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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용병은 다 계획이 있다-15화 (15/269)

15화 빌려 달라는 게 아니야. (3)

캬아악!

그때, 바스테트가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번쩍 뛰어올라 지셀을 노렸다.

하지만 그는 슬쩍 고개를 젖혀 피해 버렸다.

고양이는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삑 하고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울음소리가 났다.

지셀이 고개를 까닥이며 웃었다.

“웃기는 고양이네. 잘 좀 챙겨. 동물은 해치고 싶지 않거든.”

바스테트는 털을 바짝 세우고 지셀을 노려보았지만, 더 이상 덤벼들지는 못했다.

그 모습이 꼭 제 주인 같아서 지셀은 실소를 흘렸다.

“그러고 보니 여기 호위 단장 말이야. 이름이 베르나프였나? 사이가 참 좋은 것 같던데.”

지셀은 아멜리아가 레이폴드 백작 자리에 오른 뒤, 호위 기사인 베르나프와 결혼한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대충 아는 대로 던진 말이었지만 아멜리아는 단단히 오해를 하고 말았다.

‘설마…… 지금 호위 기사랑 가깝다고 질투하는 거야?’

세상에 이런 한심한 놈이 있나!

베르나프와 특별히 가까운 건 사실이었다. 순박한 촌놈이었던 그를 직접 거둬들이고 지금까지 키워온 사람이 자신이니까.

제법 재능이 있고 괜찮은 남자여서 나름 높이 평가하고 있었지만, 절대로 지셀이 의심하는 그런 사이는 아니었다.

생각을 이어 가던 아멜리아는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 이 미친놈이 쓸데없는 소문을 내면 어떡하지…….’

약혼자를 두고 호위 기사와 사랑에 빠졌다는 소문이 돌면 두고두고 가문의 망신이 될 일이다.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이놈의 입을 통해서 나오면 장작에 불을 지피는 격이지.’

아멜리아가 베르나프를 총애한다는 건 영지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어디서 얼굴만 잘생긴 놈을 주워와서 호위 기사단의 단장까지 맡겼다고 수군대는 사람들도 있었다.

베르나프가 그녀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도 비밀 아닌 비밀이었다.

지금 악티움 상단의 일만으로도 골치가 아플 지경인데 그런 문제까지 터지면 수습할 자신이 없었다.

마른침만 삼키며 한동안 침묵하던 아멜리아가 겨우 입을 열었다.

“상단의 일도 그렇고…… 제 뒷조사를 하고 다닌 건가요?”

어쩌면 지셀이 자신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뒤를 캐고 다닌 건지도 모른다.

그러다 자신과 베르나프가 생각보다 가깝다는 걸 알게 되어서, 복수심으로 돈이라도 뜯어내려는 거라고 아멜리아는 생각했다.

‘저 명예도 모르는 놈이라면 그럴 수 있지.’

하지만 지셀에게서는 질투심은커녕 아무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뭐, 그냥 아는 사람이 있어서 말이야. 우연히 들었지.”

지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적에게 거짓 정보를 흘려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기초 중에서도 기초 전략이다.

아마 그녀는 지셀이 어떻게 비밀을 알게 된 건지 추적하느라 한동안 골머리를 앓을 것이다.

하지만 파 봤자 뭐가 나올 리가 없다. 설마 미래에 살던 사람이 죽었다가 되살아나 과거로 왔다고는 상상도 못 할 테니까.

“자, 어떻게 할 거야? 돈 줄 거야, 말 거야? 나 급하다고.”

아멜리아가 이를 갈며 말했다.

“당신, 이러고도 당신과 페르디움이 무사할 거 같아? 어디서 헛소문을 주워듣고 온 건지 모르겠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협박으로…….”

하지만 그녀는 말을 미처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시종일관 여유롭던 지셀에게서 갑자기 끔찍한 살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봐. 우리 영지가 무사할 거 같냐고?”

가문과 영지가 멸망한 건 지셀을 평생 괴롭히던 트라우마였다.

그리고 아멜리아는 그 주범 중의 하나. 그런 사람 입에서 저따위 협박이 나오니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급변한 지셀의 기세에 벨린다를 비롯한 주변의 호위 기사들마저 마른침을 삼켰다.

아멜리아는 정면에서 지셀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멎어 버릴 것만 같았다.

“협박은 말로 하는 게 아니야, 아멜리아.”

가문을 뛰쳐나온 이후, 지셀은 평생 사선에서 타인을 베어 넘기며 살아왔다.

그중에는 이름난 기사들과 지체 높은 귀족은 물론 수많은 강자들이 있었다.

지셀이 죽인 이들의 시체로 성이라도 쌓을 수 있을 텐데, 그중 아멜리아 같은 이들이 없었을까.

아직 세력을 제대로 구축하지도 못한 아멜리아의 험한 소리 따위는, 고양이가 할퀴는 것만도 못했다.

“지금껏 나한테 덤빈 놈들이 다 어떻게 됐을 것 같아? 저 고양이 빼고 말이야. 그놈들은 모두…….”

지셀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과거로 돌아왔으니 놈들도 모두 멀쩡히 잘 살아 있을 게 아닌가.

잠시 고민하던 지셀이 작게 중얼거렸다.

“지금은 건강하게 잘들 있겠지. 아직은.”

“……뭐?”

“그놈들 제법 강한 놈들이라.”

아멜리아는 물론, 방 안의 다른 사람들도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따가운 시선을 피하듯 눈을 내리깔던 지셀은 고개를 젓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지금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어쩔 거냐고.”

지셀은 델파인 공작가의 이름까지 꺼낼까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지금도 위험한데, 굳이 배후까지 들먹여서 더 큰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었다.

아멜리아는 눈을 감고 말았다.

설마 싶지만, 저 여유로운 태도를 보니 지셀이 무언가 더 알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지셀 일행을 전부 죽이려면 죽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셀과 저 기사들까지 모두 처리하려다 보면 소란이 커질 수밖에 없고, 그럼 결국 자신이 의심받을 가능성도 커진다.

‘일단은 성에서 내보내자. 아버지와 오빠들이 모르게 해야 해.’

결정을 내린 그녀는 눈을 뜨고 씹듯이 내뱉었다.

“……2만 골드, 드리지요. 당장 가지고 꺼져 주세요.”

“좋아. 역시 화끈하다니까.”

“닥쳐요. 파혼 절차도 바로 진행될 거예요.”

“그래, 그건 뭐 편한 대로 해.”

지셀은 흔쾌히 동의했다. 거금을 받았는데 파혼 정도야.

아멜리아가 그를 잠시 바라보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많이 변했군요.”

“날 변하게 한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너야.”

아멜리아는 지셀이 달라진 이유를 꿈에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돌아섰다.

원한 어린 목소리가 지셀의 걸음을 붙잡았다.

“당신 따위가 변해 봤자 뭐가 달라질 것 같나요? 고작 질투심과 돈 때문에 스스로 위험에 빠지다니. 여전히 어리석군요.”

“멋대로 생각해.”

“오늘 일을 후회하게 될 거예요.”

“기대하지.”

아멜리아는 이렇게 당하고 가만히 있을 여자가 아니다. 아마 앞으로 지셀의 입을 막기 위해 온갖 수작을 걸어 올 것이다.

그래도 그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2만 골드라면 당장 필요한 초기 자금 정도는 될 테니까.

‘아멜리아, 이번에는 반드시 목을 베어 주마. 전생처럼 도망 다닐 생각은 하지 마라.’

접견실을 나서는 지셀의 표정은 아멜리아 못지않게 차갑게 굳어 있었다.

형식적이나마 약혼으로 묶여 있던 두 사람의 관계는, 그렇게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 * *

지셀 일행이 떠난 뒤에도 한참이 지나도록 아멜리아는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지셀 페르디움! 감히 나를 협박해?”

그런 남자한테 협박을 당하고 돈까지 뜯기다니! 태어나서 이런 굴욕은 단연코 처음이었다.

“어떻게든 입을 막아야 하는데…….”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델파인 공작은 무서운 자다. 그들 사이에 맺은 밀약에 관해 소문이 퍼진다면 바로 꼬리를 자르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이미 손을 잡기로 한 이상 빠져나올 수도 없었다.

“힘을 기르기 전까지는 그들의 눈 밖에 나면 안 돼.”

델파인 공작가의 음모는 벌써 진행되고 있었다.

페르디움 영지처럼 안에서 뒤집을 수 없다면 밖에서 공격하고, 레이폴드 영지처럼 가능성이 보이는 곳은 투자해서 손안에 넣는다.

그들은 자기편이 아닌 모든 영지의 힘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역시 죽여 버려야겠어.”

망설임이나 죄책감 같은 건 없었다. 여차하면 피를 나눈 가족이라도 죽여야 한다. 귀족 사회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우선 죽이고 나서, 명분이 필요하다면 그때 적당히 만들어 붙인다.’

지셀을 죽인 게 자신이라는 의혹을 사도 상관없었다. 그보다는 상단 문제를 입막음하는 게 더 중요했다.

어차피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

“베르나프! 베르나프를 불러와! 당장!”

결단을 내린 아멜리아가 소리를 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짙은 금발에 키가 크고 잘생긴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베르나프!”

냐앙!

분노한 아멜리아와 바스테트를 본 베르나프가 흠칫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지셀을 죽여. 그놈이 내 비밀을 알고 있어.”

“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그가 뭘 알고 있다는 겁니까?”

자초지종을 들은 베르나프는 심각한 표정으로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않은 상황이군요.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뭔가 일을 벌일 능력은 없는 한심한 사람이에요. 그저 돈을 뜯어내려고 왔을 테죠.”

“하지만 그놈이 입을 가볍게 놀리면 일을 망칠 수도 있어. 지금은 조심해야 할 때라고.”

“돈을 먹었으니 당분간은 조용할 겁니다. 오히려 계속 입을 다물고 있으면서 돈을 더 받으러 올 수도 있습니다.”

사실 지셀은 더 이상 그녀를 찾아올 생각이 없었지만, 두 사람은 그가 돈을 더 뜯으러 올 수도 있다 생각했다.

지셀을 명예도 없이 약혼녀를 협박하는 소인배쯤으로 여기고 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들은 지셀이 그 돈을 어디에 쓸 생각인지는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도박이나 유흥으로 날리겠거니, 잘해 봐야 거지 같은 영지에 조금 보태 주겠거니 짐작할 뿐이었다.

오랫동안 지셀이 쌓아 온 망나니 이미지가 지대한 역할을 했다. 달라진 모습을 봤다지만, 편견이란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으니까.

아멜리아는 책장에서 지도를 꺼내 손가락으로 한 곳을 짚었다.

“여기에서 죽여. 여기라면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을 거야. 돈도 다시 찾아와.”

아멜리아가 가리킨 장소는 낮은 산으로 둘러싸인 골짜기였다.

레이폴드 성에서 페르디움 영지로 향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좁은 길이니 진을 치고 있다가 기습하면, 몇 명 되지도 않는 지셀 일행 정도는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베르나프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지셀 공자가 이곳에 왔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되었습니다. 의심을 살 수도 있습니다.”

“산적이나 몬스터에게 당한 것처럼 조작하면?”

“만약 저희가 공격했다는 사실이 발각된다면 페르디움 백작의 분노를 살 겁니다. 지금 페르디움과 영지전이 벌어져서 좋을 게 없습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지 않습니까?”

“들키지만 않으면 되잖아. 나한테 준 굴욕도 굴욕이지만 위험 요소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어.”

“……영지의 기사를 쓸 수는 없습니다.”

“용병이든 암살자든, 그동안 투자한 놈들이 있잖아. 그놈들이라도 보내.”

결국 베르나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멜리아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들키면 위험하지만, 증거를 남기지 않는다면 위험할 일도 없다.

어차피 페르디움 영지 내에서도 겉도는 지셀이니 사람들의 관심도 크지 않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단단히 준비시켜 보내겠습니다.”

아멜리아가 냉정한 눈빛으로 베르나프를 바라보았다.

베르나프는 한심한 지셀 따위와는 달리 제법 능력이 있었다.

그가 움직인다면 지셀 정도는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소문나기 전에 확실히 처리해.”

“문제없이 처리하겠습니다.”

“좋아, 가 봐.”

“…… 얼른 끝내고 돌아오겠습니다.”

베르나프는 아멜리아에게는 보이지 않게 표정을 찡그렸다. 지셀 때문에 당분간은 상당히 피곤해질 거 같았다.

‘하아, 그놈은 왜 이렇게 귀찮은 일을 벌여서 …….’

아멜리아의 얼굴만 보고 살고 싶은데, 세상이 도와주지 않는다.

‘그래도 파혼이 앞당겨졌으니 나한테는 좋은 일인가?’

베르나프는 아쉬운 눈길로 아멜리아를 훔쳐보다 방을 나섰다.

지셀이고 뭐고, 얼른 처리하고 다시 아멜리아 곁에 붙어 있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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