었다고 생각했다.

실력 또한 그간 열심히 수련하던 것이 이제야 빛을 발하는 거겠거니 여겼다.

본래 그에게 있었던 뛰어난 재능이 이제야 나타난 거라고 자신을 납득시켰다.

어렸을 때부터 망나니 같은 지셀을 보살펴 온 탓에 관성처럼 모든 것을 좋은 방향으로만 끼워 맞춰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쪽으로 이해해 보려 해도 길리언의 딸을 치료한 일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 지식은 도련님 혼자서는 절대로 알 수 없어.’

지셀은 그다지 머리가 좋지도 않고, 견문도 짧았다. 영지 밖으로 나간 적도 없는데 견문을 어디서 쌓겠는가?

게다가 벨린다는 지셀이 어릴 때부터 책과는 담을 쌓고 살아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누구도 모르는 치료법을 대체 어떻게 알게 된 건지, 도통 모를 일이었다.

‘혹시…… 흑마법사?’

벨린다는 품 안의 단검을 만지작거리며 온갖 가능성을 떠올렸다.

전설적인 흑마법사 중에서는 다른 사람의 몸으로 자신의 영혼을 옮겨 삶을 이어 가는 자도 있다고 들었다.

벨린다는 지셀의 덤덤한 얼굴에서 무언가 이상한 점을 찾아내려고 애썼다.

‘아니, 아니지. 사람이 달라 보여서 그렇지, 우리 귀여운 도련님이 맞는데.’

가끔 다른 모습을 보이지만, 지셀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지셀을 돌봐 온 그녀가 그걸 몰라볼 리 없었다.

묘하게 여유 있고 능청스러워졌지만, 삐뚤어지기 전의 지셀을 생각하면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그때도 조금 천연덕스러운 면이 있었으니까.

지금은 거기에 과한 자신감까지 얹힌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같으면서도 다른 사람.

그게 현재 벨린다가 보는 지셀의 모습이었다.

‘정말 모르겠네. 도통 얘기를 안 해 주니.’

몇 번이나 추궁해 봤지만, 지셀은 그저 나중에 말해 주겠다며 은근슬쩍 넘겨 버렸다.

벨린다는 결국 답이 안 나오는 의심을 멈추고, 지셀이 개발한 약을 어떻게 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잘만 하면 돈이 좀 될 것 같은데.’

지셀에게 지급되는 품위 유지비도 모두 벨린다가 관리하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는 금액 내에서 지셀을 뒷바라지하느라 항상 고심하던 차에, 동전 한 닢이라도 벌 수 있는 기회가 보이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재료가 문제네. 돈 많은 사람들만 쓸 수 있겠어.’

약의 재료로 쓰인 ‘요정의 축복’은 특정 지역에서만 아주 소량으로 자라는 탓에 금보다 더 비싼 꽃이다.

엄청난 가격임에도 다양한 효능을 가지고 있어 고급 약과 포션의 재료로 쓰인다.

‘그래도 신성력 치료를 받는 것보단 쌀 테니까…… 조제법만 계약해서 팔아도 돈이 좀 되지 않을까?’

일행이 각자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지셀은 길리언과 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셀이 귀족적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편하게 행동하니, 길리언 또한 마음 편히 대할 수 있었다.

“공자님은 귀족임에도 참 자유분방하신 거 같습니다.”

“흐흐, 내가 좀 털털하긴 하지.”

길리언이 살짝 돌려 말하긴 했지만, 지셀은 정말 귀족 같지 않았다.

애초에 귀족으로 산 세월보다 용병으로 산 세월이 더 기니 당연한 일이었다.

귀족적 품위도 정말 최소한만 갖춘 인간이라, 남들이 보기에는 귀족보다는 자신감 넘치는 평민 같았다.

“뭐, 그래도 요새는 품격 있게 행동하려고 노력은 하고 있어. 그런데 영 불편하더라고.”

“젊을 때는 차라리 마음 편히 행동하는 게 나을 때도 있습니다. 젊음을 즐기시지요.”

“나도 그러고 싶지만 내 젊음은 이미 다른 일에 저당 잡힌 상태라. 조금 아쉽군.”

지셀이 간혹 흘리는 말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길리언은 그냥 지셀이 특이한 성격이라 생각하고 넘겼다.

* * *

일행은 별다른 일 없이 레이폴드 영지의 끝자락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아멜리아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조금 긴장했지만, 다소 위험한 지역을 지나칠 때도 습격은 없었다.

“이곳만 통과하면 곧 레이폴드 영지를 벗어나겠군.”

지셀이 후련한 듯 말했다.

앞을 보자 길 양옆에 나무가 빽빽이 서 있었다.

큰 숲은 아니지만 무심코 들어갔다간 길을 잃을 수도 있을 만큼 나무가 가득한 지역이었다.

그만큼 매복이 있을 위험도 크지만, 페르디움 영지로 가기 위해서는 저 길을 지나가는 게 가장 빠르다.

만약 저 길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산을 넘거나 아예 빙 둘러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 성격에, 습격한다면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을 만한 전력을 보낼 거다.’

물론 지셀은 아멜리아가 사람을 보내도 격퇴할 자신이 있었다.

자신의 실력을 전부 내보이진 않았으니 아멜리아도 제대로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애초에 지셀을 감당할 만한 실력자를 보내기는 아무리 아멜리아라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실력자라는 게 필요하다고 언제든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언제나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길의 초입에 들어선 지셀은 슬그머니 실처럼 마나를 풀어 사방으로 뿌렸다.

‘습격하기엔 여기가 제일 좋지. 레이폴드 영지에 항의하기도 애매한 위치이고.’

실처럼 가느다란 수십 가닥의 마나가 일행 주변을 훑으며 멀리 퍼져 나갔다.

극의 경지에 이른 자가 아니면 알아볼 수도 없는 지셀만의 기술.

지셀은 고개를 몇 번 끄덕인 뒤 일행들에게 말했다.

“통과하자.”

그들은 천천히 말을 몰아 안쪽으로 들어갔다.

길을 통과하는 동안 지셀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수행 기사들도 다소 긴장한 채 움직였다.

하지만 상당히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기사들은 하나둘 마음을 놓았다.

작은 숲길의 끝자락에 도착했을 즈음, 지셀의 옆에 있던 벨린다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따끔거리듯 피부에 닿아 오는 희미한 살기.

그것은 그녀가 쌓아 온 경험에 기인한 직감이었다.

마나를 집중하자, 곧 익숙한 것들이 감각에 잡히기 시작했다.

벨린다가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도련님, 잠깐…….”

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길리언이 말 하나에 훌쩍 올라타더니 마차와 연결된 줄을 끊어 냈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쉬고 계십시오.”

그러고는 등에 멘 쇠뇌를 꺼내 볼트를 발사했다. 동시에 길리언이 탄 말이 앞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투투퉁!

연속으로 세 발을 발사할 수 있는 개량형 쇠뇌의 볼트는, 높이 솟아 있는 나무들 사이로 날아가 꽂혔다.

“크어억!”

나무 곳곳에 위장하고 숨어 있던 몇 사람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곳곳에서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눈치챘다!”

“쳐라!”

땅바닥에서 사람이 튀어나오고 나뭇잎으로 가려졌던 가지 위에서 위장한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그 수만 어림잡아 서른여 명.

지셀의 수행 기사들이 놀라 검을 뽑아 드는 사이, 길리언은 튀어나온 사람들을 향해 돌진하며 외쳤다.

“쥐새끼들이 많이도 왔구나!”

길리언은 코웃음을 치며 쇠뇌를 버리고 허리춤에 꽂아 놓은 두 개의 손도끼를 꺼내 던졌다.

퍼어억!

손도끼는 가장 앞에 선 자들의 이마에 꽂혔다. 그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그대로 쓰러졌다.

하지만 길리언은 시체가 된 자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안장의 옆에 달려 있는 스몰 랜스를 꺼낸 뒤, 그대로 적들이 몰려오는 중심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콰직!

“으아아악!”

순식간에 몇 사람이 스몰 랜스에 찔려 머리가 박살이 났다.

그는 그대로 돌진하며 경로에 걸리는 적들을 가차 없이 뚫어 버렸다.

그 모습을 본 수행 기사들은 습격당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입을 벌렸다.

“래, 랜스 차지?”

“이런 지형에서 저게 가능하다고?”

나무나 바위 등의 방해물이 많은 이런 숲속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게다가 저렇게 연속으로 적을 꿰뚫는 건 어지간한 기마술을 가진 게 아닌 이상 평지에서도 어렵다.

하지만 길리언은 능수능란하게 방해물을 피하면서도 말의 속도를 유지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적들의 시체만 남았다.

그야말로 경이로운 기술이었다.

적들도 경악했는지 이를 악물며 소리를 질렀다.

“저놈은 무시해! 저 지셀이란 놈부터 죽여!”

그들은 길리언을 피해 모두 지셀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도련님, 제가…….”

벨린다와 수행 기사들이 다급히 막으려 하자 지셀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괜찮아, 길리언이 쉬고 있으라잖아.”

그사이 이미 말의 고삐를 틀어 방향을 선회한 길리언은 다시 지셀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사방에 퍼진 적들을 무시하고 지나친 그는, 순식간에 마차까지 다가와 마차 옆면에 달려 있던 거대한 방패를 떼어 냈다.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적 중 한 사람이 품에서 단검을 꺼내 지셀을 향해 던졌다.

쉬익!

칼날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수없이 이어졌다. 사방에서 단검이 날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시퍼런 칼날을 눈앞에 두고도 지셀의 표정에는 여유가 넘쳤다.

타타타타탕!

그 순간, 길리언이 지셀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거대한 방패가 모든 검을 막아 내었다.

뒤이어 그가 방패를 전방으로 크게 휘둘렀다. 달려들던 적 두셋이 어마어마한 힘에 밀려 직선으로 날아갔다.

벨린다가 당혹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저 아저씨 뭐예요? 뭐 하는 사람이에요?”

언제나 비밀이라며 넘기던 지셀이 이번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전 라타토스크 용병단 단장 길리언. 어느 지형, 어느 상황에서도 전투가 가능한 병기의 달인이지.”

지셀은 길리언의 든든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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