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변수가 필요해. (2)
“뭐라고요?”
벨린다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대화하는 사이에도, 소녀의 온몸에 난 붉은 반점은 마치 꽃잎처럼 피어올랐다가 서서히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어떤 반점은 완전히 부어올라 고름이 새어 나오고, 어떤 반점은 그저 점멸하듯 생겼다 없어지곤 했다.
벨린다는 길리언의 딸을 잠시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이 병은 분명히 ‘영원의 형벌’이에요.”
지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영원의 형벌’은 신성력으로도 완치되지 않는 지독한 병이다.
그렇기에 성직자들은 이 병을 두고 전생에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이 받는 형벌이라 주장했다.
그 말이 떠오르자 지셀은 무심결에 혀를 찼다.
“하여튼 그쪽은 영 마음에 안 들어. 성녀랑 같이 나한테 매일 잔소리나 꼬장꼬장하게……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다른 이들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지셀은 잽싸게 말을 돌렸다.
“어쨌든 이건 그냥 단순한 병일 뿐이야. 신이 내린 형벌도, 태어날 때부터 매인 족쇄도 아니야. 충분히 치료할 수 있는 병이지.”
그 자신만만한 태도에 벨린다는 인상을 쓸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치료하지 못하는 걸 도대체 공자님이 어떻게 치료한다는 거예요? 이 병에는 신성력도 듣지 않는데.”
신성력을 이용하면 대개의 병은 고칠 수 있지만, 이 병만은 예외였다.
신성력을 쏟아부으면 잠깐은 병세가 호전되는 듯 보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재발하여 쓰러지기 때문이다.
“신성력은 잠시 병을 억제할 뿐이야. 그것도 결국 한계가 있고. 애초에 보통 사람들은 신성력 치료를 계속 받기도 힘들어.”
신전에서는 아주 가끔, 대대적으로 구호 활동을 할 때 외에는 쉽게 신성력을 베풀지 않았다.
귀족이나 돈이 많은 사람들은 쉽게 이용할 수 있지만, 가난한 자들에게는 다른 세상 이야기일 뿐이다.
“이미 재산을 전부 써 버렸겠군.”
길리언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과거에는 꽤 큰 돈을 벌었지만 오랜 병간호로 모든 가산을 소진했다.
딸을 치료하기 위해 전 재산을 아낌없이 썼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없었다.
“어쨌든 이만 떠나도록 해요. 도련님이 더 이상 여기 계실 이유는 없어요.”
벨린다는 그저 지셀이 소녀에게 가까이 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전염된다는 소문은 거짓이라지만, 마음이 찝찝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도 이 병에 걸린 사람을 보면 피하기 바빴다.
재수 없게 걸렸다간 평생을 고생해야 하는 병인데, 아무리 헛소문이더라도 불안을 감수하며 굳이 환자와 가까이 지낼 이유가 없으니까.
“아니, 반드시 치료해야겠어. 아직 늦지 않아서 다행이야.”
하지만 지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벨린다가 말리는 이유도 이해하지만, 기껏 찾은 사람을 두고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전생에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고 바로 길리언을 찾아와서 다행이었다. 운 좋게 시기가 아슬아슬하게 맞았다.
길리언의 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만다. 딸의 죽음에 상심한 길리언도 모든 걸 포기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만약 그렇게 됐다면 길리언을 영원히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직접 치료하시겠다고요?”
“지금 이 병의 치료법을 아는 건 나뿐이니까. 당연히 내가 해야겠지?”
그 말에 벨린다는 두 손을 들고, 말리기를 포기했다.
지셀은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고집을 부리곤 했다. 한번 고집을 피우기 시작하면 벨린다조차도 도무지 말릴 수가 없었다.
자신만만하게 구는 지셀의 모습을 보고 길리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불치병을 고칠 수 있다면 바라 마지않는 일이지만,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하지만 길리언에게는 그 말을 믿고 따르거나, 믿지 않고 부정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때, 길리언의 딸이 크게 몸을 떨며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아아, 으으윽…….”
“레이첼!”
길리언이 다급하게 딸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갔다.
‘영원의 형벌’은 시도 때도 없이 엄청난 고열과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불러온다.
“아아아악!”
고통스러운 비명을 차마 듣고 있기 힘들어, 벨린다와 수행 기사들은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셀과 엮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과는 별개로, 병자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고통에 하도 침대보를 잡아 뜯으니, 그녀의 손톱은 이미 너덜너덜하게 찢겨 나가 피고름이 맺혀 있었다.
침대보에 거멓게 말라붙은 핏자국들은 레이첼이 겪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여실히 보여 주었다.
입에서도 피가 새어 나오자 길리언은 급하게 레이첼의 상체를 세워 피를 빼 주었다. 누워 있는 채로 피를 토하다가는 기도가 막혀 질식할 수 있었다.
“으아아, 아아아악!”
“레이첼, 레이첼…… 괜찮다, 괜찮아…….”
피거품을 내뿜으며 고통스러워하는 레이첼과 그에 못지않게 괴로워하는 길리언.
어쩔 줄 몰라 그저 딸을 안고 벌벌 떠는 그의 모습을 보며 벨린다는 이를 악물었다.
‘얼마 남지 않았어.’
‘영원의 형벌’은 처음부터 레이첼처럼 심각한 증세를 보이는 병이 아니다.
그저 몸에 붉은 반점 한두 개가 나타나고, 가볍게 열이 오를 뿐이다.
그러다 시간이 갈수록 상태가 심각해져 종국에는 신성력조차 아예 듣지 않고, 처절한 고통만 남게 되는 것이다.
레이첼의 상태를 보니 이미 그 끝에 다다른 것 같았다.
“으, 아아, 아, 아빠…… 나, 나 너무 아파…… 아아악…… 죽고 싶어…… 아빠, 아빠 제발……!”
“레이첼, 레이첼…….”
고통에 몸부림치는 딸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꽉 껴안고, 길리언은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의 눈을 가득 채운 것은 이 지옥 같은 고통을 끝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뿐이었다.
‘괴롭다.’
‘이제 나도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구나.’
‘같이 죽자.’
‘미안하다, 레이첼.’
언제나 상상만으로 끝나고 차마 실행하지 못했던 일.
하지만 이제 끝이 다가옴을 직감한 길리언의 눈빛이 까맣게 죽어 갔다. 삶을 포기하는 자의 마지막 눈빛이 바로 저러하리라.
벨린다와 수행 기사들은 차마 더는 못 보겠다는 듯 몸을 완전히 돌렸다.
오직 지셀만이 심각한 표정으로 그 모든 비극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레이첼의 발작이 조금씩 잦아들 즈음, 지셀이 입을 열었다.
“벨린다.”
“네, 네?”
훌쩍거리던 벨린다가 황급히 고개를 들고는 지셀의 손짓에 따라 가까이 다가왔다.
“발작이 멈추면 바로 치료를 시작해야겠어. 필요한 약재를 적어 줄 테니 빠짐없이 사 와.”
지셀은 잠시 레이첼을 보며 기억을 더듬다, 곧 품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벨린다는 종이를 건네받고 깜짝 놀랐다.
“요정의 축복을 사 오라고요?”
“그래.”
요정의 축복은 같은 무게의 금보다 몇 배는 더 비싼 꽃이다.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자가 아니면 함부로 구경도 못 할 정도로 귀한 물건이었다.
“아니, 공자님. 도대체 왜 그렇게 비싼 걸…….”
“그게 가장 중요한 재료니까. 시간이 없어. 언제 또 발작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최대한 빨리 약을 만드는 게 좋다고.”
벨린다는 어쩔 수 없이 약재들을 사러 밖으로 나갔다. 수행 기사들 또한 지셀의 명에 따라 약을 만드는 도구들을 준비했다.
겨우 발작이 멈춘 딸을 잠재운 길리언은 멍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그는 이미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지셀이 무슨 짓을 하든 말릴 기력이 없었다.
벨린다가 약재를 사 들고 돌아오자 지셀은 바로 약을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지금은 불치병이지만 미래에는 치료법이 발견되지.’
워낙 화제였던지라 지셀도 그 치료법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마어마하게 비싼 재료가 쓰인다는 게 문제일 뿐, 배합 비율도 세심하게 맞출 필요 없고 조제법 자체도 어렵지 않았다.
덕분에 약학을 배운 적이 없는 지셀도 어설프게나마 약제사 흉내를 낼 수 있으니 다행한 일이었다.
지셀은 기억하는 배합법에 맞춰 정성스럽게 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일행들도 그가 정말 약을 만들 수 있는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았다.
솔직히 믿을 수 없었지만, 레이첼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니 약이 조금이라도 효과가 있기를 기대하게 되었다.
길리언은 진지하게 약을 만드는 지셀을 무기력하게 쳐다가 물었다.
“나는 공자님을 오늘 처음 만났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오?”
그는 왜 지셀이 갑자기 딸의 병을 치료하겠다고 달려드는지, 비싼 재료를 사다가 직접 약까지 만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셀은 길리언을 보지도 않고 약을 만드는 데만 집중했다.
“병을 고쳐 주겠다니까? 아픈 사람 고치는 데 뭐 거창한 이유가 필요한가?”
“…….”
사기꾼이나 할 것 같은 말이었다.
아니, 사기꾼이라 하더라도 이제는 상관없었다. 작은 희망에라도 기대고 싶은 게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오랜 세월 쌓아 온 체념을 비웃듯, 다시금 희망이 마음속에 싹텄다.
하지만 희망을 품었다가 좌절하면 그만큼 절망도 커진다는 것을 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길리언은 희망을 꺾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키우지도 못한 채 그저 떨리는 눈으로 지셀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다 됐다.”
작은 플라스크에 담긴 보랏빛 액체는 마치 자수정을 녹인 듯 보였다.
지셀은 약병을 한 손에 들고 레이첼에게 다가갔다.
그는 의식을 잃은 레이첼의 목을 받쳐 들고 입 안으로 조심스럽게 약을 흘려 넣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일행들은 곧 실망한 표정을 내비쳤다.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괜히 나까지 걱정되니까 벌써 그런 표정 짓지 말고 조금 기다려. 마법도 아니고, 먹자마자 낫겠어?”
지셀은 레이첼이 누운 침대 옆에 의자를 가져와 앉아 팔짱을 꼈다.
다른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그 곁에서 지루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헉!”
몇 시간 뒤, 지셀 옆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벨린다가 누군가의 외침에 눈을 번쩍 떴다.
“뭐야! 적이야?”
수행 기사들이 경악한 얼굴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저거…… 진짜야?”
길리언도 마찬가지였다.
“이, 이게…… 약이…… 진짜로…….”
지셀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효과가 있네. 솔직히 조금 걱정했는데.”
벨린다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레이첼의 얼굴과 몸에 난 반점들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신성력을 쓸 때는 반점들의 색이 옅어지기는 해도, 이렇게 사라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금 레이첼의 몸에는 피딱지만 남아 있을 뿐, 군데군데 있던 반점들이 확실히 사라져 있었다.
벨린다는 지셀 옆에 바짝 붙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 정말 치료가 된 거예요? 확실해요?”
길리언 또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지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렇게 눈에 띌 정도로 효과가 나타나다니. 기적 같은 상황에 그의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한 번에 완치되는 건 아니지만 많이 나아졌을 거야. 그래도 확인은 해야겠지? 돈을 줄 테니 사제를 불러와라.”
수행 기사 한 명이 지셀에게 돈을 받아 잽싸게 달려 나갔다. 그도 정말 치료가 된 건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잠시 후, 후덕하게 살이 찐 사제 하나가 기사를 따라 거만하게 걸어왔다.
그는 집 안에 들어오자마자 코를 막고 인상을 썼다.
“어허, 여신께서는 청결한 걸 좋아하시는데…… 쓰레기장도 이런 쓰레기장이 없군. 현세의 지옥이로다. 이런 지옥에 살고 있는 그대들은 악마인가?”
사람들은 모두 사제의 말을 무시했다. 지셀은 피식 웃으며 손짓으로 그를 불렀다.
‘어린놈이 싸가지 없이 어디서 손짓으로 오라 가라야.’
사제는 속으로 불만을 품었지만, 돈을 두둑하게 받아서 겉으로는 뭐라 하지 못했다.
“흠흠, 병자를 봐야 한다는데 그게 누구요? 제법 신실한 성의를 보였기에 오긴 했지만, 공무가 바빠 오래 있지는 못하오.”
사제의 말에 지셀이 고갯짓을 까닥하며 레이첼을 가리켰다.
“이런 싸가지 없…… 이 소녀는?”
사제는 레이첼을 금방 알아보았다. 그도 신전에서 몇 번 레이첼을 치료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허허, 이 병은 신성력으로 완치시킬 수 없소. 몇 번이나 말했는데 아직도 포기를 못 한 것이오? 신성력은 그저 병을 억제하는……. 아니, 잠깐. 당신들 무슨 짓을 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