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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18화 (18/269)

18화 변수가 필요해. (3)

레이첼을 살펴보던 사제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가 앓는 병은 시간이 갈수록 신성력에 저항하며 병세가 악화되다 죽음에 이르는 불치병이었다.

한데 지금 보니 레이첼은 상태가 눈에 띄게 좋아져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사제는 처음 보는 광경에 놀라 레이첼에게 잽싸게 신성력을 불어 넣었다.

“오, 여신이시여!”

그는 연신 탄성을 내뱉었다.

신성력을 주입할 때마다 병 기운이 크게 반발해서 치료할 수 없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몇 번 레이첼을 치료해 본 적 있는 그는 신성력에 저항하는 병의 기운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레이첼의 몸은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신성력을 거부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한참 동안 레이첼의 몸에 신성력을 주입한 사제가 멍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믿을 수 없지만…… 병이 호전된 것 같소. 이건 기적이다! 여신이 기적을 내리신 거야! 오, 자애로운 여신이시여! 악마의 소굴에 이런 축복을 내리시다니!”

사제가 호들갑을 떨며 여신에 대한 찬양을 시작했다. 요는 레이첼의 죄를 여신께서 용서하시고 병이 낫도록 기적을 베풀어 주셨다는 거였다.

오래 있지 못한다던 사제는 쉬지 않고 앉았다 일어났다 하며 기도문을 읊어 댔다.

아예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이는 모습에 지셀이 기사들에게 한마디 던졌다.

“집에 보내라.”

다리에 힘을 주며 기적을 더 접해야 한다고 버티는 사제를, 기사들이 억지로 끌어 내보냈다.

길리언은 흥분해 떠드는 사제의 모습을 보고 나서야 확신했다. 정말 딸의 병이 치료된 것이다.

심장이 마구 뛰고 다리가 떨려, 도저히 제정신으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연신 눈물을 흘렸다.

“아, 아아…… 아아, 레이첼…….”

병세가 완화되며 고통도 많이 사라졌는지, 잠든 레이첼의 얼굴에 편안한 미소가 떠올랐다.

몇 년 만에 보는 딸의 평온한 모습에 길리언은 결국 오열하고 말았다.

대체 얼마 만에 보는 미소인가.

이 웃음을 다시 볼 수 있기를 얼마나 바라고 바랐던가.

이건 기적이었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한참 눈물을 흘리던 그는 번뜩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간절한 눈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저, 정말 제 딸의 병이 나을 수 있는 겁니까?”

“아마 한두 달 정도 약을 계속 먹으면 완치될 거야.”

“어, 어떻게 불치병을……. 신성력으로도 치료를 못 했는데.”

“신성력은 몸의 활력을 돋우고 재생력을 강화해 주는 것뿐이다. 그 힘으로 병을 이겨 내는 거지. 그래서 의외로 못 고치는 병이 많은데 사람들이 잘 모르더라고.”

지셀이 거만하게 답했다.

길리언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고친 사람이 그렇다는데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멍하니 지셀을 바라보던 길리언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무엇을, 무엇을 원하십니까. 원하는 게 있으니 저를 찾아오셨을 터.”

“뭘 줄 수 있지?”

“제게 남은 건 이 쓸모없는 몸뚱이밖에 없습니다. 개가 되라 하시면 개가 되고 노예가 되라 하시면 노예가 되겠습니다.”

길리언은 진심이었다. 딸을 위해서라면 지셀이 무엇을 원하든 내줄 생각이었다.

지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나는 단지 과거의, 본래의 네가 필요할 뿐이야.”

잠시 멈칫한 길리언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제가 거절하면 딸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뭐, 거절해도 딸은 치료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마. 돈도…… 딱히 받을 생각은 없는데.”

길리언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지셀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호의를 베풀겠다니. 이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몇 번이나 경험했듯이.

길리언의 생각을 눈치챈 듯, 지셀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못 믿겠어? 내게는 별거 아닌 일이야. 네가 생각하는 만큼 큰일이 아니라는 거지. 이 정도 베푸는 건 어렵지 않다.”

지셀의 말에는 설득력이 부족했다.

그는 아무도 모르는 병의 치료법을 알고 있었고, 일면식도 없는 길리언을 찾아왔다.

수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거절하면 아쉽기야 하겠지만,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강요하는 취미는 없거든. 싫다는데 어쩌겠어.”

길리언은 한참 동안 지셀을 바라보았다.

천진난만한 아이 같으면서도 묘하게 어른스러운 여유가 보인다. 그 눈빛에서는 오롯한 신념이 묻어났다.

‘대체 무엇을 꿈꾸는 자인가?’

길리언은 이내 눈빛을 단단히 굳히고는 크게 심호흡한 뒤 단검을 하나 집어 들었다.

투둑.

그러고는 어깨까지 내려오던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쥐고 단번에 잘라 냈다.

굽어 있던 어깨와 허리가 반듯하게 펴지자 몸은 더 건장해 보였다. 죽어 있던 눈빛은 이글거리는 불처럼 형형하게 타올랐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 강렬한 기세에 깜짝 놀란 수행 기사들이 반사적으로 검 자루를 쥐었다.

벨린다도 눈을 가늘게 뜨고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혹시나 약을 더 얻으려 지셀을 협박할지도 모른다 생각한 것이다.

수행 기사들은 지셀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는 길리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길리언은 우뚝 걸음을 멈추고 지셀과 눈을 마주쳤다.

지셀보다 그의 키가 두 뼘 정도는 더 큰 탓에, 그가 지셀을 내려다보는 모양이 되었다.

평범한 자세인데도 엄청난 위압감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길리언이 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지금 여기 있는 사람 말고 같이 왔거나, 찾아올 사람이 더 있습니까?”

“아니, 우리가 전부야. 만나야 할 사람도, 찾아올 사람도 없어.”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벨린다가 천천히 품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일행이 몇 명인지, 만날 사람이 있는지 묻는 것 자체가 수상했다. 갑자기 달라진 기세 때문인지 협박을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길리언은 벨린다가 자신을 경계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지셀에게 물었다.

“혹시 공자님에게 원한을 품은 사람이 있습니까?”

지셀이 알 만하다는 듯 픽 웃었다.

“원한을 품은 사람이야 있지. 앞으로도 더 많아질 테고.”

그 답을 듣자마자, 길리언은 대뜸 구석에 있던 작살 하나를 들어 긴 밧줄 끝에 묶었다.

그러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방을 나가 문을 향해 작살을 강하게 집어 던졌다.

콰아앙!

창은 문을 뚫고 쏜살같이 날아갔다. 곧 길리언이 마나를 뿜어내며 밧줄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박살 난 문 너머에서 회색 로브를 입은 남자 하나가 작살이 어깨에 꽂힌 채 끌려 들어왔다.

“크아악!”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를 보며 지셀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었다.

“이런, 꼬리가 붙어 있었네?”

순식간에 끌려 들어온 남자는 두려움이 가득 담긴 눈으로 길리언을 올려다보았다.

보이지도 않는 곳에 있던 사람을, 죽지 않도록 절묘하게 어깨만 뚫어 끌어오다니.

놀라운 투척술에 벨린다와 수행 기사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길리언이 보여 준 건 마나뿐만 아니라 근육의 움직임까지 미세하게 조절할 수 있어야 가능한 기예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놀라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한 손으로 남자의 머리를 움켜쥔 채 지셀의 앞으로 끌고 갔다.

지셀이 남자를 내려다보며 냉랭하게 물었다.

“누가 보냈지?”

“나, 나는…….”

남자는 덜덜 떨기만 할 뿐 말을 잇지 못했다.

대체 어떻게 자신을 골라낸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는 다른 행인들처럼 지나가는 척하며 근처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정확하게 자신을 노려 공격해 오다니.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남자의 품을 벨린다가 나서서 급하게 뒤졌다.

하지만 나온 건 독을 바른 단검과 여러 암기뿐, 딱히 신분을 알 만한 단서는 없었다.

“어떻게 할까요.”

길리언이 묻자, 지셀은 잠시 생각하다 남자를 돌아보았다.

“순순히 말할 생각은 없는 거지?”

“…….”

남자는 머뭇거리면서도, 결국 입을 열지 않았다.

지셀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쉽군. 그냥 쉽게 가면 서로 좋았을 텐데. 오늘처럼 좋은 날에는 손을 쓰고 싶지 않았거든.”

누군가를 죽이고 살리는 데에는 가벼운 것이라도 나름대로 이유가 필요했다. 적으로 만난 사람이라면 더 그랬다.

이건 지셀이 용병왕 시절부터 지켜 온 행동 원칙이었다.

여전히 대답하지 않는 남자를 내려다보며 지셀은 길리언에게 말했다.

“누가 보냈는지는 말 안 해도 알 거 같다. 그 외에는 딱히 궁금한 게 없으니,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잘 보내 드리는 게 좋겠네.”

길리언은 고개를 끄덕인 뒤, 남자를 끌고 다른 방으로 건너갔다.

우드득.

문 너머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한 차례 들리더니, 이내 숨 막힐 듯한 정적이 이어졌다. 곧 길리언이 무심한 얼굴로 돌아왔다.

수행 기사들은 재차 확인하지도 않고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길리언의 단호함에 기가 질렸다.

‘저런 인물이었나? 어떻게 저렇게 갑자기 달라질 수가 있지?’

‘손속에 망설임이 없다. 공자님이 위험한 사람을 거두러 왔구나.’

길리언은 처음 봤을 때는 비루먹은 강아지처럼 힘없어 보이더니, 지금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위압감을 내뿜고 있었다.

지셀이 그를 보며 말했다.

“행동을 보니 마음을 정한 거 같군.”

길리언은 크게 숨을 들이켜고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공자님께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후회하지 않겠어?”

“이미 평생의 소원을 이뤘습니다. 앞으로 남은 삶은 공자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단호한 어조에는 굳은 각오가 서려 있었다. 지셀은 손수 그를 일으켜 주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든든하군. 레이첼은 영지에서 보살펴 줄 거야. 남은 치료도 당연히 봐줄 거고.”

“감사합니다.”

지셀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대단하네. 어떻게 저렇게 딱 짚어서 끌고 올 수가 있지? 우리 기사들도 몰랐는데 말이야.”

그 말에 벨린다와 기사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들도 집 밖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파악했지만, 그 사람들이 적인지 아닌지까지 판단하기는 어려웠다.

아무리 인적이 드문 외곽 지역이라고 해도 다니는 사람이 조금은 있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길리언은 그 남자가 수상하다는 것을 바로 눈치채고 잡아냈다.

“아니, 저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거든요? 치료 구경하느라 그런 거라고요!”

벨린다가 억울하다는 얼굴로 외쳤다.

지셀이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아. 나도 몰랐어.”

“모르는 게 당연하다는 식으로 말하지 마세요!”

벨린다가 길길이 날뛰는 사이, 길리언이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제가 그동안 집에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자리에 오래 있다 보면 거동이 수상한 사람을 눈치채기 쉽거든요.”

자존심이 상한 벨린다가 입술을 씰룩거렸다.

“그래도 혹시 실수하거나 착각할 수도 있잖아요? 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는 법인데.”

“그보다 공자님의 안전이 더 중요하다. 아니라는 게 확인되면 그때 수습해도 된다.”

길리언이 묵묵히 대답했다.

벨린다를 비롯한 수행 기사들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수행 기사들은 그렇게 막무가내로 행동할 수 없다. 자칫 실수라도 했다간 모시는 사람의 명예에 흠이 되기 때문이다.

실수가 아니라는 게 밝혀져도 한번 떨어진 명예는 회복되지 않는다.

하지만 길리언은 방금 죽인 남자가 정말 손님이거나 애먼 사람이었더라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쳇, 도련님을 보살피는 건 내 일이라고.’

왠지 지셀을 뺏긴 듯한 기분이 들어 벨린다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길리언의 심정도 이해는 갔다.

그는 아픈 딸 옆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절망하다 죽기 직전의 폐인이 되었다.

그런 딸을 지셀이 살려 줬으니 얼마나 고맙겠는가. 아마 목숨을 내놓으라면 내놓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달라질 줄이야.’

기세가 너무나도 강렬했다. 저런 인물은 분명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밖에 없다.

‘쌍으로 사고나 안 쳤으면 좋겠네.’

벨린다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도 모르고, 지셀은 길리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수고했어. 앞으로도 잘 부탁하지.”

길리언은 고개를 숙였다.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지셀이 준비한 변수, 길리언이 일행에 합류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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